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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장로회

열려라 에바다 2023. 12. 22. 14:07

*** 한국기독교장로회( 韓國基督敎長老會, 기장 ) ***

한국의 장로교는 미국 북장로교 등 4개의 외국 선교부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전래되어 일제의 심한 압박 속에서도 단일 교단을 유지했다. 그러나 8·15해방과 더불어 신학노선의 차이, 신앙의 경건성 문제, 교회정치의 문제 등으로 분열을 거듭했다. 이는 곧 한국기독교장로회를 탄생시킨 배경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열은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조선신학교(한국신학교의 전신) 교수들의 신학 사상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신학교측의 자유주의적 신학 경향에 대한 비판이 8·15해방 이후 표면화되면서 1949년 6월 서울에서 장로회신학교가 박형룡을 교장으로 개교하면서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1949년 남부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지정하고 1951년 대구에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통합·폐교한다는 의도로 총회신학교를 개교하자 조선신학교는 이에 불복했다. 오히려 조선신학교는 1952년 한국신학대학으로 개칭하여 새롭게 출발했다.
1952년 4월 대구에서 가진 제37회 총회에서 성서오류설을 주장한 김재준을 경기노회에 명하여 목사직을 제명시키자 이에 9개 노회의 대표 47명이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 강당에 모여 기독교장로회의 창단 이념과 강령 등의 선언서를 채택하여 공표했다. 이듬해 6월 1일 교단의 명칭을 대한예수교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고치고, 1956년 여장로제도를 채택했다. 1957년 한국기독교연합회에 가입했으며, 한국신학대학을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자동에서 강북구 수유리로 이전했다.
1961년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WCC) 세계대회에서 강원용이 실행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정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이때 교파명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개칭했다. 1970년대 독재정치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 신앙과 양심의 수호를 위해 3·1민주구국선언을 주도하는 등 정부와의 잦은 마찰로 한국신학대학의 학생과 교수, 교역자들이 수차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80년 기독교장로회의 신학교육을 담당한 한국신학대학이 한신대학으로 종합화되었다.
기독교장로회는 교육정책과 지침서(1970), 사회선언지침(1971), 신앙고백선언서(1972), 선교정책(1973) 등 교단의 기본 신학과 선교방향을 제시한 문서 등을 남겼다. 총회 산하 13개의 노회와 월간 〈기장장로회보〉를 발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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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준(金在俊) **


* 출생 : 1901년
* 사망 : 1987년


장로교 목사이자 신학자.
호는 장공. 일본 아오야마[靑山]신학부를 졸업한 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구약학으로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하여 193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성서를 가르쳤다.
1935년 '아빙돈(Abingdon)단권성경주석사건'이 일어났을 때 송창근(宋昌根)·한경직(韓景職)과 함께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8·15해방 이전에는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 비판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한국신학계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로 부각된 것은 8·15해방 후 조선신학교를 세우면서부터이다. 즉 그는 1947년 성서비평에 입각하여 모세오경 저작 문제와 십계명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강의했다.
이러한 신학적 해석에 대해 당시의 보수적 학생들의 항의를 받게 되었고, 이 사건이 비화되어 1952년 장로교 총회에서 제명되었고, 1953년 기독교장로회가 별도로 분립되었다. 그는 이 교단에서 자유로운 신학 연구와 강의를 했으며 한국신학대학의 신학적 배경을 성립시켰다. 1970년대부터는 사회문제에 적극 관심을 보여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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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환(文益煥) **

* 출생 : 1918년
* 사망 : 1994년
호는 늦봄. 만주 북간도 출생. 목사인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의 3남 2녀 중 장남이다. 3·1운동을 전후하여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북간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만주의 한인들이 세운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 북간도의 용정광명학교를 다녔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본의 동경신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학병 거부로 퇴교되어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전학하였고 그 뒤 한인교회 전도사로 일하였다. 1947년에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성서의 구약 번역책임자로 8년 동안 일하였다. 1976년 명동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민주화투쟁에 나섰으며, 1980년 내란예비음모죄로 다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민주·통일국민회의 의장(1984년)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1985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1989년), 범민련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1991년), 제4차범민족대회 대회장(1993)을 역임하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매진하다가 1월 18일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익환의 삶의 과정을 볼 때, 무엇보다 성직자(목사)와 신학자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목사 안수를 받기 이전부터 만주의 만보산한인교회와 신경한인교회, 구미교회, 을지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일했고, 한빛교회와 갈릴리교회에서 목사로 일하는 등 개신교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또한 구약학자로서 16년 동안 대학의 교단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특히 구약 성서의 번역에 공헌하였고, 그 과정에서 시인으로 등단하여 7권의 시집과 많은 수필집, 산문집 등을 출판하였다. 그는 절친한 친구였던 장준하의 횡사 이후 「3·1민주구국선언」을 기초하면서부터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섰다.
그의 활동은 1978년 유신헌법비판성명서 발표, 1980년 YWCA 위장결혼사건, 1986년의 인천 5·3사건과 서울대학교 연설 사건으로 이어졌으며, 그 뒤 통일운동에 매진하여 재야 통일관련 단체의 구심점이 되었다. 특히 1989년에는 실정법을 어기고 방북하여 김일성을 면담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들로 인해 여섯 차례 투옥되어 10여 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92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같은 해 제3회 4월혁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에 『새삼스런 하루』(1973), 『꿈을 비는 마음』(1978),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한 하늘 두 하늘』(1989), 『옥중일기』(1991) 등이 있고, 수필집에 『새 것, 아름다운 것』(1984)이 있으며, 『꿈이 오는 새벽』(1984), 『통일을 비는 마음』(1989), 『히브리 민중사』(1990), 『가슴으로 만난 평양』(199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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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로고 **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연합)와 온 세계(오이쿠메네), 에큐메니칼(일치) 정신을 상징합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기장'의 약자를 상징합니다.
화살표는 나아가는 화살처럼 새 질서를 향한 희망의 전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젊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인내, 정의를 상징합니다.

