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발동기 벨트에 낀 아버지 붙잡고 “하나님 살려주세요”

열려라 에바다 2023. 9. 30. 09:32
 
***간증: 1054. [역경의 열매] 이종락 (1-25) 발동기 벨트에 낀 아버지 붙잡고 “하나님 살려주세요”


고교 시절 음주가무 빠져 집안 애물단지
졸업 후 부친이 운영하는 정미소 일 돕다
위기 상황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 찾게 돼


이종락 목사가 1970년 고등학교 서무과에서 일하던 시절 학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치기 어린 때를 구태여 기억하고 싶은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날마다 돌이켜 자신을 “죄수 중의 괴수”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딤전 1:15)이 내 고백이 되지 않을까.


나는 1954년 8월 경남 거창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유서 깊은 유교 집안이었다. 당시 마을에서 논과 밭이 제일 많았고 정미소도 운영하며 머슴 셋을 둘 정도로 제법 부유했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마을 대소사를 직접 챙기셨던 아버지는 동네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셨다.


넷째인 나는 고등학생 때 집안 어르신과 동네 사람들에게 “아버지 얼굴에 먹칠도 아닌 똥칠을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곤 했다. 농번기만 되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손발을 걷어붙이고 진땀을 흘리며 모를 심었는데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기타와 장구를 매고 음주가무에 빠졌다. 18세 때는 집안 어르신들이 못된 버릇을 고쳐주겠다며 고주망태가 된 나를 매질했지만, 그것도 며칠뿐 못된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가엾이 여겨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들려고 애쓰셨다. 친인척의 도움을 받아 고등학교 서무과, 콩나물공장 등에 취직시켰지만 나는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 나왔다. 더이상 지인들에게 폐를 끼칠 수도 없고 보낼 곳도 없게 되자 집에서 운영하는 정미소 일을 시켰다.


하루는 아버지가 정미소 일을 봐주겠다며 발동기를 작동 중이었는데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아버지의 점퍼 끝자락이 발동기의 벨트에 끼어 몸이 3m가량 끌려 올라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아 옷자락을 붙잡고 꺼내려 했지만, 발동기 벨트의 힘에 밀려 나 역시 끌려 올라갈 찰나였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갑자기 이 말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벨트가 벗겨져 작동이 멈췄다. 아버지는 크게 다치셨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지실 수 있었다.


위험천만한 순간에 내가 불렀던 하나님이 현재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그때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성탄절 부활절 등 교회 절기에 맛있는 것을 얻어먹으러 간 게 전부였다.


20대 후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 하나님을 알아갈 때 정미소 사건을 떠올렸다.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게 아니라 위기의 순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 내 입술을 주장하셨음을 깨달았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그때부터 하나님은 나를 부르시기 위해 역경의 열매를 예비하신 것 같다. 내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라 입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약력=1954년 경남 거창 출생, 고려신학교 졸업, 고려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 생명사랑운동연합 공동대표, ‘베이비박스’ 운영자, 다큐멘터리 영화 ‘드롭박스’ 출연.


* [역경의 열매] 이종락 (1) 발동기 벨트에 낀 아버지 붙잡고 "하나님 살려주세요"
* [역경의 열매] 이종락 (2) 나이트클럽서 남인수 모창가수 활동하다 스캔들 터져
* [역경의 열매] 이종락 (3) 나쁜 술버릇 때문에 연이은 해고… 생활비까지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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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이종락 (5) 직장 내 싸움 소식 사장 귀에… 해고될까 전전긍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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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종락 (2) 나이트클럽서 남인수 모창가수 활동하다 스캔들 터져


문제 생길 조짐에 ‘가수 되겠다’ 핑계로
도망치듯 상경… 떠돌다 공장에 취직
친척 누나 소개로 지금의 아내와 결혼


이종락 목사가 1980년 1년간 연애한 정병옥 사모와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지는 정미소 사고로 한동안 병원에 입원하셨다. 정미소에서 아버지의 빈자리는 내가 채워야 했다. 정미소 일에 익숙해진 나는 기계가 고장 날 때마다 직접 고치며 기계의 원리를 알게 됐다.


기계를 잘 고친다는 소문이 나자 마을 사람들이 TV 라디오 오토바이 등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내 손을 거치면 대부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난생처음 가족과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었다. 틈틈이 검정고시를 준비해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취득했다. 삶에 잠시 봄이 온 듯했다.


당시 내 꿈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남인수처럼 되는 것이었다. 정미소 일이 슬슬 지루해질 무렵 다행히 아버지가 회복되셨다. 여유가 생긴 나는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콩쿠르가 있는 날이면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운이 좋았던지 1등 상품으로 알루미늄 냄비 같은 것들을 종종 받았다. 노래를 부르며 자연스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노래를 제법 부른다는 소문이 나자 동네 나이트클럽에서 남인수 모창 가수로 활동하게 됐다. 인기가 많아지자 여성들과 스캔들이 생겼고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가수가 되겠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상경했다. 서울에서도 큰 가수가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서울이 어떤 곳인가. 나보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무대에 서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던 나는 그간 익힌 기계 기술로 서울 성수동의 유명한 가방 공장에 취직했다. 첫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한 나는 자신감이 생겼고 안정된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워낙 술을 좋아했던 나는 하루도 술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친척 누나가 지금의 아내를 내게 소개해줬다. 가정이 생기면 정신을 차릴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멋지게 꾸미고 나가도 시원치 않을 판에 나는 ‘어떤 여자가 나를 좋아할까’ 생각하며 술을 마시고 주선 자리에 나갔다.


벌겋게 취기가 올라온 나를 본 친척 누나와 아내는 어이없어했다. 친척 누나는 문 앞에 서 있는 내 팔을 꼬집으며 “제정신이냐”라고 했다. 하지만 웬일일까. 당시 아내는 꾸밈없는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고 했다. 나 역시 아내를 본 순간 결혼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1년간 연애하고 1980년 결혼했다. 주례자는 장로님이셨는데 주례사 말미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정에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 마음에 깊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당시엔 그저 좋은 말로만 받아들이고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결혼하면 정신을 차리고 가정에 충실할 것이라는 친척 누나의 말은 빗나갔다. 그때까지 내 삶은 주(酒)가 이끌던 삶이었다. 결혼 후 이듬해 첫째 딸 지영이가 태어났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3) 나쁜 술버릇 때문에 연이은 해고… 생활비까지 떨어져


버스서 난동 부리거나 사장을 차는 등 술 취하면 이성 잃고 폭력적으로 변해


이종락 목사(왼쪽 두 번째)가 1979년 10월 첫 직장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공장에서 근무한 지 3년째 된 어느 날 전 직원이 봄놀이를 갔다. 차에서도 음주 가무가 가능했던 시절, 동료들이 뒤에 앉은 내게 돌아가며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슬슬 취기가 올랐다.


술에 취한 나는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좁은 버스 통로를 뛰어다니며 형광등 유리창 의자 등을 파손하기 시작했다. 동료들도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운전기사는 깨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갑자기 도로변에 차를 멈췄다. 도착지에 가보지도 못한 채 그날 봄놀이는 나 때문에 망쳤다. 이튿날 술이 깬 뒤에야 사태 파악이 됐다. 봄 놀이를 망치고 관광버스 집기를 망가뜨린 책임을 지고 회사에서 쫓겨났다.


서울 성수동에 있는 원심분리기 제작 공장에 취직했다. 밤낮없이 일하던 직원들은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사장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들과 술 마시고 노래하며 어울리다 보니 노래를 잘한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어느 봄날 회사에서 전체 야유회를 갔다. 사장이 “종락이가 노래 좀 한다며. 나와서 노래해 봐”라고 권유해 노래를 불렀다. 사장은 노래가 마음에 들었는지 간부들 앞에서 나를 칭찬했고 간부들은 내게 술을 따라줬다.


그것이 화를 불렀다. 고주망태가 된 나는 사장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과 분노를 떠올리며 이성을 잃었다. 술상 위로 뛰어 올라간 나는 사장의 얼굴을 발로 찼다. 간부들에게 끌려 내려와 집단 구타를 당한 나는 이튿날 바로 해고됐다. 직장만 잃은 게 아니었다. 고막도 손상됐다.


다시 취직하려고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냈다. 금세 취직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술버릇에 대한 소문이 주변 공장들에 퍼져 있었다.


4개월째 아내에게 생활비를 주지 못하자 쌀이 떨어졌다. 급기야 아내는 쌀을 구하기 위해 딸의 돌 반지와 결혼반지를 팔려고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기를 당해 돌 반지와 결혼반지만 잃고 말았다.


취직이 안 되자 전 직장 동료들이 나를 위로한다며 매일 술을 사줬다. 지금 생각하면 제정신이었나 싶다. 술 때문에 이 지경이 됐는데 또다시 술이라니…. 그땐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하루는 늦은 밤 포장마차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세상 한탄을 하고 있었다. 포장마차의 천막 비닐 사이로 힘없이 슬픈 걸음으로 터벅터벅 걷고 있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속으로 “저 사람도 나처럼 상처가 있고 슬픈 일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걸음이 포장마차에 가까워지자 얼굴이 보였다. 아내였다.


나도 모르게 포장마차 테이블 안으로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저 사람에게 상처 준 사람이 나였단 말이야. 나였어.” 살면서 몇 초 만에 술에서 깬 것은 처음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4) ‘백수 남편’ 대신 생계 책임진 아내 보며 새 출발 다짐


세상 탓하며 술만 마시다 잘못 깨닫고
가장으로 죄책과 절실함으로 구직활동
술 멀리하고 열심히 일해 사장에게 신임


이종락 목사(오른쪽) 부부가 1983년 첫째 딸 지영이의 세 돌을 맞아 생일상 앞에서 딸과 사진을 찍었다.


