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편 16절-18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16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주의 인자하심’이란 주님의 온유한 사랑을 말하는데, 이 세상 임시성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에 해당되는 사랑을 말한다. 그래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라고 하는 것은 영원에 해당되는 사랑으로 대하는 대함성이 선이라는 거다.
이 세상 일반적인 사랑은 언제까지 가느냐? 아무리 길어도 이 세상에서 끝난다. 임시성이다. 그래서 다윗은 임시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영원에 해당이 되는 사랑으로 응답을 해 달라는 거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느 쪽의 기도를 많이 하느냐? 다윗의 기도는 세상 속화된 교인들의 기도와는 그 질이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러니까 다윗이 ‘나를 사랑해 주옵소서’ 라고 하는 사랑의 차원이 질적으로 임시성이냐, 영원성이냐? 영원에 해당이 되는 사랑으로 사랑해 달라는 거다.
진리의 사랑이 아니면 우리들에게 이 사랑은 영적인 면으로 작용이 안 된다. 그래서 질적으로 세상에 속한 것을 위한 기도는 안 해야 한다. 자기가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영원 궁극적인 면의 사랑을 사모하고 구해야지 세상 임시적인 것에 목적을 두고 구하게 되면 영원한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된다. 깨달음에 있어서도 영원 궁극적인 세계에 해당이 되는 이해타산 평가성이 아니라면 영적인 면으로 작용이 안 된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 믿는 자기는 어느 쪽의 응답을 바라고 기도를 하고 있느냐?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긍휼’이란 불상하게 보여져서 도움을 주는 것인데, ‘주의 많은 긍휼’이란 세상에서 임시성적인 효력만 보는 긍휼이 아니라 영원에 해당이 되는 긍휼을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영원에 해당이 되는 긍휼이냐? 우리가 주님께 어떤 면이 불쌍하게 보여질 때 주님께서 도와주시는 거냐?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의 어떤 면을 보고 도와주신다고 하는 거냐? 또한 인간 자기는 어떤 면의 도움을 바라고 있느냐?
일반적으로 장애의 몸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보는데, 이거는 뭘 보고 불쌍하게 보는 거냐? 외모 모양 행동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거다. 그러면 장애를 입은 사람이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부요자로 보겠느냐, 인간들처럼 불쌍하게 보겠느냐? 건강하고 옷도 잘 입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의 속 중심을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본다면 이 사람이 옷을 입은 거냐, 벗은 거냐? 계: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인간들이 볼 때는 ‘와, 부자다. 참 복 받은 사람이다’ 라고 말을 하겠지만 주님이 보시는 눈은, 그리고 우리도 주님의 눈을 가지고 영적인 차원으로 보면 ‘저 교회는 참으로 불쌍하구나. 처절하구나. 헐벗었구나’ 이렇게 보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면이 불쌍하게 보일 때 도와주시는 거냐? 첫째는 하나님 앞에 한없이 비뚤어져 있고 잘못되어 있음을 깨닫고 이것을 바로 잡는 사람을 도와주신다는 거고, 또한 자기 속에 하나님의 것이 없음을 가난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사람을 도와주신다. 다윗은 이런 자신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다 주겠다’ 라고 약속을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구해서 받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구해도 받지 못하는 교인들이 많은 것을 보면 잘못 구하고 있구나. 잘못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안 믿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뭐가 모자란 것인 줄을 모르는 거다.
그러면 기도를 했을 때 응답은 어떤 식으로 되는 거냐? 나는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투명인간처럼 나타나서 안 보이는 손으로 어떤 성경구절을 펼쳐서 보게 하는 거냐? 어떻게 응답이 오는 거냐? ‘하나님, 너무 가난합니다. 부자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하니까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람이 돈 보따리를 가져다 놓고 가는 게 응답이냐? 자기의 마음에 감동성이 와서 ‘성경을 봐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성경말씀이 맛있고 재미있고 한 게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러다 보면 자기 속에 말씀이 쌓이게 되고, 말씀의 이치가 열리게 되는데 이것도 응답이다.
그리고 장사를 할 때 장사가 잘 되려면 손님이 없어야 하느냐, 점점 많아져야 하느냐? 많아져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손님이 많아지겠느냐?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 손님을 많이 보내달라고 기도를 하면 되는 거냐? 손님을 자기 집 식구처럼 극진히 대하고, 물건을 좋은 것을 받아와서 싸게 팔고, 서비스도 좋으면 장사가 잘 되는 건데, 이런 응답도 있는 거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거냐? 아니다. 이건 마귀의 수법이다. 안 믿는 사람들도 이런 것을 위해 기도를 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지는 않으면서 하나님께 자꾸 달라고 하면 주시겠느냐? 성경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라’ 라고 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일을 하고 싶으냐? 그렇다면 먹어라’ 이 말이다. 그러니까 먹었으면 일을 해야 한다는 원리가 들어있는 거다. 사람이 먹고서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병이 나 버린다.
