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 역사 및 유대인 학살
기독교 순교 역사
사도시대에 복음을 위해 희생되었던 기독교 순교의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유대교의 핍박은 거세졌고 로마의 탄압은 더욱 잔혹해졌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단순한 종교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마무리되는 포스팅을 통하여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가 얼마나 평탄한 시대인지 느끼고 그들이 복음에 대해 가졌던 마음을 다시금 되새기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며 사도시대에 일어났던 순교의 역사를 정확히 짚어보기로 합니다.
네로 치하에서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A.D. 64년 7월, 로마의 제5대 황제 네로(재위 A.D. 37~68)가 재위하던 때에 로마 시내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화재는 대전차경기장인 막시무스라는 곳 근처에서 발생했고 불길은 급속히 번졌다. 불길이 일주일 동안 계속하여 치솟았고, 로마 도시의 열네 지역 가운데 네 지역을 제외한 모든 곳이 잿더미로 변했다. 그런데 주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사는 지역만 불에 타지 않았다.
온 로마가 불길에 둘러싸여 있을 때 네로황제는 팔라타인(Palataine)의 탑 위에서 배우의 옷차림을 하고 수금을 타면서 트로이 멸망을 노래했다. 그는 불길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이제야 트로이의 불길을 상상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방화의 주범은 옛 건축물과 로마의 좁은 골목에 싫증을 낸 네로였다. 방화의 배후가 네로라는 소문이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그러자 네로는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희생양을 찾았는데, 그 대상이 기독교인들이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불을 질렀다고 뒤집어씌우고 잔혹하게 박해했다. 그러나 네로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공개적으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사람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맹견이나 사자의 밥이 되거나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물의 가죽을 씌워 죽을 때까지 개에게 물어 뜯기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을 박아 매달고, 불을 질러 횃불로 이용했다. 어떤 자들은 왁스를 바른 옷을 입힌 후에 정원의 기둥에 묶어 놓고 불을 붙여 그의 정원을 밝히게 했다. 네로는 기독교 박해를 일종의 축제로 만들었다. 그 잔인무도함은 로마 사람들조차 동정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 괴물의 야만적인 박해는 로마를 집어삼킨 불길보다 더 뜨겁게 복음의 불꽃이 타오르게 했고, 성도들의 기도가 달아오르게 했다.
이 네로의 박해 기간에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순교자의 면류관을 쓰고 영광스런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려 순교할 때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릴 자격도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게 해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피로 물든 그리스도인들의 역사
이처럼 기독교회의 역사는 피로 물들어 있고,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존 폭스는 사도 시대에 성도들이 받은 핍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사단의 도구인 압제자들은 그들의 육체적 생명을 빼앗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무서운 사형 방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인간이 발명해 낸 온갖 잔인한 장치들을 기독교인들을 고문하는 데 사용했다.
몸을 잡아당겨 심한 고통을 주는 고문, 찢어 죽이기, 돌로 쳐죽이기, 뜨겁게 달아 오른 철판 위에 올려놓기, 감옥 안에서 질식시키는 방법, 채찍질,사나운 짐승의 먹이가 되어 죽게 하는 방법, 교수대, 석쇠, 황소의 뿔에 받혀 죽이는 방법 등이 사용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이렇게 하여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쌓아 놓고 그대로 방치해두어 장례도 치를 수 없게 했다.
그러나 이처럼 무서운 형벌과 박해가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성도들의 피라는 풍성한 수액(樹液)을 공급받으며 성장했다.
사도들의 최후
사도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리고 나중에까지 살았던 사도는 요한이었다. 요한은 에베소에서 중심적으로 사역을 했다. 요한은 통치 말년 폭정을 했던 로마 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51~96)의 명령으로 로마로 보내져 끓는 기름 가마솥에 던져졌다. 도미티아누스는 황제를 신격화하여 황제에게 제사를 드리고 숭배하게 했다. 그는 신민(臣民)들이 자신을 주(Lord)와 하나님으로 부르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행위는 모반으로 간주했고, 그러한 사람들은 극형에 처해졌다. 심지어 황제 숭배에 비판적이던 황제의 사촌형 사비누스도 A.D. 89년에 처형을 당했고, 몇 년 후 그의 동생 클레멘스 부부(클레멘스의 아내였던 도미틸라는 황제의 질녀였다)도 처형을 당할 정도였다.
요한이 주님의 기적적인 보호로 인하여 아무 해도 입지 않자 A.D. 73년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광산에서 노동을 했다. 그 곳에서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사도 요한의 죽음과 함께 사도 시대는 막을 내리는데, 트라얀(Traianus) 통치 3년째인 A.D. 100년에 100세의 나이로 에베소에서 그는 영원히 밤이 없는 주님의 나라로 갔다. 그는 포악한 죽음을 면한 유일한 사도였다.
