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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이전의 유대교

열려라 에바다 2024. 3. 20. 08:16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

 

Ⅰ. 들어가며

유대교란 <구약성서>를 성전으로 하는 유대인의 민족 종교이다. 천지 만물의 창조자인 유일신(여호와)을 신봉하며 유대인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자처하고 메시아의 지상 천국 건설을 믿는 종교이다.

BC 538년 바빌론의 포로로부터 해방된 뒤 예루살렘 신전을 중심으로 성립된 엄격한 율법적 유일신교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 절대의 신이며 창조주로서 전 인류를 창조하고 섭리하는 분이다. 그 신의는 모세의 율법에 계시되었으며 일체의 일상생활은 여기에 의거하여 영위되었다. 그 율법은 유대 민족만의 것이었으므로 유대인은 신과 특수한 계약을 가지는 선민이라 하였다.

이 사상은 항상 위기에 놓여 있던 민족적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민족 지도자들에 의하여 강조되었으며 BC 70년 로마제국에 굴복 당한 뒤로는 유대교에 강한 정치적 색채를 부여하였다. 그에 의하면 말세에 그들 속에서 구세주가 나타나 천사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백성에 반역하는 제 민족을 벌하여 새로운 신의 나라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출현했을 무렵의 유대교는 이러한 정치적 정열이 완고한 율법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유대교는 시나고그(회당)를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예배 의식을 맡는 랍비를 둔다. 즉 안식일을 엄수하여 일체의 노동을 쉬고 하루를 기도로 보낸다. 할례는 중요한 의식의 하나이며 기타 신년, 출(出)이집트를 기념하는 유월절 등의 축제일이 있다.

유대교의 역사를 통해 그 형성 과정을 살펴보고 그 사상과 의식, 종파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유대교의 역사

유대교는 광의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4000여 년에 걸친 유대 민족의 종교 현상 전부를 뜻하며, 협의로는 BC 5C 유대 민족이 바빌론 유수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유대교를 재건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400여 년 동안 믿어 온 신앙 체계를 가리킨다.

1. 바빌로니아의 유폐

BC 2000년대 말에 사울과 다윗 왕에서 시작된 고대 이스라엘인의 왕조는 BC 6C 초에 신바빌로니아에 의하여 쓰러졌다. 그 당시 국토는 큰 타격을 받아 극히 황폐하였으며, 지배층, 지식층, 기술자 다수가 포로로서 바빌론으로 연행되었다.

이 사건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민족국가가 소멸되고 민족이 그 지반을 잃어버린 것과 둘째는 신전이 파괴되어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여지던 제사 의식을 중심으로 하던 종교가 변혁을 겪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598년에 억류 생활이 시작되고 바빌론에서 활약하던 예언자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함락이후 각 개인의 주체적 신앙을 강조하고 이국땅에 있어서의 동포들을 지도하고 격려하게 여행(勵行)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주위 환경으로부터 구별하고 주변 문화에 흡수 동화되지 않도록 노력하여 그들 선조들의 전통을 끝까지 지켜 나가 다음에 오는 시대에 대비하고자 노력하였다.

기원전 538년에는 페르시아 제국이 바빌로니아 제국을 넘어뜨리게 되어 그들은 고국의 땅에 돌아갈 것을 허락 받게 되고 신전의 재건과 고국의 부흥에 힘을 기울였다.

2. 유대교 재건 시대 (BC 538-333)

BC 539년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황제가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이듬해 칙령을 내려, 신바빌로니아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하고 성정 재건을 명했다. 제스바쌀과 그의 조카 즈루빠벨이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동족을 데리고 귀향해서 성전 재건에 진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과 귀향하지 않고 눌러 살던 유대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귀향자들은 너무 곤궁해 생계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나 즈루빠벨은 다리우스 황제의 지원을 받아 BC 515년 3월 드디어 성전을 완공하고 다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사장, 레위인, 평신도 가릴 것 없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신앙생활이 위태롭게 되었다.

BC 444년 유대 총독으로 임명된 유대인 느헤미야가 BC 437년 12월에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마쳤다. BC 433년 느헤미야는 총독 임기를 마치고 궁정으로 돌아갔다가 1-2년 후 다시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여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하도록 여러 조치를 취하였다. 십일조를 바치고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하고 혼종혼(混宗婚)을 금했다.

BC 428년을 전후하여 느헤미야에 이어 제사장이며 율법 학자인 에즈라가 아르닥사싸 1세의 명으로 모세의 법전을 갖고 유대로 와서 초막절을 맞아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다. 그는 이방인들과 맺은 혼종혼을 모두 파기하여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명했다.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갖고 온 모세의 법전이 정확히 어떤 책이었는지는 계속 논란이 되고 있으나 모세 5경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 국가는 아니었지만 모세의 법전을 생활신조로 삼은 율법 공동체로 다시 태어났다. AD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버림으로써 성전 제사가 아주 사라져 버린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율법 공동체로 존속할 수 있었다. 에즈라야말로 유대교를 재건한 장본인이므로 그를 제 2의 모세로 일컫기도 한다.

