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69:22-23)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열려라 에바다 2025. 9. 18. 15:16
(시69:22-23)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궁극이추천 1조회 6225.09.14 08:45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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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편 22절-23절: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22절: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날마다 먹는 밥이 올무가 되게 해 달라고 하고 있고, 날마다 산다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 더 죽어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이 저주의 삶이요 자살행위가 되게 해 달라는 거다. 이건 저주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구원의 도를 따라 사는 성도의 삶은, 즉 생명과를 먹고 사는 성도의 삶은 날마다 사는 삶이고 영생이다. 몸은 죽어 들어가는 것 같으나 영적인 면은 날마다 성장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도는 산 거다. 안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정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먹혀 들어갈수록 자기는 전부가 영생으로 살아난다. 안 먹혀 들어간다면 전부가 죽어 들어간다.


사람은 출생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죽을 때까지 영적인 면에서 성장되고 살아나는 게 있어야 하는데 이방인들은 영은 죽어있고, 하나님의 말씀 생명과를 알지도 못하고, 먹으라고 해도 먹을 줄 모르기 때문에 영적인 차원에서 죽은 채 그대로 있고, 사는 것은 전혀 없고, 육신은 산다고 해도 사실은 전부가 죽어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육신이 죽어가는 것 같으나 말씀에 먹혀 사는 고로 살아갈수록 영원히 사는 것으로 들어간다. 성경이 이걸 가르쳐 준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본분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날마다 사는 것은 이런 효력이 있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처럼 생각하지 말아라.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정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마음에 고통이 진행이 될 수도 있고, 기쁨이 진행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어릴 때부터 부지런한 사람은 어른이 되어도 부지런하다. 그 정신이 그대로 자라는 거다. 반대로 어릴 때부터 게으른 사람은 커서도 게으름성이 그대로 들어있다. 자기가 가진 정신에 따라 고통의 삶을 살게도 되고, 기쁨의 삶을 살게도 된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런 일을 많이 본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모른다.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올무는 올가미인데, 이 올가미는 짐승이 잘 다니는 곳에 설치한다. 짐승은 땅을 쳐다보며 앞으로 걷기 때문에 대가리가 이 올가미에 잘 걸려든다. 한 번 걸리면 빠져나오려고 몸을 움직일수록 목이 더 조여져서 결국은 죽게 된다. 이런 게 다 우리의 구원도리를 가르쳐 주는 거다. 그러니까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산다고 하는 것이 죽는 것이 되게 해 달라는 거다.


이 밥상을 신앙사상과 신앙정신 면으로 보면 아침에 눈만 뜨면 자기 앞에 밥상이 차려진다. 눈만 뜨면 자기 앞에 세상일이 전개가 되어있다. 즉 여러 가지 환경을 만나고, 크고 작은 일들을 만나고, 기쁘고 슬픈 일들이 교체되는 것은 예수 믿는 자기가 먹어야 할, 겪어야 할 밥상 위의 음식과 같은 거다. 그런데 음식을 편식하는 사람이 있듯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맞는 것은 먹으려고 하고, 안 맞는 것은 안 먹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겪게 되는데, 겪는다는 것은 자기 밥상 위에 놓여진 음식을 먹듯이 그 사건 환경을 먹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라고 하는 것은 악인들이 겪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그들의 올무가 되게 해 달라는 거다. 올가미가 되게 해 달라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우리 기독자들은 기본구원을 얻은 후에는 이룰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예수를 믿었느냐? 그 다음에는 말씀을 배우면서 이룰구원으로 자라가야 한다. 안 자라가면 얻어맞는다. 왜냐? 안 자란다는 것은 못 깨달은 거다. 못 깨닫는다는 것은 머리가 어둡다는 거다. 사람 꼴이 안 된다는 거다. 그러니 얻어맞는 거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의 세계를 보면 세상에 태어나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여러 가지를 끊임없이 배운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을 아무리 많이 배울지라도 전부는 물질적인 배움이요 생활에 유익하게 써먹는 공부일 뿐이다. 하나님의 성품으로의 인격성장은 전혀 없다. 인격성장의 공부는 성경밖에 없다. 일반세상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에 족하면 다인 것으로 안다.


우리 기독자들은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는 구원은 현실에서 겪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 환경 존재 속에 들어있다. 또한 자기 속에도 들어있다.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즉 질적으로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살아나고 만들어지는 것이 날마다 겪는 사건 환경 속에 들어있다. 그런데 악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가르쳐 줘도 무시한다. 선악과 따먹은 지식적 개념으로 사건과 환경과 존재를 연관시켜서 자기의 이기주의적 목적을 위해 산다.


