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궁금점?
유대인들의 족보란 다음과 같은 다양한 기능과 가치를 갖고 있다.
1) 가계가 지닌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기능
2) 법적, 정치적 혈통성을 확인시켜주는 기능
3) 성직에 합당한 자격을 부여해 주는 종교적인 기능,
예를 들면 제사장 직분을 가진 레위족속이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성경에 족보가 중요시 되는 것은 기업(유업)과 깊은 연관이 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는 것은 마태복음 1:1~17과 누가복음 3:23~38과
이에 관련된 창5:1~33,창11:10~32,대상 1:17-27등의 기록이 있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가 현저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줄곧 지적하여왔다.
이 족보의 차이점에 대해서 많은 학설과 많은 견해가 분분하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며 오류는 있을 수 없다.
이 두 가지 족보에 대한 차이점을 살펴 보자.
1. 마태복음은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맛단-엘르아살-엘르웃'(마1:15-16)으로, 누가복음은 '헬리-맛닷-레위-멜기-dis나'(눅3:23-24)로 기록되어 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시는 예수가 나시니라”(마1:16)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 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눅3:23)
즉 예수의 호적상 아버지이며,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의 족보부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차이가 나고 있다.
그 차이점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가장 보편적이며 정설로 알려져 있다.
(1) 수혼법
이 문제는 이미 각 교회들에서 신명기 25장 5,6절에 나오는 수혼법(嫂婚法) 때문이라는 학설이 일반적이다.
수혼법이란 한 사람이 후사가 없이 죽게되면, 죽은 남편의 형제가 죽은 형의 아내를 취하여 그 후사를 이어주는 이스라엘의 제도를 말한다. 이때 대신 낳은 바된 그 아이는 죽은 사람의 자녀로 법적으로 인정되게 된다.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신25:5)
요셉의 출생도 이와같은 과정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으므로 혈통적인 것보다는 법적인 것을 더욱 중요시하는데 비하여,
누가는 예수님을 인자로 묘사함으로 혈통적인 족보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래서 마태는 혈통적인 아버지가 아닌 법적인 아버지인 후사없이 죽은 '야곱(이삭의 아들과 다른 동명이인)'의 이름을 족보에 기록하였으며 누가는 요셉의 혈통적 아버지인 실제로 요셉을 낳은 '헬리'를 쓰고 있는 것, 또는 율법에 따른(눅 3:23의 문자 그대로의 번역, KJV 'as was supposed')것이었는데,
그것은 요셉이 사실상 헬리의 아들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그의 아들로 여겨졌음을 가리킨다.
요셉은 마리아의 아버지인 헬리의 사위였다. 이것은 민수기 27장 1절부터 8절까지와 36장 1절부터 12절까지에 따른 사례였을 것이다.-inaspi님의 의견
(2) 요셉과 마리아의 족보
또 다른 학설은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부친 요셉을 통해서, 누가복음은 마리아를 통하여 그의 족보를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눅3:23의 “사람들의 아는대로”라는 구절이 예수와 요셉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성경본문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요셉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낳다”는 단어로 “겐나오”를 사용하였는데, 본래적인 의미로 아버지계열을 따르는 단어이며, 누가복음에서의 “이상”이라고 되어있는 단어는 “호”라는 관사로서 원문에서는 구체적인 의미는 없다.
즉 마태복음은 “낳다”라고 기록되어있는데 반하여, 누가복음은 그냥 순서대로 족보를 나열해 가는 것으로서, 마태복음은 실제적인 혈통을, 누가복음은 합법적인 형통을 기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즉 누가복음은 예수를 낳은 사람이 요셉이 아니고 마리아이므로, 마리아의 혈통적 족보를 명시하였다는 것이다.