이 시대의 유대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신관

바빌론 유수 이전에는 하나님을 마치 다른 인간처럼 묘사하곤 했다. 그런데 바빌론 유수 이후에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나머지 될 수 있는 대로 의인화 경향을 피했다.

(2) 선민 사상

에즈라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조리 내쫓음으로써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는 다른 선민으로 자처했다. 선민 이스라엘이 보기에 이방인들은 죄인들이라고 지칭했으며, 이때부터 선민이 만민을 적대시하고, 따라서 만민이 선민을 적대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3) 율법

에즈라는 이스라엘을 율법 중심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국가 제도, 성전 제도 등 모든 제도가 없어져도 이스라엘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율법 중심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율법은 모세 5경과 그 안에 들어 있는 규범들을 가리킨다. 이 규범들은 바빌론 유수 이전의 것들이 많았던 까닭에 바빌론 유수 이후 시대에 새롭게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옛 규범들을 시대에 맞게 해석했다. 이렇게 해서 미드라시 문헌(성서주석)이 생겨났다. 율법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예언자들이 차츰 사라진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4) 성전의 구성

이 시기에 과거의 이스라엘 역사가 신학적으로 반성되고 그에 따라 전승이 재편되었다. 유대교 경전(구약 성서)은 BC 1C에 거의 결집을 마쳤으나, 그 기본 적인 구성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t; 1-2장의 <천지 창조> 이야기도 이 시기에 유래되었고, 그들의 신학을 역사의 원점을 향하여 역투영 하였으며 세계의 시초를 신화적, 설화적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마지막 즉 종말 사상의 궁극적 전개를 가능케 하는 구성을 만들어 냈다. 이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모든 종교적 전승 가운데에 그들의 역사가, 공간과 시간이 끊임없이 끌어들여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3. 그리스 시대 (BC 332-63)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BC 323년 바빌론에서 열병으로 죽은 다음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고 BC 198년에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정복되었다. 두 왕조의 영향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도시에 사는 부유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갔다. 대제사장 야손과 메넬라우스가 헬레니즘 전파에 앞장섰다.

마침내 BC 167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를 금지하고 이 금령을 어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심하게 박해를 가했다. 이에 마카베오, 일명 하스모네 가문에 속하는 제사장 마따디아와 그의 5명의 아들이 봉기하여 BC 164년 12월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제사를 드렸다. 이를 기념하여 유대교에서는 유대력으로 기슬레브 달 25일부터 8일 동안 성전 봉헌 축제(하누카)를 지낸다. 하스모네 가문 중심의 독립 전쟁이 차츰 승리하여 마침내 하스모네 왕조(BC 142-63)가 수립되었다.

독립 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하스모네 가문은 그만 과욕을 부려 정권과 대제사장직을 독식하는 잘못을 범했다. 마따디아의 넷째 아들 요나단은 독립군사령관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대로 대제사장을 배출한 사독 가문을 제치고 BC 152년 대제사장 직분까지 겸직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독립군에 가담하던 경건자들(하시딤)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요나단을 지지하는 경건자들이 바리사이파를 만들고, 그를 반대하는 경건자들이 에세네파를 만들었다.

(1)종파의 분화

이 당시의 이스라엘 종파의 성격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바리사이파 : 바리사이파는 경건한 평신도들로서 <구약 성서> 못지않게 조상들이 구전으로 전해 준 전통도 존중했다. 이들은 성서와 구전의 계율을 다 지켰다. 또한 이들은 섭리, 천사, 내세에서의 보상,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 왕 치세 때 바리사이파는 6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② 쿰란 종파 : BC 152년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하자 제사장이었던 '의로운 스승'은 저항하다가 모진 박해를 겪었다. 요나단의 조카 요한네스 히르카누스가 통치 할 무렵(BC 135-104) 의로운 스승 또는 그의 후계자가 추종자들을 데리고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으로 가서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 치세(BC 103-76)때 매우 번창했으나, AD 68년 6월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사악한 제사장들이 봉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막에 살면서,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하여 다윗 계통 임금메시아와 사독 계통 제사장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본래 제사장들이 지키던 정결법을 철저히 준수했다. 성교와 사정에서 생기는 불결을 피하려고 수도자들은 독신 생활을 했다.

