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 : 믿음 BIW : 변화받으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에서 변화받는 삶을 사는 것이다.
도둑 남편과 목사 남편
어느 선교사 사모님께서 남편의 책상을 정리하다 손바닥만 한 작은 성경책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 성경책은 7년 전에 그녀가 학교 기숙사에서 잃어버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성경책은 벌써 손때가 묻고 헤어져 있었지만 자기의 것이 분명했습니다.
사모님은 성경책을 품에 안고 선교사인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선교사님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피곤한 기색이었으나 아내를 보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사모님은 아무 말 없이 그 성경책을 탁자 위에 꺼내 놓으며 날카로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순간 남편 목사님의 얼굴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이 성경은 오래전에 내가 잃어버린 것인데 어떻게 당신이 갖고 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님께서
“정말 미안하오. 내가 당신에게 숨긴 것이 있소. 옛날에 나는 도둑이었소.
어느 날 밤 한 기숙사에 들어가 물건을 훔쳐 왔는데 성경이 들어있었소.
무심코 펼쳐본 성경책에 줄이 쳐진 구절이 있었다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베푼 선한 일을 하라.’고 기록되어 있었다오.
그때처럼 부끄러운 적이 없었소.
그 뒤로 나는 날마다 이 성경책을 들고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여 지금의 내가 되었소.
그 성경책의 주인이 당신이었다니......”
지난 과거의 이야기를 들은 사모님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편 선교사님도 역시 하나님을 찬양하며 놀라운 역사를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는 이처럼 놀랍기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오늘의 나를 이끌어가실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이루어가시는 분입니다.
오늘도 주일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4
살아 있는 생명체가 지닌 특색은 무언가가 자라도 자란다는 사실이다.
이미 성장기가 다 지나서 어르신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무언가는 자란다.
머리카락이 자라고, 손톱과 발톱이 자란다.
몇 백 년이 지난 고목들도 봄이 되면 새롭게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살아있다는 증거는 무언가라도 자란다는 사실이다.
자라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죽으면 어떤 것들도 더 자라지 않고 썩고 부패하고 없어진다.
인류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 부부가 하나님께서 금지시킨 선악과를 따먹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 부부를 쫓아내고 만다.
하나님께서 아담 부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면서 에덴 동산 동쪽에 두루 도는 불칼과 그룹들을 세워서 아담 부부가 에덴동산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막으신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막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을까 봐서 에덴동산을 막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3:24에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 부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기 위해서 찾아가는 길을 차단시킴으로 더 이상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지구촌으로 인간의 몸을 입혀서 보내신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아담 부부로 인해서 생겨난 죄,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죄를 용서하신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죄를 용서하심으로 에덴동산을 막고 있는 두루도는 불칼과 그룹들을 없애버린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무참하게 찢어지고 만다.
휘장이 무참하게 찢어짐으로 휘장에 새겨놓았던 그룹들이 사라지고 없어지고 말았다.
더 이상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지키는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이 사라짐으로 이제는 더 이상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는 것들이 없어졌다.
이제는 얼마든지 에덴동산으로 들어가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을 수 있게 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시고 죽음의 길로 걸어가신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게 된다.
그럼으로 이제는 생명을, 영생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생명, 영생을 가졌기 때문에 생명은 자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으로 무언가라도 자라게 되는 것이다.
무언가 자라고 성장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변화 받는다는 의미이다.
변화 받는다는 의미는 이전에 비하여 무언가 하나라도 새롭게 자라고 성장한다는 것이다.
자라지 않으면 죽는 것이고, 자라고 성장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표이다.
살아있다는 증표는 무언가 하나라도 변화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 신앙인들에게 무언가 하나라도 변화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변화 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변화 받는 삶을 살기 위헤서 신앙인들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D4
① 역사 속에서 구원의 세계를 펼쳐나가시는 하나님.
1-2절에서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에 기록한 디베료 황제는 로마제국의 제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황제이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로마1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상속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이자 황후(아우구스타)인 리비아 드루실라(Livia Drusilla)가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하기 전에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친아들이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뒤를 이어서 로마의 제2대 황제가 되어서 AD37년 3월 16일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티베리우스 황제 때에 가나안 유대 지역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이었고, 헤롯 안디바가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이었고, 헤롯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의 분봉왕이었고, 루사니이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제사장은 본래 1인으로 죽을 때까지 종신형 대제사장이었다.