폭스(Fox)에 의하면 사도들의 최후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벳새다 사람 빌립은 채찍에 맞았으며, 감옥에 갇힌 후 A.D. 54년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C. H. 매킨토시의 친구였던 앤드류 밀러(Andrew Miller, 1818~1883)를 비롯한 복음주의적 기독교회사가들에 의하면, 마태는 우상 숭배가 만연해 있던 에티오피아로 가서 사역을 하며 영적인 목자들을 세웠다. 마태는 A.D. 60년 나다바에서 끝이 두세 가닥으로 갈라져 있는 미늘창으로 살해당하였다. 작은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었는데 그는 94세 때 유대인들에게 구타당하고 돌에 맞아 뇌에 손상을 입고 순교했다. 안드레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에데사에서 붙들려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는데, 땅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시키려 했을 때 자신은 십자가를 갈망하며 품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천천히 죽도록 십자가에 밧줄로 묶여 있었다. 그런데 안드레는 십자가에 묶인 상태로 이틀 동안 말씀을 전하다가 사모하던 본향으로 갔다. 사도 유다는 말년에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사도시대의 기독교박해와 그들의 순교에 관한 포스팅은 이번 포스팅으로 마무리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했던 사도들은 하나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위해 살았고 진리를 위한 그들이 삶이 얼마나 귀한지 우리가 형용할 수 없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사도들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져온 복음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다음 유대교가 어떻게 기독교를 박해했는지 알아보고 그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로마까지 번져나간 복음의 역사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프레임을 좀 더 넓혀서 사도들의 이야기에서 사도시대에서 기독교가 어떤 과정을 걸쳤는지 역사적인 사건과 함께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독교 순교자의 피로 물든 사도시대
사도행전을 펼치면 사도들의 순교가 끊이지 않습니다. 유대교의 탄압과 로마의 기독교 핍박은 거세져만 갔습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기독교 순교자의 수는 늘어났고 복음의 역사 또한 힘있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현재 듣고 있는 복음은 수많은 사도들의 죽음 위에 전해져왔습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면 어려움 없이 사는 부분이 부끄러우면서도 앞서서 복음을 외치고 믿음을 지켰던 성도들의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마음도 듭니다. 교회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그 역사(歷史)를 알아가 보면 수많은 방법으로 사단이 교회와 복음을 무너뜨리려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집요하고 잔혹한 역사(役事)를 해왔습니다. 그 뿐아니라 성경을 변질시키거나 없애버리기 위하여 온갖 공격과 핍박을 가했습니다. 또 참된 교회와 종들을 대적하고 핍박하는데 거짓선지자들과 거짓교리를 무기로 삼았습니다.
사단의 역사가 진행되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을 비롯한 복음을 진실로 사랑했던 성도들은 복음을 지키고 다른 영혼을 구원하였고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 일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려졌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희생을 치렀는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복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당하고 감옥에 갖히고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의연히 사단의 일군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들은 실로 자신을 넘고, 세상을 이기고, 죽음도 이긴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기독교역사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믿음과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교회를 위한 희생과 헌신적인 수고, 형제애(兄弟愛)를 이야기하는 간증들이 많이 유실되고, 그분들의 삶을 정확히 평가하고 전달하는 사료(史料)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늘에 기록된 그분들의 귀한 간증은 없어지지 않고, 하늘의 별처럼 영원이 빛을 발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사에는 거짓 신학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을 마치 하나님의 일꾼처럼, 진실된 신학자처럼 평가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성경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복음을 지키며 달려간 앞선 성도들의 보석처럼 귀한 마음을 만나기 바랍니다.
구원은 예언으로 성경에 약속되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인류 모두가 사단에게 속아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저주와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또한 그들을 사단의 권세에서, 죄에서 구원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시고 구원자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준비하셨다. 그리고 그 아들을 보내시기 전에 미리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을 통해 온 인류를 마귀의 권세에서, 죄에서 구원하실 것을 예고하셨다. 그것이 바로 구약 성경의 핵심이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약속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 죄에 대한 형벌과 심판을 대신 받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는 의롭게 되었고, 구약에 약속된 구원이 성취되었다.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상실되었던 모든 것들은 회복되었고,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 구원의 복음이다. 이 놀라운 진리의 증인이요 목격자들인 주님의 제자들은 이 복음을 믿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
존 폭스(John Fox, 1516~1587)의 <순교사>, 침례교회의 저명한 교회사가인 J. M. 캐롤(1858~1931) 박사의 <피흘린 발자취> 등에서 전해주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 사도들은 대부분 복음의 능력과 사랑에 사로잡혀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였다. 캐롤 박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구세주의 뒤를 따라 지체 없이 많은 순교의 영웅들이 쓰러져 갔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살해되었으며, 마가는 죽기까지 거리에서 끌려다녔으며, 누가는 목이 매여 죽었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드레도 십자가에 달렸고,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하였으며, 빌립은 십자가에서 맞아 죽었고, 바돌로매는 산 채로 가죽이 벗기웠으며, 도마는 창에 찔려 죽었고, 동생 야고보는 회당에서 죽기까지 매를 맞았으며, 유다는 화살에, 맛디아는 돌에 맞아 죽었고, 바울은 목베어 죽임을 당하였다.
