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20절-24절: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20절-21절: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여기의 ‘무리’에는 제자들도 들어있고, 제자들 외에 평신도도 들어있고, 율법사도 들어있고, 바리새인도 들어있고, 그리고 예수님 앞에 모인 이방인의 무리도 있다. 그러니까 구별 분별이 안 되고 혼합이 된 게 무리다.
한 교회 안에 있어도 무리성이 있다. 소원성 목적성 취미성 간구성이 다 다른 게 무리성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의 발전이 힘들다. 예수님께서 ‘내가 말하는 것은 육이 아닌 영이니라’ 라고 하시니까 육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다 떠나갔다. 단일성이라야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영능의 실력적으로 부쩍부쩍 자라게 된다. 같은 교인이라도 신앙의 성질이 차이가 있다.
세계적인 전체 교회도 본질로 된 교회, 즉 주님이 원하시는 참 교회가 있고, 거짓된 교회가 있다. 교회권 안에 있는 교회가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가 있다. 주님의 생각 안의 교회가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가 있다. 구원이 되는 교회가 있고, 구원이 안 되는 교회가 있다. 그러니 사람의 신앙을 말할 때는 사람 속의 생각과 정신을 보고 판단을 해야 한다. 설교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어느 동네를 지나가는데 병자의 입장에서 이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못 만나고, 못 고치고, 못 깨닫게 된다. 바로 믿으려면 기회 포착을 잘 해야 한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인간은 영육 결합체로 지음을 받았는데, ‘육’이라고 할 때 몸, 즉 육체가 있고, 이성 또는 마음도 육에 속하는 것인데, 인간은 이성의 작용에 의해 몸과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영도 있는데, 인간의 영을 만드신 하나님도 영적인 존재다.
그러면 영이신 하나님과, 내 속의 영이 질적으로 같으냐, 다르냐?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느냐, 안 되느냐? 귀신, 마귀, 악령들은 다 영물이다. 천사도 영물이다. 그렇다면 귀신이나 악령들과, 영이신 하나님이 같으냐, 다르냐? 하나님이 안 계시면 천사가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있는 거냐? 안 된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인데, 하나님이 안 계시면 천사는 심부름을 못하는 거다. 안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 없어진다면 천사가 존재하겠느냐, 사라지겠느냐? 사라진다. 또한 우리 인간도, 세상도 전부가 없어진다. 하나님이 계시니 현재 자기도 있는 거고, 산천초목도 있는 거다. 천사는 영물이요 영적인 존재요, 귀신과 악령도 영물인데 이 둘이 같은 거냐, 다른 거냐? 귀신이 천국에 올라가면 천사가 되고, 땅에 내려오면 귀신이 되는 거냐? 질이 전혀 다르다. 이런 것을 명확히 알면 우리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과 같은 건지, 다른 건지 알게 된다.
우리의 영은 아담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도 죄적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본질에 비해 피조 된 존재라는 면에서의 이질이다. 그리고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영이 죄에 물이 든 죄적인 이질이 되었다. 중생을 한 후에는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을 입은 영이 되는 건데,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본질로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음으로 되는 거다. 그리고 영이 중생 된 사람이 성령의 감화 감동을 입으면 이성과 몸이 신의 성품을 입게 되고, 영이 성장이 된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느냐? 아니다. 그런데 왜 성경에 사람에게 귀신이 들어가서 귀신이 말을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냐? 귀신이 중생한 사람의 영 속에 들어가는 거냐, 성도의 이성에서 장난을 하는 거냐? 후자다. 귀신이나 악령이 영물이라고 해서 중생 된 영 속에 들어갈 수는 없는 거다. 그러나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소원 목적이 물질성이라서 표현을 하자면 머리를 감지 않으면 오만 잡벌레가 생기는 것처럼 사단 마귀가 이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오만 장난을 하는 거다. 믿는 사람이 이런 상태로 살면 주님이 오셔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으로 이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작업을 하신다. 다른 말로는 귀신을 쫓아내고 사단 마귀를 쫓아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어린아이를 세우고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고도 남는 건데 왜 제자들을 향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을 하신 거냐? 또한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도 했는데, 왜 예수 믿는 사람이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씀을 하신 거냐? 인간 자기의 신앙의 질이 예수님의 것으로 되어지지 않은 그 성분 그 요소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믿는 사람이 주님과 이질적인 요소가 주격이 되어서 이질적인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하나님의 본질을 따라 성장하는 이룰구원을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영적인 면이 둔감해서 거짓과 이단 짓을 하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 면을 몰라서 이렇게 시끄러운 거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상 끝까지 이 땅에 계시면서 거짓이나 이단자들이 힘을 못 쓰게 만들어 놓을 것이지 왜 가르쳐만 주고, 모범만 보여주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거냐?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대로만 하면 영능의 실력자가 되고, 이 영능의 실력에 따라 천국에서의 존귀 영광의 누림성이 있기 때문에 이 실력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닦게 하기 위해서다.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느냐? 귀신을 믿는 자들에게도 구원이 있느냐?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이런 자들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데, 구약 같으면 이런 말을 하다가는 맞아 죽는다. 우리는 이런 말은 신앙이 아니니 밟아버려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부처와 악수하게 만들고 귀신과 악수하게 만드는 거다. 그런가 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어디에든 다 구원이 있으니 나는 내 식대로 하나님을 믿고, 너는 네 식대로 부처를 믿어라’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없는 거다. 우리는 확고부동하게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제 멋대로 되어버려서 공공연히 이단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우리가 믿을 분은 오직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신령천국을 누리고 통치하며 극치의 쾌락으로 영원히 살게 하려 함이다. 이렇게 되려면 이방종교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되는 거다. 이게 구원이다. 그래서 교회의 인도자는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인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서 이탈이 되는 교훈을 하면 안 된다.