아내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던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힘없이 걸어갔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힘없이 걷던 아내의 모습이 자꾸 아른거렸다. 이렇게 만든 내가 죄스러웠다.


몇 년 후 알게 된 사실인데 아내는 벌이가 없는 상황에서 가족에게 밥 한 끼라도 먹이려 친구와 지인들에게 돈을 꾸러 다녔다고 한다. 그날은 돈을 빌리지 못해 ‘끼니를 어찌해야 하나’ 하는 막막함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했다.


직장 동료 환경 세상을 탓하던 내가 처음으로 ‘술만 마시는 내가 문제야. 모든 게 내 탓이야’라고 생각하며 울었다. 처음으로 가장이자 아버지로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한참을 울다 정신을 차리고 회사 수십 곳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연락을 주는 곳이 없었다. 집에 쌀도 없는데 시간만 하염없이 지나갔다. 제대로 된 남편과 가장이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건만,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느낌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어려웠다.


절망이 깊어가는 가운데 서울 성수동의 한 회사에서 이력서를 낸 지 한 달 만에 연락이 왔다. “이종락씨, 아직 취직 안 했으면 우리 회사에서 영업직으로 일합시다.”


그 소식에 너무 기쁘고 행복해 동네 한 바퀴를 뛰었다. 실직 기간이 더 길어졌으면 가족을 위해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가장으로서 아내와 딸을 위한 절실함이 생겼다. 더는 가족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입사한 회사는 믿음이 신실한 사장이 운영했다. 매주 월요일 목회자를 초청해 예배를 드렸다. 한 목회자가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그는 술을 마시며 음탕한 생활을 하던 어거스틴이 회개해 성화되는 과정을 소개했다.


어거스틴의 타락했던 삶이 어찌나 내 삶과 같은지…. 모든 말씀이 집중포화하듯 내 심장을 때렸다. 눈물이 났다. 함께 예배를 드리던 직원들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창피해서 눈물을 닦고 또 닦아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목놓아 울었다.


이날 말씀이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새로운 마음으로 회사 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교회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전 직장에서 내가 어떤 사고를 쳤는지 회사 사람들도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말씀을 실천하고 싶었다. 친구와 술을 멀리하고 남들보다 두세 배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장으로부터 조금씩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회사의 모든 열쇠와 창고 관리까지 맡길 정도로 인정받았다. 나에 대한 사장의 신임이 높아질수록 내부에서는 나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동료들의 시기심과 질투가 고조될 즈음 사건이 터졌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5) 직장 내 싸움 소식 사장 귀에… 해고될까 전전긍긍


후배 훈계하다 싸움 나 해고 위기에… 예수 믿어보라는 뜻밖의 사장 제안받고 교회 다니기로 약속


이종락 목사(왼쪽 세 번째)가 1986년 한 기도원에서 시각장애인 바디매오 역을 맡아 성극을 하고 있다.


하루는 직장 후배가 노골적으로 일을 게을리해 일을 제대로 하라고 훈계했다. 그가 비아냥대며 말을 듣지 않자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나보다 덩치가 컸던 후배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격했다. 큰 싸움으로 번지면서 내 눈과 입술이 찢어지고 코피가 났다. 사무실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동료들은 그제야 싸움을 말렸지만, 이 소식이 사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찢어진 상처로 아픈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 일로 직장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밤을 꼬박 새웠다.


이튿날 아침 사장이 나를 사장실로 불렀다. ‘문제가 많은 과거에도 불구하고 나를 채용했는데 사고를 쳤으니 분명 해고하겠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부들부들 떨며 식은땀까지 흘렸다. 사장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로 호소하며 제발 해고하지 말아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한숨을 쉬며 별말이 없던 사장의 모습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그때 사장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이종락씨.” ‘이 분위기면 짐 싸라고 하겠구나. 나는 이렇게 해고되는 걸까.’ 하지만 사장이 이어서 한 말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뜻밖이었다. “이종락씨는 예수 안 믿으면 안 되겠어. 예수 안 믿으면 큰일 낼 사람이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고가 아니라 예수를 믿으라고. 이게 벌 맞나.’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지만, 사장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싸움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사장은 그저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닐 것을 내게 제안했다.


이 제안이 명령처럼 느껴졌지만, ‘해고가 아니라 단지 예수를 믿어보라는 제안이니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보다 더한 벌을 준다고 해도 기꺼이 감수할 마음이었다. 교회에 다니겠다고 바로 약속했다. 사장은 내 손을 잡고 영접 기도를 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이종락씨의 길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나라와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큰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


아멘도 모르는 내가, 사장의 두 손을 잡고 눈을 감은 채 함께 기도했다. 아니, 사장의 기도를 들었다. 가슴이 뭉클했고 큰 감동이 밀려왔다.


기도를 마친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사장실에서 나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왔다. 후배와 전 직원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한 뒤 일상으로 돌아갔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은혜이고 축복이었다. 회사에서 해고되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 잊힌 아들로 남아 있지 않게 됐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다른 길을 준비하시고 계셨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6) “하나님 아버지” 기도 시작하자 갑자기 머리 하얘지더니


준비해둔 기도문 읽지도 못하고 눈물만 한 동료 찾아와 “은혜받고 울었다” 위로


이종락 목사(오른쪽) 부부가 1988년 성탄예배에서 특송을 부르고 있다.


사장에게 하나님을 믿겠다고 약속한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직원 예배가 열렸다. 나는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예배 시간에 다음 주 예배에선 내가 대표기도를 한다는 광고를 들었다. 난감했다.


과장에게 어떻게 기도하냐고 묻자 그는 “그런 건 알려주는 게 아니라 혼자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해 검색만 해도 기도문이 나오는데 당시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찾기 어려웠다.


기도문을 어떻게 써야 하나 며칠을 발을 동동거리다 대표기도 하루 전에 집에서 두서없이 작성했다. 월요일 아침에 대표기도를 하러 앞으로 나갔다. 손을 부들부들 떨며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종이가 하얗게 변했다.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도 하얘졌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기도문을 읽지 못하는 내가 순간적으로 창피했다. 그냥 눈물만 흘리고 서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한창 울고 있는데 앞에서 과장이 “이종락씨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고 하고 내려와”라고 말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부장이 나와 나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해 같이 내려왔다. 기도는 내가 시작했는데 마무리는 부장이 한 것이다.


‘아, 이마저도 망쳤구나.’ 점심시간까지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식당 구석 자리에 앉아 동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식사하고 있었다. 그때 나를 발견한 한 동료가 다가와 “이종락씨, 정말 은혜 많이 받았어. 나도 같이 울었어”라고 말했다.


‘무슨 소리지. 나를 놀리나.’ 지금은 직장 동료가 내 기도에 함께 눈물을 흘린 일을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시엔 창피해하는 나를 놀리는 줄로 알았다.


그날 ‘이제부터라도 교회에 나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퇴근 후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여보, 교회에 다니려 하는데 당신도 함께 갑시다.”


아내가 놀라며 입을 뗐다. “어쩐 일이데요. 당신이 뭐라고 할까 봐 얘기를 못 했는데, 3개월 전부터 몰래 교회에 나가고 있었어요. 당신이 예수님을 믿고 술과 담배를 끊고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어요.”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아내의 기도가 응답된 것일까. 난 눈물이 없는 사내였다. 아내 앞에서는 울지 않았지만, 그날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뭉클하고 속으로 눈물이 났다.


아내와 함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새벽 예배도 아내 손을 잡고 다녔다.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길로 이끌고 계셨다. 사장과 아내의 기도처럼.


***[역경의 열매] 이종락 (7) “좋아하는 거 버려라” 주님 말씀에 술·담배 모두 끊어


기도원서 방언 터진 후 주님 음성 듣고 집에 쌓아둔 술과 담배 버리고 기도


고려신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종락 목사(오른쪽 네 번째)가 1997년 12월 수련회 조별모임에서 조원들과 다과를 나누고 있다.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교회에 처음 갔다. 교회를 향해 걸어가는 내 모습이 대로변 상가의 유리창에 비쳤다. 내가 아닌 새로운 사람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설교 제목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 말씀이 내 양심을 찔렀다. 마치 내 속에 있는 죄를 하나하나 뽑아주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처럼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했다.


회개 기도를 한 후 눈을 뜨니 십자가에서 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내에게 “십자가에서 빛이 나온다”고 말했다. 아내는 “십자가 뒤에 있는 간접조명”이라 했다.


그러나 내가 본 빛은 간접조명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봐요. 십자가에서 환한 빛이 우리를 비추는 거 안 보여요.” 그렇게 환하게 비추던 십자가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교회의 새신자로 등록했다. 새신자 교육이 끝나자 남전도회에서 초대를 받았다. 많은 집사가 환영해줬는데 그들 중 한 명은 내 과거를 아는 사람이었다.


순간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그는 “이종락 형제님, 제가 당신을 압니다. 앞으로 신앙생활 같이 잘합시다”라고 말하며 반갑게 맞아줬다. 그는 교회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좋은 친구가 돼줬다.


교회는 집보다 좋은 안식처가 됐다. 예배를 기다리고 사모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한 달에 한 번씩 남전도회원들과 기도원에 갔다. 기도원에서 예배를 마친 뒤 산에 올라가 각자 흩어져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기적으로 기도원 예배를 드리면서 조금씩 기도의 줄이 잡히기 시작했다.


