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편 12절-19절: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전능하신 자가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12절: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본 절을 오전 시간에 한 내용과 이어서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가 단계적으로 진전이 된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느냐?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부어주신다. 문제는 자기가 어느 가난성을 더 크게 느끼느냐? ‘육적이냐, 영적이냐’에 따라 부어주시는 은혜가 다르다. 자칫 잘못해서 육적으로 돌아가 버리면 이방인들이 사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이 돼버린다.
믿지 않는 사람 중에 하나님께 구하지 않아도 부자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는 사람 중에 육적인 가난성에 갈급함을 느껴서 하나님께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하는데도 부자가 되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래서 성경을 육적인 면에 붙여 해석을 하게 되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영적인 면으로 해석을 하면 틀림이 없다.
영적인 면에 주의 은택을 받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으니 영능의 실력이 자랄 수 있는 자들 틈에 있어야 강한 자가 되고 정복자가 되어 나오는 거다. 이 성경을 무시하고 세상위주로 가르치는 대열에 서서 ‘영적인 말씀이 갈급하니 은혜를 주옵소서’ 라고 하면 은혜가 내려지겠느냐? 안 내려진다. 은혜를 받을 노선에 들어있어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거다. 그래서 내가 모임에 나오는 목사님들에게 늘 말하는 것이 ‘왜 은혜가 안 되는 곳에서 거짓운동에 동참하고 충성봉사를 하느냐? 네가 망한다’ 라고 하는 거다.
그런 곳에서 충성봉사를 하면서 임시적으로 얼마나 배부르게 잘 먹고 살 런지 모르겠지만 깨닫는 것도 없고 인격 면에서도 망한다. 이러면 가정적으로도 자녀교육에 있어서 신앙 믿음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 다음 대로 또 내려가면 그 후대는 완전히 불신자화 돼버린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할 거냐? 얼마나 미련하냐? 목사님들 세계에서 왜 이해타산 평가적으로 바른 판단을 못 내리고 그런 곳에 붙어있을까? 그러니 저주소리를 듣는 거다.
옳은 권고를 듣지 않을 때 육신적인 저주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영적인 면의 저주는 즉시 들어가는 거다. 옳은 권고를 듣지 않음으로 해서 깨달음이 없는 게 즉시 내려지는 저주다. 사람은 깨닫는 존재인데 깨닫는 게 없다면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살다보면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여기에 따라 자기의 정신과 마음과 모든 소원성이 어떻게 되겠느냐? 불 보듯 빤한 거다. 제 생각 제 바람에 제가 고통을 당하고 제가 병을 얻어서 죽는 수밖에 없다. 도리가 없다.
12절: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여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여러 군대의 왕들’이라고 하면 각 조직마다 각각의 목적을 가진 최고의 전문적인 우두머리들이 있다. 영의 눈으로 보면 기독교 안에도 전문적인 운동을 하는 자들이 많다. 목사만 해도 음악목사도 있고, 체육목사도 있고, 심방목사도 있고, 교육목사도 있다. 그런데 본 절에서 ‘여러 군대의 왕들’이란 악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니까 비진리적이며 육적이며 이질적인 사상을 가진 악한 무리들과 우두머리들이 기독교 복음인 것처럼 연합을 이뤄서 교회나 가정에 진을 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왜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을 가느냐? 그것은 힘 있는 주의 말씀을 받은 자들이 힘 있게 외치니 자신들의 모습이 탄로가 났고, 자신들의 위치가 탄로가 났고, 자신들의 정신 사상이 탄로가 났고, 자신들의 거짓이 탄로가 났기 때문에 도망을 가는 거다. 자기 위치, 자기 신분, 자기가 가진 것 등 모든 것이 탄로가 났기 때문에 도망을 가는 거다.
이단은 거짓과 잘 통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천국과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데 거짓 운동은 성경을 세상적으로 푼다. 이게 거짓 운동이요 거짓 신앙이다. 세상과 세상 것은 전부가 천국에 못 가져가는 거고 결국은 불에 타지고 썩는다. 복음은 이런 걸 주는 게 아니다. 이런 건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다 만들어 놓았으니 만들어 놓은 것을 자기가 노력을 하면 얻는 거고, 노력을 안 하면 못 얻는 거다.