2. 족보에 대한 차이점
<역대상과 마태복음의 차이점>
“그 아들은 1.아사요, 그 아들은 2.여호사밧이요, 그 아들은 3.요람이요, 그 아들은4. 아하시야요, 그 아들은 5.요아스요, 그 아들은 6.아마샤요, 그 아들은 7.아사랴요, 그 아들은 8.요담이요, 그 아들은 9.아하스요, 그 아들은 10.히스기야요, 그 아들은 11.므낫세요”(역대상3:10-13)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마1:8-9)
마태복음과 역대상에도 차이점이 있는데,
역대상에 기록된 요람 - 아하시야 - 요아스 - 아마샤 - 아사랴(아사랴는 웃시야로 추정- 왕하 15:1,8,13) -
요담 - 아하스의 계통이
마태복음에서는 요람 - 웃시야 - 요담 - 아하스 로서 역대상의 기록 중 중간에 있는 아하시야, 요하스, 아마샤가 생략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요람이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서 난 딸과 악한 결혼을 함으로써 이 결혼이 요람의 자손들을 부패시켰기 때문이었을 것이며(대하 21:5-6, 22:1-4).
출애굽기 20장 5절에 따라서 요람은 자손 삼대는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끊어진것이다.
또 마태복음에서는 역대상에 있는 여호야김도 생략되어있는데
마태복음 1장 11절에서 보면 '요시야가 여고냐와...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역대상 3장 15절부터 16절까지에서는 '요시야의 아들들은... 둘째 여호야김과...여호야김의 아들들은 그 아들 여고냐...'라고 기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대-여호야김-가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애굽의 바로에 의해 왕으로 세워져 바로를 위해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왕하 23:34-35)
▶ 저자의 의도적인 관점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마1:1)로 시작된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2대의 족보를 열거하면서 14대씩 세 번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14대, 포로다음부터 예수님까지 14대(마1:17)로 나누어서 마태 나름대로의 의도적인 계산을 넣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14대를 맞추기 위해, 역대상 3장에 나타나 있는 왕의 족보의 세 왕, 즉 아하시아, 요아스, 아마샤등을 빼버린 것이다. 마태는 족보를 “요인열거주의”에 입각하여, 의도적으로 14대를 맞추기 위하여 정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의견은 앞에서 설명한 이유보다는 설득력이 약하다.)
또한 마태복음 1장 11절에서도 여호야김을 빼놓고도, 마태는 모든 대수가 14대씩 세번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족보를 정확히 세어보면, 모두 41대 밖에 안됨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42대로 계산하여 말하고 있다.
수학과 계산이 밝은 세리 출신인 마태가 계산을 못해서였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족보를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14대요"(마1:17)라고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마태의 설명과 같이, 다윗의 이름을 두 번씩 의도적으로 계산하여, 42대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을 매우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마태는 다윗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마태가 강조한 다윗은, 왕중왕인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시89:3-4)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담까지 77명의 인물을 언급하고, 마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42명의 인물을 언급한다.
누가는 이 인물을 7명씩 묶어 11개 그룹으로 서술하며, 마태는 14명씩 묶어 3개의 그룹으로 서술하고 있다.
14 란 숫자는 다윗의 이름의 숫자의 합으로 메시야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누가는 완전숫자 7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7☓2=14)
또한 14라는 수는 10더하기 4로 이루어집니다. 4는 피조물을 상징하고(계 4:6) 10은 충만을
상징합니다(마 25:1). 따라서 14는 충만한 수의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14세대에 3을 곱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을 충만한 수의 피조물과 연합시키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3곱하기 14는 42입니다. 40은 시련과 유혹과 고난의 수입니다(히 3:9, 마 4:2, 왕상 19:8).
42는 시련 후의 안식과 만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안식이 있는 좋은 땅에 들어가기 전에
42지점들을 거쳤습니다. 안식인 천년왕국도 42개월 간의 대환란 후에 올 것입니다(계 3:5).
시련과 유혹과 고난의 모든 세대 후에 그리스도는 마흔 두 번째 세대로 오시어 우리의 안식과 만족이
되셨습니다.
누가의 기록은 예수로 시작해서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태의 기록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까지 나아갑니다. 누가는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가고, 마태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내려옵니다.
모든 세대들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으며 그리스도를 이끌어 왔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세대들의 목표이시고 완결이시고 결론이시며, 모든 세대들을 완전케 하시고
온전케 하십니다.
그러한 분으로 그리스도는 그들의 예언을 이루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빛과 생명과 구원과 만족과 치유와 자유와 안식과 위로와 평안과 기쁨이 모두 함께 옵니다.