중간기 시대에 마카비 왕조에 이어 하스모니안 왕조가 세워지면서 대제사장은 종신형에서 임기제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여러 명의 전직 대제사장과 현직 대제사장이 함께 기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로마 황제와 유대 각 지역의 분봉 왕과 여러 대제사장이 함께 기록하는 것은 역사적인 팩트임을 기록하는 것이다.
곧 성경은 역사적인 사건에 근거하여 진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추진하고 계시는 구원의 계획은 철저하게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진행하는 사역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한 다양한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임의로 꾸며낸 신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화(神話, Mythology)는 어떤 사건에 신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꾸며낸 이야기이다.
신화는 사람들이 임의로 꾸며낸 이야기이기 때문에 100% 신뢰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신화들이 존재하고 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에서 등장하는 탄생 신화, 건국 신화는 무속신앙의 영향으로 사실에 근거하여 신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고조선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김부식이란 분이 기록한 정사(正史, authentic history)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에 승려인 일연이라는 사람이 신화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를 기록하면서 한민족이 가진 5000년 역사의 찬란하고 고귀한 역사가 100% 신뢰할 수 없는 야사(野史, an unofficial history)가 되는 불행한 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팩트는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100%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사건, 예수님의 사건은 신화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고, 존재했던 사건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분명한 팩트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과 영생을 회복하기 위하여 추진하는 구원의 계획,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통하여 온 인류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추진하는 구원의 역사는 역사적인 팩트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믿고 신뢰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는 사람들이 임의로 꾸며낸 허황한 신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100% 신뢰할 수 있는 구원의 역사를 알고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② 빈 들로 찾아오셔서 임재하시는 하나님.
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라고 소개하고 있다.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 4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엔 케렘에서 태어나서 엔 케렘에서 자란 사람이다.
이 엔 케렘이란 지역을 누가복음에서는 “빈 들”이라고 기록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빈 들이라는 말이나 들녘이라는 말이나 광야라는 말이나 다 똑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이다.
빈 들, 들녘, 광야라는 지역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사람이 너무나 살아가기에 곤란한 지역처럼 보인다.
황량하고 시도 때도 없이 모래바람이 불어닥치고, 온통 돌맹이들, 자갈들이 나뒹글고 있는 지역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지역처럼 보이는 곳이지만, 그런 곳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임재하시고 도와주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지역이다.
엘샤다이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도와주시고 지켜주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처소이다.
그러므로 들녘이나 빈 들이나 광야는 살아계신 하늘의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유대 사회에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면 광야로, 들녘으로, 빈 들로 나아가라고 가르치는 이유이다.
요한이 엔 케렘이라는 빈 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도와주심과 지켜주심과 은혜로 살아왔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요한의 부모가 되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늙어서 일찍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간 이후에도, 여전히 요한은 빈 들에서 살면서 하나님과 독대하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는 것이다.
요한은 빈 들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와주심과 지켜주시는 가운데 성장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 빈 들로 요한에게 찾아오셔서 새로운 사명을 심어주시는 것이다.
요한은 본래부터 사명자로 부르심을 입고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빈 들로 찾아오셔서 사명을 주셨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명자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임재하시고 부르셔야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자라고 해서 먼저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마음대로 자기가 먼저 나셔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겠노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먼저 일을 시작하셔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지금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마치 빈 들처럼, 광야처럼, 들녘처럼 너무나 힘들고 어렵고 황량하고 아무것도 바라볼 수도 없고 의지할 곳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전능하신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을 만나주시기 위해서 그런 여건과 환경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인내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려움 중에, 고난 중에, 역경 중에, 핍박 중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진짜 살아있는 신앙, 생생하게 체험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난관에서도 비굴해지거나 낙담하지 않고 심지가 굳은 신앙인으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③ 죄 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도록 하시는 하나님.
3절에서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요한이 베푸는 세례에 대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정의하고 있다.
‘요한이 요단강 근처에서 베풀고 있는 세례가 어떤 의미이냐?’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죄 사람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일까?
아니다. 이들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곧 육신적으로는 할례의 징표를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이들에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도록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죄는 무엇인가?