사도들의 순교: 야고보
요한의 형제였던 사도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에 기록된 대로 헤롯의 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클레멘트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 제4대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 때 야고보는 재판정으로 끌려갔는데, 야고보를 재판정으로 데리고 가던 사람은 야고보가 가진 믿음과 증거하는 말씀에 감동을 받아 자기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했고,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함께 형장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도중에 그는 야고보에게 자신을 용서하라고 간청했고, 야고보는 그에게 입을 맞춘 뒤 그들은 함께 참수(斬首)되었다고 한다. 기독교 순교가 연이었던 사도시대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사료에 기록되지 못했지만 우리가 셀 수 없는 순교가 복음을 지켜 현재까지 이르렀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이번에 포스팅한 '기독교 순교가 연이었던 사도시대_ chapter 1'에 이어서 복음을 위해 흘렸던 피의 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유대교의 기독교박해와 로마로 전파된 복음
사도시대에는 기존에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유대교(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가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고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며 자신들의 의를 지켜 천국을 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심은 오히려 눈가리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위해 보낸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자신의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 끊임 없이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사단은 여기서 기독교박해를 그만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인에 로마군정까지 합세하여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거세졌습니다. 지난 포스팅에도 언급되어있듯이 이러한 강한 핍박속에서도 사도시대의 기독교인들은 더욱 마음을 다 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만 있던 기독교인들이 강한 핍박으로 인하여 전 세계로 퍼져가는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과 기독교의 충돌
초기 교회사를 보면 복음은 대부분 유대인들에 의해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러던 중 안디옥을 중심으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고(행 11:19), 이방 도시에도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빌립보에서는 보잘것없는 곳에서 루디아와 그의 가족이 모두 구원을 받았다. 이로써 유럽에서 가장 처음으로 한 가정이 복음 안에 들어왔다. 당시에 기독교는 유대교의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처럼 유대교의 한 종파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유대교에 속해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한 편으로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은 상당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바라 볼 때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메시야로 자처한 것이나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라고 하는 주장은 신성모독처럼 보였다.
유대교인들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주는 그리스도를 기다렸다. 그 것은 권력과 영광 중에 오시는 정치적 메시아였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이 전파하는 그리스도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하신 메시아였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셔서 이제 우리는 율법의 행위 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다는 복음을 증거했다. 그러다 보니 율법의 준수를 고집하는 유대교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격분하여 그리스도를 로마 법정에 세운 후 처형해 버렸는데, 그것으로 끝날 줄 알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되살아났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유대교 세력은 약화되었다.
유대교의 기독교 박해
사도 시대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인들 옆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유대교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후에 로마제국, 중세에 카톨릭으로부터 대대적인 핍박을 받는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웠을 때에 유대인들이 교회를 핍박하기 위하여 아가야의 총독 갈리오(Gallio,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세네카의 형. 고린도 델피에서 그의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A.D. 51년에서 52년 봄까지 로마 총독으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에게 바울을 고소하였으나, 갈리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일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갈리오는 말을 끝낸 후에 그들을 재판정에서 쫓아냈다. 로마 정부는 폭동이나 난동이 생길 때에는 치안 유지를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고 주모자를 색출하여 체포했다. 그러나 종교적, 민족적 갈등에는 되도록 간섭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던 기독교와 유대교는 유대 전쟁과 성전의 파괴(A.D. 70년)를 계기로 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국가적이자 민족적 비극의 종말에 대한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메시아를 죽인 유대교인들의 교만과 타락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기독교는 오직 복음 전파에 주력하였으며, 로마 정부를 자극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반면 유대교도들은 로마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려 했으며, 기회만 있으면 로마에 저항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감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얌니아 회의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직후 얌니아(Jamnia: 고대 팔레스티나의 도시)에 모인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유대교 ‘의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유대교 회당 출입을 일체 용납하지 않도록 정하였다. 또 이 회의에서 유대인들이 회당 예배 때마다 바치는 기도문 가운데 12조항에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특별기도문(Bitkath ha- Minim)을 삽입시켜서, 회당에 모여 예배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하여 A.D. 85년에 유대교도들은 기독교인을 공식적으로 파문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기도하도록 선포하였다.
“나사렛인들(notzrim, 기독교인)과 이교도들(minim)을 순식간에 파괴하소서. 또 생명책에서 그들의 이름을 지우시고 의로운 자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소서. 은총을 베푸소서, 오 주여, 교만한 자를 비천하게 하시는 이여!”
이로써 유대교 유대인들과 기독교 유대인들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결별하였다.
또한 로마가 기독교를 탄압하는 와중에서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멈추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예언의 성취
예루살렘의 함락과 예언의 성예루살렘의 함락과 예언의 성취 1
여기서 잠시 AD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함락에 관련된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루살렘의 함락은 주님의 예언이 얼마나 놀랍게 성취되었는지를 아주 잘 보여 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유대 전쟁 발발의 배경
AD 44~66년 사이에 유대에는 일곱 명의 로마 총독이 주재하며 유대인들을 관할했는데, 유대인들에게는 이 기간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압제의 기간이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벨릭스(행 23:24, 행 25:14 등)를 유대 총독으로 파견했고, 그의 후임은 베스도(Festus)였으며, 그 후임은 알비누스(Albinus)였다. 알비누스는 온갖 비행을 저질렀다. 재산을 강탈하고, 뇌물만 내면 죄수들을 풀어 주며,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 자연히 유대인들 마음에 불만과 악감이 쌓여 갔다. 그 후임으로 플로루스가 유대에 왔는데, 그는 더 교활하고 포악했다. 전체 주민을 한꺼번에 약탈하고, 온갖 악을 자행하여 전 유대를 폐허로 만들었다.
