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시74:15-17)

열려라 에바다 2026. 4. 27. 14:48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시74:15-17)

궁극이추천 1조회 5026.04.26 08:29댓글

 

74편 15절-17절: 바위를 쪼개사 큰물을 내시며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15절: ‘바위를 쪼개사 큰물을 내시며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바위를 쪼개서 물이 나온 것은 출17:1-, 민20:11에 나온다. 하나님이 느비딤에서 모세에게 바위를 치게 해서 물을 내게 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생수를 의미한다. 이 생수를 어떤 자들이 먹었느냐?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순종하여 나가는 자들에게 먹이셨다. 애굽에 머물러 있는 자들에게 먹인 것이 아니다.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널 때 물이 갈라졌다. 엘리야도 강물을 갈랐고, 엘리사도 강물을 가르고 건넜다. ‘길이 흐르는 강들’이라고 하는 것은 세차게 강하게 흐르는 강들을 말하는데, 이 강들을 말려버렸다고 한다. 왜 말려버린 거냐? 사람을 해치는 물이기 때문이다. 세차게 흐르는 강들이란 비진리적 사상의 운동들을 말한다.

 

이 골짝 저 골짝의 물이 합쳐져서 골짜기로 내려갈 때는 급속도로 요란하게 강하게 소리를 내면서 내려간다. 이것은 여기저기서 ‘바다로, 세상으로, 세계로’를 외치는 비진리의 큰 무리들이 돌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단강을 따라 흘러가는 물은 죽음의 바다인 사해로 들어가듯이 비진리의 무리들이 무리를 지어서 아무리 세차게 나간다고 해도 죽은 사상이요 성도들의 신앙사상을 말려버리는 운동일 뿐이다. 사해바다로 떠내려가는 것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없다. 필연적으로 죽는다. 그러나 바위에서 나온 생수를 먹는 자는 새 생명의 활동성이 나오는데, 전부는 약속의 땅을 향해 올라간다.

 

16절: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낮과 밤은 인간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다. 그러면 낮과 밤을 왜 만들어 놓으셨을까? 하나님 당신에게 필요해서 만들어 놓으신 건가?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만드신 것은 인간 나를 위해서다. 그래서 알고 보면 낮은 낮대로 좋고 밤은 밤대로 좋다. 어떤 자에게 그런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렇다. 바위틈에서 나는 물을 먹고 약속의 땅을 향해 올라가는 자들에게 그렇다. 이게 정상적인 생활이다.

 

낮은 일을 할 수 있어서 좋고, 밤은 편히 쉴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낮도 모르고 밤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죽을 사람이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자연법칙에 맞춰서 살게 만들어져 있다. 어기면 병들어 죽는다. 인간들과 가까이 사는 새가 참새인데, 새들은 일어나는 시간과 자는 시간이 거의 정확하다. 인간들도 하나님께서 정상적으로 살도록 만들어 놓은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하겠는데, 타락 이후로부터 ‘잘 먹고 잘 살고, 돈 돈’ 하는 바람에 자기 스스로를 죽이며 살고 있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낮도 밤도 주의 것이니 주의 마음대로 할 수 있으시다. 왜 이렇게 하시는 거냐? 그것은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세상 끝 날까지 교체시키듯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번창하는 시대와 고통스런 시대로 교체시킬 때, 즉 밤이 오기 전에 낮에 부지런히 신앙실력을 키우라는 거다. 우리는 시간적인 낮과 밤, 그리고 시대적인 낮과 밤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요셉을 아는 바로 왕은 이스라엘을 대우를 했고, 이스라엘은 그 대우를 잘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을 모르는 바로 왕으로 교체시키니 이스라엘은 고통의 대우를 받았다.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낮에는 해를 주관하게 하시고, 밤에는 달빛을 주관하게 했다. 이 역시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서다. 천체에서 생기는 일들은, 또는 자연 법칙적으로 생기는 일들은 시대적 징조가 많이 들어있다. 징조라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교인들의 신앙정신 사상의 징조를 아는 거다.

 

하나님께서 어두운 시대, 죄악의 시대, 환난의 시대, 고통의 시대를 교체시키면서 빛을 준비해 주셔서 환난의 때에 이 빛을 붙잡고 모양도 색깔도 위치도 활동도 명확하게 확실히 구별 분별을 하면서 넘어지지 않고 한눈 팔지 않게 해 주셨다. 빛은 조명적 영감의 역사요, 각성적 영감의 역사요, 보혜사 성령의 역사요, 신실한 종들을 붙잡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다.