소위 말하는 인간적인 범죄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다. 인간적인 범죄행위로 인해서 생겨난 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죄란 바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저지른 죄이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엄격하게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왕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들어 버린 바로 그 죄악을 의미한다.
곧 원죄를 의미힌다.
원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원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지옥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지옥으로 가야만 하는 죄를 사함을 받도록 하는 세례를 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지금까지 성전 번제단에서 소, 양, 염소, 비둘기로 제물을 바치면서 제사를 드려도 완전한 죄 사함을 받지 못해서 매일매일 제물을 드리면서 제사를 올려드려야 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면 그 죄를 사해주신다니 이 얼마나 감격하고 놀라운 일인가 하는 것이다.
요한이 베풀고 있는 회개의 세례는 곧 다가올 예수님의 세례, 불로 임재하시는 세례로 옮겨가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받는 세례에게로 이끌어가는 지침서, 나침판, 등대 역할을 하는 것이 요한이 베풀고 있는 회개의 세례이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부어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까지 요한이 베푸는 세례가 필요한 것이다.
④ 말씀에 근거하여 사역하도록 이끌어가시는 하나님.
요한은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4-6절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의 사역,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요한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행하는 사역이 아니다.
요한은 철저하게 빈 들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요한의 사역은 자신의 뒤에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를 뭇 백성들에게로 이끌어가는 사역,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가르쳐 주는 사역이다.
요한의 사역은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데까지만 협력하면서 도와드리는 사역이다.
요한의 사역은 자신의 욕망과 부귀영화와 영달을 위해서 행해지는 사역이 아니다.
요한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해주고 가르쳐주는 사역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행해지는 사역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사역은 어떤 사역이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사역은 아무리 대단하고 화려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워 보여도 무의미한 사역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사역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사역이라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철저하게 하늘 아버지의 말씀 안에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신다.
주님의 제자들도, 사도들도, 속사도들도, 교부들도, 수많은 사역자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역을 감당한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 뛰어나고 유능한 사역자가 되었다고 떠벌리는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단자들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사역은 철저하게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보혈과 부활과 재림의 복음만을 전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행해지는 사역이라야 한다.
신앙인들의 사역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뿌리를 박고 행하는 사역이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6절에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보혈과 부활과 재림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온 지구촌에 생존하는 뭇 백성들의 영혼들이 구원받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마태복음28:19-20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사도행전1:8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디모데후서4:2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라고 권면하고 있다.
⑤ 변화 받는 삶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요단강에서 죄 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 찾아오는 무리들에게 요한은 크게 외친다.
요한은 무리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라고 외친다.
독사는 생명체를 죽이는 동물이다.
요한이 무리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야단치는 말은 뭇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자들이라고 야단치는 것이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은 자칭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고 있노라고 자랑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처럼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백성들이 이들을 따라 살면 자칭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거역하고 대적하면서 죽음의 길로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자칭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사는 의인이라고 자평하는 무리들이다.
요한은 이들에게 너무나 따끔하게 야단치면서 회개의 합당한 삶을 살라고 충고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기본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봐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위를 일삼는 이들이 있다면 따끔하게 책망할 때는 책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잠언13:24에서는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12:6-8에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책망해야 하는 것은 그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는 것이다.
그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으면 구태여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책망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을 줄을 알면서도 책망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요한이 외치는 강력한 말을 들은 무리들은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반문한다.
그럴 때에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라고 외친다.
아니 옷 두 벌 있는 것이 뭐 그리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어야 한단 말인가.
옷이란 두 벌 뿐만 아니라 더 많이 가지고 있어야 때에 맞추고, 사람에 맞추어서 갈아입을 수 있지 않겠나?
단벌 신사가 얼마나 비참하게 사는 지 모르는 것 같다.
겨울이고, 여름이고, 봄이고, 가을이고 사시사철 똑같은 옷, 단벌 신사로 살아야 한다면, 그것 자체가 지옥 같은 삶이 아니라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모르시고 요한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다.
만일에 옷을 두 벌밖에 없는 사람이 옷 없는 다른 사람에게 한 벌을 주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주변 사람들을 살피면서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돌아보는 삶을 살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래서 12-13절에서도 세례를 받으려고 나오는 세리들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세리들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제국에 바치는 일을 하는 직업꾼이다.
그런데 로마제국이 세리들에게 합당한 월급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다.