한번은 그가 성전에 드려진 ‘거룩한 돈’을 17달란트나 가져갔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압제자의 학정에서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힘도 없는 아그립바 왕에게 아우성쳤지만, 플로루스는 더 악랄하게 돈을 긁어모았다. 유대인들은 격분했다. 이에 플로루스는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라고 지시했고, 반역자들은 모두 십자가에 처형시켰다. 유부녀와 어린아이까지 하루에 3600명을 마구 살해한 적도 있었다. AD 67년의 일이다.
반란의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로마 군인들은 반란자들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플로루스는 성전 안의 보물고를 탐냈다. 유대인들은 아그립바 왕과 대제사장에게 플로루스를 고소할 사신을 네로 황제에게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 혼란의 기간에 유대인들도 두 부류로 갈라졌다. 평화를 원하는 이들과 결사항전을 부르짖는 이들이었다. 반란을 지지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열심당원들에 의해 수없이 살해되었다. 이 유대주의의 애국적 열심당원들을 시카리(Sicarii)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점점 더 담대해지고 아그립바 왕의 군대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로 로마 총독들의 유대 재임 기간은 다음과 같다.
유대 전쟁의 발발
마침내 유대인들의 폭동을 일으켰고, 로마의 폭정에 항거한 유대인들은 두려움 없이 맞서 싸웠다. 플로루스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시리아 지방의 총독 갈루스가 플로루스를 구출하기 위해 1개 군단과 수많은 외인 보조 부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했으나 막대한 병력을 잃고 퇴각하고 말았다. 유대의 반란군은 전국을 장악했다. 그들은 도성 방어를 강화하고, 예루살렘을 지키던 로마 수비대를 공격했다. 그리고 매일 로마 황제에게 올려지던 제물 헌납을 금지시켰다.
안디옥에 있던 로마군 지휘관 케스티우스가 원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성벽 밑을 허는 ‘거북이 전법’으로 성문에 불을 지를 준비를 했으나, 5만 명이 넘는 유대 저항군들의 공격을 받아 로마군 1개 군단이 패해 후퇴했다. 유대인들은 후퇴하는 로마군을 다시 습격해 보병 5,300명과 기병 380명을 몰살시켰다. 유대인들은 사기가 올라갔다. 하지만 로마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를 갈릴리 지역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다가올 로마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주로 유대전쟁이 어떻게 발발되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유대전쟁에 대하여 우리가 단순히 이스라엘민족이 겪은 수난사로 생각할 수 있으나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있는 말씀을 보면 다시금 성경을
깊이 바라보게 됩니다. 진실로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느끼게 됩니다.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성경예언과 유대전쟁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뒤 제자들은 유대교인들의 핍박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를
펼치면 1장에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인들로 핍박을 받았다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다른 이방나라로 복음이 더 많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얌니아 회의를 통해 유대교인들이 공식적으로 기독교인들을 거부하고 탄압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유대교인들이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섬겼지만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그들 보기에 좋은데로 행한 것이어서 정작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허락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은 거부하였습니다. 사단이 유대교인들에게 자신의 옳음을 굳게 세워서 하나님이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로마서는 사도바울이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인들과
로마로부터 어려움을 겪지만 로마에서도 복음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의 형성
로마에는 언제 누구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었는가? 여기에 대해 기독교 역사학자들의 견해는 A.D. 30년 오순절(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날)에 천하 각국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와 있던 경건한 유대인들(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 로마에서 온 사람들(행 2:5~10)이었다고 본다. 그들이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보고,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구원받은 후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을 것으로 본다. 그들을 통하여 구원받는 사람들이 일어났고, 그 사람들이 유대교로부터 독립하여 로마 교회가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로마 교회는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니었다.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
바울이 쓴 로마서는 로마 교회 방문을 앞두고 복음과 믿음의 삶을 자세히 가르치기 위해 로마 교회에게 보낸 편지였다.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끝마칠 무렵인 A.D. 57년경 고린도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편지를 통해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소개할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로마 교회 형제 자매들 만나기를 진정으로 원했고, 여러 번 로마로 가려는 시도를 했으나 길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로 가는 좋은 길 얻기를 구하고 있었다(롬 1:10). 바울이 로마로 가고자 했던 것은 로마 교회 형제 자매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고,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네로 앞에 선 바울
하나님은 로마의 네로 황제(행 27:24의 가이사)에게도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 원하셨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네로 앞에 서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을 준비하셨다. 그 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는 것이었다. 주님의 관심은 오직 복음이 전파되어 높고 낮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데 있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임금들 앞에 끌려가는 일을 통해서도 임금이나 통치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되는 일을 기뻐하셨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증거의 기회가) 되리라.”(눅 21:12~13)
사도행전 26장은 전체가 바울이 아그립바 왕(헤롯대왕의 증손)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모습을 기록했다. 하나님은 바울이 가이사(Caesar 케사르, 영어로는 ‘시이저’라 읽는다. 기원 전 3세기 이후 가장 유명한 로마의 명문 가문으로, 특히 알려진 인물이 ‘줄리어스 시이저’다. 후에 ‘케사르’는 로마 황제들에게 붙여지는 칭호가 되었다. 여기서 가이사는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 앞에도 서야 하겠다고 말씀하셨다(행 27:24).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도살하고 핍박했던 잔악무도한 인간에게도 자비와 긍휼을 베풀기 원하셨다. 바울 자신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는데,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과 사랑을 입었다(딤전 1:13~14). 그래서 바울은 네로와 같은 폭군도 오래 참으시고 그 영혼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신(使臣)으로 네로 황제 앞에 나아갔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행 27:24)
하나님은 가장 악한 인간에게 가장 귀한 하나님의 종을 보내셨다. 가장 악한 죄인에게 주님은 ‘바울’이라는 옷을 입고 그의 영혼을 향한 놀라운 사랑을 들고 다가가셨던 것이다.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 네로와 고관대작들,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네로 앞에 섰고,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들에게 죄와 심판,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을 분명하게 증거했을 것이다. 바울은 “황제인 당신도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당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당신을 의롭다 하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하고 복음을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네로는 복음을 외면하고 결국 31세의 나이에 자살로 인생의 막을 내리고 만다. 네로가 바울이 증거한 말씀을 듣고 십자가의 한 강도처럼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더라면 로마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네로가 온갖 악한 일을 행했고 그의 죄가 크지만, 그보다 더 악한 일은 그런 자기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종을 외면하고, 그런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거절한 것이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네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고 있는데도 그 인자를 보지 못했다. 교만한 사람은 가장 귀한 것을 손에 쥐어주어도 귀한 줄을 모르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십자가 형 대신에 로마에서 칼로 참수된 것으로 전해진다.