 

캄캄하고 답답하고 막막할 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누가 누구인지 모를 때 빛이 있으면 다 알 수 있다. 빛 앞에서는 짐승들이 다 도망을 간다. 어느 교회가, 어느 성도가 빛의 역할을 잘 할까?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이런 교회에는 비진리성이 못 덤빈다. 덤빌 수가 없다. 분별력이 강하게 나가면 이건 빛의 역할이기 때문에 흑백이 분별이 되니 크고 작은 것이나 색깔 등이 다 분별이 되기 때문에 악한 자들이 이 앞에 함부로 서지를 못한다. 교만을 떨 수 없다.

 

‘해를 예비하셨으며.’ 해는 낮을 주관케 하고, 모든 피조물을 활동케 하고, 생산케 한다. 이것도 물론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서다. 인간이 해를 멀리 하고 살 수는 없다. 인간이 해를 피하면 약해지고 장기적으로는 시력을 잃게 된다. 해가 뜨면 만물이 소생을 하고, 성장을 하고, 열매를 맺는다. 추운 겨울날 몸이 햇볕을 받으면 따뜻해지고,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서 불을 붙일 수도 있다. 해를 받으면 뿌리가 있는 나무는 성장을 하고, 뿌리가 없는 나무는 메마르고 불에 잘 탄다.

 

해가 뜨고 지고 함으로 때를 알게 하고, 해가 기울어짐으로 사시사철이 바뀐다. 봄에 해가 넘어가는 거, 여름에 해가 넘어가는 거, 가을에 해가 넘어가는 거, 겨울에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보면 겨울에는 해가 공중으로 높이 뜨지를 않고 옆으로 지나간다. 그래서 낮이 짧고 날씨가 춥다. 봄이 되면 살살 해가 위쪽으로 뜨다가 한 여름이 되면 머리 위로 뜨고, 가을이 되면 살살 또 기울어진다. 해가 기울어짐으로 사시사철이 바뀐다.

 

창세 때 뜨던 해는 지금도 여전히 그 해인데, 이 해는 뜨고 지고를 수없이 반복을 하면서도 인간처럼 변해지거나, 식어간다거나, 해가 닳는다거나 그런 것이 없다. 이 와중에 사람은 수없이 태어나고 죽는다. 땅 위의 모든 것도 태어났다가 영원으로 흘러가 버리고 만다. 그러나 영원하다고 할 수 있으리만큼 변치 않는 것은 천체의 세계인 것 같다. 이게 다 우리들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한 마디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존재 성품 성격이 모든 만물보다 위라는 거다. 쉽게 말하면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천체 쪽으로 올라가 있다. 교회의 역할과 성도의 역할이 하늘 쪽이라는 거다.

 

천체에 변화가 생기면 땅에서도 변화가 생기듯이 성도들의 신앙에 따라 세상이 변해진다. 땅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하늘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거다. 하늘로 말미암아 땅이 풍성이 되던 가난이 오던 하는 거다. 그래서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느냐? 성도가 어떻게 돌아가느냐? 진리를 잡은 성도가 어떻게 돌아가느냐? 진리를 잡고 돌아가느냐, 진리를 버리고 돌아가느냐?’에 따라, 즉 하늘의 족속들의 신앙사상에 따라 땅의 것에 변화가 온다. 해가 비취면 땅에서 생산이 되듯이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 것이, 진리를 붙잡고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니 성도가 이것을 놓치지 않고 높은 위치에서 살 때 땅의 것도 풍요로이 생산이 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성도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일반사람들처럼 생각하지 말아라.

 

해가 없으면 땅의 모든 것은 존재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안 계시면 세상은 없는 것이고, 우리도 없는 거다. 진리가 없으면 성도도 없다. 해와 같은 성도, 구원을 잘 이루는 성도가 없어지면 땅 위의 것도 다 없어진다. 성도가 하늘나라로 다 휴거가 되고 나면 땅의 것은 존재하기가 어렵다.

 

하나님께서 해를 준비해 두셨으니 땅 위의 모든 생물은 해가 있는 동안에 해의 혜택을, 빛의 혜택을 많이 받고 가야 하듯이, 해가 있는 동안에 만물이 번성하듯이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진리의 빛이 있는 동안에,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동안에 진리의 혜택을 많이 받고 가자. 그래야 자기에게 생산이 많이 된다. 일반사람들은 일반적인 생산이고, 우리는 영적인 생산이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심어놓으면 영적인 생산이 풍부해진다.

