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아람 사람들 ②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1:02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아람 사람들 ②

이지현
입력 2012-11-29 17:40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아람 사람들 ② 기사의 사진
‘이스라엘 왕 □람과 다윗 집 □야와 싸웠다’


하사엘이 건립 추정 ‘텔 단 石碑’

아람 왕 하사엘


지금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성서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 팔레스타인의 가자에서 분쟁이 발생하기 직전 시리아 정부군이 이스라엘의 골란고원으로 포탄을 쏘아 공격했다. 이스라엘군도 곧바로 대응하여 진압에 나섰지만 또 다른 전쟁의 불씨가 남아 있다. 오늘날 시리아가 성서시대의 아람제국과 동일한 지역인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특히 아람의 왕 하사엘 시대에 더욱 그랬다. 하사엘은 두로와 시돈의 이세벨을 견제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다메섹으로 가서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으로 만들라고 인정했던 자(왕상19:5)로 벤하닷을 암살하고 왕이 되었고(왕하 8:15), 선지자 엘리사가 예언했던 것처럼(왕하 8:12)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괴롭히는 장면들을 성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왕하 8:28∼29; 9:14∼15; 10:32; 12:17∼18; 13:22).

성서적 연대에 의하면 하사엘은 아람 왕으로 주전 842∼796년 다메섹에서 재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난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람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사엘의 흔적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그의 모습은 오히려 주변 국가들의 흔적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 유적지들에서 발견된 병거용 말의 눈가리개들 중에는 아람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람어로 ‘하다드신께서 우리 주 하사엘에게 하사하신’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하사엘의 역사성에 대해 힘을 실어주고 있다.

최초로 성서 밖에서 발견된 다윗의 이름

무엇보다 하사엘의 자료로 유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텔 단에서 발견된 석비다. 더욱이 이 석비는 성서상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하는 역사적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동시에 ‘다윗’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어 세기의 발견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텔 단은 1966년부터 히브리 유니온 대학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1993년 당시 발굴 지도자였던 비란 교수는 주전 9세기경의 도시 성문을 재현하려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는 고대 도로와 성벽들을 복구하면서 아람어로 기록된 두 현무암 조각들을 발견하였고 다음해 같은 지역에서 조각 하나를 더 발견하였다. 모두 13행이 보존된 이 석비는 많은 부분의 복구가 불가능하여 석비를 기록한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석비는 아람의 어느 왕이 그의 승전을 기념하여 텔 단에 세웠던 것이라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석비는 하다드신에 의해 왕이 된 이가 그의 아버지 땅에 침략한 이스라엘과 맞서 싸워 수십명의 왕과 수천의 말, 병거를 파괴했노라고 말하고 있다.

특별히 이 석비는 ‘이스라엘의 왕 □람과 다윗 집(beit David)의 □야’와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비석이 잘려나가 읽을 수 없는 문자). 아직도 찬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비란 교수는 이 석비의 주인은 아람 왕 하사엘이며 그는 열왕기하 8:28∼29에서 묘사되고 있는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와 싸움에서 승리한 후 이 석비를 세웠다고 주장했다. 결국 텔 단 석비는 성서적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석비의 보다 중요한 관심은 ‘다윗 집’이라는 유다 왕국의 호칭에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텔 단 석비가 발견되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지는 다윗은 성서 외에 주변 국가의 어떤 자료에도 등장하지 않아 역사적 존재성에 대한 의심을 받아왔다. 비록 다윗 시대인 주전 10세기 기록은 아니지만 그의 이름이 주변 국가의 다른 언어로 기록된 문헌에 등장하였다는 것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고대 중동지역에서 사람 이름 앞에 사용되는 집(beit)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김씨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의 가족을 김가네 혹은 김씨네라고 불러 가족 구성원들이 김씨라는 아버지 아래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듯 남왕국 유다 왕들의 계보를 ‘다윗 집’ 즉 ‘다윗가네’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 왕의 조상이 다윗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몇몇 학자들은 이 석비의 진위성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또한 ‘다윗 집’이라는 글이 고대 아람어를 기록할 때 두 단어 사이에 띄어쓰기 표시 기호가 없는 것으로 보아 두 글자가 아닌 한 글자로 이어 읽어야 하며 도시의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가드를 쳐서 점령하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으로 인해 여호와는 이스라엘에서 땅을 잘라내기 시작했고 하사엘은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왕하 10:32). 그는 남쪽까지 전세를 이어나가 블레셋과 유다의 경계에 있던 가드를 쳐서 점령하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고자 하였다(왕하 12:17). 가드는 현재 텔 이스라엘 남쪽 쉐펠라 지역 엘라 골짜기에 위치한 텔 에-사피 유적지로 밝혀졌고 1996년 이후 현재까지 활발히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발굴 책임자인 메이르 교수는 발굴 답사 초기 단계부터 텔 에-사피를 찍은 항공사진에 나타난 유적지 주변을 둘러싼 2.5㎞ 상당의 선들을 따라 부분 발굴들을 시도했는데 현대가 아닌 고대에 누군가 3m 가까이 되는 깊은 웅덩이를 팠지만 후대에 메웠음을 밝혀냈다.

이러한 웅덩이는 마치 로마 군인들이 자주 사용한 포위공격용 웅덩이와 유사했다. 고대 근동에서 발견된 여러 전쟁의 흔적에 의하면 한 도시를 점령할 때 공격군은 도시를 둘러싸고 깊은 웅덩이를 판 후 반대편에 자신들의 군 진영을 세웠다. 이 웅덩이는 도시를 포위한다는 의미와 함께 도시민들이 성을 빠져나가 도망가지도, 또한 외부로부터 물자를 들여오지도 못하게 하고 동시에 자신들을 공격할 수 없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텔 에-사피의 웅덩이 반대편 군 진영으로 사용된 언덕에서 발견된 유물들의 연대와 유적지 자체에서 발견된 파괴의 연대는 하사엘의 시대와 동일시되고 있다. 더불어 텔 에-사피의 주전 9세기 거주지는 심한 화재로 인해 파괴된 침략의 흔적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불에 탄 여인들의 시신들도 발견되어 엘리사가 예언했던 것처럼 하사엘은 이스라엘의 성에 불을 지르고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의 배를 갈랐던 것으로 보인다(왕하 8:12). 결국 하사엘의 검에 겁을 먹은 유다 왕 요아스는 그에게 여호와의 성전의 성물과 왕국의 금을 바쳐 예루살렘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사엘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 벤하닷은 아버지만큼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요아스에 의해 아버지 때 차지했던 성읍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성서는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무찔렀으며 그의 아버지 여호아하스가 빼앗겼던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왕하 13:25). 아마도 이 빼앗긴 성읍들 중에 아람과 이스라엘의 경계선 상에 있던 텔 단 역시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성읍을 되찾은 요아스는 하사엘이 세워 놓은 승전비를 깨부수고 그 조각들은 성문 입구를 포장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람 사람들 계속>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