복음의 확장
기독교의 확장은 로마의 박해가 화산처럼 분출되고 있을 때 이루어졌다. 그 역사는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목적과 이유에 의해 이루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피신하여 간 곳에서 복음을 전해 교회를 세웠고, 어떤 사람들은 생업을 위해 이주해 간 곳에서 복음을 전해 그 가정이 교회가 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내놓아 그 집이 곧 교회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교회는 처음부터 특별히 건물을 따로 얻어서 교회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가정집에서 말씀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는 가정 교회 형태로 출발했다. 로마의 박해를 겪으면서 기독교인들은 신앙적으로 더욱 굳게 결속되고 다져졌다. 그리고 로마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불꽃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바울이 유대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람에서 로마에서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는지 짐작해 봅니다. 과거의 나에게 얽매이지 않고 나를 쓰고자하는 하나님의 마음만을 순수하게 받아 복음을 전한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A.D.70년대에 있었던 유대전쟁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유대전쟁은 로마의 지배아래 있었던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지키고자 로마에 맏섰던 전쟁입니다. 성경에는 유대전쟁에 대한 예언을 미리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으로 가지 말고 들로 도망치라고 하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으로 믿고 끝까지 로마에 대항하였습니다. 긴 전쟁의 결과는 참혹한 시신들과 지금 이스라엘에 남겨진 예루살렘의 서쪽 벽의 일부였습니다. 죄를 사함받고 기쁜 마음을 가져야 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지금은 통곡의 성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더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성경예언과 유대전쟁
44년 이 후 부터 약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향한 로마의 압제와 약탈은 점점 거세졌습니다. 네로황제가 파견한 벨릭스, 다음으로 부임한 베스도, 그리고 그 후임으로 부임한 사람은 알비누스였습니다. 알비누스는 특히 이스라엘이 로마에 대해 악감정을 키우도록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재산을 빼앗고 범죄자이더라도 뇌물을 내면 풀어주는 등 알비누스는 권력을 남용하고 비리를 저질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알비누스의 후임으로 부임했던 플로루스는 더 심한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그는 성전에 드려진 돈을 빼앗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이라면 처형을 일삼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수모와 고통이 가해지자 유대인들의 감정또한 로마에 적대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열심당원이라 불렸던 사카리들은 온건파 유대인들을 살해하는 등 더욱더 반란의 불을 키웠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와 유대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네로 황제는 군대를 파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타파타(Jotapata)의 함락
당시 네로 황제는 자신이 직접 만든 노래를 공연하기 위해 그리스에 머물고 있었다. 황제는 로마군의 참패 소식에 대노했다. 그리고 당대의 명장 베스파시아누스를 총사령관으로, 그의 아들 티투스(Titus)를 부장으로 임명해 유대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정예 3개 군단이 투입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우수한 3개 군단과 수많은 외인부대를 이끌고 북쪽에서 갈릴리를 공격했다. 그의 아들 티투스는 군단장으로 참전했다.
