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장 1~12절) 김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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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대해 많은 명언들이 있는데 제가 최근에 접해본 문구는 그리스 고대 철학자인 세네카(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경)라는 철학자의 말입니다. 참고로 세네카는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인생은 흐른다』는 책에서 인생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남을 부러워 하지도 말고, 남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도 말라. / 자신의 길은 남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 정하라. / 과거는 망각의 손에 맡기고 미래는 신의 손에 맡기면 된다.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은 오직 현재 뿐이다 / 문제는 우리의 수명이 짧은 것이 아니라 인생의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한 데 있습니다. 인생은 충분히 깁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치를 즐기고 무관심하게 살면서 선하지 않은 목적을 추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합니다.”
세네카가 남긴 말 중에서 우리가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사는 시간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인생을 허비하려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기회의 시간을 주어도 다 허사일 뿐입니다.
무한한 영생에 비하면 우리 인생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이 찰나의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100년 정도의 인생의 시간은 그렇게 짧은 시간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가득 합니다. 의미와 가치를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중요한 삶의 이유가 영생의 나라로 가기 위한 준비 기간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생에는 기쁨과 영광과 감사와 은혜가 한 없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 일 분 일초를 허투루 허비하지 말고 회개와 돌이킴을 꾸준히 하며 영생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천국 문을 향하여 묵묵히 한 걸음씩 나아가시는 거룩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전도서는 인생의 허무함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세상의 부귀 영화을 쫓아가기 보다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것이 참 되고 복된 인생이라는 교훈이 기록된 책입니다.
솔로몬은 이 단순한 진리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고서도 지키지 못하고 부귀와 향락과 여인에게 취해서 다 빼앗기고 허비한 인생을 살다가 인생 막바지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내 인생이 얼마나 허비 되고 있는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복음 앞에 다시 마음과 생각이 돌아서는 기회를 삼으셔야 합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의 시간을 후회 없이 살아가려는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해 아래 인생의 허무함을 세 가지 상황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 째 단락에서는 학대(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위로자가 없는 인생의 허무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을 읽어 드립니다.
“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2.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아멘
이번 단락을 포함해서 “내가~보았다” 라는 표현이 반복 됩니다.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은 자신이 직접 자세하게 목격한 사실을 기반으로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전도자가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학대가 자행 되는 것이 목격 되었습니다. 학대 받는 자들은 학대로 인하여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대를 하는 자들은 권세를 손에 쥐고 학대 하는 것을 멈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학대 받는 자의 인생은 그야 말로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이 고통스러웠고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로 비침한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이 모습을 관찰한 전도자가 말하기를, 저토록 학대 받는 자들 보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자가 참으로 행복한 자들 이구나,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이토록 끔찍한 학대를 보지 못한 자들은 더욱 더 행복한 자들이구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견디기 힘든 상황을 맞이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이런 넋두리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욥이 극심한 고난을 당하여서 차라리 모태에서 출생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부르짖은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전도자가 목격한 학대의 상황이 얼마나 심하였는지 조금은 짐작이 되실 겁니다.
권력, 자리, 그리고 돈, 이 세 가지는 타인의 인생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가진 힘으로 권력을 남용하고, 더 이익을 취하려고 남의 것을 강탈하고, 비열한 방법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것을 즐겨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남을 학대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자들은 그래도 된다 라는 무식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학대가 무지막지한 절대 권력자만이 가지고 있는 무기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자신도 사실 별로 가진 것이 없으면서 남보다 조금 나은 한 줌의 힘과 권력으로 남을 못살게 굴고 학대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소위 갑질이라는 상황을 보면 자신도 그리 잘난 것이 없으면서 타인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들을 많이 봅니다.