가랑비가 내리던 어느 날, 어김없이 기도원을 찾았다. 보통 예배를 마치고 저녁 11시에 산 기도를 시작해 새벽 3시 30분 즈음에 귀가했다. 그날 깊은 기도를 하면서 옷이 비에 젖는 줄도 몰랐다. 기도에 깊이 빠져들어 간 적은 처음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내가 내려오지 않자 다른 집사가 날 찾으러 올라왔다. 내 기도 소리를 듣더니 “언제 방언을 받았나요”라고 물었다. 그 자리에 있던 남전도회 집사들이 손뼉 치며 축하해줬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도착해 2시간 정도 잔 뒤 출근하기 위해 일어났다. 화단에 물을 주는 데 꽃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기분이 좋아 찬송가를 흥얼거리는데 갑자기 어떤 음성을 들었다.


“네가 좋아하는 거 버려라.” “내가 좋아하는 거요”라고 되물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음성을 들었다. 그때 “내가 좋아하는 게 뭐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술과 담배지. 이것 때문에 내 인생이 여기까지 왔어. 당장 끊어야지.”


당시에도 한 달간 먹을 술과 담배 네 상자가 항상 집에 있었다. 술과 담배를 모두 버렸다. 내일 이것들이 다시 생각날까 두려워 간절히 기도했다. “나를 망친 술과 담배, 다시는 생각도 안 나게 해주세요.”


나는 어려서부터 술과 담배의 노예였다. 이것들을 끊으려 수없이 노력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그날 이후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술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났다. 다른 사람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스치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몸에서 거부반응을 보이니 순식간에 끊을 수 있었다. 사회생활에서 술이 아닌 콜라를 마시는 게 일상이 됐다. 어느 순간부터는 은혜의 빛이 내 삶을 이끌었다. 나 홀로 걸어가는 삶이 아니었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8) 백혈병 걸린 아이 위해 기도… 기적처럼 회복되는 체험


병세 깊은 아이와 수심 깊은 엄마 본 후
3개월 동안 “하나님 도와주세요” 간구
기도하던 중 응답받고 치료에 확신 들어


이종락 목사(오른쪽)가 1994년 교회학교 수련회에 참석해 한 초등학생을 끌어안고 기도하고 있다.


교회 담임목사가 미국으로 부흥집회를 가셨을 때 신학대 총장이 보름간 요한복음 강해를 하셨다. 하나님이 천하보다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깊이 느꼈고 예배 시간이면 가슴이 견딜 수 없이 뜨거워졌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배가 끝날 때까지 계속 중얼거렸다.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이 가슴을 달궜고 3개월 동안 식지 않고 연단되는 것 같았다.


교회에서 다른 목회자의 부흥회가 열렸다. 그분도 요한복음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십자가의 긍휼, 부활의 소망을 전했다. 그 기간 교회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나 역시 회개하며 말로 형용하지 못할 큰 은혜를 받았다. 내가 느끼기에도 거듭난 사람으로 새로워지고 있었다. 표정이 이전보다 환해졌다.


새벽 예배도 드렸다. 300여명이 모이는 교회였지만, 새벽 예배에는 늘 서너 명의 성도만 참석했다. 은혜를 받다 보니 불같이 기도했다. 보수적 교회여서 한 성도가 조용히 기도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기도하다 보면 절제가 안 됐다. 그분이 다시 조용히 기도해달라고 말하자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을 언급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이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며칠 지나니 옆자리 사람들도 똑같이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새벽 예배에 오는 성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3개월이 지나자 예배당이 꽉 차 있는 게 아닌가. 기도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이듬해에는 본당에서 새벽 예배를 드릴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 무렵 나는 둘째 자녀를 허락해 달라는 기도를 2년간 드리고 있었다. 기도하던 어느 날 얼굴이 하얀 아이와 얼굴에 깊은 수심이 있는 어머니가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했다. 아이는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 어머니는 간절한 마음에 아이를 안고 교회 앞자리로 데려왔다.


모녀를 보자 둘째 자녀를 허락해 달라는 기도보다 백혈병에 걸린 아이를 위한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사람의 힘으로 능으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잖아요. 치료해 주세요.”


아이를 위해 3개월 동안 기도한 시점에 나도 모르게 마음에서 하나님께서 치료하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믿지 못해 아이의 어머니에게 바로 얘기하지 못했다. 마음에 응답이 계속 와서 어머니에게 “하나님께서 수연이 치료해 주셨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이상한 사람을 본 듯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괜한 말을 했나. 나 때문에 엄마와 아이가 교회에 안 나오는 거 아니야.’ 얼마 뒤 교회에 나온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전에 봤던 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이 꽃처럼 활짝 피었고 살이 붙어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럼 그렇지.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신다고 했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처럼 회복되는 체험을 하면서도 두려움이 있었다. “하나님,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신 겁니다. 부족한 저를 통해 기도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만하지 않게 해주세요.” 교만이라는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다.


기도의 응답으로 1987년 7월 병원에서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준비도 계획도 없던 주사랑공동체교회의 생명 사역은 둘째 아들의 출산으로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9) 혹 달고 태어난 둘째… 15분간 호흡이 끊겨


악성 종양으로 뇌에 바이러스 전이돼
여러번 심폐소생술 끝 기적적으로 호흡
의사도 “의학적으론 설명이 안되는 일”


정병옥 사모(왼쪽)가 1987년 운영하던 채소·과일 가게에서 둘째 아들 은만이를 안고 첫째 딸 지영이와 포즈를 취했다.


1987년 7월 병원에서 둘째 은만이가 태어났다. 의사는 출산 전에 “아이가 거꾸로 있고 상태도 좋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아내가 제왕절개수술을 하는 동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를 보고 의사는 “이놈 봐라. 복을 달고 나왔네”라고 했다. 아이의 얼굴을 보니 큰 혹이 있었다. 흡사 얼굴이 두 개 같았다. 그 모습에 나는 “하나님, 기왕 아이를 주시려면 건강한 아이로 주시지. 왜 장애 아이를 주셨습니까”라고 불평했다.


순간 하나님께서 책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그렇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병원 기둥을 붙잡고 회개 기도를 했다. “죄송합니다. 주님을 섬기듯 저 아이를 잘 돌보겠습니다.”


아내가 충격받을까 염려해 한 달간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아이를 데려가자 끌어안고 얼굴에 뽀뽀하며 더 사랑해줬다. 아내는 나보다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아내도 하나님께 나와 같은 기도를 드렸다.


악성 종양을 갖고 태어난 은만이는 생후 4개월 만에 바이러스가 뇌에 전이됐다. 하루는 열이 41.9도까지 올랐고 그로 인해 시력과 고막에 문제가 생겼다. 119 구급차를 불렀는데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은만이의 호흡이 끊어졌다. 의사들이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가망이 없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이 주신 아이인데 이러려면 왜 주셨나요. 하나님이 책임지고 살려주세요.” 나는 탄식하며 기도했다.


내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의사가 심폐소생술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했다. 호흡이 끊어진 지 15분이 넘었는데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은만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의사가 말했다. “의학적으로 도저히 설명이 안 됩니다. 살아난 게 기적입니다. 하지만 이건 아셔야 합니다. 얘는 전신 마비라 아무것도 못 할 겁니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서 살리셨으니 하나님께서 이끄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감사 기도를 드렸다. 침대에서 기도하며 은만이를 보니 주님이 침대에서 은만이를 품고 있는 환상이 보였다. 은만이가 절대 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놓였다.


은만이는 7개월 넘게 중환자실에 있었다. 누군가 옆에 붙어있어야 했다. 큰딸 지영이는 너무 어려서 어디에 맡길 상황이 아니었다. 자꾸 불어나는 병원비를 대다 보니 전세 보증금까지 까먹었다. 갈 곳이 없었다. 우리 세 식구는 은만이가 누워있는 침대 밑에서 근근이 생활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광야의 기적처럼 감사와 기쁨이 흘렀다. 병원에서 은만이처럼 아픈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아픈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10) 기도로 병 나았단 소문에 다른 병실까지 불려 다녀


가와사키병 걸려 죽음 기다리던 환아 기도 후 정밀검사에서 완치 판정받아


1987년 12월 25일 은만이와 같은 5인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케이크의 촛불을 불며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있다. 왼쪽 세 번째가 가와사키병을 앓다 회복한 아이, 오른쪽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가 은만이다.


중환자실에 전신마비로 누워있던 아들 은만이는 죽음의 문턱을 간신히 넘기고 1년 만에 일반 5인 병실로 옮겼다. 주님의 은혜였다. 그곳에는 은만이처럼 오랫동안 입원한 아이와 부모들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매일 밤 8시면 어김없이 은만이와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이 모습을 본 옆 침대의 아주머니가 어느 날 내게 물었다. “아저씨, 우리 아이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주머니의 아들은 당시 급성열성혈관염인 가와사키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아주머니께 “예수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옛날에 믿었습니다.” “그러면 함께 기도하시죠.” 그리고 같이 기도했다. “하나님, 이 아이를 치료해주시고 회복시켜주세요. 주님의 은혜로 아주머님과 가족 모두 다시 예수님을 믿게 해주세요. 낫게 해 주세요.” 기도하는데 마음에 평안함이 들었다.


기도를 마친 아주머니는 울먹이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나는 “아주머님의 기도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할 수 있는 겁니다. 같이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께만 감사하시면 됩니다. 기도할 때마다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며칠 뒤 그 아이의 정밀검사가 진행됐다. 얼굴이 환해진 아주머니가 아이와 함께 병실로 돌아왔다. “아저씨, 가와사키병이 없어졌대요. 몇 번이고 다시 검사했는데도 말이죠.”


