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 트레킹 1번지’ 울진 왕피천… 굴구지마을∼용소 4㎞를 걷다
“아침이 오기까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살아온 서른 해를 가만가만 벗어던지며, 내가 원래 존재했던 장소로, 지느러미를 끌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윤대녕의 단편소설 ‘은어낚시통신’에서 1964년 7월생 모임인 그들은 이쪽과 저쪽으로 세상을 나누고 동시에 ‘저쪽’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원래 있었어야만 하는 그 먼 존재의 시원(始原)을 찾아 나선 그들이 은어처럼 지느러미를 끌고 거슬러 올라간 곳은 바로 원시계곡인 울진의 왕피천이다.
왕피천은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원해 울진군 왕피리와 구산리를 지나 망양정해변 인근에서 동해와 만날 때까지 61㎞를 풍경화처럼 흐른다.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몸을 숨겼다는 왕피리에서 유래한 왕피천(王避川). 여름철에는 호젓한 강수욕과 계곡 트레킹을 즐기는 피서객으로 제법 시끌벅적하다.
계곡 트레킹의 출발점은 왕피천 중간쯤에 위치한 근남면 구산3리의 굴구지마을. ‘등허리 긁어 손 안 닿는 곳’이 울진이라지만 굴구지마을은 울진에서도 오지로 꼽힌다. 구고동으로도 불리는 굴구지는 왕피천 하류의 성류굴에서 아홉 구비 산자락을 돌아가야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그 흔한 마을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두메산골이다.
금강송에 둘러싸인 산길을 빙글빙글 도느라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무렵 굴구지마을 초입에 위치한 구고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강폭이 한껏 넓어진 구고교 아래 왕피천은 수심이 얕고 물살이 느린데다 강돌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다. 강변과 모래톱을 수놓은 형형색색의 텐트를 베이스캠프 삼아 ‘그 먼 존재의 시원’을 찾아 나선 피서객들이 삼삼오오 한여름의 추억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굴구지마을은 40가구 70여 주민이 손바닥만한 농경지에서 논농사와 밭농사로 입에 풀칠을 하는 전형적인 산촌이다. 아름드리 금강송 몇 그루가 장승처럼 버티고 있는 들녘은 뙤약볕을 머리에 이고 밭을 매는 늙은 가시버시들로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2007년에 산촌생태마을로 조성되면서 입소문이 나 여름에는 민박하는 피서객들로 북적거리지만 한겨울에는 적막하다.
산양과 수달 등 멸종위기 동물의 흔적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왕피천 계곡 트레일은 굴구지마을회관 앞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왕피천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오른쪽은 상천으로 가는 생태탐방로이다. 왼쪽 길을 선택하면 마을에서 용소까지 계곡 트레킹을 즐긴 후 계곡 옆으로 난 왕피천 생태탐방로를 2㎞쯤 걸어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코스.
왕피천 생태탐방로인 왼쪽 길은 시멘트로 포장된 한적한 산길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구불구불 흐르는 왕피천이 금강송 사이로 언뜻언뜻 보인다. 사람이 살지 않아 허물어지기 직전인 묵은 집과 길섶 고추밭에서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고 있는 촌로가 풍경화의 일부처럼 정겹다.
상천초소에서 방명록에 서명한 후 좁은 오솔길을 내려서면 밀림 같은 수풀이 펼쳐진다. 초록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풀은 왕피천 일대가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수풀을 500m 정도 전진하면 집채 크기의 바위가 나오고 길은 왕피천으로 내려선다. 이곳에서 왕피천의 으뜸 절경인 용소까지는 약 400m.
선택은 자유지만 계곡은 은어처럼 거슬러 올라야 제 맛이다. 굴구지마을에서 곧바로 왕피천으로 내려가 계곡을 거슬러 오려면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왕피천이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굴구지마을에서 좁은 협곡으로 이루어진 용소까지는 약 4㎞. 전국이 장맛비로 난리를 칠 때도 이곳은 오랜 가뭄으로 강물이 줄어 계곡 트레킹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다.