로마군들은 갈릴리 지역의 요새 요타파타(Jotapata)에 맹공을 가했다. 공성(攻城) 장비를 주위에 배치하여 돌과 창을 쏟아부었다. 이에 맞서 요세푸스는 말뚝 위에 바로 잡은 소의 가죽을 덮어씌워 방패막을 만들어 방어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인들이 굶어 죽을 때까지 성을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여름철 요타파타 안에는 물이 부족했지만, 유대인들은 빗물로 버티면서 옷을 물에 흠뻑 적셔 성벽이 물에 젖도록 하는 위장 전술을 쓰며 싸웠다. 로마군들은 성 안에 물이 많은 줄 알고 놀랐다. 유대인들은 양가죽 등을 뒤집어쓰고 로마군이 보아도 가축처럼 여기게 하여 성 밖에서 몰래 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유대인들은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기보다는 싸우다가 죽기를 원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수양의 머리처럼 생긴 공성(攻城) 망치를 이용해 성벽을 집중적으로 강타했으나 유대인들은 왕겨 담은 부대로 방어했다. 그리고 로마군의 공성 장비와 방패막에 역청과 수지(樹脂)와 유황이 섞인 물건들을 모아 화공(火攻)을 가하며, 로마군이 사닥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오를 때는 끓는 기름을 부었다. 이에 베스파시아누스는 토성을 더 높이 쌓으라고 지시했다. 그 위에 15미터 높이의 대를 세 개 세웠는데, 그 목재를 충당하기 위해 예루살렘 주변 사방 18km 내의 나무들을 완전히 벌목하여 그 땅이 황무지가 되었다. 로마군이 공성(攻城)을 시작한 지 47일째 되던 날 로마군의 토성이 요타파타 성벽보다 높아졌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눅 19:43)
그때 유대인 변절자가 탈주해서 로마군에 투항하고 요타파타 성의 상황과 유대인의 경계가 취약한 시간을 로마군에게 알려 주었다. 이에 티투스의 지휘를 따라 로마군이 소리 없이 성벽으로 접근하여 파수병의 목을 자르고 성에 진입하여 마침내 요타파타 성을 함락시켰다. 로마군들은 그동안 겪은 어려움에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였다. 요타파타의 함락 전후로 로마군에게 살해된 유대인은 총 4만 명에 달하였다. 로마군은 유대인이 숨은 곳은 샅샅이 찾아내어 죽이고, 부녀자와 아이들 1,200명을 포로로 사로잡아 갔다.
군대들에 에워싸인 예루살렘
주력부대가 무너졌기에 예루살렘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로마군은 유대 땅 전역을 차근차근 점령했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미리 말씀하셨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눅 21:20)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 19:43~44)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예언은 AD 70년 티투스에 의하여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시점(AD 68년)에서 전쟁이 잠시 중단되었다. 네로 황제가 죽어버린 것이다.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다음 황제의 명령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 티투스를 새 황제 갈바에게 보냈다. 티투스는 로마로 향하여 가던 중에 갈바가 죽고 오토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오토 역시 불과 3개월 후에 사망했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님은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이미 아시고 피할 길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눅 21:21~22)
사람들이 볼 때는 예루살렘처럼 견고하고 안전한 요새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요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여기고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전쟁이 잠시 중단된 때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유대와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갈 때라는 사실을 깨닫고 요단 동편 데가볼리 지방의 펠라(Pella)로 옮겨갔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을 믿었던 사람들은 예루살렘 안에 그대로 머물렀고, 기근과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다가 한없는 고통을 받고 로마군의 칼에 죽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신앙은 회개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자기 생각을 따라서 사는 것이 죄(罪)고, 자기 생각을 버리는 것이 회개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생명을 얻었고, 주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기 생각을 신뢰하는 자는 멸망을 당했다.
통곡의 벽 통곡의 벽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몇 가지 기호 중 하나입니다. 통곡의 벽에 얽힌 역사에 생소한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명소일 것이고 통곡의 벽의 역사와 함께 세월을 보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예루살렘이 붕괴되었던 가슴을 찢는 기억의 장일 것입니다. 통곡의 벽은 단순한 성곽이 아닙니다. 유대전쟁을 치루기 전에 통곡의 벽은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벽이었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구별하는 선을 긋고 유대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신실하고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며 예루살렘 성전안에서 죄를 씻었습니다. 격렬한 전쟁 속에서 그들의 신념이자 상징인 예루살렘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 다루겠지만 서두에 먼저 언급하자면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위해 준비 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멸망이 어떻게 성경 예언으로 적혀있는지 찾아봄으로써 유대인들이 간과하였던 진리가 무엇이었는지 밝혀보도록 합니다. 불타버린 성전 유대인들은 마치 신들린 사람들처럼 열심히 싸웠으며,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주실 것으로 믿고 여호와의 성소를 지켰다. 그러나 성전에 화염이 치솟자 유대인들은 고통에 찬 고함을 지르면서 불을 끄려고 달려갔다. 그렇게 목숨 걸고 지켜온 성전이 불에 타자 유대인들은 목숨 아까운 줄도 몰랐다. 티투스도 성전은 아꼈기 때문에 불을 끄기 위하여 급히 일어나 성전으로 달려갔다. 티투스는 불길을 잡으라고 명령하였다. 일부 로마 병사들은 성전 안뜰에 붙은 불을 끄려고 사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유대인과 싸우고 있던 병사들은 우선 불부터 끄라는 지휘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로마 병사들은 오히려 불을 지르라고 부추겼다. 무기도 없는 일반 백성들은 로마군에게 잡히는 대로 목이 잘렸고, 성전 제단 주변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로마군들은 성전 내부가 온통 금으로 된 것을 보고 내부에 보화가 가득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병사들을 제지하러 달려온 티투스보다 먼저 온 병사 하나가 성전 문의 돌쩌귀가 있는 컴컴한 곳을 향해 불을 던졌고, 횃불이 떨어진 곳은 지성소 바로 옆에 있는 예배실이었다. 이 예배실은 오래된 목재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제사용 동물을 태우기 위한 가연성 물질 및 기름단지 등이 비치되어 있었으므로 활활 타오르던 화염은 춤을 추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이리하여 장엄하게 지어졌고 미석과 헌물로 꾸며졌던 예루살렘 성전(눅 21:5)은 완전히 불타버리고 말았다. 성전이 불타면서 성전 벽에 입혔던 금이 녹아내려 벽과 바닥에 스며들자, 로마 군인들은 그 금을 긁어내고자 성전의 파괴를 자행하였다.