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궁전’으로 유명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중심지
세멜에게서 산 사마리아 산지
이스르엘 골짜기부터 벧엘까지를 성서에서는 에브라임 산지 혹은 사마리아 산지라고 부른다. 에브라임 지파에게 배분된 이 지역 역시 물이 풍부한 상당히 비옥한 지역으로 주전 18∼13세기에는 나무로 우거진 숲이 있었다(수 17:15, 렘 50:19). 여호수아가 묻힌 장소이기도 하며(삿 2;9) 드보라의 고향이기도 하지만(삿 4:5) 에브라임 산지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역할을 하는 중심지로 더 유명하다. 사마리아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흔적은 주전 9세기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 왕 시대부터 발견됐다.
성서에 의하면 오므리는 쿠데타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은 두 달란트를 지불하고 세멜의 소유인 산을 샀다. 달란트는 무게로 계산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방식으로 1달란트는 34㎏으로 오므리는 상당한 금액을 주고 이 땅을 샀다. 땅 주인의 이름을 따라 언덕은 사마리아라 불렸고 당시 수도였던 디르사를 떠나 이곳에 성읍을 건축했다(왕상 16:24). 사마리아는 타원형의 긴 경사가 있는 언덕으로 성읍이 지어진 언덕 꼭대기만 편평하며 60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전쟁이 있을 때 방어에 유리했으며 성서에서도 사마리아가 아람국의 침략(왕하 6장)과 앗수르의 침략(왕하 17장)에 꽤 오랫동안 버텼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에브라임의 머리가 되어 북왕국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도시가 되었다(사 7:9). 성서에서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문서에도 북왕국 이스라엘 출신 사람들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사마리아는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도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사마리아를 세운 오므리는 북왕국 이스라엘 왕조를 부르는 이름이 되어 앗수르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을 “베이트 오므리(beit omri)” 즉 오므리 일가라고 불렀다. 오므리는 사마리아에 장사되었고(왕상 16:28) 그의 아들 아합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사마리아에서 22년을 다스렸다. 오므리가 건설한 사마리아의 성읍은 아합 이후에도 160년간 왕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아합의 상아 궁전
하버드대 고고학팀을 중심으로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사마리아에서의 발굴은 구약시대 오므리의 궁전을 세상에 드러냈다. 이 발굴은 도시 전체가 아닌 궁전 구역 만에 한정되었으나 궁전의 건축양식과 연대를 밝힐 수 있었다. 오므리에 의해 처음 세워진 궁전은 주변 지역보다 4m 정도 높여진 바위산 단상에 지어졌다. 궁전의 바로 아래에는 바위를 뚫고 만들어진 두 개의 무덤도 발견되었다. 무덤의 주인은 밝혀진 바 없지만 일부에서는 오므리의 무덤이었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오므리의 궁전은 아합의 시대에 가서 더 확장됐고 화려해졌다. 아합의 궁전은 더 이상 단상 위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더 넓은 지역으로 뻗어나가 사마리아 언덕의 편평한 꼭대기를 거의 차지했다. 전체 궁전 구역의 크기는 90×180m로 상자를 연결해 놓은 것처럼 방을 연결해 벽을 쌓은 포곽벽으로 둘러싸였다. 아합의 시대에 사마리아는 적어도 7000명 이상이 거주할 수 있었던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궁전의 건축양식은 베니게 양식으로 베니게 출신인 시돈의 공주 이세벨이 아합과 혼인하면서 베니게가 건축에 참여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궁전은 이층 건물로(한국 성서는 다락이라고 번역하였으나 고대 이스라엘의 집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다락은 위층을 말한다) 난간이 있어 이 난간에서 여로보암이 떨어진 적이 있다(왕하 1:2).
몇몇 학자들은 이 궁전이 아합의 시대가 아닌 이후의 시대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궁전 안 행정을 돌본 것으로 보이는 건물에서는 주전 8세기쯤 기록된 63개의 히브리어로 기록된 오스트라카(Ostraca)가 발견됐다. 오스트라카는 헬라어 오스트라콘(Ostracon)의 복수 형태로 토기조각에 글씨를 쓴 것을 말한다. 고대 종이 역할을 했던 파피루스와 양피지의 경우 가격이 비쌌다. 급하게 편지나 영수증을 쓸 경우 쉽게 글을 쓸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다. 이때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깨진 토기조각은 상당히 유용한 도구였을 것이다. 사마리아 오스트라카는 글자체와 문법적인 형태를 봤을 때 아합의 아들 여로보암(주전 785∼749년)의 시대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라카의 내용은 당시 기름과 포도주, 곡식 등의 거래 목록으로 영수증처럼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마리아 오스트라카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유일한 문서로 이 오스트라카를 통해 우리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생산품 목록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여러 이름이 기록돼 있어 당시 바알이 들어간 이름들이 많았던 것을 통해 그들의 신앙의 중심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사마리아의 궁전에서 발견된 가장 인상 깊은 유물은 상아조각들이다. 궁전의 거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4번 건물에서는 500여개의 상아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 상아조각들은 열왕기상 22장 39절에 기록된 사마리아의 상아 궁전을 연상케 한다. 이스르엘 골짜기에 대한 글에서 이미 소개했던 유물 중 사마리아에서 발견된, 여인이 창가에 고개만 내밀고 있는 상아조각을 비롯해 로투스 꽃과 종려나무 가지를 새겨넣은 조각, 날개달린 그룹들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궁전 건축양식이 그랬던 것처럼 상아조각들도 베니게의 예술기조를 따르고 있다. 상아 궁전이 상아로 만든 건물은 아니다. 값비싼 상아로 건물을 짓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상아 궁전은 상아조각들로 벽을 장식하거나 의자나 침대 등에 상아조각들을 붙인 방을 말한다. 발견된 상아조각들은 크기가 작아 이 건물 전체를 장식할 수 있는 양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모양의 상아조각들이 앗수르의 님루드 궁전에서 발견되었다. 이 궁전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점령한 사르곤Ⅱ세의 궁전으로 사마리아 상아 궁전의 상아조각들은 전쟁의 노획물로 뜯겨져 님루드로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의 신전
아합은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건축하고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왕상 16:32). 성서는 사마리아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긴 산당이 있었던 장소로 부르고 있다(왕상 13:32, 암 8:14). 이사야는 사마리아에 조각한 신상이 있었고 우상을 섬겼다고 말하고 있다(사 10:10∼11). 사마리아의 선지자들은 바알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을 헛된 길로 인도하는 우매함을 보였으며(렘 23:13), 사마리아는 가증한 일을 하는 자들의 비교 대상이 됐다(겔 16장). 호세아 역시 사마리아의 우상숭배가 극심했다고 말하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의 날에 사마리아의 송아지 즉 바알 신상이 산산조각 날 것이며(호 8:6), 사마리아의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호 10:7). 사마리아의 신전은 예후가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죽여 진멸하면서 파괴됐다(왕하 10:17∼18). 안타깝게도 아합의 사마리아는 후대에 세워진 건물들에 의해 손상되어 신전의 흔적을 발견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사마리아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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