학대 받는 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으며 마음의 상처는 깊기만 합니다. 이때 학대 받는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본문에서도 학대 받는 자를 위로해 줄 자가 아무도 없다고 두 번씩이나 강조 합니다. 그만큼 이 세상은 학대 받는자의 편이 아니라 학대하는 자들의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학대를 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학대를 받는 자입니까? 우리는 언뜻 힘도 없고 권력도 없어서 학대를 받는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학대 하는 자의 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나보다 조금이라도 못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려는 의도 되지 않은 반응이 수시로 튀어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학대를 받는 자인 동시에 학대를 하는 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 학대를 받는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위로 받아야 눈물이 멈출 텐데, 위로 받아야 마음의 상처가 아프지 않을 텐데 내 주변에는 도무지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한 번 일주일 동안만 아무런 전화나, 문자나, 연락이나, 만남이나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과의 연락을 끊은 채 한번 조용히 지내 보십시오, 나에게 누가 어떤 연락을 해 오는지 한번 보십시오. 사람 숫자도 적을뿐더러, 나를 걱정해 주고, 나를 살펴 주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만 관심 주는 척 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나를 사랑해 주고, 위로 해 주고, 지속적인 보호를 해 주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위로자가 절대적으로 필요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삶의 곤고함을 살펴 주시고 항상 동행하며 위로의 마음을 전해 주시는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고아도 아닙니다. 나를 끔직하게 사랑하여 주시고, 찐하게 위로하여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 항상 대기 하고 있음을 기억 하십시오.
여러분 삶이 무척 힘드시죠. 하루 하루가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가고 있으시죠. 점점 외롭워 지시죠.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학대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위로 해줄자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에게 위로 받으려고 나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로를 요청 하십시오. 위로 받고 싶은 마음으로 부르짖으십시오. 성령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까지 통달하셔서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을 다 이해 하시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우리가 쏟아내는 학대 받은 이야기를 다 들어 주실 겁니다. 성령님 한 분 밖에 위로자가 없습니다. 나를 위로 주실 분이 단 한 분 뿐이지만, 그 한 분이면 충분한 위로와 기쁨과 소망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점점 악하고 무서운 세상에서 나를 돌보와 주고 위로해 주실 이는 위로자 성령 하나님 뿐이심을 늘 기억 하시고, 성령으로 위로 받고, 성령으로 치유 되고, 성령으로 죄와 악에서 보호 받고, 성령으로 믿음의 마음을 굳게 지켜 가는 ‘위로 받는 자의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 째 단락에서는 평안의 마음을 얻기 힘든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4~6절을 읽어 드립니다.
“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5.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6.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아멘.
이 말씀은 사람들이 일생 동안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 때문임을 지적합니다. 나름 대로 열심히 살아서 여유롭고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웃 사람들은 그가 열심히 살아온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가 수고하고 능력을 인정 받은 것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말들을 쏟아 냅니다.
“성공했다고 사람 우습게 보는 거야, 돈 좀 있다고 사람 무시하는 거야, 좀 잘 되었다고 거들먹 거리는 거 봐” 이런 식의 말들을 들을 때 그냥 그려러니 하기에는 이웃 사람들의 말들이 신경이 쓰여서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잘 산다고 살아도 이런식으로 마음의 평안을 깨트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차라리 게으르게 사는 것이 낫다는 말은 아닙니다. 5절에서 우매자가 팔짱만 끼고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의 무지몽매한 삶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게으른 자는 자기 몸만 축낸다고 했습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제일 심한 말이 “밥 벌레, 식충” 이라는 말일 텐데, 자기 몸만 축낸다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하고 불쌍한 최악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럼 참 고민에 빠집니다. 열심히 하자니 시기 질투에 마음이 평안할 날이 없고, 아무 것도 안 하자니 자기 몸만 축낸 다고 비난을 받아 마음이 평안할 날이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요? 이래도 저래도 문제 많은 인생이기게 전도자는 마음이 평안하지 못한 인간의 허무함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6절을 보시면 노동을 열심히 하여 재물을 많이 얻으려고 평안할 날이 없이 빡빡하게 사는 것보다, 조금 덜 가졌어도 조금의 여유와 평안을 누리며 사는 것이 잘 사는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심과 탐욕, 그리고 시기외 잘투에서 비롯 되는 것이며,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재물은 모두 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노동도 선물이요, 제물도 선물임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감사가 넘치고, 예물 드림이 기쁘고, 나누고 베푸는 것을 즐겨할 수 있게 됩니다.