여기서부터 신약전체는 우리에게 모든 것 되시는 이 놀라운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설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출생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예비되고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으로 요셉과 마리아 두 사람의 조상들을 그들의 선조 스룹바벨(마 1:12, 스 4:1-2)의 인도 아래 바벨론의 포로됨에서 벗어나
유대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다시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으로 요셉과 마리아를 같은 도시 나사렛에 두셨습니다(눅 1:26, 2:4) 더욱이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는 합법적인 상속자가 되도록 요셉과 마리아를 결혼시키셨습니다.
즉 마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을 묘사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의미는 다윗왕의 자손인 메시야, 언약의 상속자인 아브라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는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 안에 들어있는 예수, 즉 인자(Son of God)이신 예수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의 족보를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누가의 족보도 그 기록이 창5:1~33,창11:10~32등에도 근거가 있고 인류 전체의 족보라는데 그 가치가 높다)
마태와 누가는 각자 단순히 예수님의 역사적인 족보를 별도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마태와 누가를 통하여 예수의 인성과 신성(메시야), 즉 기독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기억하기 원하시는 인물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누가가 인위적으로 뺏을 리가 없기에 완전한 모양(77-완성 수)의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 이상은 에노스요.. 셋이요..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눅3:38)”
마태복음의 웃시야와 역대상의 아사랴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름이 다른 동일인물이다. (왕하15:1-7, 15:32-34, 대상3:12, 대하26:1, 사1:1)
3. 다윗왕 이후의 마태와 누가의 차이점
마태와 누가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차이점이 없이 족보를 진행시키고 있다.
그런데 다윗 이후부터는 전혀 다른 족보를 쓰고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 왕으로부터 남방 유다 왕들의 족보 13명(다윗부터 여고냐전까지 14대)을 쓰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다윗의 셋째 아들인 나단으로부터 넬리까지 유다왕의 족보가 아닌 나단의 후손 19명의 전혀 다른 족보를 쓰고 있다.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1:6)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그 이상은 이새요....”(눅3:31-32)
▶ 마태와 누가의 족보에는 계시적 의미가 있다.
마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예수님을 왕의 혈통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는 예수님을 인자(사람)로 나타내기 때문에, 다윗 다음에 왕통을 이어받은 솔로몬이 아닌 평범한 사람인 다윗의 아들 나단의 혈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라도 역사상 가장 찬란한 명성과 부를 누린 “솔로몬왕”이 거룩한 계보에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름없고 존재의 가치도 없는 이도 택하시듯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가치관을 초월 하시기도 하시며 사람이 그 심오한 뜻을 모두 헤아리는 것 또한 불가능 한 일이다.)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대상3:5)
“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삼하5:14)
즉,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흉내내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구약의 메시아의 왕통 족보와 인간적 혈통의 족보를 상세하게 예언하셨고 밝혀놓으신 것이다.
요컨대 마태가 솔로몬의 왕의 계통을 기록한 것에 비하여, 누가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을 제외하고 나단의 족보를 적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의도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욱 생각하게 하는 것은 부도덕한 기록을 가진 다말의 기록이며 그가 예수님의 족보를 잇고 있다는 것이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마1:3)
즉, 예수님의 족보에는 사실 전개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마태와 누가의 족보 차이를 족보를 맞추어서 풀려고 한다면 불가능할 뿐이며, 저자가 족보를 그렇게 기록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유다는 상속자를 얻을 목적으로 셀라를 다말에게 주겠노라 서약을 하고도 이행치 않아서, 다말은 시부를 속이고 창녀인체 가장하여 유다와 동침을 한다.(창38:12-15)
유다는 다말이 잉태한 아기의 아비인 것과 혈통을 이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그녀가 자기보다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창38:16-26)
유다의 가문은 베레스와 세라가 출생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들로부터 유다 지파의 주요 가문들이 생겨났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장남부터 넷째 아들까지 모두 불미스러운 죄를 범하고 말았다. 르우벤과 유다는 근친 상간 죄를 범했고 시므온과 레위는 살인죄를 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족장들이었고 레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나왔고 유다로부터는 이스라엘의 왕들과 메시야가 나왔다.