 

17절: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16절의 말씀은 천체의 일들을 말하는 것으로, 신앙 사상적으로 고차원적인 면에서 분별하고 구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가자는 것이고, 17절의 말씀은 땅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우리의 이룰구원, 영능의 실력을 위해 깨닫게 하시는 거다. 그러니 우리는 천체를 보고 깨닫고, 하늘의 모든 생태와 사물을 법칙을 보고 깨달아야 한다. 전부는 깨닫고 써먹고 갈 것들이다.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하나님께서 땅의 경계를 정했다. 자연적 지역적으로 보는 땅의 경계는 주로 높은 산이나 산맥을 경계로 하거나, 또는 강이나 바다를 경계로 하거나, 또는 사막을 가운데 두고 경계로 한다. 또는 인간들이 정복을 해서 만든 경계도 있다. 그래서 각 나라의 경계가 있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경계가 있고, 또 개인의 소유적인 경계도 있다. 경계에는 반드시 소유적 주권이 있고, 활동적 사용적 주권이 있다. 하늘에도 경계가 있어서 비행기가 다른 나라의 하늘을 침범하면 쏴버린다. 우리는 영적인 차원에서 이걸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는 책을 만든 저작권도 있고, 노래의 권도 있다. 이게 다 경계다. 경계가 참으로 많다. 바다에도 경계가 있고, 자기 집의 경계도 있다. 논밭의 경계도 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에는 경계가 있는데 누가 자기의 소유나 자기의 주권을 뺏기려고 하겠느냐? 남의 경계를 침범하면 싸움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난다. 영의 눈으로 보면 신앙 사상적인 면에도 경계가 있는 것이니 주님의 사상과 이방인의 사상과는 질적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방인들의 사상은 사망권 안에 있고, 주님의 정신 사상은 생명권 안에 있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이 다르다. 그런데 한 사람이면서 영의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육의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 생각이 다 같은 게 아니다. 이걸 나눠야 한다.

 

근본적으로 육의 사상과 영의 사상은 합할 수가 없다. 어느 한 쪽이 정복을 해야 한다. 절반씩 합리적으로 하는 것은 근본이 다르기 때문에 불가능이다.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이 다르듯이 새사람의 생각과 옛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생명과를 먹은 사상과 선악과를 먹은 사상이 다르다. 같은 용어를 쓴다고 해서 같은 게 아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영을 분별할 수 있다.

 

성령의 감화와 악령의 감화는 다르다. 생명과를 먹은 지식과 선악과를 먹은 지식은 근본적 질적으로 다르다. 천국복음의 사상과 사망적인 세상지식은 다르다. 무형적 사상적인 경계가 있다는 말이다.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부정하는 것은 거짓말쟁이들이다. 예수를 믿는 사상과, 예수를 안 믿는 사상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라서 섞이지를 않는다.

 

사람들이 ‘입에 붙은 말 하지 말아라’ 라고 하는데, 왜 이런 말을 하는 거냐? 그 말이 입에 붙어 있다가 나왔기 때문이냐? 입에 붙은 말을 하지 말라는 게 무슨 뜻이냐? 마음에 없는 말이라는 거다. 사람의 말에는 마음에 있는 소리가 있고, 마음에 없는 소리가 있는 거다. 같은 말인데도 그렇다. 마음중심에서 나오는 말이 있고, 입 안에서 뱅뱅 돌다가 나오는 소리가 있다.

 

천국복음의 신앙사상과, 세상 사망적인 지식이 있는데, 눈에 안 보이는 무형적인 신앙사상의 영의 감화성도 성령의 감화와, 악령의 감화가 있다. 예수를 믿는 사상과 예수를 안 믿는 사상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하나는 신령성이고, 하나는 물질성이기 때문에 섞이지를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듣는 말의 성질이 물질에서 나오는 물질적 소원이 들어있는 사상의 말인지, 아니면 성령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된 말인지를 봐야 한다.

 

고무풍선을 입으로 불어서 날리면 잘 뜨느냐, 자꾸 내려앉느냐? 내려앉는다. 왜 그런 거냐? 풍선의 무게 때문이냐? 풍선 속에 가스를 넣으면 공중으로 잘 뜬다. 그러니까 안에 든 내용물 때문에 뜨기도 하고 내려앉기도 하는 거다. 사람의 말에도 이런 것이 있다. 같은 말일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있고,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은 인간의 속성을 질적으로 하나님의 도덕성으로 바꿔 놓는다. 그러나 인간으로부터 나온 말은 일을 하자는 물질성적 세상적으로 목적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사람의 도덕성이 바꿔지지 않는다. 그러니 힘만 많이 들고 그 마음은 무겁다. 그 정신은 무겁다. 반대로 인간 자기 속에 성령의 바람이 들어가면 기분이 좋고, 노래도 나오고, 일을 하는 맛도 재미가 있다. 자기 속에 사랑이 가득 들어있으면 기분이 좋다. 일하는 게 재미가 있다. 그런데 미움이 가득 들어있으면 힘이 든다. 왜 힘이 드는 거냐? 미움이 쇳덩어리이기 때문이냐? 사람을 가라앉히기 때문이다. 땅의 모든 요소는, 땅에서 생산이 된 것은 전부가 그렇다.

