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다의 대학살
로마의 유대인 요새 포위전은 학살과 자살로 끝난다.
73년 4월 15일, 당시 로마의 속주 유다에 있던 사해 근처 언덕 꼭대기의 한 요새에서, 960명의 유대인 남자, 여자, 어린이가 지도자의 명에 따라 무시무시한 죽음을 맞았다. 그들은 '시카리'라는 이름의 극단주의 단체 소속이었다.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그들은 66년에서 70년에 걸친 유대인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로마의 유다 통치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 왔다.
마사다에서 그들이 차지한 요새는 난공불락일 것 같았다. 곡물 창고와 저수지가 있어 식량과 물 공급이 안정적이고, 어쩌면 반란군은 여러 해에 걸친 포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듯했다. 언덕을 올라오는 유일한 길은 위험하고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72년에서 73년에 걸친 겨울, 로마 군단은 200m 위쪽 언덕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비탈진 경사면을 지었다. 봄이 되자 로마군은 경사로 위로 강력한 투석기와 성문 파괴용 대형 망치를 장착한 공성탑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패배를 마주한 엘리아자르는 로마의 손아귀에 드느니 자살하는 편이 낫다고 부하들을 설득했다. 제비로 열 명의 시카리 전사를 뽑았고, 이들이 남은 이들을 죽이고 최후에는 서로를 죽이는 임무를 맡았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다음 날 성벽을 돌파하고 들어간 로마군은 충격을 받았고, "태연하게 죽음을 경멸한 그들의 태도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사다 항전은 A.D.70년 경에 일어난 유대인들과 로마군의 전쟁이다. 마사다는 이스라엘 남부의 암층 지대에 위치한 고대 요새이다. 마사다의 높이는 해발 40m에 불과하지만 동쪽으로 인접한 사해가 해수면보다 400m 낮기 때문에 실제 요새의 높이는 440m 정도이며, 서쪽 절벽은 약 90m로 매우 가파른 난공불락의 지형이다. 요새를 둘러싸고 있는 방호벽은 1.3km이며 방호벽의 평균 높이는 3.7m이다. 방호벽에는 감시를 위한 망루들이 있으며 내부에는 창고, 병영, 병기고, 궁정, 저수조 등이 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A.D.37-100)의 기록에 따르면 B.C.37년부터 B.C.31년 사이에 헤롯 왕(Herod, B.C.73? B.C.4 재위)이 반란에 대비하여 마사다를 요새화 했다. 마사다 요새가 유대인과 로마의 전쟁 무대가 되기 시작한 것은 A.D.66년이다. 시카리(Sicarii), 혹은 열심당(Zealots, 젤로트 黨)으로 불리는 유대인 저항 집단을 중심으로 로마군의 유대영토 주둔에 반발하는 무력투쟁이 발생했으며, 열심당원들은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마사다 요새로 피난하여 그 곳을 저항의 근거지로 삼았다.
마사다 요새를 근거지로 하는 유대 저항군의 로마 정착촌 급습이 빈번하게 일어나 피해가 커지자 로마 총독 루시우스 플라비우스 실바(Lucius Flavius Silva)는 로마 보병군단인 제 10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 요새 주변에 8개의 진지를 구축한 뒤 공격을 시작했다. 방호벽을 파괴하는데 수 차례 실패한 끝에 로마군은 요새를 포위하고 약 6천명의 유대인 노예를 동원하여 서쪽 측벽에 공격을 위한 누벽(壘壁)을 세웠다. 당시 마사다 요새 안에는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Elazar ben Yair)가 이끄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960명의 열심당원들이 남아 항전의 의지를 끝까지 불태우고 있었다. 풍부한 물과 곡식이 저장되어 있었으므로 로마군의 집요한 공격에 대응할 수 있었다.
A.D.73년에 누벽이 완성되었으며, 약 3개월간의 공략 끝에 A.D.73년 4월 16일 마사다 요새의 성벽이 무너졌다. 마사다 요새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적의 노예나 포로가 되느니 자결할 것을 호소했으며, 이에 동의한 저항군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죽이고 다시 모여 열 사람씩 조를 짜서 제비뽑기를 통해 한 사람이 아홉 명을 죽이는 방식으로 죽음의 의식을 반복해서 치렀다. 최후의 한 사람은 전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성에 불을 지른 후 자결했다. 결국 마사다에 입성한 로마군은 936구의 시신만을 보게 되었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하 동굴에 숨어있던 두 명의 여인 뿐이었다. 이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함으로서 마사다 항전의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었다.
실제로 1965년부터 1963년 사이에 독일계 이스라엘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의 마사다 유적 발굴 결과 요새 내부에는 저항의 흔적과 참수된 유골 및 머리카락 등이 발견되었다. 오늘날 마사다 유적은 유대인의 저항정신을 반영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긍심과 단결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마사다 요새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활활 타오르는 꽃들의 잔치로 울긋불긋 온통 물들일 것 아니 겠나 겨울이 없다면 희망도 없는 것 인생의 봄도 그렇게 힘든 고통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낮아지고 더이상 낮아질 곳이 없을때 따스한 봄이 찾아 오는 거라고 함박눈 덮어쓴 겨울의 나무가 그렇게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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