내가 더 놀랐다. 착오가 있을까 봐 다른 곳도 정밀검사를 했지만, 아이는 일주일 뒤 퇴원했다. 소문이 돌았다. 다른 아이의 부모도 기도를 부탁했다. 다른 병실까지 불려 다니며 기도를 요청받았다. 심히 두려웠다. 내 아들도 저렇게 누워있는데,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기도를 요청하는지….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부모의 마음이 내 마음이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전했다. “제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예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작은 병실에 모여 같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부모들은 아이가 낫길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아왔고, 어느덧 5인실에 50명 이상이 모였다.


결국 한 간호사에게서 “기독교병원도 아닌데 병실에서 왜 이러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정을 말하고 예배장소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하니 로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줬다.


예배에선 종종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모든 아이는 아니었지만, 함께 기도하던 많은 아이가 건강해져 퇴원하는 기적이 생겼다. 암으로 병원에 왔던 한 아이는 예배를 드리고 며칠 뒤 깨끗이 나아 퇴원했다. 나 역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에서나 봤던 기적들을 경험할 줄이야.


내게도 기적들이 생겼다. 당시 우리 가족은 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경제상황이 안 좋아 병원비 독촉까지 받았다. 그런데 퇴원하는 분들이 종종 우리의 병원비를 대납해줬다. 기도회에 참석한 이들 중에 생활비를 주는 분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고 예수님만을 전하며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내게 이런 것들까지 허락해 주셨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었지만, 누가 우리 삶을 이끄시는지는 분명히 아는 날들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11) “다른 아이들 치유하시는 하나님, 왜 우리 은만이만…”


뇌암으로 입원했다 병 없어지고
시신경 회복돼 다시 앞을 보고
계속되는 기적 보며 주님께 투정


2010년 8월 이종락 목사(왼쪽)가 자택에서 아들 은만이를 간호하고 있다.


은만이는 퇴원과 입원을 반복했다. 다행히 중증장애인 지원 제도가 생겨 낮에 몇 시간은 내게도 개인 시간이 주어졌다. 그 시간이면 전도하러 전철역으로 나갔다. 말씀을 전하는 게 좋았고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은만이가 다시 입원했다. 폐가 쪼그라든 상태였는데 반드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힘든 상황이 겹쳐 전신마취를 하면 숨질 확률이 높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의사가 기적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을까.


한 금식기도원에서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이상하게 은만이 옆자리에 뇌암으로 입원한 아이를 위한 기도만 나왔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그 아이의 기도만 나왔다. 나는 은만이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 아이를 위해 계속 기도했다.


일주일 뒤 병원 승강기에서 그 아이와 엄마를 만났는데 퇴원하는 길이라 했다. 엄마가 감사 인사를 했다. “아저씨, 너무 감사해요. 우리 아이가 수술하려고 MRI를 찍었는데 뇌암이 없어졌어요.” 그 소리를 듣고 오히려 내가 전율했다.


은만이도 며칠 뒤 수술했다. 전신마취하면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평안했다. 하나님께서 은만이를 지키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수술을 마친 의사가 기적이라며 “하나님이 하신 일 같다”고 말했다. 수술은 잘 진행됐고 은만이도 의식을 찾았다.


하루는 한 아이가 앞이 안 보인다며 옆 병실에 입원했다. 시신경이 손상된 상태라 했다. 그 아이의 할아버지가 “아저씨, 우리 외손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할아버지께 “예수님 믿습니까”라고 물었더니 “한때 교회에 다니다 말았다”고 답했다. 하나님이 이 할아버지를 부르시는 걸 느꼈다. “할아버지, 집안 식구들이 예수님을 믿고 한마음으로 기도하면 외손녀가 치료받습니다.” 나도 모르게 단정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큰일 났습니다. 하나님. 치료해주시지 않으면 저와 하나님 망신입니다. 부디 치료해주세요.” 간절히 기도했다. 할아버지는 이튿날 처제에 사돈 동생까지 여덟 명의 식구를 데려왔다. 너무 놀랐지만,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아이가 나으려면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철야, 주일예배, 주일 찬양예배에 모두 참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도 확신을 갖고 이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우리 손녀가 치료되면 무엇이든 못하겠냐”며 이튿날부터 가족들과 모든 예배에 참석했다. 의사도 어렵다고 한 아이였다. 아이는 2주 후 빛을 보기 시작했고 3주 후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정도로 호전됐다.


계속되는 기적들을 보며 내가 더 놀랐다. 한편으로는 다른 아이들을 치유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 은만이는 이렇게 두시는지 답답한 마음도 있었다.


하루는 기도하며 하나님께 투정을 부렸다. 기도 중에 다른 사람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는 주님의 모습이 환상처럼 보였다.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얘야, 너는 나를 알지만 저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이렇게 두신 이유가 있으시다면, 바울처럼 내게도 그 은혜가 족하겠다 싶었다. 그날 이후로 은만이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우리 삶을 인도하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주어진 길을 담대히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했다. 우리 가족은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빛이 있었다. 버려진 듯 보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12) “내 손녀 맡아주면 당신이 믿는 예수님 믿겠다”


은만이 돌보는 모습 지켜보던 할머니
의료사고로 누워지내야 하는 손녀 부탁
신앙 갖겠다는 말에 덜컥 “돌봐줄게요”


2009년 2월 이종락 목사의 수양딸인 상희(가운데)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정병옥 사모(오른쪽)가 함께했다.


7살 상희는 의료 사고로 평생 누워 지내야 하는 아이였다. 83세 할머니가 손녀를 돌보셨는데 병원에서 어느 날 나를 부르셨다. 은만이를 돌보는 모습을 사흘간 유심히 지켜보다 말하는 것이라며 애원하셨다. “나는 늙었는데 상희를 돌볼 사람이 없어 걱정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아저씨가 손녀를 잘 키워줬으면 해요.”


속으로 ‘이상한 할머니네. 우리 은만이 돌보기도 어려운데…. 양심 없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내게 은만이처럼 누워있는 아이를 한 명 더 돌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절하려 하는데 할머니가 대뜸 “제 손녀를 돌봐주면 당신이 믿는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거절할 수 없었다. ‘내가 손녀를 돌보지 않아 할머니가 예수님을 안 믿으면 엄청난 책망을 받겠구나.’ 나는 그 자리에서 “할머니, 제가 손녀를 돌봐주겠습니다”라고 말해버렸다.


그날 이후 나는 할머니에게 틈틈이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2개월간 기도하고 아내와 함께 새벽기도를 다녀오던 날 아침, 아내에게 상희 할머니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아내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생각도 못 한 말을 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해야죠.”


‘내가 아내를 너무 몰랐구나.’ 뭉클함에 아내를 꼭 안아줬다. 얼마 뒤 은만이와 상희가 퇴원해 우리 집에 왔다. 당시 우리 집은 시장 구석에 있는 단칸방이었지만 사람의 온기가 가득했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던 상희 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의 품에 안겼다.


새 식구를 들여 지출이 더 늘어난 상황이었지만, 경제 상황이 좋아질 계기는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과 다른 길로 인도하셨다. 어느 날 나를 전도한 전 직장 사장이 어렵게 사는 나를 찾아 돈을 손에 쥐여줬다. 하나님께로 인도해주신 것으로도 충분한 은혜를 받았는데 다섯 식구가 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나는 그 돈으로 서울 사당동 산꼭대기에 작은 사글셋방을 얻어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했다. 그 일도 못 하게 됐을 때 지인이 중고 승합차를 살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 차로 배달 일을 하며 주말에는 교회 차량 봉사도 했다.


그런데 배달 일이 끊겨 차를 놀려야 했다. 이번에는 다른 지인이 1년간 차를 빌려 쓰며 이용료를 줬다. 그동안 자판기 설치를 병행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병원비 부담이 다소 줄었다. 그 무렵 우연히 우·양산 사업을 하는 동네 사장을 만나 우산과 양산을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서울과 경기도 일대를 누빌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덕분에 아이들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었다.


상희로 하여금 나는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알게 됐고, 상희의 할머니는 주님의 자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상황은 어려워 보였지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지인들 덕분에 사람의 따스함을 느꼈다. 무엇보다 상희 덕분에 내가 생각해 보지 않은, 뜻하지 않은 삶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13) 목회자의 길 걸으며 6명 장애아의 아빠 되다


기도 중 환상 본 후 신학교에 입학
뇌성마비 상희가 호전된 기적을 본 의사
부모가 버린 장애아 4명 맡아달라 부탁


이종락 목사가 1999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개혁 총회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뒤 소감을 말하고 있다.


뇌성마비를 앓는 상희가 우리 집에 오면서 돌봐야 하는 아이가 둘이나 됐다. 사업으로 바쁜 나를 대신해 아내가 아이들을 돌봤다. 당시 중학생이던 큰딸 지영이도 엄마를 도와 동생들을 잘 돌봐줬다.


어느 순간부터 지인들이 목회를 권유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웃어넘겼다. ‘주님, 제 분수를 압니다. 주의 종이 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몇 개월간 기도했음에도 응답은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응답이 오지 않으면 목사가 되지 않겠다. 지금처럼 일하며 복음을 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1년쯤 지난 어느 날, 비몽사몽 기도 중에 환상을 봤다. 강어귀에 앉아 있는데 흰옷 입는 사람들이 나에게 안수하며 “주의 길을 가라”고 말했다. 나는 “아멘”으로 응답했다. 내 앞에 돌로 만든 아름다운 성이 보였는데 갑자기 갈라지며 와르르 무너졌다. ‘세상의 부와 영광, 권세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한순간에 무너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내가 목회자의 길을 가면 망설임 없이 뒷바라지하겠다고 했다. 신학교에 등록하고 주경야독했다. 사업을 그만둬 수입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내가 운영하는 분식집 수입으로 큰딸 지영이와 은만이, 상희를 돌보며 살아야 하니 그저 하나님만 의지해야 했다.