 

하늘로부터 온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것,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인간을 질적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놓는다. 인간의 것은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인격적으로 거듭난 신앙사상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자 하지만 세상 속화된 신앙사상은, 거듭나지 못한 신앙사상은 종교적 확장적 부흥활동을 부르짖게 된다. 반드시 그렇다. 그래서 진리이치, 생명이치, 하나님의 도덕이치가 없는 성경공부는 하나의 종교적인 지식에 불과할 뿐이다.

 

신앙사상의 경계는 무형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이 경계를 전혀 알지 못한다. 사망권 안에 있으면서 다 눈이 멀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이들이 사망권 안에 들어 있는 건데 그들은 자기가 사망권 안에 있는 건지, 생명권 안에 있는 건지 전혀 모른다. 만일 그들이 사망권 안에 있는 것을 안다면 생명권 안으로 뛰쳐나올 거다.

 

우리들에게는 사망권 안에 있는 그들을 정복할 권이 있다. 들어가서 정복할 수 있는 권이 있다. 우리가 가진 이 권은 실력만 있으면 쳐들어 갈 수 있는 권이다. 문제는 내가 실력이 없으면 사망권에 있는 것이 오히려 정신 사상적으로 나를 물을 들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나는 자동적으로 사망권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거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을 교회에만 다니면 다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자기의 정신 사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의 크고 작은 사건 환경에 치우쳐서 마음이 늘 염려 걱정을 하고 있다면 이 사람의 신앙사상은 사망권 안에 있다고 보는 거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생산이 되는 게 없다. 이런 자기임을 느낀다면 기도를 해야 하겠는데, 뭐라고 기도를 할까? ‘사망의 쇠사슬이 나를 끌고 가나이다. 세상정신이 나를 끌고 가나이다. 내가 세상정신에 물이 들었으니 나를 여기에서 건저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사망권 안으로 끌려가면 죽는 거다. 살아나는 신앙사상이 아니다. 이러면 시험에 들고, 몸은 자꾸 망가지고, 이런 상태로 세월만 흐른다. 여기서 박차고 나와야 하겠는데,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는 안 되고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달리는 것뿐이다. 죽을 때까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달리는 것뿐이다. 몸이 유형교회에 나왔느냐? 나왔으면 하나님의 것을 취하기 위해 마음으로 뛰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목적이라면 차라리 예배시간에 교회에 나오지 말고 일터에 가서 일을 하면 된다. 그런데 인간 자기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먹고 마시는 게 다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경계를 전혀 알지 못한다. 땅에 말뚝을 박아놓은 경계만 알뿐 정신 사상의 경계는 모른다. 천국복음의 사상은 진리와 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오직 정복만 있을 뿐이다. 늘 정복이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왜 세상 이방인들에게 세속화로 정복을 당하느냐? 진리로 무장을 안 해서다. 자기 속이 옛사람이 주격성이기 때문에 정복을 당하는 거다.

 

중생된 영은 하나님의 본질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는 정복을 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복을 당하는 것은 그 신앙사상이 세상을 소원 목적하기 때문이다. 거룩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면 구원성장이 안 된다. 이렇게 되면 남은 것은 음녀가 받는 바벨론 심판밖에 없다. 불타질 것밖에 없다.

 

이방인들의 세상에서는 물질적 사상적인 경계가 있다. 이들에게는 세상의 이 경계를 정복할 수 있도록 허용이 되어 있다. 그래서 나라를 빼앗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거다. 하나님의 군대들에게도 정복의 권이 주어졌는데, 진리로, 영능의 실력으로 정복이다. 이 정복은 신앙 사상적인 것이라서 미국인이던 소련인이던 일본인이던 할 수만 있으면 다 정복을 할 수 있는 거다.

 

믿는 사람은 진리로 무장만 돼 있으면 사망권으로 쳐들어가는 거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로 무장된 우리를 쳐들어 올 수가 없다. 질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믿는 자기가 세상 것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서 세상을 물들여 놓으면 그 다음에는 자기는 잡혀가게 되어 있다. 신앙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