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이에스더 (1-18) 일가 친척 ‘목회자 150여명’ 은혜 주신 하나님

열려라 에바다 2023. 8. 24. 15:55

 

***간증: 1343.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1-18) 일가 친척 ‘목회자 150여명’ 은혜 주신 하나님

 

내 고향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 주님, 어린 소녀에게 소임 맡길 시험을

 

원장으로 있는 서울 홍제동 요나3일영성원 개인기도실 앞에서 단식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에스더 목사. 그는 기도의 기적에 대해 늘 강조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오늘도 어김없이 동네 수영장을 찾았다. 직선거리 25m인 수영장을 정확히 50회 왕복하면 1250m가 된다. 보통 1시간10분이 소요되는 이 수영은 숨도 가쁘고 힘들지만 건강을 위해 주일 외엔 하루도 거르지 않는 나의 일과가 되었다.  

 

주위에서는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것이 내가 아직 현장에서 왕성한 사역을 펼치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이 말에 공감한다. 하나님의 종은 사명자로서 자신을 잘 가꾸고 또 건강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더 역동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내 나이 69세.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온 세월이다. 숱한 희로애락과 거친 파도를 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은 나와 함께해주시며 힘과 용기, 은혜와 능력을 주셨다. 내 삶에 좌정해 역사해 주신 좋으신 주님을 두 손 들어 찬양한다. 연약하기만 했던 한 홀사모에게 주신 주님의 강력한 은혜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만들어냈고 이제 그 간증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내 고향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이다. 서양 선교사에 의해 증조부부터 복음을 받아들여 난 출생부터 이미 4대 신앙인이었다. 우리 집안이 얼마나 신앙의 뿌리가 깊었는가 하는 것은 아들로 태어나면 목사가 되거나 장로가 되고, 또 딸로 태어나면 사모가 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가풍으로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우리 집안의 일가친척까지 목사가 된 분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니 무려 150여명이나 되었다. 조부도 목회자(이상기 목사)셨고 선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다. 외가 친가가 다 독실한 기독교 가계(家系)였다.

 

둘째 딸인 나는 할머니의 낭랑한 기도 소리를 언제나 자장가처럼 들으며 성장했다. 새벽기도도 할머니의 등에 업혀 빠짐없이 참석했다. 할머니는 강대상에 호롱불을 켜 놓으시고 잠든 나를 무릎에 누인 채 기도하셨다. 

 

5살 때 6·25가 일어났다. 우리 가족도 평양 큰집을 버리고 남한으로 피란길에 나섰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든 멀고 먼 길이었지만 우린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걷고 또 걸어 경북 김천에서 얼마 안떨어진 종산골이란 곳에 안착했다. 영양실조에 너무나 힘이 들었던 나는 형체만 겨우 알아보는, 눈이 안 보이는 실명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의사에게 가볼 수도 없는 가난한 형편에 부모님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주님. 이 딸의 눈을 치료해주세요.” 간절한 부모님의 기도는 기적을 일으켜 시력이 회복됐고 다른 어린이들과 다름없이 뛰놀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당시 설교하던 외국인 선교사 특유의 말투를 곧잘 흉내내 어른들을 배꼽 잡게 만들곤 했다. 그때부터 예능에 자질을 보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씩씩하게 길가로 나가 전도지를 돌리며 전도를 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내가 신앙인으로서 제대로 하나님을 만난 것은 중학교 시절,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결교단 임영재 목사님을 통해서였다. 부흥사셨던 임 목사님은 영적 카리스마도 대단했지만 포용력과 자상함으로 목회자의 본을 보여주심으로 나의 신앙이 바르게 뿌리내리는 데 큰 도움을 주셨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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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46년 평양 출생. 중앙총회신학교 졸업. 민족복음화운동본부 여성강사단장 및 국제단식기도원 원장 역임. 현재 요나3일영성원 원장. 홀사모선교회 회장. CTS CBS 방송설교. 저서 ‘주님 한손만 잡아 주소서’ ‘행복한 기도대장’ ‘3일 기도의 기적’ 등.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2) 나를 10번 찍어 반려자로 삼은 장경환 전도사

 

“절대 목사에겐 시집 안간다”던 나를 믿음의 남편 통해 주님의 종 만드셔

 

목사가 되어 왕성하게 사역하던 어느 날, 영적 멘토인 고 임영재 목사님 부부를 모시고 식사 접대를 했다. 왼쪽이 이에스더 목사.중학교 때 금요철야예배 시간에 성령을 체험하고 깊은 회개기도 가운데 방언까지 하게 된 나는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성령의 불을 받으니 내가 죄인인 것이 인정되고 회개가 터져 밤새도록 기도해도 시간가는 줄 몰랐다. 거듭남의 체험은 기쁨과 감사, 은혜를 충만하게 했다. 깊은 기도는 은사로 이어졌고 어린 나이임에도 영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목회자는 가난한 것이 당연했던 때였다. 후줄근한 옷에 비쩍 마른 몸에 성경책만 옆에 끼고 다니는 모습은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사모만큼은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반면 코쟁이로 불리는 외국 선교사들이 멋진 옷에 지프를 타고 우리가 보지도 못한 서양음식을 먹는 것이 부러웠다. 차라리 미국사람에게 시집 가 좋은 옷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머님의 오랜 지병으로 인해 집안 살림을 도맡았고 이를 야무지게 잘해 동네 어른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오랜 투병 중에도 기도생활은 철저하게 하셨는데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신유를 체험하시고 병을 이겨내셨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걸스카우트 대원으로 봉사했고, 대학에서 발레를 전공해 고등학교 발레 교사가 되었다. 난 집안의 영향으로 신앙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목회자 사모가 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느 날 한 기도원 집회에 참석한 어머니는 한신대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봉직하고 있는 한 청년을 만나 사윗감으로 점찍으셨다. 열정적이고 용모도 뛰어난 이 장경환 전도사에게 나를 시집보내고픈 마음이 드셨던 것이다.  

 

“내가 봐둔 전도사와 선을 보기로 했으니 그리 알아라.” 

 

“엄마. 난 절대로 목사에겐 시집 안 가요. 딸을 평생 고생시키려고 하세요? 생활능력도 없는 가난한 전도사 전 싫어요.” 

 

어머니는 양가 어머니들이 선을 보기로 약속은 했지만 내가 워낙 단호하게 거절하자 아주 난처한 상황이 됐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교회의 믿음 좋은 처녀를 딸이라고 하고 맞선 자리에 나가게 했는데 결국 들통이 나고 말았다. 

 

그 전도사는 포기하지 않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불쑥 찾아왔다. 매스게임을 지도하던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워 아주 쌀쌀맞게 대하고 돌려보냈는데 그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집요하게 구애를 해왔다. 나는 정식으로 맞선을 보겠다고 한 뒤 일부러 짧은 치마를 입고 한껏 멋을 내고 나갔다. 내가 사모감으로 적절치 않다고 그쪽 어머니에게 보이고 포기시키려는 작전이었다. 어머니는 예상대로 아니라고 손을 저었지만 장 전도사는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은 맞는 말이었다. 나를 위한 열정적인 구혼에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고 나는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 YMCA회관에서 예배 형식으로 드린 결혼식에서 나는 과감한 초미니드레스를 입어 하객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나는 그토록 목회자와는 결혼 안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나의 길을 예비해 서서히 당신의 종으로 쓰기 위한 준비를 하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난 결국 우리 집안의 가풍대로 목회자 아내가 되었고 남편은 경기도 파주 탄현면의 25평 정도 작은 교회에 첫 부임을 했다. 초가집 사택이 딸린 이 교회는 임진강이 한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한 달 목회자 사례비가 쌀 두 말에 보리 한 말, 현찰 2만원이 전부였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3) 남편, 죽는 날까지 목회·기도… 홀사모가 되다

 

“4명의 자녀와 저를 책임져 주세요” 눈물 기도에 목회자의 길 소명 받아

 

목사 안수를 받고 있는 이에스더 목사.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야간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한 뒤 목회 일선에 나서게 된다.고교시절 난 전국 행사인 남원 춘향이로 뽑히기도 했고 미스코리아에 출전했다가 지역 결선에서 어머니에 의해 단상에서 끌려 내려오기도 했다. 한때 영화 촬영까지 하다 부모님의 반대로 중단할 만큼 외모에는 자신이 있었고 여기에 발레까지 전공해 몸매도 빠지지 않았다. 