따라서 그들은 회개의 본 보기가 되었고 또 죄사함의 자비를 얻은 기념비적인 인물들이 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4. 마태의 족보에 들어간 네 여인.
당시의 유대인들의 족보에는 여인들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마태의 기록에는 여자들이 4명이 기록되고 있는데(다말, 라합, 룻, 우리야), 그것도 이방인의 여자들과 불륜한 여인들이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헬라인이나 유대인의 차별이 없으며, 나그네나 이방인들의 차별이 없으며, 남녀의 차이도 없는 “온 세계 모든 민족 모든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비천한 혈통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더욱 낮아지시는 인간의 모습으로서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5. 족보에 나타난 하늘의 섭리 -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
다윗 이후에는 두 족보가 서로 다른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단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서는 일치한다.
그런데 역대상 3장 10절부터의 다윗 왕조 족보를 살펴보면 스알디엘의 아버지는 여고냐이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달라진다.
마태: 여고냐 - 스알디엘 - 스룹바벨 - 아비훗
누가: 네리 - 스알디엘 - 스룹바벨 - 레사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족보이지만, 역대상의 족보를 자세히 보면, 여고냐는 일곱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스알디엘, 말기람, 브다야, 세낫살, 여가먀, 호사륵, 느다뱌이다.
여기서 장남은 스알디엘인데, 놀랍게도 스룹바벨은 장남의 아들이 아니라 셋째인 브다야의 아들이라고 명시하고 있다는 것이다.(대상3:19).
스룹바벨은 브다야의 아들인데, 마태와 누가의 족보에는 스알디엘이 스룹바벨을 낳았다고 말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스알디엘이 자식이 없이 죽어서, 수혼법(신명기 25:5~6)에 의하여 브다야가 스알디엘의 미망인을 취하여 스룹바벨을 낳음으로서 그가 스룹바벨의 친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과 역대상 3:17절~19까지의 '여고냐의 아들들은 스알디엘과... 브나야와...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을 비교해 보면
스룹바벨이 스알디엘의 형제인 브다야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스룹바벨은 스알디엘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였고 이 조카가 스알디엘의 후사가 되었다.
이것은 신명기 25:5~6에 따른 사례였을 것이다라는 두가지 의견이 있다.
어쨌든 신명기에 있는 그 말씀까지도 그리스도의 계보와 관계된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유다의 왕가의 법적 정통성을 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윗 - 솔로몬... 여고냐 까지의 왕들을 나열하고 있다.
여고냐는 여호야긴의 이름이다.(대상3:16-17, 에2:6, 렘24:1)
그런데 여고냐의 다음대는 스알디엘인데, 스알디엘이 과연 여호야긴(여고냐, 고니야)의 아들인가에도 회의적이다.
예례미야는 여호야긴이 무자(無子)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렘 22:30)
그러한 왕가는 바벨론 포로기간 중에 스알디엘에게로 넘어간다.
만일 여호야긴이 아들을 낳지 못했다면, 스알디엘은 누구인가? 이러한 연속되는 의문은 누가복음의 족보 3:27에서 풀린다.
마태: 여고냐 - 스알디엘 - 스룹바벨 - 아비훗
누가: 네리 - 스알디엘 - 스룹바벨 - 레사
네리의 아들이 스알디엘이라고 누가복음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알디엘은 여호야긴(여고냐)의 양자인 것이고, 대상3:17-18의 7명의 여고냐의 아들도 모두 양자일 것이다.
이러한 추리가 맞다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는 다윗 이후에 갈라진 것이 아니라, 스룹바벨 이후로 내려와야만 한다.
그런데 스룹바벨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스룹바벨은 스알디엘의 아들로 대통을 이어 받는데(스 3:2 8, 느 12:1) 대상 3:19에는 브다야의 아들로 되어 있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스3:2),
“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 매제 슬로밋과”(대상3:19)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수혼법을 통해 이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다.