로마제국은 세리들이 백성들에게서 정한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두어서 너희들도 살고 로마 제국이 정한 세금도 올리라고 묵인해 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세리들은 자신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 로마제국이 정한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두어야 가족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정한 세금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곧 이 말은 세리들은 굶어 죽으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을 요구하는 것이다.
14절에서 세례를 받으려고 나온 군인들에게도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군인들도 로마제국에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생활 대책을 세워주는 것이 아니다.
로마제국은 군인들에게 자신들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의 백성들에게서 무언가를 쟁취하여 생활하도록 묵인하는 것이다.
군인들도 백성들에게서 무언가를 쟁취하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군인들도 먹고살기 위해서 백성들에게서 무언가라도 하나 더 쟁취해야만 부대원들, 가족들의 입에 풀칠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받는 급료를 족한 물로 알라고 하면서 백성들에게 강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축복이 크든지 작든지, 받은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자족하면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삶의 여건, 상황, 처지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나님께서도 더 많은 것들로 채워주시는 것이다.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면서 신앙인으로서 살아야 할 삶을 살지 않고 이방인들처럼 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지금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일까? 아니면 이방인일까?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 요단강으로 몰려든 무리들은 이미 육신의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이방인들이 아니다.
이미 육신의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모세5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모세5경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죄 사함의 세례를 받기 위하여 요단강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주변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을 배려하면서 아주 조금이라도 나누어주는 삶, 베푸는 삶, 섬기는 삶을 살면서 유대인의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지나친 탐욕을 버리고, 이웃들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지 말고, 이웃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말고, 이제는 변화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변화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좋지 않은 나무들을 찍어내기 위해서 도끼가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찍혀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농부는 좋은 나무라고 판단이 되면 목재로 만들기 위해서 더 오래 키울 수도 있고, 열매를 따서 상품화하기 위해서 더 오래 키울 수 있다.
하지만 농부가 볼 때 나무들이 더 이상 목재로도, 열매로도 쓸모없다는 판단이 서면 미련없이 도끼로 찍어내거나 톱으로 잘라내어 땔감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나무가 니무로서의 목적이 사라지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잘려 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지 않게 살면 더 이상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야 할 목적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미련 두지 않고 잘라내는 징계를 내리는 것이다.
신앙인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건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자칭 신앙인이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내가 과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과 말씀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 생명을 얻은 사람이다.
생명은 반드시 자라고 성장하고 변하기 때문에 무언가 하나라도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서 전혀 변화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면 “난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를 자문하면서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L4 & B4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에게 변화받는 삶을 요구하신다.
요한을 통해서 세례받으러 나온 무리들에게 변화받는 삶을 요구하셨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받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요한의 목소리를 통해서 세례를 받는 자들은 자신의 잘못된 삶, 그릇된 삶을 깨우치고 새롭게 변화받는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받은 사람은 변화받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사람들은 교회만 다니면 되지 않나?
세례만 받으면 만사 오케이 아니냐?
직분만 받으면 되지 않나?
헌금만 하면 되지 않나?
봉사만 하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의 테두리에 갇혀서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를 받은 증거는 지금까지의 삶을 뛰어넘어서 그냥 그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무언가라도 변화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앙인들에게 아주 조금씩이라도, 1/10000이라도 변화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아무리 연세가 많이 들어서 연로하시더라도 하얀 머리카락이 자라서 미용실에 가서 헤어 커팅해 주어야 하듯이,
아무리 몇 백 년이 지난 나무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봄이 찾아오면 새로운 새싹이 돋아나고 자라서 꽃도 피고 열매가 맺히듯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새사람이 된 신앙인들은 아주 조금씩이라도 변화되는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이웃들 앞에서, 가족들 앞에서, 신앙인들 앞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으로 새사람이 되어 무언가라도 변화받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덴 동산으로 복귀하는 길(창 3:14-24) (0) | 2025.02.15 |
---|---|
스크랩 성도가 짊어져야 할 사랑의 빚. (0) | 2025.02.15 |
스크랩 좌파적 사고가 추구하는 평등의 허상 (창세기 1장 11절) (0) | 2025.02.15 |
스크랩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 창 4 : 6-15 (0) | 2025.02.08 |
스크랩 거룩한 소원을 이루라(빌 2:5-16) - 소원 (0) | 2025.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