 

나는 눈이 높을 만큼 높았고 자존심도 무척 셌다. 그리고 절대 목회자와 결혼 안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 목회자 사모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센 기도를 당해낼 수 없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시골에서 갇혀 지내려니 매우 갑갑했다. 

 

남편은 사회도 잘 보고 영어와 음악 실력도 뛰어난 다재다능한 목회자였다. 목회엔 정말 열심이었는데 형편이 어려우니 난 가계를 돕느라 다시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발레 레슨을 했다. 남편이 속한 장로교(기장)는 교단에서 정해주는 목회지로 가야 했다. 문산에서 다시 김제로 갔다가 안양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을 때였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지나치게 무리하며 목회하던 남편이 갑자기 소회가 안 되고 혈압이 높아지는 이상증세로 힘들어했다. 목회는 점점 자리를 잡고 성도는 느는데 남편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난 일단 학교 근무를 중단하고 간병에 매달렸다. 그런데 남편은 병약한 몸을 외면한 채 40일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이를 시작했다.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나는 남편을 살려 달라고 주님께 뜨겁게 부르짖었지만 결국 남편은 소천하셨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마음의 상처와 고통은 엄청났다. 이어진 현실도 암담했다. 당시 난 네 자녀를 두었다. 맏이가 중학교 3학년 그리고 둘째가 중학교 1학년, 둘 다 딸이었다. 그 밑에 2년 터울로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 아들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목회자 남편이 소천하면 사모와 아이들은 대책 없이 사택을 비워주고 나가야 했다. 전셋집이라도 하나 얻어주는 배려나 일정 기간의 생활비 지원도 전혀 없었다. 이때 난 홀사모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후 내가 목사가 되고 안정을 찾으면서 홀사모 돕기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직접 체험해 보아야 그 아픔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을 책임져 달라고 눈물을 뿌리며 기도했다. 그런데 기도하면 할수록 남편이 못다한 목회를 내가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솟았다. 이것은 개인 의지가 아닌 성령의 명령이었다. 

 

나는 당시 서울 청파동에 있던 대한신학교를 찾아 야간에 신학 공부를 하고 낮에는 교회 사역을 하며 아이들을 양육했다. 여성 목회자를 처음 배출한 중앙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막상 목회 일선에 나서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편 친구와 아는 분들이 거의 목사인데 아내인 내가 목회를 한다고 하면 다 비웃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기간에 나는 골방기도를 통해 영성을 쌓고 또 쌓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런 가혹한 현실을 주시는지 따지고 싶기도 했지만 이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는 예전과 다른, 깊은 믿음을 키우게 해 주었다. 목사 안수를 받고 개척하여 목회에 집중하던 나에게 캐나다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목사님, 안수도 받으셨으니 말씀에 목말라하는 캐나다 한인들을 위해 순회설교 좀 해 주세요. 비자 기간인 3개월간 지내시며 좀 쉬기도 하시구요.” 

 

이 제안은 갑갑해하던 내게 새로운 돌파구였다. 그러나 한창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문제였다. 시댁에 노크를 했더니 모두 고개를 저었고 결국 친정에 애들을 맡기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아이들 걱정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4) 캐나다 공무원 “기도로 병 고쳐줄 수 있나요?”

 

비자 연장하러 갔다가 기도 부탁받아… 30년 된 지병 치유에 특별시민증 선물

 

 캐나다 오타와벧엘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받아 강단에서 설교하고 있는 이에스더 목사. 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교회였다.남들이 보면 자식을 팽개치고 캐나다로 사역을 나서는 나를 비난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담대하게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용기를 주셨다.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한 나는 즉시 복음에 목말라하는 이들을 찾아 나섰다. 

 

기후가 좋고 먹을 것이 풍부한 캐나다에서는 가는 곳마다 산해진미를 차려 내왔다. 그러나 손이 가지 않았다. 아이들 생각에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난 주의 종이기 이전에 모성애 강한 어머니였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금식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와 비례해 나의 영성은 더욱 깊어졌고 성도들에게 큰 역사를 일으키는 집회가 이어졌다. 신유의 기적이 일어나고 각종 은사가 나타났다. 한국에서 온 한 여사역자의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계속 집회 요청이 이어졌다. 그런데 나의 집회에 오타와에서 온 유학생 청년그룹이 참석했다가 큰 은혜를 받은 모양이었다. 

 

“이에스더 목사님, 저희가 오타와에서 한인교회를 개척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저희 교회 담임 목사로 모시면 안 될까요? 부탁입니다. 저희는 목사님처럼 열정적인 설교자가 필요합니다.”

 

주의 종은 양들이 요청하면 마음이 약해진다. 난 나를 애타게 기다릴 자식들을 생각지도 않고 덜컥 승낙을 하고 오타와벧엘교회 담임목회자가 되었다. 새로운 사명감에 가슴이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관광비자로 온 나는 3개월이 지나 연장신청서를 관계기관에 제출하게 되었다. 비자담당관은 내게 왜 연장을 하려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나를 도우려고 온 통역성도가 “우리가 세운 교회 목사님이신데 설교에 은혜를 받고 있으니 계속 계시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 담당관은 이렇게 말했다.

 

“기도로 병도 고치나요. 난 30년째 병명이 없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어요. 늘 고통을 느끼는데 의학적으로는 나오지 않아 답답하죠. 은사가 많은 목사님이시라니 기도를 받아도 되나요?”

 

난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방언으로 기도를 시작해 30여분은 한 것 같았다. 그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성령이 임해 함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이 시간 자신의 병을 고쳐주셨다는 확신이 든다고 했다.

 

“당신은 하나님이 쓰시는 종이 확실히 맞는 것 같소. 내겐 평생 3명에게 보증을 서서 특별시민증을 나오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그 중 한 장을 당신을 위해 쓰겠소.” 

 

난 비자연장은 물론 거주자격까지 보너스로 받은 셈이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그 어느 것도 불가능이 없다. 교회에서는 내게 살 집과 차를 마련해 주었고 나는 이곳저곳을 순회하며 마음껏 집회를 인도했다. 성령의 역사는 계속 나와 함께하며 캐나다 사역의 입지를 다져 주었다. 

 

그동안 아이들에겐 생활비를 보내주며 안부를 전하다 1986년 2월, 한 달간 휴가를 내어 한국에 나오게 되었다. 아이들이 그 사이 몰라보게 자라 있었고 엄마의 공백을 큰딸이 잘 메워 주고 있어 감사했다. 

 

난 한국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잘 섬기는 집사님을 통해 우연히 공군사관학교를 나온 현역 공군 중위를 만나게 되었다. 나와 동역자가 되어 지금까지 함께 사역하고 있는 사위 장덕봉 목사이다.

 

장 목사는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학생부 회장을 맡을 정도로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부친도 그를 주의 종으로 삼으려 기도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부모의 기대와 달리 등록금 부담이 없는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과정에서 다시 소명을 찾아 목회자의 길을 가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나는 그를 본 순간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위라는 느낌이 빠르게 스쳐갔다. 이는 기도하는 나의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셨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5) 믿음의 딸-사위, 얼굴도 안보고 결혼 날짜 잡아

 

공사 출신 장덕봉 중위를 보는 순간 주님이 주신 미래 사윗감임을 직감

 

 결혼식을 마치고 사위 장덕봉 중위와 딸이 폐백을 드리는 모습. 사위는 군인으로 근무하며 신학대학 및 대학원을 졸업해 목사가 된다.결혼도 대물림을 하는 것인가. 내가 어머니의 기도로 목사와 결혼하게 된 것처럼 딸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늠름한 공군사관학교 출신에 믿음 좋은 장덕봉 중위를 사위 삼고 싶어 서두르는 나의 모습이 예전의 엄마 모습 그대로였다. 기도해 보니 딸의 배우자감으로 장 중위를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믿음이 왔다.

 

딸은 20대 초반이라 아직 소녀 같았고, 나도 곧 캐나다로 돌아가야 했으며, 장 중위도 미국으로 군사유학을 갈 예정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쳐버릴 것 같았다.

 

"장 중위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 딸과 장 중위를 맺어주라는 응답을 받았어요. 함께 기도해 보십시다." 