그러면 이단이 뭐냐? 정통교회와 교리적으로 다른 건데, 간단히 말해서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을 교리적으로 축소해 놓은 것인데, 한 마디로 성도의 영적인 면을 말한다. 이것을 하나라도 부정하거나 다르게 주장을 하면 이단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통교회에 다니면서 날마다 사도신경을 달달 외우면서도 신앙사상은 거짓 것을 추구하게 되면, 즉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는 신앙이라면 이 사람은 사도신경을 외우는 그 자체도 거짓이 돼버린다. 이런 사람을 거짓 신앙자라고 한다. 그래서 거짓 사상과 이단자들은 세상과 세상 것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잘 통하는 거다. 즉 거짓 속에 이단도 들어있고, 이단 속에 거짓도 들어있는 거다. 참 성도라면 이런 곳에 있지 않는다.
우리교회가 다른 교회와 같다면 굳이 이곳에 모일 필요 없이 집 근처의 가까운 교회로 나가면 된다. 우리는 참 주님의 사랑, 이룰구원이다. 주님처럼 닮아지는 거다. 성경이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는 것이라고 했으니 우리의 신앙이 이 목적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그런데 세상 판으로 믿는 교회의 인도자와 교인들은 이런 우리를 향해 이단시 한다.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이들이 도망을 가는 것은 자신들이 이길 수 없으니까 도망을 가는 거고 안 죽으려고 도망을 가는 거다. 진리의 빛이 비취면 빛의 자녀들은 빛으로 나오지만 어두움의 자녀들은 빛을 피해 어둠 속으로 자기 모습을 감춰버린다. 그런데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겠느냐? 자기들의 거처지가 아닌 영적으로 강하지 못한 이스라엘 집 안에 있었고. 강하지 못한 교회의 회중 속에 있었고, 장차 구원 얻을 자 속에 있었던 거다. 이 자들이 막강한 말씀으로 무장한 여전사들의 공격에 다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말이냐? 계시적으로 보면 성도가 말씀으로 강하게 무장을 하고 있으면 세상성적인 요소가 말씀의 강함에 의해 빠져나가든지, 도망을 가든지, 기를 못 쓰게 된다는 거다.
예수 믿는 내가 세상적인 면에서 못났고, 연약하고, 못 배웠다고 해서 기죽지 말아라. 학교에서 공부를 못했다고,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못했다고 절대로 소외감을 갖지 말아라. 부산의 백목사님은 국민학고 3학년 밖에는 안 다녔는데 기네스북에도 올라가 있고, 그 분 밑에서 원어학 박사들도 배우고 있다. 그러니까 이 분은 성경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거다. 이건 세상공부의 힘과는 다른 거다.
사람이 힘이 있는 것은 세상 것에 달린 게 아니다. 진리생명의 빛 되신 말씀으로 무장만 되면 각양의 정신적 사상적 색깔을 가진 여러 왕들을 다 구별하고 분별해서 물리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대학공부를 했을지라도 이 면에 힘이 없으면 무장도 못하고, 가르치지도 못하고, 목회도 안 된다. 목회를 하려면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뭘 달라고 했느냐? 지혜를 달라고 했다. 무슨 지혜를 달라고 했느냐? 재판하는 지혜를 달라고 했다. 재판이 뭐냐? 구별 분별하는 거다. 생과 사를 구별해 내는 거다. 목사님들의 메시지도 생과 사를 구별해 내야 한다. 죽을 것과 안 죽을 것, 영원히 가는 것과 임시적인 것을 전부 구별해 내야 한다. 안 그러면 교회를 인도할 수 없다. 이 이치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체험한 얘기나 하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목사들이 구별을 하느냐? 교인들을 자꾸 세상화로 만들어 놓을 뿐이다.
세상의 힘이 막강한 것을 자기 힘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고 ‘나는 그게 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내 힘으로 삼고 살련다’ 라고 하면서 말씀 쪽으로 강한 정신을 가져라.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강한 정신은 없다.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사상이 자기의 주격이 되어있고 예수 믿는 것은 소유격으로 되어있지는 않은지? 진리주격의 사상으로 굳게 선 상태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소유적으로 이용을 하는 건지, 아니면 먹고 마시는 것을 주격으로 하고 이를 위해 예수를 소유격으로 믿는 건지 자기 스스로 생각하면 대강은 안다. 어느 게 자기의 주격이냐에 따라 신앙 믿음이 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힘없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을 가도록 집에서 협조한 여자들에게도 탈취물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복음사역에 동참하고 수종드는 자들도 같이 수입을 받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왕, 즉 지도자를 잘못 만다면 모두 이용을 당하는 거고, 말씀에 힘 있는 자를 만나면 수입이 많다는 거다. 더 나아가 자기가 힘 있는 말씀에 협조 동참까지 하면 자기도 강한 자가 되고 받는 은혜가 많음을 알아야 한다.
