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므깃도 ②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1:55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므깃도 ②

이지현
입력 2013-07-11 17:10 수정 2013-07-11 19:23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므깃도 ② 기사의 사진
2중 성문·지하터널 뚫은 급수시설 갖춰 견고한 요새였지만 앗수르에 점령 당해

아합의 도시

므깃도는 지중해변에서 동쪽의 내륙으로 연결되는 와디 아라(Wadi Ara)길과 남쪽 이집트에서 북쪽 중동지역으로 가는 ‘바다 길’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요지에 위치해 있는 도시이다. 솔로몬이 다윗의 왕국을 계승했을 때 그는 분명 이 중요한 도시를 요새화해야만 했다. 성서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을 견고하게 할 때 하솔, 게셀과 더불어 므깃도에 성을 건축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왕상 9:15).

야딘(Y. Yadin)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솔로몬의 병거성(chariot city)을 므깃도에서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후대에 지어진 건물들로 인해 정확한 아웃라인을 밝혀내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적어도 아합의 시대에 므깃도는 요새화되었으며 아합의 건축물의 상당부분이 솔로몬 시대의 건물과 오버랩된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특별히 예루살렘에 구약시대 솔로몬의 궁전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므깃도의 여러 행정 건축물들은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

아합 시대의 므깃도를 들어서면 상당히 인상적인 거대한 돌을 깎아 쌓아 올린 성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성문의 양쪽에는 솔로몬 시대와는 달리 2개씩의 방들이 있어 전체 ‘4방 성문’이 되었다. 성문은 병거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이중문을 달았을 것이며 앗수르에서 발견된 문들처럼 청동을 입혀 견고하게 사용하였을 것이다. 주전 722년 므깃도가 앗수르에 함락된 이후 성문은 양쪽에 방 하나씩 있는 2방 성문으로 개조하여 사용되었다.

마구간과 궁전

성 안으로 들어와 만나는 행정건물 중에는 마구간이 있다. 고대 말은 일반인들이 소유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다. 말은 전쟁에 사용되는 왕의 병거를 끄는 동물로 상당히 고가였으며 오직 왕과 군대에 속한 동물이었다. 우리는 이미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 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왕상 10:26)라는 구절을 통해 상당히 준비된 군대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솔로몬의 병거성 중에 하나가 므깃도라고 보고 있으며 말이 귀한 동물이었기 때문에 분명 행정적인 건물을 세워 보호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므깃도에는 현대의 마구간을 상상하게 하는 건물이 두 구역에서 발견되었다.

이 건물은 솔로몬 시대에 지어졌다가 아합 시대에 재건축된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를 잘 다듬은 돌을 쌓아 지어 행정건물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건물 내부에는 양쪽에 돌기둥들을 세워 세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가운데 부분은 흙을 다져 마치 우리의 마당처럼 되어 있고 측면의 바닥은 자갈돌을 깔아 포장하였다. 돌기둥들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말을 묶어 놓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기둥 사이에는 돌로 만든 구유가 놓여 있었다. 이 건물들 전체의 면적을 계산했을 때 아합 시대에 이 마구간에는 450마리의 말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앗수르의 살만에셀 III세는 주전 853년 가나안의 왕들과 시리아의 칼카르라는 장소에서 전쟁을 벌인 적이 있다. 이때 앗수르의 기록에 의하면 아합이 병거 이천을 보냈다. 아마도 아합은 이 마구간에 수용한 말들을 가지고 마구간 앞에 있는 50m×50m의 마당에서 훈련을 한 뒤 전쟁에 내보냈을 것이다.

므깃도에서 발견된 행정건물 중 우리에게 예루살렘을 상상하게 해주는 건것은 비트 힐라니(bit hillani)라 불리는 건물이다. 비트 힐라니는 아카드어로 창문이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시리아에서 주로 발견되는 왕이나 영주의 주택을 말한다. 길고 좁은 두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가로로 넓은 면에 있는 방에는 양쪽에 기둥이 서 있어 건물의 현관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이 방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세로로 긴 방이 있는데 왕이나 영주가 앉아 행정을 보던 보좌의 방이다. 건물은 전체 2층의 구조로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기둥이 서 있던 현관에 있었다. 므깃도의 건물 6000번이 비트 힐라니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이 건물의 전체 구조는 열왕기상 7장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의 솔로몬의 궁전과 상당히 유사하다. 건물에 사용된 기둥 위를 장식한 기둥머리의 경우 성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종려나무 가지를 아로새긴 형상으로 이러한 기둥머리는 므깃도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하솔, 게셀 등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수자원

겨울에만 비가 오고 여름에는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는 이스라엘에서 수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유적지들에서는 각 지역에 맞는 독특한 급수시설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전쟁을 하러 온 적군에게도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각 도시는 전쟁 중에도 수자원을 지키기 위해 땅 속으로 터널을 파서 샘에 도달하는 시설들을 마련했다. 이 샘은 도시 밖의 적군에게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적군은 자신들이 포위한 도시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더불어 자신들마저도 물 공급이 원활하지 못할 경우 전쟁을 그만두어야 하는 위기에 봉착하기도 하였다. 므깃도에도 이러한 급수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합의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시설은 언덕의 꼭대기에서부터 소용돌이 모양으로 굽이치는 층계를 파 내려가 수직으로 30m 깊이의 수갱을 팠다. 수갱의 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성 밖에 있는 샘까지 70m 길이의 수평 터널이 뚫렸다. 샘은 적군이 볼 수 없도록 거대한 벽으로 막아놓았다.

앗수르의 점령과 요시야의 죽음

이렇듯 견고한 요새였지만 므깃도는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다. 앗수르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마깃두(므깃도)와 사메리나(사마리아)로 행정구역을 나누었다. 므깃도에는 앗수르의 건축 양식에 영향을 받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므깃도에서 발견된 건물 1052번과 1369번은 중앙에 직사각형의 안뜰을 두고 방들이 이 안뜰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앗수르의 건물이었다.

앗수르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바빌론이 중동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요시야는 이 틈새를 이용하여 앗수르에게 빼앗겼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때 이집트의 왕 느고는 앗수르를 돕고자 북쪽으로 원정을 나갔고 요시야는 이를 저지해야만 했다. 그들은 항상 전쟁지역이었던 므깃도에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요시야는 승리하지 못했고 므깃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왕하 23:29). 주전 586년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면서 므깃도에는 더 이상 도시가 건설되지 않았다. 그러나 므깃도가 가지고 있는 접전지라는 전통은 신약시대에도 기억되었다. 요한계시록 16장에서 마지막 전쟁이 있으리라고 예언된 아마겟돈은 히브리어의 하르 므깃도 즉 므깃도 언덕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발음한 명칭으로 전쟁의 상징적인 장소로 사용되었다. 일부에서는 므깃도 언덕 앞 즉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많은 전쟁이 있었기에 이 땅이 전쟁의 피와 시신으로 인해 땅은 붉으며 비옥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