자기와 연관되는 모든 것을 이용하고 활용해서 날마다 자기의 인격을 살리고 부흥 발전시키고 성장을 시켜야 할 텐데 매사가 자기의 육신적 유익 쪽으로 되어있으니 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자기가 날마다 산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누적될 뿐이다. 죽는 것으로 자꾸 누적이 된다. 그 삶 전부가 자타를 사망으로 죽게 만든다. 그러니 이런 삶은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라는 말에 딱 맞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언행심사나 눈동자 하나하나 움직이는 것마다 모두는 사람을 살리는 삶, 고치는 삶, 완전케 하고 온전케 하는 삶이었지만 당시의 바리새인과 종교 두목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삶이요, 전도를 해서 사람을 가르쳐서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게 만들어 놓았으니 전부가 심판으로 살고 있었다. 가만있는 게 숫제 나을 정도였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공부를 하는 것은 바로 하는 거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공부를 남보다 더 많이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더 알아주는 것은 없다. 안 믿는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했건 안 했건 태어날 때부터 죽는 거고, 아무리 남들이 알아주는 공을 많이 쌓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부가 사망이고 심판이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속화된 정신 사상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속화된 목사의 가르침을 받게 되면 예수를 믿으니까 당장 죽어도 그 영은 천국에 가겠지만 이성과 몸에 입는 성화구원은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천국에 가기 전에 안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지옥의 맛을 톡톡히 보고 가게 되기 때문에 이런 가르침은 숫제 안 하는 게 낫다. 왜 그러냐?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과 연관이 되면서 다른 사람을 다 죽여 놓기 때문이다. 가만있으면 자기 혼자만 악인이 되겠는데 연관을 시키는 것마다 다른 사람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만지는 것마다 다 못 쓰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부가 죽이는 삶이다. 그런데 속화된 목사들이 이걸 아느냐? 전혀 모른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전에는 어린아이를 데려가서 남의 호주머니를 털어오게 하는 자들이 있었다. 여기에 갓 들어온 아이는 밥만 먹으면 남의 호주머니를 터는 연습을 한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왜 밥을 먹는 거냐? 남의 호주머니를 터는 연습을 하려고 밥을 먹는 거고, 이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것은 남의 호주머니를 터는 연습을 시키려고 먹이는 거다. 이 아이는 죄 짓는 일을 하려고 밥을 먹는 것이니 먹는 것마다 다 심판에 회부가 되는 거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종교 두목자들은 영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영적인 면을 사냥하고 죽이는 살인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영의 눈이 감겼기 때문에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소경이라고 했다. 왜냐? 이들은 자기들이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알고 보면 자기들이 하는 짓마다 전부가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게 하는 일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되 바로 믿어야 한다. 잘못 알고 잘못 믿었다가는 예수 믿는 것이 오히려 자기에게 올가미가 되고 덫이 된다. 교회에서 세상에 속한 모든 가르침들은 전부가 올가미요 덫이요 심판이다.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 신실한 성도들은 일반적인 자연은총의 축복을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한 투자성으로 여긴다. 하나님의 사업, 복음을 위해 심는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연은총을 축복으로 여기면서 세상을 위해 다 투자하고 소비해 버린다. 불타질 것에 투자하고 소비를 한다. 세상 속화된 기독자들은 물질축복을 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 거고, 예수를 믿은 후에 물질이 조금 더 풍부해지면 ‘내가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었다’ 라고 하며 자기 세상을 위해 다 써버린다.


사람은 조용하고 평안하면 정신적으로 느슨해지기 쉽다. 육적인 평안을 참 축복으로 여기는 자들은 저주의 덧에 걸리기 쉽다. 그래서 사람의 사고방식이 문제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한다’ 라고 했듯이 이럴 때 하나님의 재앙이 순식간에 밀어닥치게 된다.


23절: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육신의 눈에 눈병이 나면 어두침침하고, 더 심해져서 회복 불가능이 되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하면 속은 물론이고 외모 외형 모양을 구분하거나 분별할 수 없고, 모든 존재 자체를 분별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고 아는 것이 없게 된다. 그리고 눈이 어두우면 자기 스스로 활동을 할 수 없고 자기를 인도할 인도자가 필요한데, 그 인도자가 개가 되기도 하고, 사람이 되기도 한다. 눈이 어두우면 개가 자기를 인도하고 사람이 자기를 인도하게 된다. 이 말의 뜻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소경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느냐? 소경이 할 수 있는 것은 지하철 계단에서 돈 바구니를 앞에 놓고 구걸하는 일이다. 이것을 신앙정신 사상 면으로 보면 영의 눈이 어두우면 영 분별을 할 수 없고, 자타 속에 들어있는 것이 영의 생각인지 육의 생각인지 알 수 없고, 영과 육을 분별할 수 없다. 안 믿는 사람은 영의 눈이 없기 때문에 영육 구별을 전혀 못 한다. 이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세상을 구하게 된다.


