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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세운 조선의 학교이야기

열려라 에바다 2022. 11. 26. 07:31

기독교가 세운 조선의 학교이야기            

 

대한민국 건립에
초석이 된 인재들을 키운 학교들

1800년대 말 조선에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는
서대문구 신촌동에 연세대의 모태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워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계몽 교육을 벌였습니다

한국 개화기의 역사는 기독교 사학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의 근대사에서 기독교 사학은 시대를 이끄는 역할을 해왔고
신앙에 입각한 수많은 지성인이
후학 양성을 통해 세상을 바꿔나가는 데 헌신했습니다
교육을 통하여 그리스도 정신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겨 기독교학교를 ‘미션스쿨’이라고 부르게 된 연원이기도 하다.

한국 기독교 학교의 역사는 개신교가 전래한 것과 거의 동시에 시작됐습니다
조선 중·후기인 1700년대 말 천주교가
새로운 학문 성격으로 전래한 지 100년 뒤인 1884년부터입니다

미국 선교사 알렌에 이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인천 제물포 땅에 걸음을 내디디면서 한국의 기독교 역사가 출발하였습니다
알렌 선교사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개원하였고,
이는 훗날 연세대 의과대학(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하여 나갔습니다

이들이 선교활동을 시작할 당시 조선은 외세의 간섭과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기존 질서가 혼란에 빠져 있었고
유교 질서에 바탕을 둔 기존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였습니다
기존 권위에 대항한 유일한 종교였기에 깨어 있는 상류 지식인은 물론이고
양반상놈 계급사회에서 신음하던 하층부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선교사들이 운영한 학교는
이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폐쇄적인 조선 사회에서 백성을 계몽하는 일은
선교사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사명 중 하나였습니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전파하기 위해선
배움이 따라야 했고, 배움을 위해선 문맹 퇴치가 절실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일제 강점으로 절망에 빠진 양반가 지식인에게도
새로운 문물과 외국 사상을 탐구하려는 욕구도 컸을 것입니다
이들이 기독교 가치관에 입각해 사회 발전을 견인해 나가려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새로운 교육기관이 필수요소라 생각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1880년대에
저마다 교육기관을 열어 일반 대중을 상대로 기독교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울시 중구 정동에 연 배재학당은 기독교 사학의 시초였습니다

 

처음에는 선교 사역을 위한
인력 양성으로 시작해 일제 강점기에 정식 학교 인가를 받았고
비슷한 시기 언더우드 선교사도 정동에 고아 교육시설인
경신학교를 설립해 기독교 교육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경신학교 대학부는
연세대학교의 모체인 연희전문학교로 확대되었고
스크랜턴 선교사도
같은 시기 정동의 자택에서 여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학교들은 민족 지도자 양성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하였고
서양 선교사의 가르침을 통해 서구의 근대 문물을 접할 기회가
차단돼 있던 현실을 극복할 돌파구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19세 청년 이승만은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해
영어 등 새로운 학문을 익히며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혔습니다
이후 이승만은 선교사의 후원을 받아 미국으로 떠나
조선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895년에 결성된 독립협회에 참여한
인물 대부분이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교육 받았고,
독립 열기를 고취했던 [독립신문]도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발간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계몽운동, 교육운동, 물산장려운동, 3.1운동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와 조선 민중의 계몽·독립 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새 문물을 익힌 당대 지식인들은
저마다 기독교 가치관에 입각한 학교를
전국 각지에 설립해 문맹 퇴치에 앞장섰습니다

배재학당에서 한글 문법 연구를 시작한 주시경 선생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후원 아래 한영·영한 사전, 한글 문법서 등을
간행해 한글 보급에 앞장섰기도 했습니다

민족지도자 33인 중 한 사람인 남강 이승훈 장로는
민족운동의 산실로 꼽히는 오산학교를 세우면서
신앙입국, 교육입국, 산업입국을 소명으로 내걸었고
조만식, 함석헌, 이광수 등 당대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지식인들이 오산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대성학교를 비롯해
양정의숙, 보성학교, 휘문의숙, 중동학교 등도
이 시기 기독교 교육을 받은 선각자들이 세운 대표 사학들입니다

사료에 따르면
1910년 초에는 기독교계열 학교는 전국에 796개에 이르렀습니다

일제의 노골적인 탄압에도
기독교 학교의 교육 열기를 막진 못했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기독교적 신념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독교학교의 항일 정신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통해 분수령을 맞게 됩니다

1937년 일제의 황민화 운동이 고조되면서
신사참배 강요가 전국으로 확산했을 무렵입니다
당시 수많은 기독교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로 맞섰고
숭실대가 1938년 스스로 문을 닫은 뒤
1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재개교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배재학당은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기독교 학교였습니다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있던 배재학당는 강남으로 이전하였습니다

한국의 기독교학교 역사에서 눈 여겨볼 대목은
비단 종교인 양성을 위한 목적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근대 교육의 오랜 전통을 가진 유럽의 경우 학교 교육이 시작된
중세 당시 성직자를 양성하는 게 학교의 거의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일반 학문으로 교육 범위를 넓히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나 근대가 시작되면서부터였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기독교 학교는 출범할 때부터
대중 계몽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배재학당을 설립하면서
“우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학교의 일꾼을 양성하려는 것이 아니요,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세상에) 내보내려는 것”이라고 천명한 데서
당시 기독교 학교의 소명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직 입신양명의 발판으로만 여겨졌던
조선의 교육제도와도 차별화를 이루는 지점입니다

해방 후 기독교 학교는 새로운 소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전까지 기독교 학교의 역할이 자강을 위한 계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해방 후에는 공교육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해방 후 좌우 이념대립과 분단 등 혼란한 정세 속에서 공교육이 표류한 탓이었습니다
해방 후 이념적으로 혼란한 상황 가운데 기독교 학교들은
자유 민주주의 이념을 기초로 국민의식 수준향상에 힘을 쏟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독지가들이
사재를 털어 창학에 나서기 시작하였습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한 뒤 훗날 [기독교신문]을 창간한
백남 김연준 장로는 한양학원을 설립해
한양대와 부속 초·중·고교 등을 세워 교육보국에 투신했습니다

미국인 여자 선교사 미스 골든이
전주에 세운 기전여학교에서
수학한 임영신 박사가 세운 중앙대,
민중병원 설립자인 유석창박사가 세운 [건국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조원식박사가 설립한 [경희대] 등이 대표적입니다

 

기독교인이 세운 사립학교들은 이후에도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대한민국 국가 재건의 토양을 이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130년의 기독교 선교가 가난하고 암흘했던
조선이라는 땅에 전파되어 문맹의 백성들을 교육하고
서양의술을 통하여 치료하고 나라잃은 아픔에 같이 동참하며
이 민족을 지극히 사랑하므로 대한민국 국가 건립에
크나큰 공헌이 있었음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