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항구도시 욥바와 가이사랴 ②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0:57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항구도시 욥바와 가이사랴 ②

이지현
입력 2012-11-08 18:04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항구도시 욥바와 가이사랴 ② 기사의 사진
가이사랴 신약시대 대표적 항구로 기독교 복음 중심지 역할

로마를 위한 도시 가이사랴


가이사랴는 구약성서의 전통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도시이며 신약시대 헤롯대왕 이후 등장한 역사적 도시다. 지중해변의 항구도시들 중 구약시대는 욥바이고 신약시대의 항구는 단연 가이사랴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행 10장), 그리고 로마로 압송되기 전 바울의 재판과 증언(행 25장) 등 기독교 복음의 중심지가 된 가이사랴는 이스라엘, 로마 그리고 열방의 영적인 전초기지였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헤롯대왕은 로마의 후원으로 유대의 왕이 되자 욥바 항구를 통해 로마의 모든 것을 유입하고자 했고 로마로의 진출을 꾀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욥바는 유대인들의 거주지였고 그들은 도시가 로마화되는 것에 반대했다. 정통 유대인도 아닌 이두메아인으로서 유대의 왕이라는 호칭을 안게 된 헤롯대왕은 유대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때 일어날지 모르는 폭동에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해준 로마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로마식 도시 문명으로 가득 찬 도시가 필요했다. 결국 헤롯은 욥바가 아닌 새로운 항구도시를 지중해변에 건설했고 이를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Augustus Caesar)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가이사랴라고 불렀다.

가이사랴는 욥바에서 북쪽으로 40㎞ 떨어진 지중해변에 위치한 해양 도시로 이스라엘의 어제와 오늘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휴양지이자 국립공원으로 수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다. 가이사랴의 아름다움은 이스라엘의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글에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또한 1959년 가이사랴 해변을 탐사한 링크(Link) 부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전 30년 헤롯대왕이 가이사랴를 건설하기 전 이곳은 스트라톤의 탑이라 불리던 작은 항구로 주전 3세기 베니게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심한 지중해의 남서풍이 해변의 모래를 쓸어가 버리는가 하면 절벽에 바람이 부딪치는 등 항구로서는 부적합하여 버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주전 30년경부터 헤롯대왕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자 가이사랴는 로마 군대의 주둔지가 되었으며(행 10장), 헤롯대왕도 그의 안식처를 마련한 장소(palace)이기도 했다(행 12:19). 그 이후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주전 4년∼주후 6년)가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를 통치했지만 실정(失政) 때문에 물러나고 로마의 총독이 파견되었다. 총독은 예루살렘이 아닌 가이사랴를 행정적인 수도로 정하고 유대 땅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가이사랴는 비잔틴 시대, 초기 무슬림 시대를 거쳐 십자가군 시대까지 번성했고 인구도 12만명 이상 늘어났다.

가이사랴가 이렇게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헤롯대왕이 주전 30년경 지형적 악조건을 딛고 이곳에 300척의 배를 한 번에 정박할 수 있는 10만㎡ 규모의 항구를 지었기 때문이다. 헤롯대왕은 이 항구를 세바스토스 항구라 명명하였는데 이는 아우구스토스 카이사르의 헬라어 이름이다. 세바스토스 항구는 현재 가이사랴의 항구보다 더 큰 규모로 놀라운 것은 이 항구가 해변의 절벽이나 자연조건을 이용해 만든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건설된 항구라는 것이다. 헤롯대왕이 로마 건축에 광적이었다는 것은 마사다라든가 헤로디온 등을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더불어 그의 건축과 관련된 어떤 문헌에도 건축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헤롯대왕 본인이 설계까지 담당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도 한다. 만약 그가 이 항구의 설계를 직접 했다면 그는 분명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처음 설계했다는 임호텝과 견줄 만한 건축의 천재였을지도 모른다.

가이사랴의 해변을 찍은 항공사진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바다 속에 비치는 마치 건축물 유적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약 40m 두께의 거대한 육지의 그림자다. 이 그림자는 해수면 5m 아래 잠겨 있는 헤롯대왕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항구의 남쪽과 북쪽의 방파제 흔적이다. 이 방파제는 현재 우리가 콘크리트를 만들어 건물을 완성하는 방법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단지 이 콘크리트를 지상에 두는 것이 아니라 바다 속에 설치한 것이다. 북쪽과 남쪽의 콘크리트를 쌓는 방법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500m 길이의 남쪽 방파제는 평평하게 만든 짐배를 먼저 바다에 띄우고 그 위에 50㎝ 두께의 시멘트를 붓고 다시 짐배를 얹고 그 위에 시멘트를 붓는 방법으로 쌓아 바다 속으로 가라앉도록 했다. 이 작업은 수면의 높이까지 인공적인 언덕이 닿도록 반복해서 쌓았다. 북쪽의 방파제는 지상에서 먼저 나무로 약 15×20m 규모의 틀을 짰는데 이 방파제의 경우 길이가 275m에 달했기 때문에 상당한 양의 틀을 만들었을 것이다. 틀의 바깥쪽은 벽을 이중으로 만들어 방수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거대한 틀이 바다로 띄워지고 수많은 잠수부들이 이 틀을 바다 속으로 밀어 넣었다. 틀에는 포추오리 화산회와 석회석 그리고 지중해변의 자갈들을 섞어 만든 시멘트를 부었으며 역시 해수면까지 쌓았다. 헤롯이 사용한 화산회는 이탈리아의 포추오리(Pozzuoli) 지역에서 수입해 온 것으로 그 양이 1만8000t에 달했다.

세바스토스 항구를 재현한 그림들은 대부분 항구 입구에 서 있는 등대를 묘사한곤 한다. 아직까지 이러한 등대의 모습이 발견된 바는 없지만 요세푸스는 항구에 탑들이 서 있었고 그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탑은 카이사르의 요절한 아들 드루수스(Drusus)의 이름에 따라 드루이온이라 불렸다고 기록돼 있어 학자들은 이 탑이 항구 입구에 서 있었던 등대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가이사랴 세바스토스 항구는 당시 가장 큰 규모였던 아테네의 피라에우스 항구만큼 컸으며 어떤 바다의 위협에도 쓰러지지 않을 만큼 견고하고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고 기록했다(유대전쟁사 1권 408-415). 그러나 이 항구는 주후 1∼2세기 사이 거대한 쓰나미의 공격을 받아 손상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쓰나미의 공격 외에도 최근 고고학은 헤롯대왕의 콘크리트가 잘 섞이지 않았던 점들이라든가 당시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콘크리트보다 약했던 결점 등을 발견했다. 결국 헤롯대왕의 항구는 주후 6세기 비잔틴 시대 이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가이사랴는 이스라엘 유물청을 비롯하여 많은 고고학자들의 관심으로 상당히 많은 부분이 발굴된 바 있다. 특별히 세바스토스 항구를 재현하고자 하는 해양고고학자들은 차가운 바다에도 마다하지 않고 잠수복을 입고 있다. 바다 속에 숨겨진 많은 보물이 밖으로 드러났고 연구되긴 했지만 많은 부분이 사라져 항구는 아직까지 완전한 모습을 재현할 수 없다.

<가이사랴 계속>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