영 분별을 하지 못하면 영운동, 복음운동, 생명운동을 할 수 없다. 육운동인지 영운동인지 분별을 못한다. 다시 말하면 소경이라서 소경을 인도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누가 자기에게 ‘예수 믿어 부자 되자’ 라고 하면 ‘아, 예수 믿는 게 그런 거로구나’ 라고 하지 그 사람이 악령이 들린 사단 마귀의 종인 줄을 모른다.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운동이 뭔지 아느냐? 알고서 교회를 다니느냐? 교회라고 하는 것은 원리 원칙적으로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복음밖에 없다. 그런데 사단 마귀의 꾀임에 빠진 거짓 종들은 예수이름을 가지고 가르친다고 하는 게 ‘교회간판을 붙이지 않았거나 십자가를 붙이지 않은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이단이니 뭐니’ 이런 말을 한다. 외모 모양적으로 뭔가를 꾸며야 만이 교회라고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 거냐? 내가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니면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고 나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래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 거냐? 그런가 하면 자기가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전철을 탔는데 앞에 나이 드신 분이 서 있으면 이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면서 ‘내가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알 텐데 어떻게 그대로 앉아있겠느냐?’ 라는 생각으로 나이 드신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자기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있지 않으면 나이 많은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거냐? 이 말을 하는 것은 어째하든 무슨 표시를 가지고 자기를 예수 믿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거라는 거다. 이걸 외식자라고 한다.


교회란 영이 중생된 성도를 말하는데, 영이 중생된 이것은 주님의 단독적 주권적 역사로 된 거고, 영이 중생된 사람은 말씀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한다. 이 하나님의 성품은 물질적이 아닌 비물질이요 영적인 것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어 부자가 되자고 한다면 이 부자는 물질에 관한 것이요 하나님의 성품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아지지를 않는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걸 받을 런지 못 받을 런지 모르겠지만 자기의 입을 크게 벌려서 예수님께 세상과 세상의 것을 달라고,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영광을 달라고 부르짖는다면 이게 뭐냐? 앞에서 말한 지하철 계단에 앉아서 돈 바구니를 앞에 놓고 ‘돈 주시오. 먹을 거 주시오. 큰 거 주시오’ 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다. 영적으로 보면 이게 소경이다. 그래서 기독교 안을 보면 지팡이만 안 짚었다 뿐이지 소경목사가 많고 소경교인이 많다.


교회에서 ‘내가 가난했었는데 예수를 믿은 후에 직장이 어떻고, 병이 나았고’ 라는 등등의 자랑을 하고 간증을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예수님께 구걸을 했더니 이것도 얻었고 저것도 얻었다’ 라고 자랑하는 셈이다. 그러면 그런 것이 욕심이 나는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자기도 그렇게 하는 거다. 예수 믿는 건 이런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아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네 마음 속이 하나님 나라가 되도록, 네 마음 속에 하나님이 왕이 되도록, 네 가정이 하나님 나라가 되도록, 복음의 가정이 되도록, 하나님이 계시도록 하라는 거다.


마: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에게 세상을 자랑하면서 ‘나에게 딱 한 번만 절을 하라. 그러면 다 주겠다’ 라고 했다. 이게 뭐냐? ‘오늘 주일에 교회에 가지 말고 자격증 시험을 치러 딱 한 번만 가라. 다음부터는 네가 주일에 교회에 가던 시험을 치러 가던 상관 안 한다. 오늘 딱 하루만 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게 마귀의 속셈이다.


이런 소리에 넘어가서 한 주 예배에 빠지고 시험을 친 후로는 다시는 주일예배를 안 빼먹었다고 할지라도 그 신앙 믿음은 이미 그 날로 죽은 거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오늘 이룰 구원을 오늘 이루지 못하면 그것을 보충할 길은 일절 없는 거다. 내일 이룰 구원은 내일 이루는 거지 오늘 못 이룬 구원을 내일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영의 눈이 없기 때문에 이걸 전혀 모른다. 아예 느끼지도 못한다. 그러니 신앙은 영적인 면을 말하는 거고, 성경은 영인성장을 두고 말을 하는 것인데도 맨 먹고 마시고 많이 가지는 육적인 것을 말하는 거다. 이게 말이 되느냐?