 

장 중위는 딸을 한번 보지도 않고 내 말만 들은 채 기도해 보겠다고 하더니 나흘이 지난 후 자신도 응답을 받았다며 결혼을 승낙했다. 우리 집안의 가풍대로 딸도 사모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결혼이 또 있을까. 신앙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딸과 장 중위는 결혼식 날짜를 미리 정해 놓고 그 전날 처음 만났다. 다행히 딸이 사위를 만족해하는 눈치여서 마음을 놓았다.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주장하시는 결혼이라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진행되었다.

 

하객들의 축의금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남은 돈을 사위에게 주며 신혼여행비로 쓰라고 했다. 그런데 신혼여행을 뒤로 미루고 딸과 의논해 그 돈을 자신이 지휘하는 공군부대 성가대원 가운비로 사용하겠다고 해 기특했다. 딸은 사위의 성가대 연습이 늦게 끝나 신혼 첫날밤을 자취방에서 보냈다고 했다. 나는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위의 모습에 서운하기는커녕 더 많은 점수를 주었다. 캐나다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한 딸과 아직 도움을 줘야 하는 아이들을 보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캐나다에서는 왜 안 오느냐고 전화가 빗발쳤고 나를 데리러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가려고 하면 국내 부흥집회가 잡히곤 해 출국이 자꾸만 늦어졌다. 

 

한번은 사위가 근무하는 대구의 공군부대 기독장교 모임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이날 하나님이 크게 역사해 주셔서 모두들 은혜를 받았고 매주 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사위 입장도 있어 당분간이란 단서를 붙이고 예배를 인도했는데 아예 예배처소를 얻어 목회를 해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사위도 이렇게 말했다.

 

"이 목사님, 캐나다보다 한국 사역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장모님으로서가 아니라 목사님으로 모시고 옆에서 힘껏 도울 테니 국내 사역을 하시지요. 무엇보다 아내와 처남들이 장모님을 필요로 합니다."

 

결국 난 캐나다 교인들에게 미안했지만 한국에 남기로 했다. 그리고 딸의 집과 가까운 교회에 터를 잡고 철야하며 기도의 포문을 열었다. 하나님께 내가 목회할 수 있는 공간을 주실 것을 간구했다. 그렇게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병원 앞으로 가라"는 응답을 받았다. 

 

대구 파티마병원으로 가보니 건축 중인 새 건물이 있었다. 전세만 준다는데 사정해 50여평에 월세로 들어가기로 계약했다. 완공과 함께 요나금식기도제단이란 현판을 걸고 입주를 했다. 요나와 같은 신앙인이 주변에 너무나 많기에 금식하며 죄를 자복하고 신앙인으로 거듭나자는 의도였다. 

 

집회를 시작하자마자 놀라운 성령의 은혜가 넘치기 시작했다. 신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나면서 매일 200여명의 성도가 문제를 안고 모여들었다. 저녁 10시 반부터 12시까지 1차 집회를 열고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철야기도를 드렸다. 낮에는 주부들이 밤에는 직장인들이 모여 뜨겁게 기도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6) 대구 기도원 탄생 비화… 1억2000만원이 하루 만에

 

3000만원 들고 5000평 부지 계약… 日 후쿠오카 집회서 헌금이 밀물듯

 

 일본 후쿠오카한인교회 집회에 가서 기도원 부지 헌금을 응답받아온 이에스더 원장(왼쪽 네번째). 맨 오른쪽이 이성주 담임목사.요나금식기도제단은 대구 도심에 생긴 기도원인 셈이었다.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은 날선 검이 되어 원근 각지에서 온 성도들의 심령을 쪼개고 파고들었다. 성령께서 전하고픈 말씀이 내 입술을 통해 선포되고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 변화와 영적 각성이 있게 만들었다. 

 

난치병이 낫는 역사들이 이어졌고 성도들뿐 아니라 목사님들도 찾아오게 되었다. 처음엔 성도들이 이곳에서 은혜를 받고 치유를 경험했다니 좀 이상한 곳이 아닌가 우려하며 검증차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정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나를 돕는 사위도 공군정훈장교 출신에 침례신학교에서 공부했다니 안심했다.

 

“기도제단이 교회와 다른 점은 교회가 영적병원이라면 기도제단은 응급실 같은 곳입니다. 급하게 하나님께 부르짖고 응답받을 때 기도로 부르짖는 이런 곳이 꼭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엄숙한 경배와 갈멜산상의 애끓는 기도가 다른 것과 같습니다.” 

 

나의 이 말에 목사님들이 격려해 주시고 성도들까지 보내주시기도 했다. 난 이곳에서 만 6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집회를 인도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지구력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다. 오랜 불치병으로 고생하던 성도가 기도하다 깨끗함을 입었고 아기가 안 생겨 애타하던 부부가 기도로 쌍둥이를 임산하기도 했다.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한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던 환자도 기도로 치유 받았다.  

 

한번은 대구 근교 달성군의 한 산을 찾았다가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감탄사를 연발했다. 큰 호수를 병풍처럼 둘러싼 산의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이곳을 기도원 부지로 매입하고픈 열망이 가득했지만 금전적 여유가 없었다. 5000평을 사려고 하니 1989년 당시에 큰 금액인 1억5000만원이 필요했다. 난 믿음으로 계약서를 썼고 3개월 안에 잔금을 다 치르기로 했다. 계약금은 내가 가진 전부인 3000만원으로 치렀다. 

 

난 오직 기도로 잔금을 마련케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밤낮으로 부르짖고 부르짖었지만 응답이 없었다. 자칫 계약금만 떼일 판이었다. 이 무렵 일본 구마모토기도원에서 집회인도 요청이 들어왔다. 당시 국방부에서 국제기독장교대회를 준비하던 사위에게 요나제단 집회를 맡기고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에서 하나님의 땅값 응답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가득했다. 그런데 일본 전국 성회로 열린 이 집회가 성령의 풍성한 역사로 끝났지만 내 문제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실망하던 중 후쿠오카 한인교회를 담임하는 이성주 목사님이 이번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며 하루 만이라도 자신의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쿠오카로 이동해 마음이 답답한 상태에서 강단에 올랐다. 그러나 이 시간을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감동이 오며 성령 충만한 시간이 이어졌다. 설교를 마치자 담임 목사님은 나의 대구 기도원 부지 계약사실을 성도들에게 알리며 “우리의 고국에 기도처가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손으로 하십니다”라며 긴급 광고를 했다. 

 

이날 헌금이 6000만원에 가까웠다. 그러자 목사님께서는 “지금 드려진 예물로는 이에스더 목사님께서 매입하려고 하는 땅값으로는 절대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S장로님께서 책임지시면 어떨까요?”

 

그 순간 S장로님도 “아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시원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손길을 통해 하루 만의 반전으로 대구 기도원 부지 잔금을 치를 수 있었다. 나는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했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7) 홀사모의, 홀사모를 위한 선교회를 창립하다

 

내가 겪은 아픔을 가진 사모들 위해 수양관 개관… 장학금·생활비 등 후원

 

 이에스더 목사는 항상 기도 가운데 설교를 준비해 성도들에게 영의 양식을 공급하고 있다. 자신이 정리한 설교 파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 목사.대구 요나금식기도제단은 이사야 58장에서 금식의 원리를 발견해 시작할 수 있었다.

 

성경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한다. 금식을 통한 선물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또 금식 후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계신다. 

 

나는 홀사모가 된 뒤 단식하며 기도할 때가 많았다. 이때 체험한 강한 은혜를 바탕으로 에스더와 요나가 3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밤낮으로 부르짖던 ‘3일의 금식’을 나의 단식기도법으로 정립했다. 이것은 오늘날 내가 요나3일영성원을 운영하는 핵심 골격이 돼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때부터 나는 1∼3일간 단식하며 기도한 후 물과 부드러운 죽으로 3∼7일간 단계적 보호식을 하도록 한다. 이곳서 단식하며 기도하는 분마다 건강의 회복과 문제 해결의 급속한 응답을 경험하게 되면서 요나금식기도제단이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홀사모’는 소천한 교역자, 목사의 홀로 남은 아내를 뜻하는 말로 홀사모선교회란 이름을 지었다. 내가 특허로 등록한 이름이기도 하다. 나 역시 홀사모로 졸지에 아이 넷을 데리고 사택에서 나와 고생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릿하다.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며 언젠가 홀사모를 돕는 사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드디어 1994년 6월 23일 요나기도제단이 있던 대구 달성군 논공읍 노이동에 200평 규모의 홀사모수양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평생을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내조만 하다 어려움을 당한 홀사모를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형편이 어려우면 생활비를 주고, 매주 화요일 홀사모 사역자 양성 과정을 열었다. 