일, 일, 일, / 돈, 돈, 돈, / 없어, 부족해, 모자라, 이런 생각이 가득하면 마음의 평안은 도저히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그토록 부자 였음에도 인생이 헛되고 헛되다라고 쓴 이유는 돈과 재물이 결코 평안과 기쁨의 절대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삶은 평안도 없고 소망도 없고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고 그저 후회와 미련만 남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내 안에 충만하게 임재 하실 때, 그리고 내가 하나님 품 안에 깊이 안겨 있을 때 뿐입니다. 솔로몬은 철저하게 인생의 시간허비한 후에야 그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에 탐욕, 시기, 질투가 가득하기 때문이며, 게으름, 나태함, 낙심과 절망에 붙들려 쉽게 포기하는 마음을 갖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평안을 얻지 못하고 괴로워 하는 것을 결코 방치하거나 모른체 하고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평안을 주시려고 항상 대기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내 눈, 내 마음, 내 생각, 내 몸까지 하나님만을 향하여 집중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거짓말 같이 평안이 찾아 옵니다.
세상은 나를 속이고, 서럽게 하고,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지만, 하나님은 오직 평안만을 안겨 주십니다. 그 평안을 구하고, 받아서 누리는 자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입니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그 평안은 간절함으로 구하는 자가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하면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 하셨습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인생의 시간을 무의미 하게 그냥 흘려 보내면서 탐욕과 시기 가운데서 헤매이다가 헛되고 허무하게 인생을 마치는 자가 아니라, 매일 같이 심령 천국으로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풍성하게 누리며 꿋꿋하고 당당하게 영원한 본향을 향해 나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락에서는 사랑하고 헌신할 대상이 없다는 것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목격한 내용입니다. 세 번째 단락인 7~12절 중에서 먼저 7~8절을 읽어 드립니다.
“7.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아멘.
이 단락에서 인생이 헛된 것은 자신에게 상속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죽도록 일하여서 재산과 부를 쌓았는데, 물려줄 아들이 없습니다. 양자도 없습니다. 형제도 없습니다. 친구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탄하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일벌레처럼 살았는가, 나는 과연 행복하지 못한 불행한 사람이었구나, 내 인생이 참으로 허무하구나. 다 헛된 것 뿐이구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맞벌이들을 많이 하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가족을 위해 정말 기계처럼 일만 했는데 남은 것은 하나도 없고 돌아오는 것은 냉대와 무시와 귀찮음으로 자신을 상대하는 가족들을 볼 때 참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남자의 경우에 특히 직장을 그만 두고 돈벌이가 없을 때 그동안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것은 다 사라지고 당장 가족들 눈치나 보며 오갈곳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중년의 남자들 많이 봅니다. 정말 자신의 헌신의 냉대가 철저한 무관심으로 돌아올 때면 참으로 비참해질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타인을 위해 죽도록 수고한 희생이 가져다 주는 것은 버림 받은 인생과 낙오자 취급을 받는 다면 그저 죽고 싶은 마음 뿐일 겁니다.
그래서 농담 섞인 진담으로 하는 말들이 “돈 많으면 죽을 때까지 왕으로 살고, 당장 돈 벌어다 주면 최소한 식사를 대접 받는 인간 대우를 받고, 돈벌이가 없이 집에만 있으면 걸리적 거리는 물건이 된다”라고 합니다. 이런 말들을 보게 되면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어느 누구라도 고독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다는 외로움은 곧 절망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든지, 돈이 없든지, 오갈 데가 없든지 인생의 마지막에 오는 이러한 고독과 외로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9~12절을 읽어 드립니다.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오늘 말씀에 나오는 위로 받지 못한 사람들, 마음에 평안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어디 가서 누구에게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문제 투성이인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서 해결해 주셨고, 이제는 자신의 죽음과 희생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 곳에서 문제 투성이인 자들이 함께 모여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와 용기를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위로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함께하는 공동체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 보다 낫다, 넘어지면 일으켜줄 동무가 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다, 이러한 말씀들 속에는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 냉대와 무시와 차별과 외로움을 이겨 낼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 것입니다.