17절: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주의 얼굴’이란 주님의 인격을 말한다. 주님의 성품이요, 주님의 마음이요, 주님의 사랑을 말한다. 주의 얼굴이 주의 종으로부터 떠난다면 주의 종들이 어떻게 살겠느냐? 여기서 ‘종’이란 자신의 목숨, 자손, 재산, 성공, 출세, 심지어 종 자신의 존재 여부까지 모두 주인에게 달려있는 거다. 종의 신세가 그렇다. 이런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하면 종이 아니다.
만일 종이 자기 주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기의 자유로 살면서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라고 한다면 주인이 그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을 할까? ‘신실하고 충성된 종아, 내 집을 관리하고 다스려라’ 라고 하겠는지,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아라’ 라고 하겠는지? 교회 안의 주의 종은 주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다. 꼭 목사만이 아니라 일반 평신도라도 자기의 사는 전폭이 주님께로 들어가 있다면 이 사람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주의 종이다.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주의 종의 환난이 어떤 것이겠느냐? 앞에서 주의 종의 신분과 정신 사상을 말했는데, 주의 종의 환난은 어떤 환난일까? 주의 종이 되려면 이걸 심사할 줄 알아야 한다. 1. 자기가 죄를 짓고 그 가운데서 헤매는 것이 주의 종의 환난이다? 2. 자기가 무능하여 헤매는 것이 주의 종의 환난이다? 3. 진리생명의 말씀을 따르다가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이 주의 종의 환난이다? 어느 거냐?
주의 종의 환난은 어느 것이라야 가치가 있는 거냐? 첫 번째의 자기가 죄를 짓고 그 가운데서 헤매는 것은 주의 종으로서 가치가 있는 일이냐, 가치가 없는 일이냐? 가치가 없다. 그러면 두 번째의 자기가 무능해서 헤매는 환난이라면 이게 가치 있는 일이냐, 부끄러운 일이냐? 부끄러운 일이다. 주의 종들이 환난을 당할 때 영적인 면의 환난과 육적인 면의 환난이 있는데, 문제는 두 환난이 같이 왔을 때 ‘어느 것을 더 무게 있게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하느냐?’ 하는 게 문제다.
주의 종들이 환난을 당하면 육신상태가 부모 없는 고아와 같이 되는 게 있고, 이리 가운데 양과 같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리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은 상태는 조금은 신앙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는 거다. 다시 말하면 악한 자들이 자기를 육신적으로 잡아 죽이려고 한다거나, 또는 이질성적인 사상으로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할 때 주의 종, 즉 양으로서 자기가 살기 위해 이리에게 기댈 수는 없는 건데, 사는 상태적으로 보면 그것을 배기지 못해서 육신적으로 슬며시 이리에게, 즉 세상 쪽으로 붙는 게 있다. 이건 그 신앙상태가 이리에게 잡아먹힌 거다.
주의 종으로서 이럴 때 어떤 기도를 해야 하겠느냐? 첫째는 만능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를 한다? 두 번째는 환난이 빨리 물러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 세 번째는 주의 아가페와 진리로 보호를 원한다? 어느 거냐? 세 번째다.
18절: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다윗은 영혼에 대해 염려를 하며 기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육신이 사는 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가난해졌다거나 굶고 있다면 마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겠느냐? 먼저 현실이 왜 이렇게 됐는지 헤아려 보면서 지혜를 구해야 하고, 그 다음에 일을 해야 하고, 그러면 먹을 게 나오는 거다. 이건 없이 무조건 기도를 하는 것은 신앙의 이치에서 어긋난 거다.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되는 것이고, 죄에게 붙들리면 죄만 짓는 악인이 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유명한 사람일지라도 인간을 죄에서 풀어낼 능력이 없다. 죄인 된 인간이 죄에서 자유하게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속량밖에 없다.
