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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기도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15)

열려라 에바다 2023. 12. 23. 12:37

주기도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15)

누가복음은 제자 중 하나가

요한이 그의 제자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처럼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하자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신다(눅11:1).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외식하는 자의 기도와

대비되는 기도를 가르치시는 중에 주기도문을 언급하신다(마6:5-8).

외식하는 자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모세 제자들이다.

따라서 외식하는 자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의 특성을 가리키는 별칭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 내용인 율법에 부착하면,

그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외식으로 나아간다.

이는 율법이 육체와 상관된 육체의 예법이기 때문이다(히7:16, 9:10).

이는 여호와께서 사람 판정관을 통해서 언약에 신실한 여부,

곧 율법을 준수한 여부를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 판정관을 세우셨는가?

구약의 하나님 나라 통치체계가 간접통치체계이기 때문이다.

휘장의 장벽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는 수렴청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외식하는 길로 나아갈 수가 있다.

그런데 율법은 헌법인 십계명과

하위법률로서 시행세칙인 장로들의 규례와 유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장로들의 규레와 유전을 따라 정해진 시간에 성소를 향하여 기도하였다.

구제할 때에도 율법을 따라 정한 방식과 규정을 따라 시행하였다.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사람 판정관을 통해서 구제와 기도를 신실하게 행하였는지를 판단하여,

장로들의 규례와 유전을 따라 기도하고 구제하였는지를 판정하여,

언약에 신실한 의로운 자로 판정하셨다.

이는 사람 판정관의 판정은 여호와의 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 외식하는 자들,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 경건한 백성들의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는 기도이다.

 

누가복음은 고난을 받는 의인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성령을 부으셔서 모든 백성을 하나님 백성으로 세우는 의로운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의인들’과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요한’과

‘찬미하며 기도하며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는 제자들’을 주로 다룬다.

예수께서도 항상 기도하시며 제자들에게도 하늘의 아버지께 강청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러면 하늘의 아버지께서 좋은 것 성령을 주시리라 말씀하신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에 있는 남은 자와 모든 민족을 복종케 하시는 종말의 천국 복음이다.

그러나 율법에 부착한 외식하는 자들은 예수를 대적하고 거절한다.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에 소동하며 거부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에 있는 남은 자.

율법 아래에서는 나중 되고 작은 자인 이방의 갈릴리 출신 사람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과 여자들과 같은 자들을 천국 백성으로 세우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아들(자녀)로 세우신다(갈4:5).

그러므로 예수의 공생애 사역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역이다.

공생애 기간은 율법의 통치가 그리스도의 통치로 전환되는 과도기이다.

이는 율법의 통치가 종결되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 교체기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 백성의 경건을 가르치실 때,

항상 율법 아래에 있는 외식하는 자들의 경건과 대비하신다.

기도에 대해서도 외식하는 자와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종말에 아들을 통해서 비로소 참되고 온전한 뜻을 나타내신다.

구약에서는 휘장의 가리고 계셨으나

종말에는 율법 아래에 보내신 그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로 나타내신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는 어떤 의미인가?

옛 경륜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과 임재하심을 나타낸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이름에 대한 의미이다.

가령 하나님께서 단을 지으라고 명하시고

    “이 단을 내 이름으로 칭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단에 임하실 것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여호와의 제단, 회막이 여호와의 이름이 칭하여졌다면,

이스라엘과 제단, 회막은 여호와께서 임하신 처소이며 거처이다.

여호와의 이름은 언제 맨 처음 나타나는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족장들에게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여호와로는 나타낸 적이 없다.

     나는 여호와로라”

고 자신을 증거하신다.

이처럼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로라고 칭하시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계시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거기에 나타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시점과

구원하는 일에 여호와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부르는 하나님 이름이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에덴에서 아담과 함께하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할 때 언급되어서 나타난다.

따라서 여호와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서 그들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러므로 이름을 거룩히 한다는 말은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다.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는 것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시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난다.

하나님 이름의 등장은 하나님 자신의 나타남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은 항상 함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 이름을 부르고 즐거워하면

여호와의 이름은 열방 중에 높아지게 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율법에 부착하는 삶을 살면

여호와의 이름은 만국 중에서 높아진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으로 영광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옛 백성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는 부르지는 못하였다.

이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로 인한 휘장의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옛 백성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시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시는 것은 그 이름대로 하나님이 되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 이름의 거룩함은 모든 피조물과 우상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창조주에게만 합당한 존귀와 영광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대로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 되셔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과 영광, 거룩함은 구원받은 백성과 함께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게서는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려고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소유한 구약의 하나님 나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맡기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을 범하여 이방의 포로가 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이름은 바벨론과 우상에게 조롱을 받으셨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내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낼 신은 없다고 교만하게 말하고

벨사살왕도 성전 기물로 술을 마시며 여호와의 이름을 조롱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 언약에 신실하신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중에서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모든 민족 위에 높여서 영광스럽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만국을 복종케 하셔서 더럽혀진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셨다.

이것이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종말의 구원이다.

이러한 선지자들을 통한 약속을 따라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구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율법 아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공생애 사역은 율법을 지키거나 순종하신 사역이 아니다.

이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

종(머슴)인 이스라엘의 완악한 수준에 맞춰서 주어진 율법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이다.

예수께서는 온전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르치고 행하셔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고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예수의 가르침은 아버지의 음성이며 예수의 사역은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일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아버지라는 호칭을 언급하신다.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은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함을 드러내신 일이다.

이러한 영광과 거룩은 이전의 율법 아래에서는 봉인되었던 것들이다.

구약백성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다.

예수께서 순종하신 아버지의 뜻은

개혁신학(칼빈주의 신학, 장로교 신학)의 가르침처럼

예수께서 인간이 지킬 수가 없는 율법을 지키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이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율법 아래에 보내셨는가?

이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함이다.

율법의 요구는 죽음이다.

율법 아래에서 죽음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던가?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예수께서 율법의 요구를 따라 죽음을 죽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과는 다른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행함으로,

율법을 고수하는 산헤드린 공회에 의해

율법과는 다른 이단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괴수로 정죄가 되어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죽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의 자리에 앉히신다.

그리하여 아들을 믿고 따르는 자의 아버지가 되신다.

이것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고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영광스럽게 하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이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자녀)로 행하는 것이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는 일이다.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세상에 보내신 그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자녀)답게 사는 것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하고,

우리가 어떤 봉사와 수고를 하든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할 때,

아버지의 이름은 그 이름대로 높아지며

아버지의 이름은 그 이름대로 우리의 구원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가면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광이며 우리가 누리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이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