 

홀사모는 남편이 소천하면 사모가 아니라 집안의 가장이자 어머니로 돌아간다. 재산이 없으면 생계가 막막한 경우가 많았다. 또 목사가 소천한 것에 성도들이 왈가왈부 말을 많이 하는데 이 역시 남겨진 사모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된다. 나는 사모들의 고충을 해결해주고 자녀들이 장학금을 받아 공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홀사모 모임을 매월 정기적으로 가지다 1998년 7월 14일 서울 양재동 횃불회관에서 홀사모 전진대회 및 위로 행사를 열고 공식 명칭을 ‘세계기독교 교역자 홀사모선교회’로 이름을 지었다. 나는 이 사역을 하면서 그 중요성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전국 교회에 보내곤 했는데 외면도 많이 받았지만 수고한다고 격려하며 후원금을 보내주는 목사님도 많았다. 참으로 감사했다. 

 

사역을 하면서 의외로 어려움에 처한 홀사모가 많았다. 도움을 주고자 선교회로 오라고 해도 일부는 차비도 없어 못 온다는 것을 알고는 직접 홀사모를 찾아다니며 기도해주고 생활비도 전달하곤 했다. 또 해외 교회도 순방하며 홀사모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기도 했는데 한동안 해외 교회의 후원이 이 사역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당장 사택을 비우라는 말에 울기만 하던 사모를 찾아 가재도구를 싣고 수양관으로 데려온 경우도 있었다. 홀사모선교회 사역은 단순히 도움을 주는 차원을 넘어 사모들의 잠재됐던 재능을 깨우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나서는 데 동기부여를 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무엇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낙담해 있던 사모들에게 연수 과정을 통해 사역의 길을 열어드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이 사역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8) 수양관 덮치는 산불을 잠잠하게 하신 하나님

 

불길, 보일러 연료통 1m 앞에서 진화… 소방대원 “무언가가 바람 멈추게 해”

 

 대구요나기도제단을 사역하며 국내외 부흥사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고 신현균 목사의 격려와 지도가 큰 힘이 됐다. 부흥사연수 과정을 마친 이에스더 목사(오른쪽 세 번째).성경에 다니엘의 세 친구를 화마 속에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기적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우리 기도원도 이런 기적을 체험하는 일이 있었다. 1999년 3월 22일이었다.  

 

밤에 보일러에 불이 깜빡거려 관리집사에게 잘 챙겨보라고 했는데 새벽 6시께 지나가던 차가 수양관 근처 산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를 깨웠다. 밖으로 나오니 화마가 수양관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오 주여’라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기도원을 지켜 달라는 기도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119로 신고를 해야 하는데 손이 떨려 번호가 눌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웽웽대는 소방차 소리가 나면서 순식간에 불길이 잡혔다. 화재를 수습한 소방대원들은 잔 불씨도 살아나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소방대원들이 불을 끈 후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불길의 최종 상태로 보아 적어도 서너 시간 동안 불이 번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산불 중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현상입니다. 새벽 내내 불이 났는데 마치 4시간 동안 자연현상을 정지시킨 것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새벽이었기에 불이 산 위로 세차게 타오르지 못하였고, 게다가 1m도 채 안 되는 보일러 연료통에 불길이 닿지 않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소방서로 연락해 준 분이 있었다. 소나무 숲으로 울창한 곳인지라 삽시간에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지만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자고 있을 때 바람을 잔잔케 하셨고, 다른 손길을 통하여 문제를 처리해 주고 계셨던 것이다. 불길도 피하게 해주신 하나님이셨다. 

 

하루는 학창 시절부터 사랑으로 길러주신 임영재 목사님께서 불러주셔서 시무하시던 독립문성결교회 금요철야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당회장실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예배 전에 만나 볼 사람이 있다고 말하셨다. 잠시 후 들어오는 사람은 50대의 여성도였다. 임 집사라고 소개를 하는 그분은 위암 말기의 중환자였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예배시간에 참석할 수가 없어서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해준 뒤 가능하면 대구로 내려와 단식하며 함께 기도하기를 권했다.

 

철야집회 후 한밤에 고속도로를 질주해 대구로 내려왔다. 피곤한 몸이었지만 잠시 잠을 취한 다음 아침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제단에 나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제 밤에 만나 기도해 주었던 임 집사의 모습이 보였다. 생과 사를 넘는 마지막 선택이었던 탓인지 나보다 먼저 내려와 단식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보여주실 것을 믿으며 집회시간이나 한밤의 기도시간에 강청하는 기도를 함께했다. 어려운 상태였지만 3일의 단식을 잘 마치고 보호식에 들어갔다. 이미 나는 남편목사님이 위암으로 운명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도했다. 더구나 위암은 먹지 않는 순간부터 회복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항상 그의 먹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나님의 기적은 보호식을 하는 가운데 일어났다. 물과 미음을 주는 대로 잘 받아 넘기는 것이었다. 이것은 위에서 거부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어서 너무나 기뻤다. 임 집사의 병세는 호전되어 강단 앞으로 나아와 찬양을 하기도 하고 간증하면서 눈물로 영광을 돌렸다. 그녀는 서울로 돌아가 담임 목사님께 간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며 전화로 감사를 전해왔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셨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9) 성경 속 기적·신유 역사는 오늘도 진행형

 

영적 문제로 생긴 병, 하나님께 알려야… 현대의학 무조건 거부는 잘못된 자세

 

 이에스더 목사는 기도원 땅값을 지원받은 후쿠오카한인교회의 선교목사로도 임명받아 수시로 일본에 가서 설교를 했다.아무리 현대 의학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영적인 문제로 생긴 병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전문의들도 이런 환자를 대하기가 가장 까다롭다. 이것은 본인만이 느끼는 고통이기에 아무리 상태를 설명해도 처방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식기도원에서 이런 고통을 호소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 때마다 나는 병이 오게 된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성경적 원리를 가르쳐 주면서 자신에게 해당되는 부분에 집중적으로 기도하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회개를 통해 그 자리에서 낫기도 하고, 귀신이 떠나갈 때 병까지 갖고 나갔기에 온 몸이 기적같이 깨끗해진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오랜 기간 동안 단식과 보호식을 하며 기도할 때 낫는 병도 있고, 때로는 첨단 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은 기도 후 그와 상담을 하는 가운데 의사처방이 필요함을 알려 주기도 한다.

 

간혹 무조건적인 신앙만으로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신자를 만난다. 우선 보기에는 그의 믿음이 훨씬 강해 보인다. 물론 하나님께서 손대시면 어떤 병도 고치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그 사람이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의사들은 먼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묻는다. 증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부족하면 오진확률은 높아진다. 왜 병에 걸렸는지 분명하게 알고 거기에 맞는 처방을 할 때 그 환자는 치료될 수 있다.

 

신유기도를 할 때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그에게 병이 침투한 경로를 깨닫게 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앞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일하게 하는 데 목적을 두고 기도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낫게 하실 것으로 믿는다. 

 

의사나 약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도 신앙적인 문제가 있지만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는 신앙이 더 문제다. 생명의 근원을 아는 자라면 함부로 자기 생명을 의탁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알리고 지시를 받아야 한다.  

 

성경 속 기적과 신유의 역사는 오늘도 진행형이다. 하지만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의 은사를 최대한 활용해 과학이 발달된 만큼 의료적 도움을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의 선택을 따르고자 하는 자세를 취할 때에 역사하는 힘이 더욱 강할 것이다. 

 

일본 후쿠오카한인교회 이성주 목사님은 수시로 나를 초청해 강단에 설 기회를 주셨다. 하루는 한 일본목사님의 사모님이 위암 말기로 투병 중이라며 기도요청을 했다. 나는 손을 얹고 기도한 뒤 “이미 의사가 불가능하다고 했으니 부르심을 받더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단식기도를 하면 어떨까요?”라고 했다.

 

그 사모님은 남편에게 “여보! 소원이니 함께 단식하며 기도해요”라고 하는데 일본목사님은 바쁘다며 거절하는 것에 내가 충격을 받았다. 사모의 눈에 언뜻 눈물이 비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모님에게 기적을 베푸셨다. 내가 한국에 들어온 뒤 얼마 후 이성주 목사님으로부터 사모님이 단식 후 나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도 너무 기뻐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 드렸다. 