스알디엘은 아들이 없었는데 장남이기 때문에 법을 따라 그 장남의 법통을 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 동생 브다야가 아들이 없이 죽은 스알디엘의 아내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스룹바벨이며, 마태는 그리스도를 왕의 계통으로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법적인 관계를 중시하여 호적상의 법적 아버지인 스알디엘을 스룹바벨의 아버지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7)는 말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사실상 메시야의 조상이 될 수 없었던 스룹바벨은 힘으로나 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의 도우심으로 그 혈통을 법적으로 잇게 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출생에 대한 계시적 표현인 것이다.
▶ 누가복음의 차이점
노아-셈-아박삿-가이난-살라-헤버-벨렉-르우-스룩-나홀-데라-아브라함(눅3:34-36)
셈-아르박삿-셀라-에벨-벨렉-르우-스룩-나홀-데라-아브람(창 11:10-20)
셈-아르박삿-셀라-에벨-벨렉-르우-스룩-나홀-데라-아브람(대상 1:17-27)
유독 누가복음에만 아르박삿(아박삿)과 살라(셀라) 사이에 '가이난'이 들어있다. 이 사람은 어찌 누가복음에만 들어 있을까? 어찌된 사람이기에 갑자기 등장했을까?
(눅3:37의 가이난은 창5:10,대상1:2의 게난으로서 에노스의 아들이며 동명이인)
가이난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주전 280년경에 헬라어로 번역되었다고 알려진 [70인 역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눅 1:3)는 누가복음은 이것을 참조했음이라고 보여지며, 70인 역본과 거의 동시대로 추정되는 쿰란동굴에서 발견된 외경 [요벨서] 8장에 이러한 글귀가 있다.
"아르박삿의 아들 가이난은 성장하여 도시로 나가 점성술사의 가르침을 받고, 일월성신의 징조로 점을 쳐서 죄를 범하였다..... 가이난은 셀라를 낳았고, 가이난의 아우 게세대는 에벨을 낳았다."
외경이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는 문제가 되지만, 적어도 가이난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신앙의 계보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여도, 없앴으면 그만이지 어찌 창세기에도 역대기에도 없는 사람을 누가복음에 등장시켰을까?
아무리 무거운 죄를 지은 가이난도 예수님을 통하면 사해질 수 있다는 말일까? 예수님의 인간적이며 육적인 족보는 이와 같은 죄인들이 많았음으로 낮고 천한 족보에서 태어났음을 강조하려는 것일까?
맨 처음 글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유대인들에게 족보란 법적, 정치적, 종교적인 혈통을 증거하여주는 것이 되어진다. 마태와 누가는 각각 다른 관점에서 예수의 족보를 기록하였다.
마태와 누가의 족보를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이며 지극히 높으신, 세상의 모든 왕보다 높으신 왕의 왕(완전하신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한편, 예수께서는 지극히 낮고 낮은 죄인의 모습인 인간(요셉)의 아들(성령으로 잉태하사 탄생하신 완전하신 사람이나 죄가 전혀 없으신)로 오셨다는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의 족보의 차이점
마태와 누가의 기록이 상이한 점과 오류가 있다 싶은 부분을 설명하는
글들을 모아 편집했습니다.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 싶은 곳을 파헤치면
더 풍성하고 기묘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기록한 그리스도의 계보는 구약성경의 요약이라 할 수
있으며 구약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상세한 계보입니다. 마태복음의
계보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각 사건의 기원과 역사를 추적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 있는 계보는 다윗이 솔로몬을 낳았다고 말하지만, 누가복음에
있는 계보는 나단이 다윗의 아들이었다고 말합니다(눅 3:31). 역대상 3장
5절은 나단과 솔로몬이 서로 다른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은
다윗의 아들 나단, 즉 마리아의 선조의 계보인 반면에, 마태복음의 기록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즉 요셉의 선조의 계보입니다. 한계보는 마리아의
계열인 아내의 계열이며, 다른 계보는 요셉의 계열인 남편의 계열입니다.
