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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비극의 역사 ‘마사다(Masada) 요새’

열려라 에바다 2022. 12. 31. 11:52

 

 

 

유태인 비극의 역사 ‘마사다(Masada) 요새’         

유태인 비극의 역사 ‘마사다(Masada, 히브리어 מצדה, 요새라는 뜻) 요새’

 

바위절벽 위에 감추어진 마사다 요새는 이스라엘 남쪽, 사해(死海) 인근의 사막 동쪽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절벽위에 자리 잡은 고대의 유대왕궁이자 요새(要塞, Fortress)이다. 1842년에 최초로 그 존재가 알려졌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발굴되었는데 2,000여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고 철저히 숨겨졌던 곳이다.
마사다의 절벽은 동쪽이 가장 높아서 400m에 이르고 가장 낮은 서쪽도 높이도 90m정도이며 절벽의 정상은 비교적 평평한 마름모꼴로 남북이 550m 동서로 270m정도 크기라고 한다. 절벽 테두리를 따라 세워진 성곽(城郭)의 둘레는 1,300m에 달하고, 곳곳에 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감시탑이 서 있다.
마사다의 동쪽과 서쪽에는 아래에서 위로 각각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있는데 동쪽은 본래 있던 뱀길(Snake Path)이라고 하는 이리저리 휘돌아가는 길인데 엄청나게 길고 가파르다고 한다.
마사다에 관한 기록은 1세기 유대계 로마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쓴 ‘유대전쟁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요세푸스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갈릴리(Galilee)지역의 유대장수였지만 뒷날 로마에 투항하여 역사가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당시 유대(Judea) 왕국은 헤롯왕(헤로데 1세, BC 73년~4년)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통치기간 중 예루살렘의 두 번째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헤롯성전)’을 증축했고, ‘가이사랴(Caesarea Maritima) 항구 건축’ 및 ‘마사다 요새’와 ‘헤로듐(Herodium) 요새’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보면 헤롯왕은 동방박사 세 사람이 찾아와서 유대의 왕이신 구세주 예수가 태어났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왔다며 태어난 곳이 어디냐고 묻자 깜짝 놀란 유대의 왕 헤롯은 자신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혹시 찾거든 자신도 꼭 가서 경배를 드리고 싶으니 반드시 자신에게도 알려달라고 한다. 왕궁에서 나온 동방박사들은 밤이 되자 밝게 빛나는 별이 인도하여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과 함께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예수를 뵙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경배를 드리는데 절대로 헤롯왕에게 알리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그냥 돌아간다.
헤롯은 아무리 기다려도 동방박사들의 소식이 없어 찾아보라고 했더니 그냥 돌아갔다고 하자 헤롯은 베들레헴을 위시하여 그 부근 마을을 샅샅이 뒤져서 2살 이하의 아기들은 모두 죽여 버리라고 한다.
그때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꿈에 아기를 데리고 빨리 애굽(Egypt)으로 피신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이미 애굽으로 피신한 뒤였다. 이후 예수님은 헤롯왕이 죽은 후 유대로 돌아오신다.
당시 로마(Rome)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 AD 14)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였는데 세계 정복을 꿈꾸던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헤롯왕은 BC 37~31년 사이 난공불락의 마사다 절벽 정상에 궁궐을 짓고 요새화하여 그곳으로 피신하였으며 마사다 정상을 빙 둘러 성벽을 쌓고 38개의 감시탑을 세웠다고 한다.
성벽 안에는 110개의 방이 있었고 1만 명의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는 병기와 함께 수십 년 먹을 곡식 및 과일도 저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헤롯왕은 권력에 집착한 나머지 왕비와 자식들을 죽이는 등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예수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어린 생명들까지 앗아간 나쁜 놈이다. 그 만행의 보복인지 헤롯왕은 나쁜 병에 걸려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시달리다가 병으로 죽는데 헤롯이 죽은 뒤 마사다는 로마군에게 넘어간다.


마사다의 함락이 너무나 가슴 아픈데, 서기 70년에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진압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젤럿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마사다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남녀노소를 모두 합쳐 천명도 안 되었지만, 그들은 마사다를 근거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로마군을 괴롭혔다.
서기 73년 5월 2일 밤, 사해(死海) 부근 마사다 요새에서 일어난 가슴 저리는 비극.....
‘내일이면 끝이다. 아내와 자식들을 적의 손에서 구하자.’
회의장에 모인 전사(戰士)들은 제비를 뽑아서 뽑힌 사람 10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 자기 손으로 자신의 처와 자식을 죽이고는 가만히 옆에 누워 기다렸다.
제비에 뽑힌 10명은 성안을 돌며 누워있는 전우들의 목숨을 거두었다. 남은 10명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명이 똑같은 방식으로 누워있는 아홉 명을 죽이고 마지막에 스스로 자살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로마군에게 점령당한 요새에는 960구의 시체만 남았을 뿐이었으며, 그리하여 마사다 함락으로 66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1차 유대전쟁도 끝났다. 이 전쟁에 동원된 로마군은 8만여 명. 로마가 치렀던 어떤 전쟁보다 많은 병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유대전쟁에서 이긴 로마는 반란의 싹을 잘랐다며 개선문을 세우고 기념주화까지 만들었지만 유대의 저항은 113년과 133년의 2, 3차 유대전쟁으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의 끝없는 투쟁은 마사다의 항전(抗戰)이 가슴속에 살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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