교회의 교훈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서 이탈을 시킨다면 큰일 날 일이다. 자기의 구원을 위해 산천초목이 존재하고 있고, 일 년 열두 달이 돌아가고 있고,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고 있고, 악령과 천군 천사를 부리고 있는데, 이런 자기를 우습게 여기고 무시한 채 세상을 붙잡고 살면 오만 귀신이 들어와서 물어뜯게 된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죽이려고 하고 있다. 이들이 예수님의 육신을 죽이면 예수님께서 천국복음 하늘나라를 전하지 못하게 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육신을 죽이는 것만 아니라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사람 속에 세상바람을 집어넣으면 이것을 받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 천국복음은 없고 세상의 소원 목적성만 가득 차게 되니 이것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거다. 이건 마귀 짓이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마귀 짓이 되는 거다.
신령세계, 영생의 세계,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세계, 존귀 영광의 세계, 행복의 세계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세상사람들과는 그 기준적 지식이 완전히 다르다. 질적 근원적으로 다르다. 산 것과 죽은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 복음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게 들어있다. 나를 이런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영육 결합체의 인간으로 지은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 면에 대해서는 흐리고, 없어지고, 불타질 세상에 관한 것에는 애가 닳고, 이것에 손해를 보면 자살이라고 할 것처럼 난리를 피우는 사람이 많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위해 하신 일이 많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무리와, 바리새 교인들과, 유대 종교인들은 예수님처럼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교훈으로 깨닫게 하고,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일을 했느냐? 전혀 못 했다. 율법을 많이 알면 생각이 예수님께로 가게 되어있다. 그런데 유대 율법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데도 모든 생각이 껍데기만을 좇고 있었다. 반면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율법은 잘 몰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즉 알맹이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것은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예수님으로 통해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많이 알고 외워야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인격화 되라고 하신다.
우리 기독자들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천국복음의 진리정신을 가졌다면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주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구원의 일, 영능의 실력을 못 이루게 방해하는지를 알게 된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 백성의 구원을 방해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하시는데 이들은 자꾸 로마의 압박에서 해방만을 생각하고 있다. 사실 유대인들이 로마의 압제에 놓이게 된 것은 이들이 죄에 노예로 살기 때문에 이것을 깨닫게 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로마의 압제에 놓이게 한 것이니 이들이 죄에서 해방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로마의 압제에서도 해방시켜 주시는 거다. 유대백성들이 정신적으로 어느 나라를 의지하고 있으면 육적인 속국 이전에 이미 정신적으로 그 나라의 속국이 되어있는 거다.
예수님께서 그 무엇이던 육적 가견적 역사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은 영적인 면을 깨달으라는 것인데 육적으로만 고집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통해 영적인 면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상하게 여겨진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예수님으로 오셔서 영의 일을 하는 것을 부정한다. 그 어떤 종교적인 행동이라고 해도 우리의 이룰구원을 방해하는 것은 마귀의 수법으로 들어간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덧입는 것에 목적이 있는 건데 이 일이 안 되게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22절-24절: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할례는 누구로부터 온 거냐? 창17:10-13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남자아이를 낳으면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게 했다. 또 노예를 돈으로 사왔으면 그도 할례를 받게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안의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게 했다. 이 할례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인데, 지금으로 말을 하면 예수님께로 소속 또는 구별을 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은 구별이 들어가는 거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었으나 예수를 믿고서 구원 쪽으로, 하나님 쪽으로 소속이 되었다. 그러니까 할례란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증표로서의 의식이다.
할례는 남자아이의 성기 끝의 표피를 베는 것으로, 그 뜻은 육적인 몸을 벗는다는 의미가 있고, 외식자로 살지 않겠다는 거고, 세상 소원 목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거고, 오직 하나님만 향해 살겠다는 거다. 이게 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되는 일인데 오직 하나님만 향해 살게 되면 앞의 것들은 다 통과가 되는 거다. 모세 이후의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행했다. 애굽을 탈출한 자들도 광야에서 할례를 받았다.
아브라함은 모세가 율법을 따라 행하는 할례에 앞서서 할례를 행했는데, 이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축복의 보증이고, 율법을 받고서 받는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온다는 의미의 할례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축복의 보증으로서의 할례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보증의 할례가 있는 거다. 그래서 할례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거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이라고 하신 것은 할례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뜻이 들어있는 건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뜻, 이 정신은 모른 채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즉 표면적인 것을 지키기 위해 할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외모로 보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사람의 외형이나 모양이나 형태나 업적이나 활동이나 배경 등등 눈으로 보여지는 것을 기준해서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을 공의로 판단하는 것이란, 공의란 하나님께서 내리는 판단인데, 사람의 중심을 보고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공의로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것으로 되는 게 공의의 성질이다. 공의성이 아니면 심판에 걸린다. 육의 생각은 공의성에 걸리지만 영의 생각은 안 걸린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하는 일을 하신다. 예수님은 육적인 할례에서 더 들어가 영적으로 건강한 자로 살게 하는 일을 하신다. 그래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을 하라는 거다. 껍데기로만, 행동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을 하라는 거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런 정신이 없었다.
사람을 공의로 판단을 하라는 것은 속사람의 기준과 생각과 신앙성이 하나님의 본질로 되어있는지를 판단을 하라는 거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 공의로 보시니 우리도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공의로 봐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을 놓고 이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공의성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판단하실 때 내 행동, 활동, 모양만 보고 판단하시는 게 좋겠느냐, 내 중심을 보고 판단하시는 게 좋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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