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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비참한 최후

열려라 에바다 2024. 2. 14. 08:24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비참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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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에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인물 중 한명은 박헌영이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과 남조선공산당을 조직한 실권자이자,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 이후까지 이 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공산주의자였다.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김일성과 함께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김일성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며 공산주의의 실체와 허구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로 뽑히는 박헌영의 비참한 최후는 어땠을까.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자마자 서울을 3일만에 점령한 북한군은 3일동안 서울에서 머물며 승리를 축하했다. 북한군이 서울의 점령하고 3일동안 쉬었던 이유는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북한군이 38선 이남으로 내려오면 남로당 60만 명이 전국적인 반란을 일으켜 남한을 점령하고 북진하여 적화통일 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달려달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헌영이 말한 남로당의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을 1949년 12월에 제정하여 남한의 군대 내부 좌익세력 10,317명이 수군되거나 탈영하였고 남로당 서울시당 대표 홍민표가 전향하면서 이후 33만명의 공산당들이 자수를 했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3일 동안 서울에서 3일을 지체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군은 체제를 정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3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남한을 적화시키지 못한 북한의 김일성은 전쟁의 실패 원인을 누군가에게 돌려야했고, 그 타켓은 박헌영이 되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국 스파이로 몰아 투옥하였고, 평양 주재 소련대사에게 “박헌영은 해방 직후부터 그 추종자들과 당 내부에 종파를 조직했고, 당의 기밀을 미국에 누설했으며, 한국전쟁 패배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조작한 죄상을 박헌영에게 인정하라고 강요했지만 박헌영은 2년 반 동안 온갖 고문과 협박에도 거부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박헌영의 방에 며칠 굶긴 셰퍼드를 풀었고 박헌영은 온 몸이 물어 뜯겨 피투성이가 되자 그들이 조작한 내용을 인정하고 자신을 총살시켜 달라고 고함질렀다.  
 
김일성은 1955년 12월 15일 10시간에 걸쳐 비밀재판을 했고, 마침내 박헌영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리고 1956년 7월 19일 박헌영은 김일성의 특별지시로 총살당하였다.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고 온갖 폭동과 반란을 일으키며 평생 공산주의 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남한과 북한의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허무하게 생을 마친 것이다.  
 
박헌영의 비참한 일생은 공산주의가 짐승보다 더 잔악한 사상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신이 평생 옳다 믿었던 공산주의에 의해 결국 죽음을 맞았던 박헌영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 공산주의의 실체를 더 명확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