③ 사두가이파 : 상급 제사장, 대지주, 귀족들이 속한 사두가이파는 헬레니즘을 숭상하고 하스 모네 왕가 및 로마 식민 정권과 결탁했다.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됨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이들은 예언서들의 영감을 거부하고 구전된 율법을 배척했으며 오직 모세 5경만을 성서로 받들었다. 또한 이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부활을 부정하고 영혼 불멸과 섭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④ 평민들의 종교 생활

무식한 시골 사람들은 위에 소개한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고 십일조법, 정결법, 기도법 등을 소홀히 했다. 지식인들은 이들을 '땅의 백성'(암 하레츠)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이 시대에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50-70만 명쯤 되고, 해외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은 100만-5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해외 유대인들은 시리아,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에서 많이 살았다. 서기 원년 무렵에 지중해 주민 중 10%가 유대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BC 5-4C의 유대인 수에 비해서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유대인 수가 급격히 불어난 까닭은 이방인들을 많이 입교시켰기 때문이다. 그 예로 BC 130년 요한네스 히르카누스와 BC 103년 아리스토불로스가 팔레스타인 남부 지역 이두매아 사람들과 북부 지역 이두레아 사람들을 강제로 대거 입교시켰다.

(2) 구약 성서의 완성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이 BC 3-1C에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BC 1C에 쓰여진 <아리스테아 편지>에 따르면 역자 72명 이 <구약성서>를 각자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했는데, 역문들을 비교해 보니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라 이 역문을 70인역이라 한다. BC 1C에 마카베오 2-4서도 이집트에서 씌어졌다. 알렉산드리아 유대 공동체에서 배출된 가장 뛰어난 학자는 필론 이다. 그는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과 유대교 신앙 간의 융화를 시도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우의적 방법으로 성서를 풀이했는데, 이 주석 방법을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4. 로마 시대 (BC 63- AD 135)

여기서는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때부터 AD 135년 제 2차 유대 독립 전쟁이 실패로 끝난 때까지를 로마 시대로 본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을 상대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중요한 사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열심당 결성

AD 6년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르켈라우스 왕을 폐위하고 코포니우스를 그 지역 총독으로 임명했다. 코포니우스 총독은 자기 관할 지역에 주민세를 부과했다. 주민세는 12 또는 14세부터 65세의 주민은 누구나 1 데아리온씩 바쳐야 하는 인두세였다. 이에 갈릴리 지역 가믈라 요새 출신 유다가 주민세 거부 운동을 벌이고 동지들을 모아 열심당(젤롯당)을 조직했다. 그들이 내세우는 기치는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통치자이며 황제의 흉상과 황후의 좌상 따위가 양각된 은화 데라니온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우상 숭배라는 것이었다. 열심당원들 가운데서도 극력분자들을 일컬어 자객들(sicarii)이라고 한다.

(2) 제 1차 유대 독립 전쟁

AD 66년 여름 플로루스 총독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자 카이사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로마 정권에 반대하여 봉기했다. 그리스도교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라는 요구를 받고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요르단 강을 건너 펠라로 피신했다. 로마군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68년 6월 21일 에리고를 탈환하고, 이어서 남쪽으로 13Km 떨어진 쿰란 수도원을 파괴했다. 70년 유월절에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4개 여단(약 2만 4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8월 29일 성전 구역을 불지른 다음, 9월에는 예루살렘 서북부 고지대와 헤로데 왕궁까지 점령했다. 그렇지만 사해 서안에 있는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는 자객들이 74년 유월절까지 저항하다가 실바 장군 휘하의 로마군 제 10여단에게 점령될 지경에 이르자 자객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3) 야브네에서 유대교 재건

제 1차 독립 전쟁이 실패하자 독립 전쟁을 주도한 열심당과 자객당, 상급 제 사장, 대지주, 귀족 중심의 사두가이파,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하고 오직 바리사이파만이 건재하게 되었다. AD 70-80년 율법 학자 요하난벤카자이는 바리사이파들을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야브네로 가서,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오로지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했다. 그는 율법 학교(베트 미드라시)를 개설했고, 그의 후임자 가밀리엘 2세는 최고 회의(베트딘)를 창설하여 유대교 최고 의결 기관으로 삼았다. 100년경에는 히브리어, 아랍어 <구약성서>의 범위를 확정했다. 그렇지만 <아가> <전도서> <에즈라>를 두고서는 경전이냐, 위경이냐의 논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가 하면 85년경 야브네에서 작은 사무엘 라비가, 유대인들이 회당 예배 때마다 바치는 18조 기도문 가운데 이단자들을 단죄하는 제 12조 기도문에 나자렛 사람들(그리스도교 사람들)을 덧붙였다고 한다. 그 결과 그리스도 교도들은 회당 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명실 공히 독자적 종단으로 독립했다.

(4) 제2차 유대 독립 전쟁

115-117년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 때 리비아 키레네 출신 유대인 루쿠아스 안 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면서 이집트, 키레네, 키프로스, 메소포타미아 유대인들을 사주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132-135년에는 시므온 바르 코크바가 제 2차 유대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당대의 석학 율법 학자 아키바는 그를 메시아로 추대하여,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오는 '별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135년 바르 코크바는 베들레헴 근교의 바티르 마을 전투에서 전사하고, 아키바는 유대인들을 부추긴 죄로 로마군에 처형되었다. 1952-62년 사해 서쪽 헤베르 계곡에서 바르 코크바의 서간집이 발굴되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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