 

다시 일본을 찾았을 때 사모님은 건강한 모습으로 나를 맞았는데 이번에는 남편목사님이 사모가 입원했던 바로 그 병실에 입원하고 있었다. 사모는 “그 때 함께 단식하며 기도해 주지 않아 하나님께서 이 방에 들어오게 하신 것 같다”고 말해 모두들 크게 웃었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10) “수양관 앞 절을 다른 곳으로 보내주소서”

 

개발 붐 타고 맞은편에 사찰 들어서… 매일매일의 기도에 선교센터로 탈바꿈

 

 ‘3일 기도의 영적 파워’ 출간으로 집회 요청이 이어졌다. 집회 현장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이에스더 목사(강단 오른쪽)와 사위 장덕봉 목사.시간이 흐르면서 대구 수양관 주변에 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건물들이 자꾸 들어서는데 전혀 반갑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기도원 맞은편 정면에 절이 세워지는 것이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매일 눈 뜨자마자 절을 마주 본다고 생각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매일 절을 향해 “주여! 저 절을 다른 곳으로 보내 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내 기도와는 달리 날이 갈수록 절은 점점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도만 하고 있던 어느 날, 한 분이 날 찾아왔다. 자신이 건너편 절 주지의 친구라고 소개하면서 이 절을 사지 않겠느냐는 의중을 물어왔다. 순간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돈도 없지만 전혀 살 의향이 없다고 했다. 이후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부활주일 오후였다. 저녁 예배를 마치고 난 성도들과 성전 뜰에 나와 있었는데 절 방향에서 성가대의 찬양이 울려 퍼졌다. 한 교회에서 절을 매입해 선교사 게스트하우스로 꾸미고 입주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할렐루야! 나는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 교회는 정상적인 매입으로는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고 경매로 매입을 하게 됐다고 했다. 선교사들께 숙식을 제공하고 특수선교사 훈련센터로도 활용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비록 시간이 더디어도 하나님은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분이셨다. 아침마다 ‘저 절이 사라지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던 곳이 은혜스러운 곳으로 바뀌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1999년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첫 번째 책 ‘주님, 한 손만 잡아주소서’를 통해서는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불기둥을 간증했다. 이 책을 읽고 은혜가 되었는지 추석명절을 앞둔 시기에도 여러 교회의 집회요청이 이어졌다.  

 

안산의 한 교회에서 특별집회를 인도한 후 대구로 돌아가던 중 사위가 불현듯 “성령께서 수도 서울에 예비된 집회 처소를 찾으라는 감동을 주시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도해 보자고 한 뒤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란 외마디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 마음속에 기쁨이 넘친다는 것은 기도응답의 징후였다.

 

그러나 서울 처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무릎을 꿇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인간적으로는 참 답답했다. 하루는 서울에 왔는데 갑자기 총신대학 근처 교회 종탑이 나를 사로잡았다. 차를 세워둔 채 달려가 보았다.

 

한 교회가 지상 3층 지하 1층의 상가를 통째로 분양받아 리모델링하려는 중이었다. 우리는 분양받은 박모 목사님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해 보았는데 그분은 사위의 공군사관학교 3년 선배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사위 장 목사가 입학할 당시 기독생도회장이었고 3년 뒤 사위가 그 자리를 이어받은 인연이 있었다. 군악대장을 역임해 찬양선교에 관심을 갖고 목회자가 된 박 목사의 도움으로 우리는 이곳 일부 공간에 세를 들기로 하고 서울 진입의 첫발을 떼게 되었다. 우리는 박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에서 두 번째 책 ‘3일 기도의 영적 파워’ 출판기념회를 겸한 ‘요나3일 영성원’ 개원예배를 드렸다. 

 

기도의 중요성은 알면서도 기도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책 ‘3일 기도의 영적 파워’는 적중했다. 무명 저자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2000년 한 해 동안 기독교서점협의회가 선정하는 베스트 북 가운데 한 번도 빠짐없이 이름이 오른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해 열정을 갖고 사역해 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고 축복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11) “인왕산 기슭에 기도의 요새를!” 비상기도 돌입

 

서울 시대 열 상가 교회 방문 후 “바로 이곳입니다” 기도에 응답이

 

 요나3일영성원에 걸려 있는 요나가 물에 빠지는 장면을 그린 대형 성화 앞에서 그림 내용을 설명하는 이에스더 원장(왼쪽)과 장덕봉 원목.총신대 근처의 요나3일영성원은 나의 저서를 읽은 독자들의 발길과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매일 집회를 인도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장소를 더 넓혀야 한다는 비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곧바로 새 성전을 예비해 주셨다. 이곳에서 우리가 사역한 시간은 불과 두 달뿐이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 묘했다. 인왕산 기슭 아파트 상가에 세워진 교회가 후임자를 찾고 있다는 국민일보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얼마든지 모른 채 지나갈 수 있는 부분인데 우연히 광고를 보게 하시고 관심을 갖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당장 전화를 걸었다. 강남 대형교회에서 부목사로 재직하다가 이곳 상가건물 1층의 반쪽을 분양받아 교회를 개척했는데 2년이 지나도록 성도가 없어 새 목회지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의 목사님이셨다. 그런데 인왕산 아파트 상가를 가본 순간 ‘기도의 요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파트 위에서 보면 지하 2층이라 아무리 크게 기도해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또 도로상에서 볼 때는 1층에 위치해 출입이 자유로운 특이한 건물이었다. 게다가 옆에 인왕산 등산로가 있어 산의 풍취와 마음 놓고 기도할 수 있는 환경조건은 나를 아주 흡족하게 했다. 더구나 도심 한복판이어서 이만한 기도처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이제 책임져 주십시오.”  

 

기도의 용사들을 모아 집중 비상기도에 돌입했다. 며칠 후 그 교회 목사님께서 1년 동안이나 약을 달인 것이라며 내게 보약을 전해주는 꿈을 꾸었다. 이것은 ‘벧엘의 약속’과 같은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지나치게 서두를 때가 많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도 내 원대로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의 계획이 일치될 때 축복의 문은 활짝 열린다. 준비된 것은 없었어도 마음이 평안했다.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으로 선지자를 대접함으로 받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잔금을 다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집회를 인도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목사님 덕분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지 열흘 만에 모든 잔금을 순조롭게 지불할 수 있었다. 할렐루야!

 

입당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게 최적의 장소를 예비해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하나님 사역은 결코 탄탄대로만 있지 않았다. 어디선가 돌을 던지는 무리가 반드시 있는 법이다. 바로 세상에 속한 이들이다. 복도를 경계로 38선이 그어진 것처럼 안쪽은 요나3일영성원이었고, 바깥쪽은 무도체육관이었다. 이전 교회에서는 낮 예배라고는 주일뿐이었기 때문에 자기네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난데없이 영성원이 들어오면서 매일 낮 집회를 하게 되니 이 광경이 체육관 입장에서는 몹시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한번 만나자는 체육관 관장의 청에 따라 사위인 장 목사가 만나 보았다. 처음부터 영적인 싸움이었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여러 반을 운영하는 그들로서는 얘기할 자격이 없는데도 이전 상황만 거론하며 우격다짐으로 우리를 몰아세웠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찬송과 기도 소리가 시끄러운 소음으로만 들린다. 그래서 우리가 통성으로 기도하면 기도 소리보다 더 큰 기합을 질렀다. 설교 시간에도 고의로 큰 음악을 틀면서 예배를 방해했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12) 기도할수록 창대해지는 ‘요나3일영성원’ 성전

 

체육관과의 ‘소음 전쟁’ 승리 넘어… 하나님, 1층 이어 2층까지 선물하셔

 

 1998년 큰아들이 침신대를 졸업하던 날 두 딸, 두 손녀와 모처럼 자리를 함께했다.체육관과의 갈등은 악화일로였다. 매일 총성 없는 전쟁터에 선 느낌이었다. 발만 동동 구르며 그저 기도만 하던 어느 날 “저곳마저 네가 요나3일영성원 성전으로 삼으면 되지 않느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속에서 불타올랐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는 무릎 꿇는 것뿐이었다. 기도하면 기쁨의 샘이 흘러 넘쳤고 어느새 마음 한구석에는 약속의 주머니가 풍성하게 채워져 있음을 느꼈다.  