돼지를 잡는 데서 자기가 돼지의 뒷다리를 잡아주면 수입이 많겠느냐, 소를 잡는 데서 소의 뒷다리를 잡아주면 수입이 많겠느냐? 수입이 많은 데로 붙어야 한다. 자기가 바로 믿었는지 잘못 믿었는지 자기 스스로가 대강은 안다. 바른 것을 찾았으면 자기를 살펴보고 이제부터라도 바른 것을 잡고 힘 있게 나가면 자기는 그만큼 강해지고 수입이 많다. 강한 자가 수입이 많고 정복자가 수입이 많다.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다. 베드로가 얕은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던 모양인데, 베드로나 뱃사람들은 바람이 불면 파도가 어느 정도 치고, 어떤 바람이 불 때는 고기가 어디로 모인다는 것을 잘 안다. 이런 베드로임에도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니까 큰 물고기가 153마리가 잡혔다.
그러면 깊은 곳이 어디냐? 영적으로 보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깊다. 말씀을 이 깊은 곳에, 깊은 사상에 내려라. 그래야 깨닫는 수입이 많다. 큰 깨달음이 된다. 사람을 세우기 위해 백 날 ‘무슨 행동을 잘못했네. 뭘 못했네’ 해도 소용이 없다. 마음 속에서 깨달아져서 스스로 고치게 해야 한다. 이게 큰 수입이다. 이게 교육의 원리다.
13절: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뭔가 점점 더 좋아진다. 양 우리에 눕는다는 것은 양과 함께 휴식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힌다는 것은 다음의 전쟁을 위한 강한 말씀의 재무장을 말한다. 우리에게 휴식이란 노는 게 아니라 재무장을 말한다. 안식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기쁘게 만드는 거다. 자기를 기쁘게 만들어야 힘이 솟는 거다. 안식이라고 해서 아침부터 하루 온 종일 드러누워 있으면 힘이 솟겠느냐? 아니다.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깃은 날개의 털들이고, 이 깃을 황금을 입혔다는 것은 최고로 값비싸고 변질성이 없는 도덕성, 즉 가치판단 평가를 정확히 내릴 수 있는 신적 도덕성을 말한다. 양 우리에 누운 것처럼 휴식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준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휴식이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실질적으로 이런 휴식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것은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이룰구원의 목적으로 활동을 하면 들어오게 되어있다. 이방인들도 활동을 하면 세상의 것을 받게 되어있다. 우리 기독자는 세상 것을 많이 얻는 것이 사는 목적이 아니라 자타의 구원목적으로 사는 거다. 이것이 주님의 산업이다. 그래서 우리가 일을 해서 생계유지를 하는 것은 자타의 이룰구원의 목적이 들어있는 거다. 이를 위해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 대화도 하고, 쉬면서 대화도 하고, 대화를 하자니 커피를 대접도 하고, 대화를 하자니 음식 값을 내기도 하는 거다. 사람은 이래야 사는 맛도 나고 기쁜 거다. 이런 게 다 전도의 목적이다.
14절: ‘전능하신 자가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눈은 희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 잘 보인다. 눈은 바람이 부는 대로 잘 흩날린다. 눈은 가벼워서 바람이 휙 불면 한 곳에 모여 있는 눈은 사방으로 날아가면서 산산이 흩어진다. 살몬은 세겜마을 근처의 산 이름이다. 이스라엘 군대가 적군들과 싸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셔서 적군들이 산산이 흩어져 쫓겨나가는 모습이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눈처럼 보였기 때문에 본 절의 말씀을 한 것 같다. 성도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거지 무장도 안 한 채 게으름만 피고 있으면 돕겠느냐? 얻어맞기 일쑤다.
15절: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바산의 산은 요단 동편에 속한 고원지대에 있다. 바산 왕 옥이 다스리던 땅이고, 목축으로 이름이 나 있다. 이 땅을 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취한 후에 하봇야일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된 땅이기도 하다.