마리아와 요셉 둘 다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그들이
결혼하여 함께 연결됨으로 요셉은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와 간접적으로
연관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솔로몬이든 나단이든 어느 쪽을 통해서나
다윗의 자손으로 여겨 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분에게는 두 계보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조가 아니었
습니다. 솔로몬과 그리스도의 관계는 솔로몬의 자손인 요셉이 마리아-그
마리아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심(마 1:16)-와 결혼함으로 이루어진 간접
적인 것이었습니다. 구약은 그리스도께서 솔로몬의 자손일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실 것이라고 거듭 예언했습니다(삼하
7:13-14, 렘 23:5). 그리스도께서 솔로몬의 직접적인 자손이 아니시지만
다윗의 자손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은 이루어졌습니다.
마태복음 1장 8장에서 보면 '요람이 웃시야를 낳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상3장 11절부터 12절까지는 '그 아들은 요람이고, 그 아들은
아하시야이고, 그 아들은 요아스이고, 그 아들은 아마샤이고, 그 아들은
아사랴이고'(아사랴는 웃시야입니다.- 왕하 15:1,13)라고 말합니다. 여기
에서 우리는 삼 대-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가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요람이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서 난 딸과 악한
결혼을 함으로써 이 결혼이 요람의 자손들을 부패시켰기 때문이었을 것입
니다(대하 21:5-6, 22:1-4).
출애굽기 20장 5절에 따라서 요람은 자손 삼대는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끊어
졌습니다. 마태복음 1장 11절에서 보면 '요시야가 여고냐와...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상 3장 15절부터 16절까지에서는 '요시야의
아들들은... 둘째 여호야김과...여호야김의 아들들은 그 아들 여고냐...'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대-여호야김-가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애굽의 바로에 의해 왕으로 세워져 바로를
위해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왕하 23:34-35)
또 여고냐는 계보에서 왕으로 여겨지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포로된 기간 중에
태어났고 포로였기 때문입니다(대하 36:9-10-여호야긴은 여고냐입니다.). 예레
미야 22장 28절부터 30절까지의 예언에 따라 여고냐의 자손들은 한 사람도 다윗의
보좌를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고냐의 직계 자손이셨다면
그분은 다윗의 보좌를 물려받을 자격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22장 28절
부터 30절까지에서는 여고냐의 모든 자손들이 다윗의 보좌에서 제외된다고 말하
지만, 예레미야 23장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순, 곧 다스리고 흥왕케
할 왕을 일으켜주시리라고 말합니다. 이 순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언은 그리
스도께서 여고냐의 직계 자손은 아닐지라도 다윗의 자손이 되시며 다윗의 보좌를
물려받으실 것임을 확증합니다.
12절에서는 '여고냐가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이 스룹바벨을 낳고'와 역대상
3장 17절부터 19절까지의 '여고냐의 아들들은 스알디엘과... 브나야와...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을 비교해 보면 스룹바벨이 스알디엘의 형제인 브다야의
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룹바벨은 스알디엘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였고 이
조카가 스알디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25장 5절부터 6절까지에
따른 사례였을 것입니다. 신명기에 있는 그 말씀까지도 그리스도의 계보와 관계
됩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에서 포로되어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인도자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스 5:1-2). 그는 또한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축한 인도자였습
니다(슥 4:7-10). 구약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베들레헴에서 태어
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미 5:2, 마 2:4-6). 포로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리
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 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포로들에게
귀환하라고 하신 명령은 성전을 재건축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시도록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첫번째로 땅에 이끌어 오기 위해서 합당한 장소에 있는 얼마의 사람들이 필요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재림을 위해서도 포로됨에서 합당한
교회생활로 돌아올 얼마의 백성을 필요로 하십니다.
16절에서는 '야곱이... 요셉을 낳았고'라고 말하지만 누가복음 3장 23절은 헬리의
아들 요셉' 이라고 말합니다. 누가의 기록은 '율법에 따른(눅 3:23의 여겼으니'의
문자 그대로의 번역, KJV 'as was supposed')것이었는데, 그것은 요셉이 사실상
헬리의 아들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그의 아들로 여겨졌음을 가리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아버지인 헬리의 사위였습니다. 이것은 민수기 27장 1절부터 8절까지와
36장 1절부터 12절까지에 따른 사례였을 것입니다. 그 절들에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규정이 있는데, 그것은 만일 어떤 부모에게 상속자로 딸만 있다면 그 유업이 딸들
에게 가야 한다는 것이고, 그 딸들은 그 지파 안에 있는 자기들의 유업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지파의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는 그런 규정
까지도 그리스도의 계보와 관계 있으며, 이것은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임을 보여 줍니다.