상희는 우리 집에 온 지 2개월이 지나자 상태가 조금씩 호전됐다.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는데 거짓말처럼 목을 혼자 세우고 “아빠 엄마”라고 말하며 움직였다.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는데 상희의 상태를 본 의사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병원에서는 전혀 치료가 안 됐는데요.”


나는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며 “저분(하나님)이 하신 거죠”라고 답했다. 의사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료시간이 끝난 후 의사가 나와 아내를 따로 불렀다. “병원에 장애 등의 문제가 있는 4명의 어린아이가 있는데 부모가 잠적해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네요. 목사님이 이 아이들을 거둬주셨으면 좋겠어요.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치료를 해 주겠습니다.”


기가 막혔다. 아내의 대답은 더 기가 막혔다. 아내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아내가 하겠다고 해 별말 없이 돌아왔지만, 이런 상황이 펼쳐지리라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보름 뒤 4명의 아이가 우리 집에 왔다. 하나님은 우리 부부에게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다. 누워있는 아이지만 정말 예뻤고 아이들만 보면 행복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신학 공부를 마치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의 미소에 우리 부부는 피곤함을 이겨낼 수 있었다. 병원도 아닌 좁은 방에 누워있는 6명의 장애인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의 방법으로 아이들을 돌보게 하셨다.


나는 그렇게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로 목회자가 될 수 있다니 감사했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14) 노아의 방주처럼… 산꼭대기 집으로 옮겨놓으신 주님


집주인의 방 빼라는 억지에 달동네로
이사 후 보니 전에 살던 집 폭우로 침수
신세 한탄하다 아내와 울면서 감사기도


이종락 목사가 2009년 9월 서울 관악구 난곡동 자택에서 아이들과 생일 파티를 하며 기도하고 있다.


나와 아내, 첫째 딸, 아들 은만이, 옆 병동 할머니가 맡기신 상희, 그리고 병원에서 온 4명의 장애 아이들…. 이제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우리 부부의 자녀이자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주님의 은혜로 오랜 시간 광야를 걸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신 하나님은 우리도 먹이셨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셨다.


물질이 부족해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크게 불편한 적은 없었다. 아이들을 굶긴 적은 하루 한 끼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감사했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감사할 수 있으리라.


하나님은 우리 집에 꾸준히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셨다. 생명이 위험한 아이들, 수술이 몇 차례 필요한 아이들이 있었지만 모두 수술을 시켰고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수술하지 못해 세상을 떠난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하루는 술을 마신 집주인이 소동을 부리며 갑자기 방을 빼달라고 했다. ‘무슨 돈이 있어 방을 구하겠는가. 지하방에서 아홉 명의 식구가 생활하는데….’ 난감했다. 주인은 며칠간 동네 사람들에게 거짓말과 비방, 욕설을 하며 우리를 힘들게 하고 다시 우리를 찾아와 더 심한 난동을 부렸다.


더 있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며칠 만에 여기저기서 꾼 돈으로 서울 난곡동 달동네로 이사했다. 아내는 분식집도 그만뒀다.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생겼을까.’ 마음이 무척 상했다.


월요일에 이사해야 하는데 전날 주일 오후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를 맞으며 이사한 달동네 집은 땅에서 습기가 올라오고 위에서는 비가 새는 곰팡이 투성이의 집이었다. ‘주님, 제게 왜 이러십니까.’ 한탄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튿날 아침, 라디오를 듣던 중 깜짝 놀랐다. 전날 폭우로 인해 둑이 터져 이사하기 전 동네가 순식간에 물에 잠겼다는 뉴스가 나왔다. 전에 살던 집에 갔더니 1층까지 완전히 잠겨 있었다. 전신마비였던 아이들과 그곳에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모두 이 세상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처럼 우리를 달랑 들어 산꼭대기 집으로 옮겨 놓으신 것이다. 전율이 느껴졌다. 달동네로 이사한 상황이 감사했다. 아내와 울면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주님, 우리 부부와 아이들을 죽음에서 피할 수 있도록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 앞길을 주님께만 의지합니다.”


얼마 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 교제하다 연락이 끊긴 지인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교헌금이 남았는데 어디에 사용해야 할지 몰라 기도하던 중 우리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분들이 보내주신 돈으로 집을 보수하고 아이들을 먹이며 입힐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15) 벅찬 환경에 1kg도 안 되는 칠삭둥이까지 떠맡아…


다운증후군으로 부모가 권리 포기한 아이
심장 수술 급한 데 3kg에 못 미쳐 발동동
주변 도움으로 한달 만에 체중 늘려 수술


이종락 목사의 수양아들 주은이가 최근 고등학교에서 받은 표창장을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사한 집은 아주 낡았다. 쥐가 많아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 위로 쥐가 뛰어다닐 정도였다. 개미도 많았다.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에겐 개미가 고역이었다. 아이들의 땀이 고이는 곳에 개미들이 떼로 몰려와 살을 물어뜯는 바람에 욕창도 종종 생겼다. 여기서 오래 살 순 없었다. ‘주님, 여기서 탈출하게 해 주십시오.’ 기도가 절로 나왔다.


달동네에서 장애인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키운다는 소문이 나자 봉사자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한 사회복지사가 KBS 프로그램 ‘사랑의 리퀘스트’에 우리 집 사연을 신청했다. 방송에 나오자 많은 분이 적지 않은 비용을 후원해주셨다. 주변의 많은 분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집을 구해 서울 난곡13동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2003년 3월 이사한 집에서 ‘주사랑공동체의 집’ 가정교회를 세웠다. 그해 10월 인근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부모들이 권리를 포기해 병원에서 지내는 아이를 데려가 돌봐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이가 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다.


당시 우리는 아이들을 더 받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죽게 둘 순 없었다. 간호사에게 연락해 아이를 바로 데려왔다. 아이는 칠삭둥이 다운증후군으로 몸무게가 채 1㎏이 안 됐다. 생명의 징후가 약했다. 아이를 데려온 날 밤에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나님, 살리려고 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살려주십시오.”


아이의 차가워진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산소를 공급해가며 주사기로 우유를 한 방울씩 먹였다. 생기가 돌았다.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119를 불러 대형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심장에 문제가 있어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몸무게가 3㎏ 이상이 돼야만 수술할 수 있다고 했다.


간절한 심정으로 의사에게 최선을 다해달라고 간청했다. 아이가 꼭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지만, 병원비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런 선택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는데 한 월간지 기자가 미숙아 관련 내용을 취재하러 왔다가 대상을 바꿔 나와 아이들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다. 그 기사가 실렸는데 그간의 병원비가 기적같이 충당됐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1.8㎏밖에 안 돼 수술할 수 없었다. 아이의 딱한 사연이 다른 병원 간호사에게 알려졌다. 서울 동대문의 한 병원 수간호사가 찾아와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치료하자고 제안했다. 그 병원에서 잘 돌봐주신 덕분에 아이는 한 달 만에 3㎏ 이상을 넘었고 심장병 수술을 무사히 받았다.


거의 8개월을 병원에서 지내다 보니 만만치 않은 병원비가 걱정됐다. 마침 권사였던 병원 과장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병원비를 모두 대납해줬다. 이후 아이는 건강하게 성장했다.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인데 며칠 전에는 학교에서 표창장도 받아왔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16) 하늘로 보낸 한나 그리며 아이들 부모 되기로 결심


무뇌증 장애로 6년 만에 세상 떠난 한나
주님 품에 안긴 환상 본 후 평안 얻어
그 일 계기로 장애아 모두 정식 입양


이종락 목사가 2001년 병원에서 데려온 한나를 돌보고 있다.


2001년 큰 병원의 사회복지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말 기구한 사연이었다. 14살짜리 중학생이 복잡한 가정사로 가출했다가 임신해 출산했다. 출산 중 여러 약물을 먹어서 그런지 아이는 무뇌증으로 태어났다. 오래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세상을 떠날 때까지라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축 처진 아이를 안고 데려왔다. 이름을 한나로 지었다.


한나는 우유도 잘 못 먹어 거의 2시간 만에 우유를 먹었다. 우리는 하루 12시간 가까이 아이를 안고 키웠다. 한나는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이렇게 6년간 키웠는데 어느 금요일 아침 한나는 우리 곁을 영영 떠났다.


“한나야, 한나야.” 한나를 보내며 대성통곡을 했다. 많이 사랑했고 정이 들어 떠나보내기 힘들었다. 한나를 하늘로 보낸 후 나는 우울증이 생겼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흘렀고, 위로를 얻고자 기도하고 말씀을 봐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2개월이 흐른 어느 날 운전하는데 한나가 너무 보고 싶었다. 심장이 저릴 정도로 간절했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내리자 운전대를 잡을 수 없어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한없이 울었다. 휴지로 눈물을 닦으려 하는데 차의 앞문 유리창에 환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래서 목을 앞으로 내밀어 유리창 위로 하늘을 쳐다봤다. 그렇게 보고 싶던 한나가 주님의 품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나가 참 행복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제가 너무 욕심을 냈습니다. 죄송합니다. 한나가 주님 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데…. 이제 한나를 보내겠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후 우울증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한나는 법적으로 내 딸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나의 아빠와 엄마, 언니와 오빠였는데 법적으로는 남남이었다. 나는 우리와 같이 사는 장애인 아이들을 입양하기로 했다.


