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항구도시 욥바와 가이사랴 (3)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0:59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항구도시 욥바와 가이사랴 (3)

이지현
입력 2012-11-15 21:25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항구도시 욥바와 가이사랴 (3) 기사의 사진
가이사랴 화려한 궁전·대규모 수로와 극장… 로마를 베끼다

로마를 위한 도시 가이사랴 ②


황제도시(imperial city) 가이사랴를 건설한 헤롯대왕은 자신을 위한 궁전을 함께 건축했다. 그 궁전은 도시의 남쪽에 위치했으며 바다로 향해 100m 정도 튀어나온 곶(串) 위에 지어졌다. 요세푸스는 헤롯대왕의 궁전을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 불렀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은 궁전의 바닥과 그것을 유지해온 바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아 있는 몇몇 기둥과 모자이크 바닥을 통해 로마의 건축물과 유사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궁전의 동쪽에 위치한 입구로 들어서면 42×65m 넓이의 거대한 안뜰을 만난다. 로마의 건축물과 비교해 볼 때, 안뜰의 사면은 기둥들로 장식되었고 중앙은 정원으로 나무와 꽃들이 자랐을 것이다. 안뜰의 북쪽에 있었던 회중을 만나는 홀을 포함하고 있는 이 궁전은 보통 상부 궁전이라 불렸고 궁전의 북서쪽 귀퉁이에는 계단이 마련되어 있어 지중해와 맞닿아 있는 서쪽의 하부 궁전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부 궁전에는 다시 사면이 기둥들로 장식되어 있는 35×18m의 수영장이 있어 마치 바다를 마주볼 수 있는 수영장이 마련된 현대의 5성급 호텔을 상상케 한다.

그러나 헤롯대왕의 아들들은 가이사랴의 화려한 궁전을 오래 사용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헤롯 아켈라오(주전 4년∼주후 6년)는 유대 땅의 주요 지역들과 도시들을 물려받아 통치했지만 그의 오만함과 부도덕성, 종교적 갈등으로 집권한 지 겨우 10년 만에 권좌에서 쫓겨났다. 로마는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을 위한 새로운 유대 왕을 세우지 않았고 총독을 파견했다. 총독은 예루살렘이 아닌 가이사랴를 행정적인 수도로 삼았으며 헤롯대왕이 건설한 궁전을 자신의 거처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특히 1961년 상부 궁전의 안뜰 중앙에서 라틴어로 로마 총독의 이름이 새겨진 석비가 발견되었다. 이 석비에 새겨진 이름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바로 본디오 빌라도였다(마 27:1∼66; 막 15:1∼45; 눅 23:1∼56; 요 18:29∼19:22). 본디오 빌라도는 주후 26∼36년 유대 지역을 통치했던 로마의 5대 총독으로 신약성경과 역사가 필로와 요세푸스의 짧은 언급 외에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이다. 이 헌정비는 빌라도가 가이사랴에 티베리우스 황제를 위한 신전을 지으면서 기념비로 세워졌던 것이다. 이후에도 헤롯대왕의 궁전은 로마의 총독들의 거처로 주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로마로 가기 전 이 헤롯의 궁전에 있었던 감옥에 갇혀 있었고(행 23:35) 또한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재판을 받았다(행 24장).

수원을 확보하다

겨울에만 비가 오는 이스라엘의 기후 조건은 항상 물이 있는 곳에 도시가 발전한다는 공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가이사랴는 이 공식에는 그다지 맞지 않는 샘이 없는 장소였다. 도시의 초창기에는 빗물과 작은 우물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인구의 증가로 인해 물을 끌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헤롯대왕은 로마식 물 공급 시설인 수로(도수교)를 건설했다. 수로는 마치 길고 좁은 다리를 연상케 한다. 진흙벽돌을 쌓아 만든 다리는 아래 부분은 아치 형태로 연결되어 있고 윗부분은 현대의 수로처럼 물이 지나갈 수 있는 수관으로 만들어졌다. 중력을 이용하여 물이 흐르도록 수로의 하향 기울기를 상당히 정교하게 계산하였고 꽤 먼 곳까지 물을 흘러 보낼 수 있도록 구상되었다. 헤롯대왕의 수로는 갈멜산 기슭의 수원지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이사랴까지 21㎞에 걸쳐 이어져 있다. 이후 도시가 성장하자 주후 130년께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탄니님 강에서부터 6㎞의 수로를 건설해 헤롯대왕의 수로와 만나게 했고 수로의 폭을 확장시켰다. 이 수로는 십자군 시대(주후 1099∼1260)까지 계속 사용되다가 도시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점차 축소되었다. 오늘날에도 헤롯대왕의 수로는 가이사랴의 지중해변에 여전히 건재하게 서 있어 고대 로마식 수로의 모습을 직접 만지고 볼 수 있는 교육의 현장이면서 성지순례객들에게 좋은 포토존이 되어 주기도 한다.



로마 극장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극장이다. 로마는 그리스의 연극문화를 그들의 문화로 받아들였다. 그리스의 연극은 자연적인 언덕에서 행해졌는데 언덕의 경사면에 관중들이 앉았고 아래에서는 배우들이 공연을 했다. 로마는 이 모습을 건물로 만들어 언덕처럼 경사진 계단을 쌓아 관중석을 마련하고 맞은편에는 무대를 만들었다. 무대는 단상과 씬이라고 불리는 단상 배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헤롯 역시 가이사랴에 로마 극장을 지었는데 한 번에 3500명의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요세푸스는 이곳이 헤롯 아그립파가 앉아 있었던 극장이라고 한다. 가이사랴 극장의 좌석 중 중앙에는 고위층들이 앉던 특별 좌석이 있었는데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왔던 헤롯 아그립파(행 12:19)는 바로 이 좌석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였을 것이며 이때 주의 사자가 보낸 벌레에게 먹혀 죽었을 것이다(행 12: 20∼23). 현재 가이사랴 극장의 관중석은 발굴된 부분과 함께 완전히 복구가 되어 있으며 씬을 제외한 무대단상 역시 복구되어 있다. 이 무대에서는 매년 음악회라든가 연극 등이 공연되고 있어 고대 극장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한다.

기독교의 중심지

주후 69년 베스파시아누스는 가이사랴를 유대의 수도로 삼았다. 주후 70년 유대 지역과 예루살렘을 정복한 디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가이사랴에서는 검투사 경기가 열렸다. 당시 경기에 투입되어 학살당한 유대인의 인구는 무려 2500명에 달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듯 완전히 로마의 문화로 가득했던 가이사랴가 주후 200년께 기독교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가이사랴에 제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울이 회개한 후 바울이 되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할 때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 했다. 이때 바울이 도망한 곳이 가이사랴였으며(행 9: 30) 그가 로마로 가기 전 2년 동안 머무르며 총독 벨릭스가 두려워했던 예수의 복음을 전한 장소이다(행 24장). 또한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을 때 그 이방인이 바로 가이사랴의 로마부대 백부장 고넬료였다(행 10:1∼31). 교회사에 있어서도 가이사랴는 중요한 도시로 초대교회 교부들 중 오리겐은 이곳에서 성서주석과 신학 작업을 완성했으며 유세비우스는 가이사랴에서 사역하였다. 가이사랴에는 주후 6세기에 건설된 교회의 흔적이 잘 남아 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