왕피천 계곡 트레킹은 산이나 둘레길을 도는 일반 트레킹보다 훨씬 힘들다.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는데다 강바닥을 수놓은 미끄러운 강돌 때문에 균형을 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어떤 때는 길을 가로막은 큰 바위를 타고 넘어야 하고, 깊은 소를 만나기라도 하면 왕피천 가장자리로 에두르는 수고를 더해야 한다. 하지만 걸음을 뗄 때마다 나타는 자갈밭과 모래밭, 그리고 물길이 휘어지는 수직절벽에 뿌리를 내린 금강송이 걸음을 재촉한다.
바위구간을 지나 산모롱이를 돌면 계곡이 점점 험해진다. 버드나무를 비롯해 잡풀과 잡목이 많아 걷기도 불편하다. 이때는 과감히 계곡으로 내려와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게 편하다. 계곡 트래킹의 묘미는 길이 없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만나는 것이고, 길이 없으면 계곡을 길로 삼으면 그만이다. 이따금 손가락만한 물고기들이 신기한 듯 주둥이로 종아리를 툭툭 건드린다.
그렇게 산굽이를 몇 번 돌고나면 드넓은 모래톱과 여인의 피부처럼 하얀 강돌로 이루어진 구간이 드넓게 펼쳐진다. 상천초소에서 내려온 생태탐방로와 연결되는 지점으로 용소는 모래톱이 끝나면서 물길이 휘어져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 속을 흐른다.
용소는 여느 계곡의 그 것과는 생김새부터 다르다. 좁은 협곡을 이루고 있는 바위는 눈부실 정도로 하얀데다 다이너마이트로 발파를 한 듯 거칠다. 영양 수비계곡에서 울진 끝마을인 용피리 속사마을을 거쳐 흘러온 왕피천은 이곳에서 용트림을 한다. 깊이가 5m가 넘는 용소의 물빛은 심연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검은색을 띠고 있어 공포감마저 느끼게 한다.
왕피천 계곡 트래킹은 용소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다. 구명조끼와 튜브를 갖춘 마니아들은 헤엄을 쳐서 용소를 통과하지만 장비의 도움 없이 용소를 건널 수는 없다. 하지만 산란중인 은어처럼 입을 벌리고 무섭게 요동치는 용소를 한눈에 보고 싶다면 생태탐방로로 우회해 학소대에 오르면 된다.
‘은어낚시통신’에서 그녀가 그의 회귀를 바라던 시원은 한여름 햇살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왕피천의 검은 용소가 아닐까?
울진=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윤대녕의 단편소설 ‘은어낚시통신’에서 1964년 7월생 모임인 그들은 이쪽과 저쪽으로 세상을 나누고 동시에 ‘저쪽’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원래 있었어야만 하는 그 먼 존재의 시원(始原)을 찾아 나선 그들이 은어처럼 지느러미를 끌고 거슬러 올라간 곳은 바로 원시계곡인 울진의 왕피천이다.
왕피천은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원해 울진군 왕피리와 구산리를 지나 망양정해변 인근에서 동해와 만날 때까지 61㎞를 풍경화처럼 흐른다.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몸을 숨겼다는 왕피리에서 유래한 왕피천(王避川). 여름철에는 호젓한 강수욕과 계곡 트레킹을 즐기는 피서객으로 제법 시끌벅적하다.
계곡 트레킹의 출발점은 왕피천 중간쯤에 위치한 근남면 구산3리의 굴구지마을. ‘등허리 긁어 손 안 닿는 곳’이 울진이라지만 굴구지마을은 울진에서도 오지로 꼽힌다. 구고동으로도 불리는 굴구지는 왕피천 하류의 성류굴에서 아홉 구비 산자락을 돌아가야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그 흔한 마을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두메산골이다.
금강송에 둘러싸인 산길을 빙글빙글 도느라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무렵 굴구지마을 초입에 위치한 구고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강폭이 한껏 넓어진 구고교 아래 왕피천은 수심이 얕고 물살이 느린데다 강돌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다. 강변과 모래톱을 수놓은 형형색색의 텐트를 베이스캠프 삼아 ‘그 먼 존재의 시원’을 찾아 나선 피서객들이 삼삼오오 한여름의 추억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굴구지마을은 40가구 70여 주민이 손바닥만한 농경지에서 논농사와 밭농사로 입에 풀칠을 하는 전형적인 산촌이다. 아름드리 금강송 몇 그루가 장승처럼 버티고 있는 들녘은 뙤약볕을 머리에 이고 밭을 매는 늙은 가시버시들로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2007년에 산촌생태마을로 조성되면서 입소문이 나 여름에는 민박하는 피서객들로 북적거리지만 한겨울에는 적막하다.
