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인들의 예배처 지하무덤 ‘카타콤’
봉서방추천 3조회 1826.06.26 01:38댓글 2

카타콤들은 암석 형성의 성질과 시체를 안치한 수에 따라 그 양식이 다양했다.
로마 근처에 있는 카타콤은 가장 유명한 것으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의 묘지가
다 포함된다. 그런데 카타콤의 기본 양식은 복도와 시체 1구가 들어갈 만한 방이
여러 개 있는 큰 지하 구축물의 형태였다. 복도들은 90cm의 넓이와 12-15m의
높이까지 되었으며 여기에 여러 개의 시체실이 줄지어 있다.
각 시체실에는 네모지고 우묵한 곳이 있어 벽돌이나 석판으로 봉하게 되었다.
복도에는 군데군데 방이 있어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이 방에 숨어들었으며
여기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벽면에는 성경의 내용과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의
상징을 표현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 카타콤에 묻혀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헬라어,
라틴어, 아람어로 새겨져 있다.
(비전성경사전)

카타콤바의 어원
카타콤바라는 말은 옛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섞여진 '카타쿰바스'(구덩이 또는 동굴의 옆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로마의 가난했던 사람들은 그들 가족을 위한 무덤을 땅 위에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동굴도 거의 다 무덤으로 차 버리자, 그때부터 땅을 파고 지하에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세기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로마의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네크로폴리' 즉 죽은 자들의 장소라고 불렀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무덤을 '체메테리움'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잠자고 있는 중 또는 쉬고 있다는 뜻이다. 이 체메테리움(현재는 이탈리아어로 치미테로라고 부름)이라는 말은 초기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지어 낸 말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덤이 이교도들이 사용했던 '네크로폴리'라고 불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 필요성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종교의 자유를 얻은 것은 313년이다. 그 후 교황 성다마수스(366-384)가 아피아 가도 주변에 있던 성세바스티아누스의 무덤을 포함해서 그 일대의 지하 공동묘지를 재정비하고, 이곳을 성세바스티아누스의 지하 공동묘지라고 명명하면서 처음으로 '카타쿰바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 후 중세기 때부터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지하 공동묘지(주로 1세기에서 4세기 초까지) 전체에 대해 일반적으로 카타콤바라고 널리 사용하면서 현재까지 내려온다.
카타콤바의 역사와 시대적 배경
네로 시대의 박해를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첫 박해를 전후하여 초기의 선교활동은 로마 근교에 살던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계층 사람들에게 주로 많이 행해졌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은 주로 테베레강 어귀와 아피아 가도 주변이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신자들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모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자연히 신자들은 주위의 눈을 피해 로마의 성 밖에서 은밀히 모였는데 그 중에서도 아피아 가도 주변에 많이 있던 지하 무덤 안이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었다. 급기야는 신자들의 무덤도 그 안에 마련되면서 지하 무덤, 즉 카타콤바의 면적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모진 박해 속에서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의 보금자리와 휴식처는 오직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의지하는 길밖엔 없었다. 카타콤바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인 피난처였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예절을 행할 수 있었던 교회였고, 또한 죽어서도 가까이 있고 싶어했던 그들만의 보금자리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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