‘구속’이란 구원하는 일이고, ‘속량’은 값을 지불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는 거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구속과 속량’이란 기본구원을 말하는 것인데, 다윗이 본 절의 기도를 하는 것은 다윗이 아직 기본구원 기본은혜를 얻지 못해서 구원해 달라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이미 기본구원은 전제를 하고 이룰구원 면에서 기도를 하는 거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거다. 이스라엘인인 아버지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데 이 가정에서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이 어린아이는 아직은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이냐? 이스라엘의 아이가 아직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지 못한다고 해서 그 부모가 이 아이를 이방나라로 보내버리느냐, 이스라엘 시청에 가서 호적에 이스라엘 백성으로 올리느냐? 후자다. 그러니까 아예 생득적으로 이스라엘인이라는 것을 깔고 들어가는 거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렀는데 이들이 아직은 ‘세상에서 누가 크니이까?’ 라는 말이나 하는 믿음이 어린 상태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고, 비록 졸지라도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받고 있다. 이들이 부처를 따라간다거나 부처 앞에서 조는 게 아니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도 설교를 듣다가 피곤해서 졸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조는 거지 부처 앞에서 조는 게 아니다. 다만 조는 것만큼 말씀을 못 듣고 못 깨닫는 것뿐이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자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법궤를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는 자로서 이미 그에게는 기본구원은 전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다윗이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라고 하는 것은 이룰구원의 개념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도다윗의 영혼을 구속하고 속량을 하려면 다윗의 영혼 가까이 오셔야 한다. 다윗이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거나 스스로 하나님 앞에 갈 수는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야 한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우리의 영혼 가까이 오신다는 게 무슨 뜻이냐?
성경은 세상만사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이룰구원을 위해 섭리, 주관, 진행을 하신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이 잘 되라고 영혼 가까이에서 역사를 하시는 거다.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인간 자기 가까이에서 모든 사물이 움직이고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위해 가까이에서 역사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게 믿음이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돈도 안 주고 먹는 것도 안 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역사를 안 하시는구나’ 라고 생각을 한다.
엄마가 부엌에서 반찬도 만들고 밥도 하는 것은 자기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해 주려는 거다. 아버지가 직장에 나가서 돈을 버는 것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부모가 꼭 자식 앞에서 자식을 위해 뭘 해 주는 것만 아니라 멀리서 일을 하는 것도 신앙 식으로 말을 한다면 자식을 위해 멀리서 역사를 하고 있는 거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이룰구원의 역사도 이런 식으로 하신다.
야곱이 삼촌 집으로 도망을 갈 때 광야에서 자고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킨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당시의 야곱에게 역사하신 것이 믿어지느냐? 그렇다면 그 때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역사하시고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이 느껴지느냐?
이걸 못 느낀다면 이렇게도 생각해 봐라. 누굴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어서 밤늦게 버스를 타려고 나가서 막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정류장에 도착을 해서 이 버스를 타고 약속장소에 늦지 않게 도착을 했다면 믿는 자신으로서 마음의 느낌이 ‘하나님께서 막차를 준비해 두셨구나’ 라는 생각이 안 드느냐? 설령 막차가 떠났다고 해도 이로 인해 자기가 길바닥에서 잔 적은 없지 않느냐? 자기가 오늘날까지 살아온 것이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 어떤 면으로서 건 하나님의 보살핌이었다는 게 느껴지지 않느냐? 이런 게 다 나의 이룰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믿는 자기가 하나님의 이런 역사하심을 느낀다면 타의 이룰구원도 생각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구원과 연관을 짓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주시는구나’ 이렇게만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 다음에 영의 생각을 끊지 말고 늘 생명의 말씀을 생각을 하고, 옛사람의 부패성을 죽여 나가고 새사람은 살려나가야 한다. 그리고 비진리적 육적 원수들이 힘을 얻어서 득세할 때 그것에 합세나 협력하지 말고, 행여나 그런 자들에게 포로로 잡힐까 늘 자기를 살피며, 악한 자들을 주의 진리의 말씀에 붙잡히게 해서 악한 곳에서 탈출하게 하는 것이 주로 말미암아 되는 속량이다. 자기 마음 속에서 이런 생각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다. 죄에서 탈출하는 것이 속량이고 벗어나는 것이 속량이다.
우리 기독자는 완전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영 중생 후에, 즉 기본구원을 얻은 후에 살려나갈 것이 있고, 죽여 나갈 것이 있다. 탈출해야 할 것이 있고, 들어가서 머물 곳이 있다. 진리 가운데는 머물고, 죄 가운데서는 탈출을 해야 한다. 죄에게 잡히면 안 되니 도망을 가고 탈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인인관계, 대인관계, 대물관계, 대사관계가 다 이룰구원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러기 위해서는 연관관계가 급선무인데, 자기의 사고방식이 자기에게만 멈춰져 있어서 몰라서 못 써먹는 일이 많고, 연관관계가 안 되니 외부로 확장이 되어야 할 자기의 위치가 쭈그러들게 된다. 이런 사람은 그 사고방식 자체가 넓음성이 없는 거다.
우리의 이룰구원 속에는 순간순간 부분 부분마다 늘 관찰이 들어있다. 그러니 사람이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는 거고, 건강해질 수밖에 없는 거고, 지혜롭게 될 수밖에 없는 거고, 사랑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거다. 이러면 사람이 정신 면에 건강미가 있어서 활달하게 살게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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