입양하기 위해선 재판을 받아야 했다. 판사는 “왜 많은 장애 아이를 입양하시려는 거죠”라고 물었다. 나는 판사에게 “판사님, 아이들의 부모가 되기 위해 온 자리에 왜 입양하냐고 물으십니까. 아이들의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냐고 질문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판사는 얼굴이 빨개졌고 머쓱하게 나를 쳐다봤다. 3개월 후 나는 법적으로도 아이들의 아빠가 됐다. 아이들은 우리의 둘도 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자녀가 됐다.


‘이제 우리는 한 가족이고 내 사명은 많은 가족과 예배드리며 이들을 잘 돌보는 것이구나.’


그런 줄 알았다. 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2007년 4월 꽃샘추위가 있던 새벽 3시경 한 아빠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것이 베이비박스의 시작일 줄은 몰랐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17) 굴비상자에 아이 담아 교회 문 앞에 놓아두고는…
“아기 좀…” 한 남자 전화 받고 나가보니


파랗게 질린 다운증후군 여자아이
죄송하다는 쪽지와 함께 상자에 담겨


2007년 4월 주사랑공동체교회 앞에서 발견된 굴비 상자 안에 온유가 자고 있다.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장애로 인해 가정에서 돌볼 수 없거나 병원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아이들이 한두 명씩 주사랑공동체교회 장애인생활공동체로 모였다.


2007년 4월 꽃샘추위가 있던 어느 날 새벽 3시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로 바람 소리가 분명 들렸는데 1분 정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후… 목사님”이라 말하며 절망감에 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아기를 교회 앞에 데려다 놨습니다.” “아이를요? 지금이요?” “아니요. 한 20분 지났습니다. 이다음에… 이다음에…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는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대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여는데 고양이가 후다닥 달아났다. 깜짝 놀라 아래를 보는데 가로등에 희미하게 비친 종이상자와 까만 비닐봉지가 놓여있었다.


상자 속에는 얼굴빛이 파랗게 된 아기가 있었다. 아내에게 얘기해 사진기를 가져오라고 한 뒤 사진을 찍고 아이가 담긴 상자째로 안방에 옮겼다.


냄새가 진동했다. 굴비를 담았던 상자였다. 냄새를 맡은 고양이가 상자를 열기 위해 애를 썼던 발톱 자국이 선명했다. 더 지체됐더라면 큰일 났을 거란 생각에 온몸이 오싹했다. 까만 비닐봉지에는 우유병 한 개와 다섯 개의 기저귀가 들어 있었다.


상자 안에는 배냇저고리에 둘러싸인 아기뿐 아니라 ‘죄송합니다’라고 적힌 한 장의 메모지가 있었다. 배냇저고리를 벗겨내니 탯줄 끝에 집게가 집혀있었다. 다운증후군 장애가 있는 여자아이였다. 나와 아내는 목놓아 울며 기도했다. 그랬더니 아이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내는 생기를 찾은 아이를 위해 곧바로 젖병에 우유를 타서 아이의 입에 물렸다. 아이는 배가 고팠는지 젖병을 힘껏 빨기 시작했지만, 우유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젖병의 우유가 사라질 때쯤 아기는 내 품에서 소곤소곤 자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부부에겐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이의 이름을 온유라 지었다. 온유는 가슴으로 낳은 내 친자녀가 됐다. 온유는 다운증후군으로 가끔 병원에 다녀야 하지만, 건강하게 잘 성장하고 있다.


온유가 발견된 후 옆집 주차장과 공중전화 박스, 공원 입구 등에서 장애 아기들이 발견됐다. 사회복지시설이 아닌데도 경찰관까지 아기를 안고 찾아왔다.


‘이러다 자칫 대문 밖에서 아기들이 사체로 발견되면 어떡하지. 하나님, 이 아이들을 지킬 수 있도록 지혜를 허락해주세요.’


온유를 발견하고 1년이 된 어느 날 국민일보를 보는데 눈에 띄는 기사 제목이 있었다. 체코의 베이비박스 기사였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18) 어느 날부터 아기들이 울부짖는 환청에 시달려…


병원선 이상 없다는데 계속 또렷하게 들려
아이들 살리라는 주님의 명령임을 깨닫고
체코 베이비박스 벤치마킹 교회 벽에 설치


이종락 목사(왼쪽)가 2009년 12월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 앞에서 베이비박스 설치를 돕고 있다.


어느 날부터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기들의 서글픈 울음소리였다. 낙태로 인해 몸부림치며 고통 중에 죽어가는 아이들의 소리, 아무도 없는 곳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아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환청 치료와 아이들의 검사를 위해 병원을 방문했다. 병원에선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내게는 또렷하게 들려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은 ‘말할 수 없는 아이들의 대변인이 돼라. 이 아이들을 살리라’는 명령이었다.


병원의 인큐베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저걸 응용하면 되겠구나.’ 국민일보에서 체코의 베이비박스 기사를 본 건 며칠 후였다. 기자에게 연락해 현지 이메일 주소를 알아냈다. 베이비박스를 수입할 수 있는지, 안되면 도면이라도 구할 수 있는지 수차례 연락했지만, 답장이 없었다. 낙심이 컸다.


주님이 주시는 생각과 지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에서 문을 열어 아기를 보호하고 맞은편에서도 아이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양쪽으로 문을 만들고, 안에는 아이의 체온을 보호하도록 온도를 유지하고 문을 열면 소리가 나도록 해야겠다. 카메라를 설치해 아기가 들어왔는지 봐야겠다.’


친구 중 철공 일을 하는 집사가 있었다. 나는 구상한 대로 그림을 그려 친구 집사에게 베이비박스 제작을 부탁했다. 친구는 2주 뒤 설계도 초안을 만들었다. 몇 차례 보강을 한 뒤 2009년 12월 베이비박스가 교회 벽에 만들어졌다. 가로 70㎝, 세로 60㎝, 폭 45㎝ 크기였다.


“하나님,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버려져 죽지 않게 해주세요. 베이비박스에 아이들이 들어오지 않게 해주세요. 다만 베이비박스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하나님께서 살려주십시오.”


이후 3개월간 베이비박스에 아기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종종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호기심으로 여는 바람에 초인종 소리가 나 확인했지만, 아기가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2010년 3월 어느 날 갑자기 베이비박스 벨이 울렸다. 베이비박스로 다가가는데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작은 수건으로 배꼽만 살짝 덮었는데 탯줄이 그대로 있는 아기였다.


온몸이 오싹하고 떨렸다. 아내와 자원봉사자들은 아기를 보자마자 대성통곡했다. 나는 봉사자들을 다독였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베이비박스를 통해 살리셨어요. 이 세상 죄악의 물에 떠내려오는 아이를 모세처럼 베이비박스로 건지셨어요. 오늘부터 이 아이의 이름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스러운 아기로 건강히 성장했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19) 아기 놓고 간 미혼모 “우리 아기 잘 있나요” 울며 전화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는 친부모
상담 통해 아이 키울 수 있도록 돕고
양육 환경 어려울 땐 경제적 지원도


이종락 목사가 2012년 8월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에서 아기들을 돌보고 있다.


베이비박스를 통해 첫아기 모세를 만난 며칠 뒤, 다운증후군 장애아기가 보호됐다. 베이비박스가 위기 임신으로 태어난 아기들과 장애 아기들을 보호한다는 소문이 났다. 당시 월 2~3명의 아기가 보호됐다.


베이비박스 벨이 울리면 곧바로 사진을 찍고 아이의 건강 상태를 확인한 뒤 112에 연락해 미아신고를 했다. 경찰들은 아기의 DNA를 채취하고 구청에 연락해 아기 보호를 요청했다. 구청은 난감해하면서 한 달이 돼야 아기를 데려갔다.


어느 날 새벽 3시, 아기를 놓고 간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술에 취한 목소리였고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목사님, 우리 아기 잘 있나요. 좋은 부모 만났나요.”


나는 ‘아이의 친부모가 죄책감으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해 2011년부터 아기를 놓고 간 부모를 어떻게든 만나기로 했다.


어느 날 새벽 2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새벽에도 아기를 돌보던 아내는 바로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기를 살피러 갔다. 나는 밖으로 나가 급히 자리를 떠나려 하는 엄마를 불러 세웠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면 엄마도 죄책감에 힘든 세월을 보냅니다. 저와 얘기 좀 하시죠.”


아기 엄마는 교회 사무실로 들어왔다. 나는 힘든 결정을 왜 하게 됐는지 물었다. 엄마는 10대 미혼모였다. “아기 친아빠는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도망갔어요.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하고 부모님도 모르세요. 아시면 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


아기 엄마는 3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사연을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사연이 너무 안타깝고 슬퍼서 같이 눈물을 흘렸다. 사무실 창밖으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엄마의 표정을 보니 처음 왔을 때보다 한결 편해 보였다. 내가 “아기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요”라고 묻자, 엄마는 “전 해줄 게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답했다.


“기도하는 엄마는 돼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기 엄마와 영접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친 엄마는 “목사님, 혹시 아기 키워주실 수 있나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년만 키워주시면 제가 꼭 데리러 올게요”라고 말했다.


1년 뒤 아기 엄마는 약속대로 아기를 데리러 왔다. 정말 기뻤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기 엄마가 자립해 아기를 키울 수 있도록 3년간 양육 키트와 생활비를 보내줬다.


