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 (눅2:22-38) 권호만 목사
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귀한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하신 교우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3년도 오늘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일 년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건강으로 지켜주셨고 안전으로 지켜주셨고 평안함으로 지켜 주셨습니다.
가정을 지켜주셨고 가족들을 지켜주셨고 직장과 사업을 지켜 주셨고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셨습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행복하고 풍성하게 살아가게 된 것은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첫 번 성탄절에 이 땅에 태어난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밤중에 밖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만났고
동방박사들이 멀리 동방에서부터 와서 아기 예수를 만나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드리며 경배를 올려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사람, 시므온과 안나도 성탄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첫 번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만
이들은 정말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과 안나는 둘 다 선지자로 언급되고 있는데요,
이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점은 태어난 지 40일이 지나서입니다.
그리고 만난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게 된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산모인 마리아를 위한 예식입니다.
또 하나는, 맏아들인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도록 기록한 모세의 율법을 종합해보면,
첫째,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여덟째 날에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행할 필요가 없이 집에서 행하면 되었습니다.
둘째, 산모는 출산 후 사십 일 동안은 부정한 상태에 있으므로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서도 안 되었습니다.
셋째, 정결하게 되는 기한인 사십 일이 차면 산모는 제물을 준비하여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넷째, 만일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양이 아닌 비둘기로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것을 보면
참으로 가난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째, 첫 번째로 태어난 남자는 주의 거룩한 자로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출13:2)
요셉과 마리아는 정결예식과 맏아들을 바치는 이 두 가지 일을 행하기 위해 40일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과 안나가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되는데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과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던 안나는
성령의 역사가운데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겨 온 아기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알게 됩니다.
그 아기를 안고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메시아를 보내 주심을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 이들만 있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만이 아기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알고 메시아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첫 번 성탄절에 예수님은 메시아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인 메시아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은 정말 복음 중에 복음이요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것보다 더 귀하고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메시아 되시는 아기 예수를 만나고 경배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기 예수의 주위에 있었지만 그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은 목자들과 동방박사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과 안나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은 천사가 노래한 대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소식이 내 것이 되고 내게 좋은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지 않으면 그래서 주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면 아무리 기쁜 소식이라도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겠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면,
먼저, 예수님에게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노래하면서 30절에서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구원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님으로 아기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성탄에 관계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했던 말인데요,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면서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설명합니다.
천군과 천사들은 목자들을 향하여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고 했습니다.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주가 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나 구주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갈 자가 바로 아기예수였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의 첫 걸음이 바로 메시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구원자가 되시는 메시아가 아기 예수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바로 이 예수님에게 달려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을 구원할 메시아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분명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만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만민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시고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노리개 감으로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성령의 역사가운데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이방인들을 비롯한 모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아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을 구원할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분은 아기 예수가 유일하십니다.
여러 사람 중에 하나가 아니라 오직 혼자이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아기 예수는 일찍부터 선지자들로 예언된 분이셨습니다.
그 예언대로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로 이 땅에 태어나신 분도 예수님이 유일하십니다.
그러기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 이름을 믿는 것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 이름은 가장 귀한 그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흥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반대로 말씀드리면 패하지 않기 위하여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34절에서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아기가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폐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심으로 인간은 항상 예수님을 중심으로 둘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강도 두 명이 함께 못 박혀 죽게 되잖아요.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못 박히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한 편 강도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지만
한 편 강도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비난하다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똑같이 죄를 짓고 똑같이 십자가에서 죽게 되는데 이들의 인생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었던 것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인생의 승패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비시(B.C)와 에이디(A.D),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오신 이후로 나누어집니다.
사람의 미래는 ‘예수님을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고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 사람이 흥하게 사느냐 패하게 사느냐?
그 사람이 잘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는 예수님을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집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 살았어도 실패한 인생이 됩니다.
매일과 같이 잔치를 베풀며 호화로이 연락하였지만
지옥의 고통 속에 들어간 부자를 누가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조금 못살았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그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고생스러운 인생을 살았지만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는 성공한 인생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사람을 흥하게 하고 패하게 하는 기준이 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예수님을 꼭 믿을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일에만 성공하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는 일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일에도 성공해야겠지만 예수님을 믿는 일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고 꼭 성공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는 표적이 되시는 메시아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믿으면 그 사람은 흥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여러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5절에 나오는 말인데요,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여기서 드러낸다는 말은 ‘베일이 벗겨지는’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기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내가 지금 바르게 살고 있는지 잘못 살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자기 자신의 솔직한 모습, 자신에게도 감추어진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잘못된 모습을 깨닫고 회개하며 바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는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계명을 지키면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 청년은 계명은 내가 어릴 때부터 다 지키었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젊으면서도 부자요 부자이면서도 관원이요 거기다가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위 감으로 따지자면 이런 사위 감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자신은 올바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내가 무엇이 부족합니까?’ 자신 있게 질문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청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들추어내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이 청년은 자신이 어릴 때부터 율법을 온전히 지켰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 속에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음을 아셨습니다.
이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이웃을 위해 나누지 못하였습니다.
재물에 노예가 되어 그것을 붙잡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은 올바르게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청년의 모습을 주님은 솔직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이 부자 청년과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모를 때가 너무 많습니다.
자기는 누구보다도 잘 산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전혀 그렇지 못한 모습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런 인생이 바르게 살기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만나면서 구원의 문제를 해결 받으셨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흥한 인생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은 각처, 각 동리를 찾아다니시면서 자신을 증거하고 말씀을 증거 하였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여주셨습니다.
이 초청에 응답하여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습니다.
이들이 메시아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사모하고 기다렸을 때
성령의 역사로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만남의 축복을 허락하시는 줄 믿습니다.
시편기자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107:9) 했습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번 성탄절을 지내면서 또 한 번의 성탄절을 지낸다는
의례적인 생각을 버리고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오신 주님을 만나는
시므온과 안나의 축복이 모든 성도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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