대학교에 들어가면 깨알 같은 책을 보는데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어린아이처럼 맨날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 어떤 사탕이 크고, 누가 큰 사탕을 가졌고, 누가 더 많이 가졌고‘ 이것만 따진다면 대학공부가 자기 머리에 들어오지 않게 되고 대학의 실력이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영이 중생한 예수 믿는 사람이 말씀을 따라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이뤄가야 하는데 세상 것만 구하고 있다면 이룰구원 면이 성장하지 못한다.


치매에 걸리면 어른인데도 금방 밥을 먹고도 안 먹었다고 하고, 금방 먹었는데도 온 종일 밥 구경도 못했다고 한다. 온통 먹는 것만 생각을 한다. 안 믿는 세계에서 이런 어른을 모시다보면 미칠 지경이 된다. 그런데 자기도 늙어서 그렇게 되면 자기의 자식이 자기에게서 그런 현상을 보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 안을 보면 치매현상과 같은 교인이 많고 목사가 많다. 뭘 보니 그러냐? ‘하나님, 저 사람에게는 큰 것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나에게는 왜 큰 것을 안 주십니까?’ 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다. 이게 치매다. 우리 교인들은 어느 목사가 치매에 걸렸는지 잘 봐라.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 육본주의 신앙과 비진리적 신앙사상의 가르침에서는 사람이 절대로 영의 눈이 밝아지지 못하고 소경이 된 채로 있게 된다. 구별 분별이 안 된다. 자기가 아무리 세상 속화된 신앙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예수를 믿는다면 영적 소경임이 틀림이 없다. 영적인 면에 분별을 못하면서 ‘저 교회는 나쁘다’ 라고 해도 너는 소경이다. 우리는 모든 모양과 활동 속에 들어있는 사상들을 구별하고 분별해야 한다. 영적인 면에 소경이 되면 안 된다.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허리는 사람의 기둥이요, 이 기둥은 사람을 지탱해준다. 기둥은 힘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기둥이 떨린다는 것은 약한 것을 의미한다.


집의 기둥이 옆으로 비스듬히 있으면 넘어지기 쉬우냐, 세워지기 쉬우냐? 넘어지기 쉽다. 기둥이라고 하면 원래는 꼿꼿하게 서 있어야 하는데 옆으로 비스듬히 누이게 되면 힘없이 넘어진다. 같은 기둥을 옆으로 누여서 그 위에 사람이 올라가면 쉽게 넘어지고 부러지지만 똑바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사람이 올라가면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다. 이런 원리로 빛도 꼿꼿하니까 쇠를 자른다. 레이저로 철판을 자르는 게 이 원리다.


기둥이 땅에서 한 십도 정도 누여지면 땅으로 넘어지기 쉬우냐, 바로 서기 쉬우냐? 넘어지기 쉽다. 그러면 45도로 기울어져 있으면? 더 쉽게 넘어진다. 시간적으로 좀 덜 걸리고, 좀 더 걸리는 것뿐이지 기둥이 옆으로 비스듬히 누여지면 결과적으로 넘어진다. 우리는 신앙 면에서도 이런 이치를 알아야 한다. 진리본질로 정확하지 않고 엇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이 사람은 넘어지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를 알아도 바른 것을 알아야 힘이 있다. 정확한 것을 알아야 힘이 있다.


사람을 세상바람과 종교적인 유행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이치요, 하나님의 도덕이치요, 하나님의 생명이치밖에 없다. 이것이 아닌 타락된 세상적이요, 인간적이요, 종교적인 것을 신앙인 것처럼 자기의 기준으로 삼고 있으면 이 사람은 영적인 면에서 참 사람으로 바로 설 수가 없다.


세상은 세상대로 여러 분야에서 갖가지 유행바람이 불고, 이방 종교계에도 여러 가지 유행바람이 분다. 기독교 종교계 안에도 여러 가지 바람이 분다. 기독교 안에서 그 어떤 바람일지라도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는 바람이 아니라면 이질이요 비진리요 거짓에 불과한 거다. 교회에서 이런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가지고 아무리 목숨을 바쳐서 충성봉사를 할지라도 사람이 온전케 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이치로써만이 강하게 세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세우는 거다. 정신적 영적인 면의 도덕성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야 한다. 예수 믿는 것은 죽을 때까지 자기를 바로 세우는 거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성장이 되는 거다. 이게 아니면 살아갈수록 넘어지고, 한 번 넘어지면 일어나기 힘이 든다. 몸은 건강한데 정신 면이 넘어져서 자기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이 정신 면을 뭐가 와서 세울 수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 진리이치밖에 없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