한국형 베이비박스의 시작이었다. 아이의 보호를 넘어 아이 부모를 만나 상담을 통해 아이를 키울 수 있게 했다. 양육 환경이 어렵다면 상황에 따라 일정 기간 경제적 지원을 한다. 베이비박스에 온 아기를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일, 그 사명이 내겐 막중했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20) 베이비박스 알려지자 아기들 늘어… 봉사자 도움 절실


방송 보도 후 아픈 아이들 많이 들어와, 대부분 수술 필요… 익명 후원에 큰 감동


자원봉사자들이 2013년 4월 경기도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베이비박스 아이들과 야외활동을 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베이비박스에 보호되는 아기들이 늘어나면서 아기를 돌봐 줄 이들의 손길이 절실해졌다. 동시에 여러 아이를 돌보다 보니 우리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 국민일보 직원들이 2년간 봉사활동을 했는데 하루는 동료 기자를 데려와 베이비박스의 존재를 취재해 알렸다. 이를 계기로 공중파 방송에도 보도됐다. 봉사자들이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2009년 12월 베이비박스를 설치한 뒤 1~2년간 장애 아동이나 위기 임신으로 인해 아픈 아이들이 베이비박스에 많이 들어왔다. 아이들은 대부분 수술이 필요한 상태였다. 한 아이는 큰 수술만 16번 이상 할 정도였다. 비싼 수술비는 오롯이 우리가 감당할 몫이었다. 수술이 끝난 뒤 병원의 수납 창구에 가는 건 쉬운 걸음이 아니었다.


하루는 병원비가 얼마나 나왔는지 물으러 갔더니 병원 직원이 “완납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럴 리 없다며 다시 확인해달라고 했더니 직원은 “아니에요. 누군가가 계산해주셨네요”라고 말했다.


어떤 날은 교회 입구 계단에서 후원금이 들어있는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에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는 말씀이 적혀 있었다. 우리 부부는 울음을 터트렸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이 광야에서 생수와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신 것처럼 우리 공동체도 먹이고 입히시는구나.”


이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수없이 느꼈고, 돕는 분들의 아름다운 마음에 감격한 일들이 참 많았다. 때론 마음 아픈 일들도 있었다.


2012년 8월 어느 날 낮 2시쯤 베이비박스에 벨이 울렸다. 2시간 후 또 다른 벨이 울렸고 저녁에 또 벨이 울렸다. 하루에 3명의 아기가 들어온 것이다. 보육방에서 갑자기 15명의 아기를 돌봐야 했다. 그때까지는 한 달에 2~3명의 아기를 돌봤는데 8월부터 23명의 아기를 봐야 했다.


자원봉사자로도 부족했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안하게도 직장에 잘 다니는 딸 지영이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딸은 아빠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울면서 직장을 그만뒀지만, 다행히 아이들을 친동생처럼 잘 돌봐줬다. ‘우선 아기부터 살리자’는 마음이 앞서 이런 부탁을 했는데 지금까지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


세상 소식을 들여다볼 틈이 없는 시간을 보내다 잠깐 신문을 보니 입양특례법으로 인해 아이들이 밖에서 많이 버려진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2011년 개정된 입양특례법은 출생신고제를 강제하면서 피치 못할 사정을 가진 생모들이 본인과 아이의 생명을 두고 낙태나 출산 후 유기 등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다는 지적을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아 지인들에게 물어보며 이 법에 대해 알아봤다. ‘인권을 외친다는 법안이 오히려 아기들의 생명을 위협하는구나.’ 이 기사가 베이비박스에 새로운 파도를 몰고 올 것처럼 보였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21) 방송사 토론 참석 “인권·법보다 소중한 건 생명” 열변


출생신고 강제하는 입양특례법 생긴 후 베이비박스 찾는 미혼모들 급증


시민들이 2013년 6월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생명, 베이비박스가 지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생명운동 행진을 하고 있다.


입양특례법은 출생신고를 강제하는 법으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입양도 할 수 없게 했다. 이 법이 2012년 8월 시행되자 출생신고를 할 수 없는 미혼모들이 아기를 안고 베이비박스를 찾았는데 그 수가 급격히 늘었다. 수십 명에서 수백 명으로 계속 늘어가니 정신이 없었다.


이들은 대부분 10대 미혼모였다. 외국인 불법체류 노동자, 강간 피해자 등 저마다 아픈 사연이 많았다. 거의 하루에 한 명씩 아기들이 베이비박스에 들어왔다. 아픈 사연들이 내 마음을 후벼팠다. 마음이 너무 괴롭고 슬퍼 우울증이 생길 정도였다.


입양특례법이 제정된 후 베이비박스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베이비박스가 아기 유기를 조장한다는 논리였다. 나는 그저 아기들의 생명을 돌보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단체가 베이비박스 앞에서 팻말을 들고 ‘베이비박스는 아기 유기를 조장한다’고 시위했다. 나는 그분들에게 “뭐라 안 할 테니 들어와서 식사라도 하고 시위해라”고 말했다. 그분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다 진심을 느껴졌는지 눈치 보며 하나둘씩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같이 밥을 먹으며 대화하니 그들은 대부분 미혼모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이들을 홀로 키우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정말 이곳이 아기 유기를 조장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한 엄마가 답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며칠 시위하면서 봤는데 아니네요. 죽을 수밖에 없는 아기를 살리고 보호하고 계셨네요. 다시 시위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그들과 자녀를 위해 축복기도를 한 뒤 돌려보냈다. 이후엔 시위가 없었다.


한 방송사의 토론회에 초청받았다. ‘베이비박스, 유기를 조장하는가’라는 주제였다. ‘그래, 베이비박스가 유기를 조장한다고 하는 이들의 말이나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참석했다.


토론장에는 법조인, 교수, 정부 관계자 등이 입양특례법의 긍정적 변화, 인권, 관련 법, 통계, 이념 등을 설명하며 ‘베이비박스는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었다. 토론회에 참석한 관객들도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내 마음에 와닿는 건 한 가지도 없었다.


내 차례가 돼 입을 열었다. “왜 생명에 대해선 말을 안 하시죠. 생명이 법보다 인권보다 중요하지 않나요. 옆집에 불나면 119에 신고하고, 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건져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생명이 있어야 인권도 법도 있는 거 아닌가요”


몇 초간 적막이 흐르고 조용해졌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참석한 분들과 한 가지는 공감합니다. 베이비박스에 아기가 들어오지 않길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저는 소중한 아기의 생명과 베이비박스에 온 미혼모를 지킬 테니 토론회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안전하게 아기를 키울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주세요.”


아무도 내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입양특례법으로 생긴 영아 유기 문제를 베이비박스가 해결해주고 있다’는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22) 미 젊은 감독, 탯줄 단 채 베이비박스에 담긴 아기 보더니…


졸업작품에 담고 싶다고 촬영 왔다가
울면서 “제대로 된 다큐 영화 찍겠다”
주 영접하고 기독영화 제작 감독으로


이종락 목사(왼쪽)가 2014년 7월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 사무실에서 베이비박스를 촬영한 브라이언 아이비 감독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4년 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 재학 중인 브라이언 아이비라는 젊은 감독으로부터 이메일로 연락이 왔다. 한국 주사랑공동체 베이비박스를 촬영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월평균 20명의 아기가 베이비박스에 보호되던 터라 메일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몇 주 뒤 스태프에게 전화가 왔다. 한국교포 자매인 세라라는 크리스천이었다. 아이비 감독이 학교 식당에서 LA타임스에 소개된 베이비박스 보도를 접하고 졸업작품으로 촬영하고 싶다고 했다.


거절했다. 한국의 아름다운 소재를 촬영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세라 자매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촬영을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린다고 했다. 한창 꿈을 펼칠 젊은 감독과 스태프였기에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어 촬영을 허락했다. 무슨 영문인지 한 달을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알고 보니 카메라 장비도 없었고 항공권 숙박비 등도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았다.


미국 장애인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세라 어머니는 어느 날 한국에서 촬영한다는 딸이 걱정돼 점심 기도를 길게 드렸다고 한다. 옆 테이블의 여성이 “한국인은 식기도 때 그렇게 길게 기도하냐”고 물었다. 세라 어머니는 딸의 사정을 말했다.


세라 어머니의 연락처를 받아간 여성은 자신의 남편이 카메라렌즈 회사 회장인데 아직 출품되지 않은 2억원 상당의 영상촬영 카메라를 후원하겠다고 했다. 세라 어머니가 다니던 한인교회는 세라 자매가 베이비박스를 촬영한다는 내용을 듣고 2억원을 촬영팀에게 후원했다.


기적과 같은 도움으로 아이비 감독과 세라 자매, 스태프 등 13명이 한국에 입국해 베이비박스를 촬영했다. 아이비 감독은 탯줄을 달고 베이비박스에 들어오는 아기를 보더니 자리에 덜컥 앉으며 울면서 내게 말했다.


“목사님, 허락하시면 졸업작품이 아닌 제대로 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싶습니다. 저는 이전에 마약과 술에 찌들어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목사님처럼 생명을 살리고 예수님을 믿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나는 감독의 손을 잡고 영접 기도를 했다. 이 기도는 그를 기독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으로 만들었다. 1년간 촬영된 영화는 2015년 4월 80분 분량의 ‘더 드롭 박스’(The Drop Box)란 제목으로 캐나다 등지의 1000여개 극장에서 동시 상영됐다. 첫째 날부터 매진행렬에 앙코르 상영까지 했다. 지금까지 1800만여명이 영화를 관람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국제영화제에서 7개 부문을 수상했다. 미국 주요 방송국과 언론사도 대서특필했다. 영화 판권을 가진 미국 가정사역단체 ‘포커스 온 더 패밀리’(Focus on the Family)는 영화 수익의 일부로 우리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는 건물을 마련해줬다. 그 도움으로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에는 베이비박스만 남겨두고, 18명의 장애인 자녀들과 새 거처를 마련해 서울 금천구로 이사했다. 생각지도 않은 일, 계획에도 없던 모든 일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23) 비밀출산법 도입해야 미혼모·아기 다 살릴 수 있어


가명으로 병원에서 출생신고 하고
바로 입양할 수 있도록 한 비밀출산법
미혼모가 키울 경우 양육비도 제공


이종락 목사가 2013년 10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입양특례법 재개정을 위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2012년 8월 시행된 입양특례법으로 많은 미혼모 아기들이 베이비박스에 오게 됐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입양특례법으로 생긴 문제에 대한 후속 조치나 보완 입법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법을 강화하려 했다.