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눅 21:6)고 예언하셨다. “날이 이르면”이란 40년 후에 일어날 예루살렘의 멸망을 이야기하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중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헤롯이 주전 20년에 개축한 제2 성전 벽의 서쪽 부분이다.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른다. 티투스 장군이 제2 성전의 다른 부분을 모두 파괴하고 유독 이 벽만 넘겨 놓은 이유는, 후세 사람들에게 성전을 파괴시킬 수 있었던 로마 군대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성전이 세워진 산은 불바다가 되었고, 사방은 피바다를 이루었다.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 당시 로마인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와 포로가 모두 6만 명이라고 기록했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망자가 11만 명이라 한다. 특히,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예루살렘 성 안에서 굶주림과 처형으로 죽은 사람만 6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유대인은 10,000명 정도가 붙잡혀 살해되었다. 살려 달라고 애원해도 로마군은 악착같이 맞서 싸운 유대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예루살렘이 포위된 기간 동안 포로로 잡힌 사람의 수는 97,000명에 달했으며, 사망자 수는 110만 명에 달했다. 예루살렘 성은 외부의 접근이 어려운 벼랑 위에 있는 데다 사방이 겹겹의 육중한 돌로 둘러싸인 견고한 요새였다. 이 전쟁의 희생자 대부분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다가 전란에 휩쓸린 사람들이었다. 유월절 인파가 대거 몰려든 데다가 유대 지역 사람들이 자기들이 볼 때 가장 안전해 보이는 예루살렘으로 피해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근과 전염병은 더 많은 피해를 낳았다. 주님은 미리 말씀하셨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눅 21:20~22) 주님은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가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살기 위하여 자기 생각을 따라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로마군이 쳐들어와서 죽은 것도 아니고, 살 수 있는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성전 제사는 멈추어졌고, 따라서 제사장 직이 소멸되었다. 예루살렘의 몰락 이후 유대교의 중심지는,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다수의 지도적 랍비들이 피신하였던 얌니아가 되었다. 통곡에 벽에 남겨진 예루살렘 함락에 관한 포스팅을 마무리 짓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예수그리스도와 완전한 의는 보지 못한 채 자신의 옳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피를 흘려야 했던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마다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
유대인 학살
유태인학살은 이스라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유태인학살을 잊지 못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현대사에 와서 유대인이 받은 수난에는 히틀러로 인한 유태인학살이 대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들은 그 이전에도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로마로 인한 수난도 겪어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유대인들이 겪어온 수난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유대인들 스스로가 자처한 저주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겪을 일들을 예언하였고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되짚어가며 유태인학살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수난사의 이유를 찾아 보려고 합.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의 피를 흘린 저주
예루살렘이 로마군의 손에 붙여져 멸망당한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복음주의적 교회사가들은 그 첫 번째 이유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보내신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 행한 악행에 대한 보응이었다고 본다.
“빌라도가 …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마 27:22~26 참조)
이 저주가 그대로 임하여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멸망을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팔려가 2천여 년 가까이 나라 없는 설움을 겪으며 전 세계를 떠돌아다녀야 했다.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곳에서 너와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실으시고 전에 네게 고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대적에게 노비로 팔려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신 28:64~68)
2차 대전 때 히틀러에 의해 하필 유대인이 600만 명씩이나 희생된 역사가 결코 우연은 아니라 하겠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소리쳤던 그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그 후손들에게 임한 무서운 저주의 결과를 유대인의 역사가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만 흘린 게 아니라 스데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주님의 동생 야고보의 피도 흘렸다.
유태인학살 - 유대인의 수난사
유대인의 수난사를 다 읽어보지 않더라도 가까운 현대사에서 세계 만민이 생생하게 목도한 처절한 수난사의 하나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이다. 그때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은 당시 전체 유대인의 약 60%에 이르는 수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이 묻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그 언저리에 벌거벗은 채 줄지어 서 있으면 나치의 기관총구가 그들을 향하여 불을 뿜었다. 총에 맞아 그 구덩이로 떨어지면 군인들이 하나하나 확인 사살을 한 후 불도저로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줄 자가 없을 것이며”(신 28:26)라는 말씀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유럽 여러 곳에 유대인 집단수용소가 설치되었고, 각 곳에서 실려온 이들이 매일 수천에서 만 명에 이르기까지 가스실에서 죽어 나갔다. 또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지면 가스실로 끌려갔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매일 만 명의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죽어 갔다.
시체들을 화장시키는 연기가 연일 하늘을 덮었고, 시체 소각장의 부족으로 인해 시체들을 광장에 늘어놓고 그 위에 기름을 뿌려 태우기도 했다. 벌거벗긴 후 신체에 부착된 것은 물론 금니까지 다 뽑았다. 시체 기름은 짜서 비누를 만들기도 했다. 또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상상할 수 없이 잔인한 온갖 생체실험 대상이 되기도 했다. 4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그렇게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무죄한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흘린 대가가 조상들의 요구대로 후손에게 임한 무서운 저주를 깨닫고 있을까?