이 시점에서 이 계보의 기록은 앞에서 모든 사람들에 대해 말한 것처럼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 라고 말하지 않고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마리아에게서...
예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요셉 아닌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
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씨일 것이며 처녀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창 3:15, 사 7:14). 그리스도는 요셉에게서 나실 수 없었
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남자이고 여고냐의 직계자손이었기 때문인데, 예레미야
의 예언에 따르면 여고냐의 자손 중 어떤 사람도 다윗의 보좌를 물려받을 수 없었
습니다(렘 22:28-30). 그러나 마리아는 처녀였고 다윗의 자손이었으므로(눅 1:27,
31-32)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에 적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
함으로 요셉이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이끌어 오기 위해
그리스도의 계보의 두 계열이 하나로 결합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담으로, 아담에서 아브라함
으로, 아브라함에서 이삭과 야곱을 거쳐 다윗으로 이어집니다. 다윗 후에는 두
계열로 나눠지는데, 첫째 계열은 나단에서 마리아로, 둘째 계열은 솔로몬에서
요셉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 두 계열은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으로 합해져
예수 그리스도를 이끌어 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겉으로 볼 때 왕가의 계열
안에 있는 여고냐의 자손 같아 보이지만, 요셉의 선조인 여고냐의 자손이 아니라
사실상 마리아의 선조인 다윗의 자손이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다윗의 보좌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으셨습니다.
17절에서 보면 이 계보는 세 시대로 나뉘어 집니다. 1)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로서 왕국수립 이전 시대, 2)다윗부터 바벨론에 끌려갈 때까지 14대로서
왕국시대, 3)바벨론에 끌려갈 때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로서 왕국 몰락 이후
시대. 역사에 따르면 사실상 45대가 있었습니다. 이 45대들에서 저주받은 3대와
합당치 못한 1대가 제외되고, 다윗을 2대로 함(하나는 왕국수립 이전 시대이고
하나는 왕국 시대임)으로 1대가 더해져서 모두 42대가 되며, 각 14대씩 세 시대로
나뉩니다. 14라는 수는 10더하기 4로 이루어집니다. 4는 피조물을 상징하고
(계 4:6) 10은 충만을 상징합니다(마 25:1). 따라서 14는 충만한 수의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14세대에 3을 곱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을 충만한 수의
피조물과 연합시키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3곱하기 14는 42입니다. 40은 시련과 유혹과 고난의 수입니다(히 3:9, 마 4:2,
왕상 19:8). 42는 시련 후의 안식과 만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안식이 있는 좋은 땅에 들어가기 전에 42지점들을 거쳤습니다. 안식인 천년
왕국도 42개월 간의 대환란 후에 올 것입니다(계 3:5).시련과 유혹과 고난의
모든 세대 후에 그리스도는 마흔 두 번째 세대로 오시어 우리의 안식과 만족이
되셨습니다.
누가의 기록은 예수로 시작해서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태의 기록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까지 나아갑니다. 누가는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가고, 마태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내려옵니다. 모든 세대들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으며 그리스도를 이끌어 왔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세대들의 목표이
시고 완결이시고 결론이시며, 모든 세대들을 완전케 하시고 온전케 하십니다.
그러한 분으로 그리스도는 그들의 예언을 이루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빛과 생명과 구원과 만족과
치유와 자유와 안식과 위로와 평안과 기쁨이 모두 함께 옵니다. 여기서부터
신약전체는 우리에게 모든 것 되시는 이 놀라운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설명
입니다.
그리스도의 출생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예비되고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으로 요셉과 마리아 두 사람의 조상들을 그들의 선조 스룹바벨
(마 1:12, 스 4:1-2)의 인도 아래 바벨론의 포로됨에서 벗어나 유대로 돌아
오게 하셨습니다. 다시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으로 요셉과 마리아를 같은
도시 나사렛에 두셨습니다(눅 1:26, 2:4) 더욱이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는 합법적인 상속자가 되도록 요셉과
마리아를 결혼시키셨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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