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시대 천대받던 사마리아인, 강도만난 자에게 선행
사마리아의 멸망
사마리아는 자주 외부의 공격을 받았지만 꽤 오랫동안 견디곤 했다. 아합 시대에 아람왕 벤하닷 2세는 32명의 왕들과 연합하여 사마리아를 공격했다(왕상 20:1). 산꼭대기에 위치한 사마리아 성은 난공불락이었다. 벤하닷은 결국 사마리아를 점령하지 못했고 오히려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부친이 빼앗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성읍을 돌려주고 다메섹에는 아합의 거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하였다. 아합이 죽자 벤하닷은 다시 사마리아를 에워쌌다(왕하 6:25). 사마리아는 굶주림이 극에 달했지만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엘리사가 예언한 것처럼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는 기적이 일어났다(왕하 7:18).
하지만 사마리아 성의 견고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앗수르의 공성퇴와 용병들은 3년 동안 사마리아 성을 에워쌌고 결국 함락시켰다(왕하 17:5∼6). 주전 722년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와 사르곤 2세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 사마리아는 이제 앗수르의 통치 구역이 되었다. 님루드의 앗수르 궁전 5번 방의 벽 부조에는 사르곤이 사마리아를 공격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사마리아의 동쪽 경사면에서는 사르곤에게 바쳐진 앗수르의 비문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앗수르의 점령국 정책은 그 나라의 사람을 끌고 가서 다른 점령지로 보내는 것이다. 사마리아의 이스라엘 자손은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로 흩어져 살았다(왕하 17:6). 사마리아에는 바벨론과 구다와 아화와 하맛과 스발와임 사람들이 와서 살게 되었다(왕하 17:24). 사마리아에 잔류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에 이들과 섞여 살았다. 결국 신약시대 사마리아 출신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정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천대를 당했다. 앗수르는 사마리아를 포함한 북왕국 이스라엘을 사메리나라고 불렀다.
헬라 도시
바빌론 시대에 사마리아는 그리 중요한 도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 5세기 페르시아 시대에 가서야 다시 한 번 북쪽 지역의 수도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남쪽 예루살렘에 느헤미야가 있었다면 북쪽의 사마리아에는 산발랏이 있어 서로 견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스 4:10; 느 4:7∼8). 유다 사람들은 미약했지만 사마리아는 군대가 있을 만큼 중요한 도시였다.
주전 332년 알렉산더가 이스라엘을 점령하면서 사마리아는 헬라 문명의 요새가 되었다. 수천명의 마케도니아 군인들이 거주했다. 헬라시대 흔적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세 개의 탑들이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연결되어 있는 이 탑들은 돌을 쌓아 올려 둥글게 만들었는데, 지름이 13m다. 현재 19켜의 돌들이 남겨져 있다.
요새화된 도시에는 성문이 있었고 헬라시대 동전들과 인장이 찍혀 있는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들이 발견되었다. 후대에 둥근 탑들은 사각형으로 대치되었지만 이 도시가 구약 시대처럼 상당히 요새화되어 있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마리아의 헬라 도시는 주전 108년 이스라엘 하스모니아 왕조의 요한 히르카누스에 의해 무너졌다.
세바스테
그러나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하면서 사마리아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됐다. 주전 37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을 유다의 왕으로 앉히면서 사마리아를 선물로 주었다. 헤롯은 사마리아에 새로운 로마 도시를 세웠다. 도시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에게 헌정되었다. 황제의 헬라어 이름인 세바스테를 따라 사마리아 대신 세바스테라 불렸다.
세바스테의 800m 길이 도로에 600개의 기둥이 세워졌다. 로마 도시에는 우리가 보통 광장이라 부르는 넓은 열린 공간인 포룸이 있었다. 세바스테의 포룸에서는 무역거래가 이루어졌다. 정치 회합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포룸의 끝에는 로마 도시에서 흔히 발견되는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이 있었다.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은 도시의 기둥이 양쪽으로 세워져 있는 건물로 보통 시장이나 재판이 이루어진 장소였다.
헤롯은 북쪽 경사면에 거대한 극장도 세웠다. 구약 시대 아합의 궁전이 있었던 사마리아 산지의 꼭대기에는 로마의 황제 세바스테에게 헌정한 신전이 지어졌다. 지금은 신전으로 올라가는 계단만 남아 있지만 헤롯이 건축했을 때만 해도 25m 높이의 건물이었다. 이 신전에선 로마의 신 코르(Kore)를 섬겼다. 세바스테의 주민들은 동쪽의 샘에서 광장까지 이어지는 지하수로를 이용해 물을 제공받았다. 도시 전체는 4㎞ 길이의 성벽으로 둘러져 있었다. 현재 아랍 도시와 밭인 도시 바깥 지역에서 로마 시대 묘와 석관이 발견되고 있다.
사마리아인의 박해
초대 교회 전통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사마리아에 묻혔다. 로마 도시의 남쪽 경사면은 요한의 머리가 묻혀 있는 장소로 유명했다. 주후 5세기 이 장소에 요한 기념 교회가 세워졌다. 후대에 이 교회에는 수도원 등 여러 건물이 더 세워졌다. 현재 일부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신약시대의 사마리아는 천대 받는 도시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내보내면서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 명하고, 사마리아인의 고을도 가지 말라고 했다(마 10;5). 사마리아에서 만난 여인에게 물을 청했을 때 여인은 오히려 예수에게 유대인으로서 상종하지도 않는 사마리아인인 자신에게 어찌 물을 달라 하는가 되물었다(요 4:4∼9).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레위인도, 제사장도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지만 천대 받았던 사마리아인이 은혜를 베푸는 장면을 통해 누가 과연 우리의 이웃인가를 생각하게도 하였다(눅 10장). 성령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임하여 권능을 받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는 예언을 들었다(행 1:8). 이때 사마리아는 마치 땅 끝 이방인의 마을처럼 들린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박해와 천대는 신약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앗수르의 사르곤 2세에 의하면 사마리아 사람들 중 단지 2만7290명이라는 적은 숫자만이 포로로 끌려갔다. 나머지 많은 사람들은 같은 민족인 남왕국 유다로 떠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사마리아에 남았다. 앗수르의 정책에 따라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이곳에 오면서 서로 섞여 살기 시작했고 이방신을 섬기기까지 했다. 탈무드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구도 사람들이라 부르면서 그들을 유대인이라 취급하지 않았다. 이방인의 뿌리가 깊었던 도시, 신약시대에는 헬라와 로마의 전통과 신전들이 세워진 이곳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에게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곳으로 불렸다.
그러나 일부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을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자손 심지어 레위지파의 일부분이라 믿고 나름대로 유대인의 전통을 지키고자 했다. 이들은 히브리어로 ‘샤메림’ 즉 ‘지키는 자’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는 사마리아(우리에게는 사마리탄이라 알려져 있다)라고 자신들을 불렀다. 이들은 지금도 모세 오경만을 정통성 있는 성서로 취급하면서 그리심산에 모여 산다. 그리심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사마리아 전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결혼을 했으며, 주변의 아랍인들과 섞여 살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기본적인 언어는 아랍어이다. 2012년 1월 1일 현재 남아있는 사마리아인들은 751명이다. 한때 현대 유대인들이 무시하고 이방인 취급을 했지만, 현재는 그들의 독특함과 희귀성을 인정받아 이스라엘 정부에서 이들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사마리아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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