유태인학살이라는 사건보다 이스라엘이 겪은 일들이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봅시다. 성경에 쓰여진 여러가지 예언들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성경에 예언은 얼마나 많이 쓰여있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
오늘 이 시대에도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복음과 참된 하나님의 종들이 전해 주는 말씀과 권고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얼마나 복된지를 알아야 한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이 그렇게 황폐해지고 비참해진 요인들 중 가장 큰 요인은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 때문이었다고 증거한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반란군들은 백성을 속이기 위해 거짓 선지자들을 매수하였고, 거짓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을 돌아다니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전으로 올라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성전에 올라가면 여러분은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하며 거짓 희망을 불어넣어 유대인들의 탈주를 막으려는 데 이용하였다고 전해 준다.
세상 끝날에 임할 징조들
성경의 예언에는 두 개의 사건이 한 곳으로 모이며 하나의 예언이 이중적 성취를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먼저 성취된 사건들은 나중에 성취될 더 큰 일들과 의미를 그림자처럼 조명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 구약의 예언 중에 이중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유대인들이 구약의 메시아에 대해서 그렇게 혼동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예를 들어 이사야 61장 2절은 초림과 재림이 이중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거기서 은혜의 해는 예수님의 구속의 초림을 말하며 신원의 날은 심판의 재림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멀리서 조망했을 때 마치 하나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성경의 많은 예언들이 예수님의 초림 또는 예수님의 재림을 분명하게 구분지어 말하고 있으나 또 많은 경우에는 초림과 재림에 관한 내용이 섞여 이중적 관련(double reference)으로 표현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4장이나 누가복음 21장에서는 AD 70년에 닥칠 예루살렘의 멸망(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언과 세상 끝에 지구 위에 임할 멸망의 징조들이 섞여서 이중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은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나타날 징조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24:1~3 참조).
누가복음 21장 35절에서도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 예언의 말씀들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끝날에 임할 징조를 오버랩시켜 하신 말씀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련된 예언은 예루살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임하게 될 종말의 예표와 전조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의 말씀들이 분명하게, 한꺼번에 이루어져가고 있다. 처처에 큰 지진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있다. 민족 및 종족 분쟁, 테러, 핵의 위협, 자원의 고갈과 전쟁, 가뭄과 기근, 기상이변, 지구온난화로 인한 빙하의 해빙과 해수면의 상승, 심각해져 가는 대기 및 대양 오염, 생태계의 파괴와 환경 문제, 새로운 질병(온역)의 위협, 인본주의적 종교와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 영적 무감각과 타락, 그리스도인의 배도와 타협, 종교 통합, 교통의 발달과 지식의 급증, 이스라엘의 성전 재건 준비, 눈앞에 다가온 666… 등 여러 예언이 우리 눈앞에서 말씀대로 급속히 이루어져 가고 있다.
성경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성경에는 1817개의 예언(for 737 separate subjects)이 8,352 구절에 들어 있으며, 이는 전체 성경 내용의 27%나 된다고 한다
신약의 216장(chapter) 중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내용이 300번 이상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30구절 당 1번 정도의 빈도수로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때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셈이다(마 24, 25, 막 13, 눅 21장 등은 장 전체가 재림에 대한 말씀). 신약 중 단지 4권만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인용이 없다. 신약 전체의 1/20 정도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되어 있다.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쓰나미)를 인하여
일본 후쿠시마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는 단순히 자연재해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원자력발전소 폭발로 인한 방사능 누출 문제까지 겹쳐 전 세계에 천재와 인재가 맞물린 때 얼마나 무서운 재앙이 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눅 21:25)
우리는 바다와 파도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있다. 주님께서는 이럴 때 민족들이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원어에서 ‘혼란한 중에(ejn ajporiva 엔 아포리아)’는 ‘당혹함,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혼란’을 나타내는 말이다.
‘곤고하리라(sunoch; 쉬노케)’라는 단어는 ‘쉬네코(sunevcw 함께 소유하다, 어려움을 겪다, 억눌리다)’에서 유래한다(고후 2:4의 큰 환난과 같은 단어임). 이는 ‘고뇌, 고민’의 뜻이다(A.T.Robertson). 우리는 쓰나미로 일본 국민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혹해 하고,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보았다.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눅 21:27~28)
지금은 거듭난 성도들이 들림받을 구속(救贖)의 때가 가까웠다. 주님이 오시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는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한 사람이라도 복음 안으로 인도해야 할 때인 것이다.
예언의 성취가 증거해 주는 교훈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성취된 사실들을 보면 우리는 이 세상이 그냥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세상은 어떤 정치 지도자나 유명인사나 스타가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다.
인류 역사의 고삐를 잡고 이끌어 가시는 주관자가 계시며, 그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의 창조자요, 주관자이시며, 우리 영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세상의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다.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알고 세상의 미래를 아는 사람은 결코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다. 그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게 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기독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단과 마귀(魔鬼) (0) | 2024.08.09 |
---|---|
요나서에 나오는 다시스, 니느웨 위치는? (0) | 2024.08.09 |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들 (0) | 2024.08.09 |
요한복음(표적과 선언) (0) | 2024.08.08 |
구약 연대기 도표 (0) | 2024.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