이 바산의 산은, 첫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이니 이곳에 누가 살던 하나님이 주인이요 하나님의 소유다. 두 번째는 신앙 사상적으로 볼 때 요단강 동편을 죽음 이편으로 본다면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소유의 산이라고 했으니 높은 바산의 산이란 신적 도덕성적으로 죽음 저 편을 바라보는 고상한 신앙사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본 절을 앞 절의 말씀과 접목을 하면 성도 속에 이질적인 사상이 다 쫓겨나가면 고차원적인 높은 신앙이 되는 거고, 고차원적인 높은 신앙은 영의 눈을 가지고 서편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된다는 거다.
16절: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열방들의 세력을 의미하고, 두 번째는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의 교회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 정신으로 높아진 신앙사상들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대개는 시온산으로 보는데, 이걸 계시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곳, 다윗의 신정통치가 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계신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본 시의 내용을 볼 때 영왕들이 다 쫓겨나가고 진리통지의 관할 안에 살게 되면 이것은 시온의 신앙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거다.
17절: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하나님의 병거’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들을 말하는데, 신앙의 질이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잘 만들어졌으면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들의 보호를 받지만 세상 육적으로 되어있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악한 것이니 하나님의 부리시는 영들로부터 진노를 받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요’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또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한다.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그 중에 계심’이란 ‘산이 높고 하나님의 산’이라고 한 바산의 산을 말하는데, 주님께서는 신앙적으로 신적 도덕성적으로 죽음 저 편을 바라보는 고상한 신앙사상을 가진 자와 같이 하신다는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신적 통치의 시온산에 들 수 있는 질적으로 고상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
18절: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주께서 높이 오르실 때 사로잡혀서 주님과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 자들이 누구냐? 죄악에 붙잡혀 포로 되어 올라가는 자들이겠느냐, 아니면 진리와 사랑의 주님께 사로잡혀 살던 자들이겠느냐? 후자다.
주님께서 붙잡고 높은 곳에 오르시는 이유는 존귀영광의 자리에 올려서 주님과 함께 최고의 고상한 기쁨과 쾌락과 행복을 느끼고 누리며 영원히 살게 해 주시려는 거다. 그런데 마:에서 마귀가 주님을 데리고 성전 꼭대기로 올라간 것은 마귀가 주님과 같이 살려고 올라간 거냐, 주님을 땅으로 뛰어내리게(땅의 운동을 하게) 하려고 데리고 올라간 거냐? 후자다. 글자적으로 보면 ‘마귀의 시험을 받으사’ 이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꼭 마귀가 주격으로 된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이 주격으로 되어있는 거다. 마귀의 입장에서는 주님이 마귀 자신이 하자는 대로 따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하자는 대로 따라 했느냐? 안 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격이다.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주님께 붙잡혀서 높이 올림을 받은 자가 주님께 선물을 드린다고 한다. 이건 뇌물이 아니라 선물이다. 이 선물이란 무슨 뜻이냐? 감사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물욕에 사로잡히면 세상근심 걱정에 잠을 못 자고 불의로 악을 행하여 죄를 짓게 된다. 이렇게 살던 자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와 주님의 아가페 사랑에 사로잡히면 인격적으로 존귀 영광스러워지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깨우침을 받고 신적 도덕성으로 올라가고 인격이 고상해지니 이 사람은 진리의 깨달음으로 인한 인간의 행복성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게 된다.
