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λόγος , 요한복음에서의 말씀의 의미
요한복음은 다른복음서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부터 계신분으로 선언하고 시작한다. 공관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메시아되심을 조심스럽게 증명하면서 점진적으로 계시한다. 반면 요한은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 1:1을 연상시키는 '태초에'라는 단어로 장엄하게 시작한다. 본 구절을 매개로 하여,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서의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즉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됨을 나타내야 한다. '태초'(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이스의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한 시점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로고스란
''말씀(로고스)"는 본래 '수집', '계산', '목록', '말'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1)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2)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척, (3)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로고스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총화(總和)이자 이 세상을 질서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시 147:15;148:8;히 4:12)과 계시(사 2:1;렘 26:1;딤전 5:17)를 의미한다. 특히 요한은 본절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을 부각시킴으로써,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의 인격성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에서 '믿다'(피스튜오 πιστεύω
), '사랑'(아가페 ἀγάπη)과 더불어 주요 개념으로 쓰인 이 용어 '로고스'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강화(講和)로 구성되어 있는 본서의 특성까지도 잘 드러내고 있다.
• (말씀이) 계시니라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의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요한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존재했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경에 직접 사용된 용어는 아니지만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Calvin).
이제 요한은 그 로고스이신 그리스도의 본질을 숨기지 않고 계시한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이 표현은 정리하면 (1)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그리고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 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이제 요한은 말씀께서 육신이 되신 이유와 목적을 간결하게 이야기한다.
1)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시 36:9) 생명의 주인(시 104:29, 30)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생명관이 반영된 것이 본문의 '생명'이다.따라서 저자 요한은 '생명'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영생)임을 명시한다(14:6;17:3).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본원적(本源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영생을 매개로 하여 영원한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엡 2:19).
2) 로고스는 사람들이 빛이다
'빛'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 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빛(the light, NIV)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1) 빛을 발하는 구름(욥 37:15)이나 불기둥(시 78:14) 가운데 현현하시는 분 (2)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욥 12:22) 빛나는 분(사 42:16) (3) 빛과 어두움의 주(암 5:8)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사 60:1, 2)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빛이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1:9). 시편 36:9절의 의미를 요한은 그리스도 즉, 로고스(말씀)안에서 찾았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는 기쁨의 찬양에 이르게 한다.
3) 로고스의 빛이 어두움에 비추다
빛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어두움'(스코티아 σκοτία)은 앞절에 비추어 볼 때, 생명을 가로막는 죽임의 세력, 즉 사단의 세력과 그 세력하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이 죄악된 세상을 상징한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고 빛이 어두움 안에서 비추고 있다'라는 뜻이므로, 본문은 이 죄악된 세상과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성육신을 통하여 죄악된 세상인 이세상 안으로 임하셨다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승천 후에 생명의 빛은 소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요한은 '비추다'의 헬라어 '파이노'의 3인칭 현재형을 구사함으로써 말씀의 빛이 쉼없이 비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16:13) 성도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빛의 군사로서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투쟁하는 능력을 공급하고 있다(딤전 1:18;6:12).
그러나 영적으로 소경된 세상 사람들(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다. 죄악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이 바로 본서의 전반적인 맥락이다. 이러한 증거는 예수의 말씀에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4:5-26,31-38;5:10-47;6:25-65;7:14-36;8:12-59;9:39-10:18, 22-39;12:20-36;13:1-16:33).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이 세상의 정체(正體)를 준엄하게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두움의 세력에 휘말린 세상이 이제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로고스(λόγος, 그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며, 죄와 허물로 죽은 죄인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레마 ῥῆμα)이시다.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의 이해 (0) | 2023.06.17 |
---|---|
내적 죄성은 어떻게 유전되게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0) | 2023.06.16 |
‘사울’을 ‘바울’로 지칭함은 성화론적 오해 (0) | 2023.06.13 |
하나님에 대한 교리 (0) | 2023.06.13 |
성경에 관한 교리 (0) | 2023.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