베이비박스에 오는 미혼 부모 98% 이상을 만나 상담한다. 아기가 입양돼 가정에서 아기를 키울 수 있도록 설득한다. 그러나 출생신고가 없으면 대부분 시설에서 자라야 한다. 입양특례법이 가정 보호가 아닌 시설 보호를 부추긴 셈이다.


이로 인해 입양이 80%나 줄었다는 학계 보고서도 나왔다. 반면 시설의 아기들은 80% 이상 증가했다. 시설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동은 가정에서 자라야 행복하다.


한 해 미혼모 200명 이상을 상담하는데 출생신고가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찌 이들의 눈물을 국가가 외면하는지 참으로 안타까웠다. 위기 미혼모와 아기들의 대변인이 되기 위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입양특례법 재개정을 위한 1인 시위를 했다. 내게 악수를 청하며 관심을 보이는 국회의원도 있었지만, 그때뿐이었다.


고군분투하다 태아 생명운동을 하는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이명진 소장과 인연이 닿았다. 이 소장이 내게 법률 전문가들을 소개해줘 비밀출산법의 골자를 만들 수 있었다. 2018년 4월 ‘미혼모지원 확대와 비밀출산에 관한 특별법’(비밀출산법)이 발의됐다. 비밀출산법은 주사랑공동체의 베이비박스 운영 경험 전체를 반영한 법이다.


그달 일본 구마모토에서는 자혜병원 주최로 최초의 세계베이비박스 심포지엄이 열렸다.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12개국에서 참여했는데 한국 주사랑공동체 베이비박스가 높은 관심을 받았다. 비밀출산법을 소개했더니 선진국의 좋은 법들만 모아 만들었다고 칭찬했다.


비밀출산법은 위기 임신으로 인해 아기를 키울 수 없는 경우, 가명으로 병원에서 출생신고를 해 바로 입양할 수 있게 한 법이다. 엄마가 직접 아기를 키운다고 하면 양육비를 제공하고 자립을 지원한다. 아기만 낳고 도망간 아버지를 끝까지 찾아 양육비를 지원하지 않으면, 운전면허증과 여권을 취소하고 월급까지 압류한다. 20대 국회에서는 통과하지 못해 지난해 12월 1일 ‘보호출산법’으로 21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했다.


지난해 2월 베이비박스를 포함한 입양·학부모·미혼부부 단체 등과 함께 ‘지켜진 아동의 가정보호 최우선 조치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회는 보호출산법 통과를 위해 한목소리를 외치고 있다. 이전에는 입양특례법 재개정과 비밀출산법 통과를 홀로 힘들게 외쳤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이 함께해준다. 애굽에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라는 명령을 받은 모세를 위해 하나님께서 말에 능한 모세의 형 아론을 예비하신 것처럼 말이다.


언제까지 이 험난한 고개를 넘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그러하듯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신 일이기에 나는 그저 기도하고 말씀에 준행할 뿐이다.


***[역경의 열매] 이종락 (24) ‘베이비박스’ 있게 한 은만이… 33세에 주님 곁으로


전신마비로 평생 침상서 지내다 암 진단
아들 통해 완악했던 마음에 긍휼함 생겨
아픈 자녀 보살피는 부모 마음 알게 돼


이종락 목사(앞줄 왼쪽 첫 번째)와 가족, 동역자들이 2019년 8월 14일 경기도 군포 G샘병원에서 임종 직전의 은만이를 붙들고 기도하고 있다.


주사랑공동체 사역들은 내 아들 은만이로부터 시작됐다. 왼쪽 볼에 임파선 혹을 갖고 태어난 은만이는 생후 4개월 만에 바이러스가 뇌로 전이됐다. 아들은 33년간 전신 마비로 침상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아빠 엄마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고 움직일 자유도 없었다.


은만이를 통해 완악했던 내 마음에 긍휼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평생 병상에서 아픈 자녀를 간호하는 부모의 마음, 아기만은 살리고자 하혈하면서도 달동네에 있는 베이비박스까지 오게 된 엄마의 심정은 바로 내 마음이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은만이와 30여년을 행복하게 살았다. 32세가 되던 2019년 2월 은만이는 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전신 마비로 양다리가 좌우로 뻗어있어 정밀 검사가 불가능했다. 은만이는 몸이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없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고통을 대신할 수 없어 마음이 찢어지고 아팠다.


의사는 하나님께서 은만이를 부르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몇 개월 후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은만이의 숨이 채 몇 분 남지 않았다고 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나는 2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서 공동체 일을 보고 있었다. 사무국장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운전대를 잡았다. 뒷좌석에서 울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은만아, 조금만 기다려다오. 주님, 아들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해 주세요. 은만아 안 돼.’


다행히 우리는 은만이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은만이의 눈을 마주하고 기도하면서 입맞춤으로 은만이를 주님께 보냈다. 주님의 품 안에 안겼는지 은만이는 천사의 미소를 지으며 2019년 8월 14일 33세 나이로 우리 가족에서 주님의 가족이 됐다.


온몸으로 눈물을 흘리는 동안 등 뒤에서 따뜻하게 나를 위로하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제 됐다. 사랑하는 은만이를 직접 품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


은만이는 어디 내놔도 사랑스러운 소중한 내 아들이었다. 주님께 보내고서야 알았다. 우리가 은만이를 돌본 것이 아니라, 은만이로 인해 내 완악한 인격이 변했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지금까지 내 삶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다. 고백했지만, 나는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 내게 주어진 소중했던 선물 은만이, 나를 믿고 지지해준 아내와 큰딸 지영이, 무엇보다 나는 그런 길을 계획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길로 인내하시고 내가 약할 때 새로운 길로 이끌어주신 하나님이 다 하셨다.


지금도 종종 사랑하는 아들 은만이가 사무치게 보고 싶다. 그러나 은만이를 통해 아직 내게 남겨진 일을 다른 은만이들을 위해서라도 멈출 수 없다. 은만이와 다시 만날 날을 소망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묵묵히 가고자 한다.


‘은만아, 아빠와 엄마는 네가 우리에게 와줘서 고마웠어. 사랑한다. 보고 싶다. 내 아들 은만아.’


***[역경의 열매] 이종락 (25·끝)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주님 뜻따라 생명 지킬 것


2009년 12월 베이비박스 설치된 후
1853명의 아기와 미혼모들 보호 받아
약한 자들 보듬는 사명에 더욱 매진


이종락 목사가 지난 10일 서울 관악구 난곡로 주사랑공동체교회 사무실에 있는 베이비박스 모형 앞에서 환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신석현 인턴기자


그동안 하나님께 받은 큰 은혜를 바쁜 현실에 매어 잊고 살았다. 그러다 국민일보 역경의열매를 연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주님이 맡기신 사명에 대해 좋은 열매를 맺어야겠다는 경각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첫사랑을 회복하고 주님을 대하듯 약한 자들을 보듬는 일에 더욱 매진할 것이다.


역경의열매가 보도되는 동안 많은 이들에게 격려의 전화와 편지, 메일을 받았다. 어떤 분은 신앙생활을 하다 세상에 시험이 들어 마음이 황폐해졌는데 주님께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오래전 알았던 한 친구는 “내가 자네의 믿음을 보고 주님께 돌아왔네”라고 고백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2009년 12월 베이비박스가 설치된 후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1853명의 아기가 보호됐다. 미혼모 아기들이 베이비박스에 와서 안전하게 보호받을 때 가슴이 저리고 아프면서도 생명을 살렸다는 데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보호하려고 왔다가 상담을 통해 주님을 영접하고 마음을 바꿔 다시 아기를 키우기로 한 미혼모의 모습을 볼 때는 가장 감사하고 뿌듯했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3일 한 미혼모가 베이비박스까지 왔으나 작동 방법을 몰라 아이를 공사 자재 더미의 드럼통 위에 아기를 놓고 가 아이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일이 있었다. 억장이 무너지고 마음이 아팠다. 지금 그 미혼모를 만나 위로하고 돕고 있다.


최근 한 자원봉사자가 베이비박스에 보호된 아기를 학대한 사건에도 마음이 무너지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이때 정말 힘들었다. 베이비박스는 항상 손이 모자라 자원봉사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다. 다행히 아이는 건강하고 무사했지만, 다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선한 마음으로 오신 자원봉사자들에게 피해가 없길 바란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기들을 돌볼 것이다.


세상의 법은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생명을 하찮게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생명을 해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 생명을 살리는 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 모두 하나님의 뜻이다. 한 생명이 존중하고 축복받으며 사랑받는 생명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태어난 생명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국민일보는 저에게 고마운 언론사이자 동역자다. 베이비박스도 국민일보가 소개한 체코의 베이비박스를 통해 용기를 내 만들 수 있었다. 주사랑공동체의 베이비박스 사역도 국민일보를 통해 처음 소개됐다. 역경의열매에 부족한 종이 소개돼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린다. 앞으로도 겸손하게 맡겨진 사명에 더욱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겠다.

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