 

“하나님이 조만간 체육관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있는 동안이라도 잘 있다 가기 바랍니다.”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특별비상기도를 선포하고 단식하며 기도했다. 승리의 화살은 문제의 과녁 중앙을 관통했다. 5개월간의 지루한 싸움의 종지부를 찍었다. 성령님께서 아파트 조합 사무실 책임자들의 마음을 움직여주셨다. 그들과의 끈질긴 협상 끝에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매각할 것을 약속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되었다.

 

“네가 밟는 곳마다 네 땅이 되리라.” 

 

그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공격자들이 마지막 분풀이를 위해 꼬리를 칠 때 철저하게 대비하지 아니하면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최종 시한이 다가올수록 험악한 인상으로 쳐다보기도 하고, 문을 부수고 협박을 하며 도전해 와도 기도로 당당히 이길 수 있었다. 

 

462.8㎡(140평)의 성전을 기도로 얻었지만 이곳을 최대로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또 기도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최고의 인테리어 전문가를 동원해 모든 시설을 최고로 지을 수 있는 은혜와 물질을 허락하셨다. 고생한 끝에 얻은 성전에 아름다운 예배실과 숙소, 방음장치를 한 기도실, 카페 분위기의 식당, 청결한 화장실과 휴게공간을 만들었다. 2000년 12월 28일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님을 모시고 헌당예배를 드렸다.

 

행동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1층에서 멈추지 않으셨다. 1, 2층으로 나눠진 건물의 1층을 확보한 다음 이제 2층 학원가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듯이 매일 돌기 시작했다. 1층 전체를 주실 때는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그렇게 기대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이후 5년간 계속됐고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2층을 소유했던 공동 주인 세 사람이 서로 갈등이 생기면서 건물을 빨리 팔았으면 하는 상황이 됐고 오히려 내게 사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었다. 계약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계약이 이루어진 후 입주해 있던 학원의 항의에 잠시 곤혹을 치러야 했다. 자기네가 임차한 상태이기 때문에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또 이 계약은 성립되지 않는다며 방해라도 놓을 태세였다. 게다가 연말까지 잔여 계약 기간으로는 학원을 운영할 수 없기에 충분한 기간 연장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사도 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또 기적이 일어났다. 그토록 강력하게 항의하던 미술학원 원장이 찾아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어요. 축하해주세요. 우리 학원이 독립 건물로 이사를 하게 되었어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왔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지혜로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지루하게 끌어 오던 분쟁이 모두 마무리되자 긴장이 풀렸다. 게다가 숨 가쁘게 잔금을 치르고 임차인들의 보증금을 지불한 상태라 이제 좀 쉬고 싶었다. 물질도 바닥난 상태였기에 좀 더 때를 기다리면서 여유를 가지고 다음 일을 준비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달랐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13) 기도처 완공되자마자 금융위기로 원자재값 폭등

 

최고급 자재 사용 1년 넘게 인테리어 무사히 공사 마치게 하신 은혜에 감사

 

 심혈을 기울인 영성원 내부 인테리어 공사는 1년이나 걸렸다. 이에스더 원장이 벽에 걸린 김용성 화백의 대형 성화를 설명하고 있다.하나님은 기도처가 빨리 세워져 기도에 목말라하는 영혼들을 만나길 원하셨다. 2006년 7월 1일부터 영성원 내부 설계를 하고 인테리어 자재를 사들였다. 이 일을 진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건축을 재촉하실까 하는 큰 의문이 들었다. 푹푹 찌는 한여름 무더위 속에 서둘러 내부 공사를 하도록 밀어붙이시는 의도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난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임에도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손질하지 않아도 될 최고의 기도 시설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단식하며 기도하는 분들의 건강을 생각해 새집증후군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재료를 사용했다. 하나님께서는 게르마늄 광산을 운영하는 한 권사님을 보내셔서 어마어마한 양을 실어오게 하셨다.

 

바닥은 천연 대나무로 깔고 모든 벽면은 태평양 심해에서 캐낸 규조토인 산호석으로 처리했다. 복도와 천장에는 예수님 그림으로 유명한 김용성 화백이 대형 성화를 그려 단식관의 이미지가 전달되도록 했다. 한두 달이면 충분히 끝낼 수 있는 내부 인테리어 공사가 1년이나 걸렸다. 

 

우유배달에서 석재공장 경영자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집사님이 해외에서 생산되는 좋은 돌을 찾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조각해 외벽에 붙였다. 모든 자재는 최상의 품질로, 공사자는 최고의 명장을 부르다 보니 재정적 부담이 밀려왔다. 

 

그러나 휠체어에 의지한 채 부산에서 서울까지 봉고를 타고 한밤중에 도착한 여전도사님이 나의 두 번째 책 ‘3일 기도의 영적파워’를 보면서 하나님의 강권적인 명령으로 ‘옥합 300만원’을 가져왔던 일, 약국을 경영하면서 딸의 혼수예물 준비를 위해 모은 것이지만 하나님이 더 필요하시기에 가져 왔다며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던 권사님 등 어려운 가운데서도 뜨거운 은혜와 감동으로 자신의 작은 것을 주님의 손에 올렸던 과부의 두렙 돈과 어린아이의 도시락처럼 오병이어의 역사가 계속 따랐기에 공사는 기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현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임을 완공 후에 깨닫게 된다. 2007년 7월 14일. 감격스러운 입당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미국발 금융위기로 건축회사가 도산하고 모든 원자재 값이 폭등했다. 하나님이 공사를 서두르도록 하신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현실이 어렵다고 피하기만 하면 승리할 수 없다. 고난을 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 앞에 무릎 꿇고 감사의 찬양을 드렸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위기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약한 존재이다. 이 위기 때 사람은 위로하거나 도울 힘이 없기 때문에 동정할 뿐이다. 그러나 능력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자가 되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해결자이시다. 그것은 인간을 흙으로 빚으신 원제작자이시기에 인간을 누구보다 잘 알고 꿰뚫어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시선을 고정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이때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보인다. 단식은 나를 드리는 또 다른 예배의 표현이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몸을 드려 부르짖는 기도를 귀담아 들으시는 것이다.

 

최고의 친환경적 시설을 갖춘 요나3일영성원은 숱한 신앙인들의 영적 성장의 산실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단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숱한 이적과 기적의 간증이 쏟아졌다. 특히 도심에 자리한 기도의 요새로 인식되어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응답을 받고 치유를 경험한 사례가 엄청나게 많다. 머리에 떠오르는 두 분만 정리해 보려고 한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14) 투자 실패로 좌절한 집사, 1000일 기도 후 ‘찬양 전도사’로

 

찜질방 전전하던 50대 가장도 기도 후 활기 찾고 사업 재기

 

 요나3일영성원 스텝과 봉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에스더 원장을 중심으로 기도가 메말라 찾아온 성도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도록 돕고 있다.요나3일영성원 설립 초기에 오신 K집사는 회사가 적자 속에 허덕이고 부동산과 증권의 부실투자로 크게 고심하던 중 갑자기 군 시절 다친 뇌 후유증까지 발생했다. 몸과 마음, 물질이 모두 힘든 상태에서 우리 영성원을 찾아오게 되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온 K집사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50대 후반이라 새 일을 시작하기엔 무모해 보였다.  

 

나는 1000일을 기도하라고 했고, K집사는 순종했다. 그는 매일 출근하듯 집회시간에 맞춰 나와 뜨겁게 기도했다. 어렵던 회사는 IMF를 거치면서 결국 문을 닫았고 투자했던 자산은 모두 반토막 났으며 매일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지하철을 기다리다 뛰어내려 죽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라는 그의 말에 아찔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번은 입이 심하게 돌아가 입원을 했다. 담당의사는 큰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면 더 악화된다고 처방을 내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반대 처방을 내렸다. 그에게 찬송가 100곡을 암송해 예배의 찬양 인도자가 되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이를 역시 ‘아멘’으로 순종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10여년이 지나도록 그는 요나3일영성원의 찬양 인도자로서 평신도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 그는 “서울대 상대를 나온 대학 동기들이 정·재계의 화려한 직장을 은퇴한 후에 설 자리가 없어 고민하는데 73세의 나이에 건강을 회복하고 200여곡의 찬송을 암송, 매일 10곡씩 이곳서 찬양을 인도할 수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말로 다할 수 없다”고 감격해 하며 기뻐한다. 