평화와 부활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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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6월 10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새 역사 5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엠블럼.
총회는 새 역사 50주년(희년)을 맞이하여 '희년선포문'을 발표하였다..


2003년 2월 10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우리는 1953년 “복음의 자유, 신앙 양심의 자유, 자립·자조의 정신, 세계 교회 정신”을 널리 선포하고 장로교 신조와 신앙 전통의 맥을 이어 “한국기독교장로회”로 출범하였다.
지난 50년 간 우리 기장은 어두운 역사에 잠겨있던 이 땅에 새 날을 밝히며, 새 역사를 이루어 가는 생명탑을 쌓기 위해 노력해 왔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 땅 위에 실현하고, 창조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하늘의 씨앗들로 살면서 이 역사의 생명을 이어 나가기 위하여 십자가 기도의 행진과 함께 눈물로 복음의 씨를 뿌려왔다.
우리는 2003년 새 역사 희년을 맞이하여, 우리의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첫 출발의 다짐과 고백을 되새겨, 오늘의 현실을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아가는 교회가 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약속의 새 땅에서 하나 되어”를 우리의 주제로 삼고,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 위한 첫 발을 내딛는 원년으로 삼으려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로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새 하늘 새 땅’을 향한 행진을 하기 위하여 우리의 기도를 모으고 결의를 다지는 “새 역사 희년대회”를 시작하며 우리 기장의 희년을 선포하고자 한다.
새 역사 희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이 새 역사 희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만민에게 증거하는 교회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적 사명을 다하며, 동시에 희년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화 되도록 다음의 선교 과제를 기장 공동체의 기도 제목으로 고백한다.
성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1. 파괴된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 회복시켜 이 땅이 생명공동체가 되도록 정의와 평화를 구현한다.
2. 물신숭배와 폭력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전환시킨다.
3. 분단된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일구어낸다.
4. 분열된 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고백하여 일치를 이룬다.
5. 교회를 갱신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룬다.
6. 남녀간의 평등과 세대간의 화합을 도모한다.
7. 이웃사랑 정신으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한다.

 

* 엠블럼(emblem) *

어떤 기관이나 단체, 기업의 개념, 의도, 지향, 정체성 등을 나타내는 시각적인 상징. ‘엠블럼(emblem)’은 원래 고대 그리스어로 돌, 나무, 금속 등에 ‘무언가를 새기다’라는 의미인 'emblema'에서 유래했다. 중세 시대에는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기 위한 표지를 깃발, 방패 등에 수놓거나 새겼으며 이런 표지들이 후일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발전했다. 르네상스 이후 출판업자들이 자신의 출판물임을 표시하는 마크를 출판물에 새겨 넣기 시작했는데, 이 마크가 상업적인 의미에서 엠블럼의 사용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의 엠블럼은 학교, 자동차, 기업, 조직 등의 정체성과 상징을 담는 시각적 표현물을 의미한다. 보통 엠블럼은 문자(logotype)와 이미지(symbol)로 구성된다. 넓은 의미의 엠블럼에는 기장(紀章/記章), 로고, 마스코트, 문장(紋章), 상표 등도 포함될 수 있다. 종종 엠블럼과 심볼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거나, 서로 다른 문맥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십자가는 기독교인의 상징(symbol)인 동시에, 기독교의 희생정신을 상징하는 큰 의미의 엠블럼이기도 하다. 적십자는 국제적십자사(International Red Cross)의 공식적인 엠블럼이면서, 또한 인도주의 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엠블럼은 그 주체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1088년에 설립된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의 엠블럼에는 건물 속의 여러 방에 있는 사제들의 모습이 들어 있다. 1167년에 설립된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은 성서를 바탕으로 ‘DOMINVS ILLVMINA TIO MEA’(‘주님은 나의 빛’이라는 의미의 라틴어)가 새겨져 있다. 즉 당시에는 종교가 학교의 설립과 지향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자동차의 엠블럼은 상품 자체의 브랜드를 상징화하는 척도였다. 자동차 산업 초기의 엠블럼은 겨우 제작회사 이름을 알리는 정도였지만, 1960년대 들어 엠블럼은 자동차의 가치를 보여주는 브랜드로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자동차에서는 동물이 엠블럼의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페라리와 포르쉐는 말을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고, 람보르기니는 황소, 애스톤마틴은 새, 재규어는 재규어, 사브는 그리핀, 푸조는 사자를 상징으로 쓰고 있다.
일본 도요타와 혼다, 한국의 현대와 기아는 회사 이름의 첫 글자나 이름 자체를 엠블럼의 소재로 사용했다. 베엠베는 항공기의 프로펠러가 도는 모양에서 따왔고, 벤츠의 엠블럼은 다임러 사의 세꼭지 별과 벤츠 사의 월계수 원이 합쳐져서 원 속의 삼각별이 되었다. 아우디 엠블럼의 네 개의 링은 아우디로 합병된 아우디(Audi), 데카베(DKW), 호르히(Horch), 반더러(Wanderer) 등 4개의 자동차 회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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