“함께” 한다는 의미가 제대로 함축 되어 있는 말씀이 12절입니다. 함께 큰 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아멘.
12절은 기도를 이야기 할 때 꼭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삽결줄 중보 기도, 삽겹줄 기도특공대”, 이런 구호를 많이 보셨을 겁니다.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중단되지 않는 기도로 연결되는 것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우리의 외로움, 고독,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쓸쓸함, 이러한 인생 말년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곳이 공동체, 곧 교회 인데, 과연 교회 공동체가 이러한 함께 한다는 의식, 그리고 도움 주고, 도움 받는 위로가 느껴지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누구를 이야기 할 것 없이 내 자신이 삽겹줄 속에 포함 되어 있어서 다른 누군 가의 허약하고 나약한 줄과 하나되어 그를 도와 주고 위로해 주어서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는 삽겹줄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우리 교회들이 삽겹줄로 하나 되어 가기는커녕 “따로 또 같이”라는 말처럼, 모일 때만 하나인 것 같으나, 흩어지면 각개의 한 줄이 되어 그냥 살아가지 않습니까? 삽겹줄이 정말 삽겹줄이 되어야지 거창한 구호를 외친다고 해서 삽겹줄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붙잡을 삽겹줄은 사람이 하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겹겹이 이어진 줄로 하나가 된다면 그 줄은 절대로 끊어지지 아니하는 삽겹줄이 됩니다. 내가 먼저 단단한 줄로 역어진 후에야, 외로움과 고독으로 방황하는 누군가에게 두겹, 세겹 줄을 연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이 가진 줄로는 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혼자 싸워서는 절대로 사탄, 마귀, 귀신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쉽게 끊어지지 않는 삽겹줄로 하나 되라고 교회 공동체가 세워진 것입니다.
앞서 집안의 가장을 비유로 했는데, 교회도 마찬 가지입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위해서 정말 헌신하고 수고했는데 그 교회가 삽겹줄로 하나 되지 못하고 제각각 흩어지기만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삽겹줄이 되어지기를 소망하며 죽도록 헌신하고 수고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말 허무하고 외롭고 고독함을 느낄 것입니다. “내가 이런 모습을 보려고 그토록 헌신하고 수고를 했던가” 라고 생각하며 죽고 싶도록 낙심과 절망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게 내밀어 주시는 사랑의 삽겹줄, 은혜의 삽겹줄, 위로의 삽겹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곁에 있는 동무와 친구들은 언제 든지 줄을 끊고 도망갈 수 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끊어지니 아니하는 삽겹줄로 나를 단단히 묶고 계심을 기억 하십시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다시 그 줄을 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삽겹줄은 처음에 한 줄로 시작합니다. 한 줄 한 줄이 모여 세줄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소중한 한 줄 한 줄 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 안에서, 믿음 안에서 하나 된 우리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끊어지지 아니하는 삽겹줄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끊까지 함께 하려는 마음, 인내하고 감당하려는 마음, 진심으로 위로해 주려는 마음, 그리고 사랑하려는 마음이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내 줄을 먼저 내 밀고 그 줄들이 하나로 엮어서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는 헌신과 순종의 삽겹줄이 되어 가기를 바랍니다.
오늘 전도서 말씀을 통하여,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늘의 위로와 평안을 풍성하게 받으시고,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들이 회복되고 온전케 되는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는 삽겹줄로 묶여지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가기를 소망하며, 간절히 기도하며, 맡겨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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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곤고하고 평안이 없고 외로움에 시달리는 허무한 인생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늘의 위로와 평안의 은혜로 우리의 연약함을 싸매 주시고, 사랑의 삽겹줄로 하나 되어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는 공동체로 세워지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위로와 평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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