 

매일 열정적으로 찬양을 인도하는 그를 보며 은혜 받은 성도들이 ‘찬양 전도사’라는 별명을 더해 준 것은 덤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2005년에 한 젊은 가장이 영성원에 왔다. 그는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상태라 내일에 대한 소망도 없이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맞벌이를 하던 아내마저 남편의 과도한 부채 때문에 회사를 쫓겨나듯 그만 두게 되었고 월세 집마저 쫓겨나 길바닥에 내몰리고 말았다. 

 

그는 아내와 세 살배기 아들을 부모님께 부탁하고 대리운전, 인터넷전화 영업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찜질방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 수입도 없는 상태에서 무모하게 전기절감기 연구에 몰두했다. 아들의 처지를 보며 참다못한 그의 어머니가 요나3일영성원을 소개했고 쫄딱 망한 신세인지라 강압에 못 이겨 따라 오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3일 단식과 7일 보호식까지 온전히 열흘의 기도를 시킨 후 상담을 했다. 나는 어머니의 원대로 형편에 맞게 통신과정의 신학교에 입학할 것과 지금 하고 있는 전력 절감 장치 개발 연구를 계속하면 좋겠다고 조언해 주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무모한 연구를 말려줄 것을 기대했는데 그 반대가 된 셈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기도하면서 활기를 찾아 마침내 기대하던 제품을 개발, 특허를 받아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30여개국에 특허 등록을 마쳤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기업은 중국과 멕시코 등지에서 주문이 들어오면서 판로가 열렸다. 2008년도에는 융자를 받아 사업을 확장한 지 6개월 만에 대출자금을 모두 상환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됐다. 

 

국내선 비행기도 타보지 못했던 그가 이제는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누비고 있다. 그는 늘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주님이 세우신 회사 ‘이엔포스 홀딩스’를 하나님의 기업으로 키워가고 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기도에 100% 응답하신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오직 기도하면서 그분의 뜻을 찾는 것뿐이다. 아멘.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15) 우리는 ‘축복 유통자’… 기쁨 나누면 더 큰 행복이

 

조용기 목사, 홀사모 후원금·격려금 선물… 감사함에 받은 만큼 신학생들에 베풀어

 

 이에스더 목사가 조용기 목사로부터 홀사모 돕기 사역 후원금을 전달받고 있다.나 역시 홀로 된 여성 목회자이지만 요나3일영성원을 이끌면서 홀사모 회원들을 즐겁게 도왔다. 사실 그들을 돌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은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했다. 홀사모선교회 회원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지원 금액이 누적되면서 재정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했고 하나님께서는 2010년 어느 날 “부비가 더 들면 더 주마”하고 응답하셨다. 

 

2011년 1월, 국민일보에서 출간한 ‘시련의 끝’과 미국 출판사인 Xulon Press의 도움으로 아마존닷컴에 올려진 ‘주님, 한 손만 잡아주소서’의 영문 번역판 ‘Lord, grab me by one hand!’ 출판기념회를 이곳 영성원에서 가졌다. 이 책이 세계 도처에 확산돼 기쁜 소식이 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고 기대로만 끝나고 있었다.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 나는 국민일보 창간 23주년 기념 행사에 수상자로 부름 받아 이사장인 조용기 목사님으로부터 상을 받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조 목사님께서 추천해 주신 제 책이 많이 팔렸습니다”라며 짧게 인사를 드렸다. 조 목사님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축하합니다” 하며 “내가 사람 볼 줄 압니다. 이 목사님의 사역은 위대하고, 당신은 크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하며 격려해 주셨다.

 

아, 얼마나 큰 위로였던가. 나는 너무 감동해 눈물이 금방 쏟아질 것 같았다. 목사님이 나를 어찌 알고 이런 위로의 말씀을 해주시는 것일까. 목사님은 그리고는 “사역 현장에 한 번 가보고 싶으니 나를 그곳에 초청해 달라” 하셨다. 

 

사실 조 목사님을 영성원에 한번 초청하는 것은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런데 목사님이 먼저 제안해 주신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주변에서는 “목사님, 오늘 대박”이라고 말했다.

 

2012년 3월 8일 우리는 ‘조용기 목사님 초청 홀사모의 날’ 행사를 열었다. 조 목사님은 사위인 장 목사에게 “스케일 큰 장모를 만나 굉장히 피곤할 거요” 하셨다. 좌중의 분위기는 금새 화사하게 변했다. 그러자 장 목사도 “네, 그래도 장모가 두 분이면 힘들 텐데 한 분이어서 괜찮습니다”하고 화답해 또 한번 웃었다.

 

이날 조 목사님은 홀사모들에게 위로의 메시지와 함께 후원금도 전해주셨다. 돌이켜 보니 이 격려금이자 위로금은 이미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부비였다. 조 목사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선물이었다. 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한 후 지금까지 집회를 인도하면서 이렇게 적은 숫자 앞에서 설교하기는 처음”이라면서 “그래도 너무나 뜻 깊은 일이기에 오고 싶었다”며 은혜의 말씀을 전했다.  

 

이후에 조 목사님을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렸는데 그 때도 격려금을 주셨다. 마침 침신대학원 채플의 설교 요청을 받았던 터라 조 목사님에게 받은 격려금으로 신대원생 전체가 각자 원하는 식사를 할 수 있도록 1인당 두 권의 저서와 함께 1만원씩 넣은 봉투를 전달했다.  

 

그날 저녁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개척하면서 공부하는 신학생이라고 했다. 그는 “목사님, 오늘 주신 봉투를 손에 들고 감히 혼자서 점심을 먹기가 너무 가슴 벅차 저녁 때 아내와 함께 자장면을 먹으며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베푸신 사랑 늘 기억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받은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나누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 쓰는 것보다 많은 신학생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더 기뻐하셨다. 우리는 그저 축복의 유통자로 살아갈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쁨을 나눌수록 더 큰 행복으로 돌려주신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16) 굳건한 신앙의 항체 있으면 모든 바이러스 극복

 

우리 사회 메르스 공포로 질식 상태… 믿음으로 영적·육체적 면역력 키워야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열린 박람회에 김장환 목사(왼쪽 두 번째)와 함께한 이에스더 목사(왼쪽 끝).나는 수원여고와 영복여고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예능유치원을 두 개나 운영하는 교육사업가로도 일했던 적이 있다. 이때 목사인 남편과 함께 수원중앙침례교회를 한동안 섬기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김장환(극동방송 이사장) 목사님과 함께 미국에서 열린 박람회에 내가 이끄는 예술단과 참가했었다. 그 후 김 목사님께서는 남편이 교회 개척을 할 때 당시엔 귀했던 오르간을 선물해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이 복음에 생명 바쳐 일할 여종으로 만들고자 부어주신 축복의 한 부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라는 바이러스 공포에 질식된 상태다. 서로 만나 다정한 대화 나누기를 꺼리고 극빈 노약층을 돕기 위한 나눔의 장소도 폐쇄되는 지경이다. 오직 내 가족 내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팽배해진 상황이다.  

 

이 모습을 보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너무 부유해진 나머지 가난할 때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할 시간도 없이 말씀의 동산에서 떠난 상태로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는 관대한 반면 상대의 잘못만 후벼 파는 위선적인 신앙 때문에 치료가 더 힘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육체도 면역력이 있으면 병균과 싸울 수 있는 힘이 있듯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면 신앙의 항체가 생겨 어떤 영적 바이러스와 싸워도 이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니느웨에 선지자를 보내시고 니느웨의 통곡과 회개를 통해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완악함을 모르는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잘못된 우월감을 깨뜨리기를 원하신다. 사회가 어지럽고 국가가 위태로울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더욱 분명해야 한다. 더 많이 말씀의 채찍에 무릎 꿇지 않으면 미래의 희망은 점점 더 희미해질 뿐이다.

 

성도들이 왜 하필이면 이름이 요나3일영성원이냐고 묻는다. 그 답은 성경에 있다. 니느웨를 회개시키라는 부담스러운 명령 앞에서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기로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 구석구석을 살피고 계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요나도 가나안 땅만 벗어나면 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요나의 도망 계획은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려고 욥바로 내려갔을 때 자기를 기다리는 배를 본 요나는 감격하여 얼른 올라탔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아도 타이밍이 맞는 것을 과연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바다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내리막길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악한 니느웨 성의 수많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셨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한 사람을 찾는 일에 그들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하신다. 상상할 수 없이 거친 풍랑과 요나를 삼킬 물고기는 그를 위해 예비하신 것이다. 요나는 뒤집으면 ‘나요’가 된다. 내가 변하면 내 주변이 사는 것은 시간문제다. 