산양과 수달 등 멸종위기 동물의 흔적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왕피천 계곡 트레일은 굴구지마을회관 앞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왕피천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오른쪽은 상천으로 가는 생태탐방로이다. 왼쪽 길을 선택하면 마을에서 용소까지 계곡 트레킹을 즐긴 후 계곡 옆으로 난 왕피천 생태탐방로를 2㎞쯤 걸어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코스.
왕피천 생태탐방로인 왼쪽 길은 시멘트로 포장된 한적한 산길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구불구불 흐르는 왕피천이 금강송 사이로 언뜻언뜻 보인다. 사람이 살지 않아 허물어지기 직전인 묵은 집과 길섶 고추밭에서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고 있는 촌로가 풍경화의 일부처럼 정겹다.
상천초소에서 방명록에 서명한 후 좁은 오솔길을 내려서면 밀림 같은 수풀이 펼쳐진다. 초록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풀은 왕피천 일대가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수풀을 500m 정도 전진하면 집채 크기의 바위가 나오고 길은 왕피천으로 내려선다. 이곳에서 왕피천의 으뜸 절경인 용소까지는 약 400m.
선택은 자유지만 계곡은 은어처럼 거슬러 올라야 제 맛이다. 굴구지마을에서 곧바로 왕피천으로 내려가 계곡을 거슬러 오려면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왕피천이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굴구지마을에서 좁은 협곡으로 이루어진 용소까지는 약 4㎞. 전국이 장맛비로 난리를 칠 때도 이곳은 오랜 가뭄으로 강물이 줄어 계곡 트레킹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다.
왕피천 계곡 트레킹은 산이나 둘레길을 도는 일반 트레킹보다 훨씬 힘들다.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는데다 강바닥을 수놓은 미끄러운 강돌 때문에 균형을 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어떤 때는 길을 가로막은 큰 바위를 타고 넘어야 하고, 깊은 소를 만나기라도 하면 왕피천 가장자리로 에두르는 수고를 더해야 한다. 하지만 걸음을 뗄 때마다 나타는 자갈밭과 모래밭, 그리고 물길이 휘어지는 수직절벽에 뿌리를 내린 금강송이 걸음을 재촉한다.
바위구간을 지나 산모롱이를 돌면 계곡이 점점 험해진다. 버드나무를 비롯해 잡풀과 잡목이 많아 걷기도 불편하다. 이때는 과감히 계곡으로 내려와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게 편하다. 계곡 트래킹의 묘미는 길이 없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만나는 것이고, 길이 없으면 계곡을 길로 삼으면 그만이다. 이따금 손가락만한 물고기들이 신기한 듯 주둥이로 종아리를 툭툭 건드린다.
그렇게 산굽이를 몇 번 돌고나면 드넓은 모래톱과 여인의 피부처럼 하얀 강돌로 이루어진 구간이 드넓게 펼쳐진다. 상천초소에서 내려온 생태탐방로와 연결되는 지점으로 용소는 모래톱이 끝나면서 물길이 휘어져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 속을 흐른다.
용소는 여느 계곡의 그 것과는 생김새부터 다르다. 좁은 협곡을 이루고 있는 바위는 눈부실 정도로 하얀데다 다이너마이트로 발파를 한 듯 거칠다. 영양 수비계곡에서 울진 끝마을인 용피리 속사마을을 거쳐 흘러온 왕피천은 이곳에서 용트림을 한다. 깊이가 5m가 넘는 용소의 물빛은 심연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검은색을 띠고 있어 공포감마저 느끼게 한다.
왕피천 계곡 트래킹은 용소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다. 구명조끼와 튜브를 갖춘 마니아들은 헤엄을 쳐서 용소를 통과하지만 장비의 도움 없이 용소를 건널 수는 없다. 하지만 산란중인 은어처럼 입을 벌리고 무섭게 요동치는 용소를 한눈에 보고 싶다면 생태탐방로로 우회해 학소대에 오르면 된다.
‘은어낚시통신’에서 그녀가 그의 회귀를 바라던 시원은 한여름 햇살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왕피천의 검은 용소가 아닐까?
울진=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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