19절: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사람이 날마다 짐을 지고 있으면 살맛이 날까? 무겁고, 고통스럽고, 짜증나고, 힘이 빠지고, 기진맥진해지고, 결국은 쓰러진다. 무거운 짐을 낑낑거리며 들고 갈 때 누군가가 같이 들어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러면 무엇이 짐이냐? 짐은 물질에 속한 것, 이 땅에 있는 어떤 일에 속한 것, 사람에 속한 것 등등 세상살이에 속한 것으로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며 사는 게 짐이다. 알고 보면 이 짐은 임시성에 속하고 현상계에 속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세상 것에 집착을 하고 사니 그만 그것이 자기의 짐이 되어서 고통을 겪는 거다. 사람의 고통은 마음에 있는 거지 몸 밖에 있는 게 아니다. 자기의 생각과 마음에 따라 짐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거지가 걱정이 많겠느냐, 부자가 걱정이 많겠느냐? 부자가 걱정이 많다. 거지의 입장에서 보면 부자는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은데 왜 부자가 걱정이 많으냐? 반대로 부자의 입장에서 보면 거지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늘 걱정일 것 같은데 왜 부자인 자기보다 걱정이 없는 거냐? 마음 속에 고통이 되는 것은 염려 걱정을 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어린 아이가 아프면 많은 걱정이 된다. 그러면 아이가 어제 아플 때 엄마가 걱정을 안 해 주면 더 아프고 오늘 아플 때 걱정을 해 주면 덜 아픈 거냐? 아이가 부모의 걱정의 도수에 따라 더 아프고 덜 아프고 하느냐? 그게 아니라면 걱정할 게 없지 않느냐? 그 자식이 누구의 자식이냐? 하나님의 자식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식을 잘 키울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최대한 바로 키우면 되는 거다. 이러면 그 지혜에 따라 아이를 바로 키울 수 있는 여러 가지 행동이 나오는 거다. 이런 건 없이 무턱대고 걱정만 하면 애도 아프고 부모도 아프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닌데 인간의 입장에서 보니 심각한 거다. 이럴 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환경에 따라 물질경제에 따라 최대로 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린아이가 수술할 병이 들었다면 부모는 집을 팔아서라도 수술을 해 줘야 한다. 그런데 90세나 100세 된 부모가 수술할 병이 들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런 경우는 집을 팔아서라도 수술을 해 줘야 하느냐, 안 해 줘야 하느냐? 우리는 생각을 해 봐야 한다. 물론 병 나름이겠지만 나이 많은 분이 수술을 하면 얼마나 생산적으로 살겠느냐? 이를 테면 병이 나으면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말씀도 열심히 듣고, 전하기도 하면서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죽음 준비를 잘 해야 하겠는데 수술을 했는데도 늘 아프다고 하다가 죽는다면 자식들이 어떻게 되느냐?
나이 많은 분이 수술을 해도 얼마 못 산다고 하면 그냥 두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시려고 하는데 왜 자꾸 주삿바늘을 꽂아서 고통스럽게 하느냐? 부모들 입장에서는 자식들에게 미리 말을 해 놔야 한다. 안 그러면 돈은 돈 대로 들고, 빚은 빚대로 지고, 이러고서 죽는다면 죽으면서도 마음이 편하겠느냐? 선악과 따먹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이 모양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오래 사는 것 자체에 왜 그렇게 애착을 갖느냐는 거냐? 왜 그런 것 같으냐? 한 마디로 천국이 좋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다. 아무렴 천국이 이 땅만 못하겠느냐? 그래서 부모는 앞에서 말한 일이 자기에게 닥치기 전에 ‘내가 그런 일을 당하면 나는 하루라도 빨리 천국에 가고 싶으니 날 붙잡지 말아라’ 라고 미리 말을 해 둬야 한다.
또 한 면으로 보면 부모는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논밭 팔고 집 팔고 했는데 나이 많으신 부모님이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면 자기 집을 팔아서라도 부모님이 수술을 하게 하는 자식이 있느냐? 드문 것 같다.
짐이라고 할 때 물질적인 짐만 아니라 정신적 마음적인 짐도 있다. 사람이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 죄를 지어서 이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어서 고통을 겪는 짐도 있다. 이유는 없다. 사람이 죄를 가지고 있으면 그 마음과 정신은 고통스럽고, 고독하고, 원망스럽고, 괴롭기만 하다. 기쁨과 행복이 없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부터 이렇게 되었다. 말하자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부터는 인간 자기가 짐을 짊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기가 자동적으로 짐 밑으로 들어가서 사는 상태가 되었다. 한 번 들어가면 스스로는 못 나온다.
부모들은 이 사실을 안 가르쳐 주었고, 우리도 이것을 몰랐고, 부모들은 도리어 세상에서 제일 큰 짐을 짊어지라고 가르쳤다. 무슨 말이냐? ‘뭐든지 세상에서 일등이 되어라. 제일 큰 부자가 되어라’ 라고 가르쳤다. 그러면 제일 큰 부자는 뭘 많이 가지고 있는 거냐? 제일 큰 짐을 가지고 있는 거다.
지금도 부모들은 이런 짐을 벗어버리라고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많이 지라고 가르치고 있다. ‘남보다 더 큰 짐을 가져라. 더 큰 포부를 가져라. 더 큰 희망을 품어라’ 라고 가르치면서 이 짐 속으로 날마다 쑤셔 넣고 있다. 사고방식이 그렇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까? 선악과를 따먹은 세상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고방식은 전혀 다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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