 

때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고민하게 만들고 도망칠 핑계를 찾게 한다. 사랑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돈을 왜 허비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더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법이다. 그러면 내 문제는 하나님이 친히 돌보아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려는 극약처방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상상할 수 없는 큰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겸비하게 나아가면 다시 한번 큰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17) “요나를 삼킨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오십시오”

 

물도 떡도 먹지 않은 모세·요나처럼 단식기도의 영적·육체적 유익 경험을…

 

 서울 홍제동 요나3일영성원 강단에서 3일 단식의 영적, 육적 유익을 설명하는 이에스더 목사.많은 분이 금식기도는 경험했지만 단식기도는 해보지 않아 잘 모른다며 설명을 부탁한다. 일반적으로 금식은 물을 마실 수 있고 단식은 물도 마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무엇을 금하는 금식이나 끊는다는 단식은 둘 다 완전한 스톱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물도 마시지 않고 떡도 먹지 않은 모세나 물고기 뱃속의 요나, 그리고 3일 밤낮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에스더와 3일간 식음을 전폐한 바울을 보면 물도 마시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내 몸을 드리는 희생의 기도이기도 한 단식은 영적인 유익은 물론이고 의학적으로도 매우 유익하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다. 단식 기간 중 혈액은 점점 알칼리성으로 바뀐다. 산성체질인 사람이 단식 때 구토현상을 보이는 것은 갑자기 몸에 대량으로 생긴 산성을 미처 배설하지 못해서 비상수단으로 산을 내보내며 몸을 약알칼리로 유지하려는 필사의 노력을 몸 자체가 하기 때문이다.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생리학 교수인 아이비 박사의 실험에 의하면 암 세포를 약알칼리성 혈액 안에 두면 3∼6시간 이내에 완전히 용해되고 만다고 한다. 

 

이에 따라 단식을 하면 뇌신경 기능을 활발하게 해주어 기억력이 좋아지고 두통 해소에도 도움을 준다. 단식을 마치고 생수를 마심으로 배설을 통해 독소와 노폐물이 거의 빠지면 소변의 색이 맑고 깨끗해진다. 그러므로 나는 이사야 58장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금식”은 급속한 응답으로 연결되는 것을 확신한다.

 

단식기도 후 회복기간은 단식 날짜 곱하기 2.5로 하면 좋다. 사실 단식기간보다 회복기간에 응답이 오기에 단식만큼이나 회복기간 기도가 중요하다. 30년 이상의 경험으로 보면 3일 단식기도에 7일 보호식 회복이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나3일영성원에서는 단식 기도자들을 온전히 돕기 위해 철저히 예약제를 시행한다. 정규 집회나 기도시간에는 누구나 언제든지 참석할 수 있지만, 단식하며 기도하기 위해 입소할 때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3년 전만 해도 “예약하고 오셨습니까?”라고 묻는 봉사자들을 붙잡고 “뭘 기도하러 왔는데 예약은 무슨 예약” 하면서 언성을 높일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여기는 한 분 한 분이 주님 앞에 요나가 되어 물고기 뱃속으로 기도하러 오는 곳이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시는 분마다 정해진 기도실로 안내를 해드립니다”라며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 전반에 걸쳐 예약제가 보편화된 시대라 이곳 예약제 역시 정착됐다.

 

영성원에 입소한 단식 기도자들은 전화연락을 일절 할 수 없다. 요나를 삼킨 물고기 뱃속에서 통화를 하려고 하면 안 된다. 예수님도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신 것처럼, 세상의 연락줄을 끊고 오직 주님만을 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단식 기간 중에는 외출도 안 된다. 세상이 그립다고 물고기 뱃속을 찢고 나가봐야 물에 빠져 죽는다. 만약 요나가 감사와 순종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면 뱃속에서 소화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단식 기도자들은 두 길이 아닌 오직 한 길을 택한 만큼, 영적인 물고기 뱃속 안에서 반드시 주님을 만나기 위해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참된 단식은 세상적 의지를 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구하는 것이다. 3일 단식기도는 육적인 신자에서 영적인 신자로, 타락과 멸망 직전에서 부활의 새 신앙으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3일 단식기도를 통해 인간적이며 육적으로 잠든 신앙과 퇴보하여 넘어진 신앙에서 일으킴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해 볼 것을 권한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18·끝) 금식기도는 식음 전폐 넘어 내 생각마저 끊어야

 

사람들 많은 문제 갖고 영성원 방문… 불순종 회개할 때 영·육의 은혜 얻어

 

 방송설교 ‘빛으로 소금으로’ 200회를 맞아 스태프들과 기념촬영을 한 이에스더 목사. 왼쪽 세 번째는 요나3일영성원 원목 장덕봉 목사다.나는 1995년부터 대구와 대전에서 라디오 방송설교를 시작했다가 서울로 올라와 2010년 11월부터 CTS TV 방송설교 ‘빛으로 소금으로‘, 1년 뒤에 CBS TV ‘영혼의 양식‘을 통해 시청자들을 만났다. 그러자 설교에서 은혜를 받은 분들 중에 요나3일영성원을 찾아와 단식하며 기도하는 분들이 늘어났다. 교회 목사님들도 이곳을 지정해 성도들을 보내시는 것을 보며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우리 영성원은 응급실이다. 오직 주만 바라보고 기도하게 하고, 서로 간에 잡담을 금지하고 오직 기도에 집중하도록 돕는다. 사실 단식 또는 금식 기도는 식음을 전폐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 생각까지 끊고 그 속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단식을 시작하면 몸속의 나쁜 세포들이 먼저 알고 화를 내며 데모를 한다. 하지만 건강한 세포는 오히려 좋아하며 휴식에 들어간다. 3일 단식 후에 장청소를 하면, 기도하면서 죄를 떨쳐버렸듯이 몇 년 동안 장에 붙어있던 찌꺼기들이 청소되면서 몸은 한결 가벼워진다. 

 

어떤 분은 장청소를 통해 각종 질병의 치료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보호식을 하면서부터 기도의 불이 붙어 힘을 다해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게 된다. 2014년 1월에 영성원을 찾아온 한 목사님은 “요나 뱃속 기도실이 산소방에 들어온 것처럼 냄새 하나 없이 청결했다”고 했다. 그 분은 “주님과 만나기에 딱 좋은 장소였음을 알게 되었다”며 힘찬 발걸음으로 목회현장을 향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겠다는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찾아온 사모님이 있었다. 그런데 3일의 단식기간 동안 말씀을 들으면서 “모든 문제가 바로 나 때문이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회개기도로 하나님이 강하게 이끄셨다고 했다. 

 

또한 가정의 어려운 문제와 순 식구의 류마티스 관절염 때문에 괴로워하며 기도하던 중에 영성원을 찾아왔던 한 자매에게 응답받는 기도의 3가지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다. 자매는 진실한 기도, 은밀한 기도, 믿음의 기도 중에 특히 진실한 기도가 강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기도시간에 진실하게 살기를 원하며 미워함으로 생긴 상처를 치유해 달라고 기도할 때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라 미움을 풀라 성령님이 탄식하신다”는 너무나 강한 감동이 자매를 사로잡았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남편을 미워한 것을 회개하게 되었고 그토록 오랫동안 묶여 있던 결박에서 풀려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요나3일영성원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문제를 가득 안고 찾아온다. 그러면서 주님과의 만남을 갈구하고 문제의 해결과 기도의 응답을 소망한다. 무엇보다 지금은 기도할 때다. 사면이 막혔어도 기도하면 열린 하늘을 보게 하신다. 모든 사람이 안 된다고 해도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는 믿음으로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 분명한 것은 ‘내가 요나’임을 깨닫는 것이 급선무다. 물고기 뱃속에서 순순히 항복하기만을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그리고 자신의 불순종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사모할 때 물고기에게 명하사 육지로 토해 내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요나의 체험이요! 기적이요! 응답이다. 

 

생각할수록 부족한 나를 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 이 글이 연재되는 동안 많은 분들로부터 격려전화를 받아 감사드린다. 앞으로 요나3일영성원은 주님을 더욱 뜨겁게 만나길 원하는 분들, 영적으로 갈급한 분들, 하나님의 응답과 치유가 필요한 분들을 위한 ‘119 영적소방대’가 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할렐루야!  

 

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