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스르엘 골짜기 ①
아합이 탐냈던 나봇의 포도원 있던 곳… 지금도 곡창지대
이스라엘의 곡창지대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이스라엘의 곡창지대는 북쪽에 위치한 이스르엘 골짜기이다. 성서에서도 아합이 탐냈던 나봇의 포도원이 이스르엘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었다(왕상 21:1). 지형학에 따르면 이스르엘 골짜기는 약 200만년 전 지중해와 요단계곡 사이에 형성된 꽤 넓은 지역을 일컫는다. 북쪽으로는 갈릴리와 남쪽으로는 사마리아 산지를 경계로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요단 계곡과 접해 있으며 서쪽에는 갈멜산이 있다.
이스르엘 골짜기는 주전 4500∼3300년쯤의 유물도 발견될 정도로 오래전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던 장소다. 골짜기에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이스르엘로 불렸던 도시가 있었기 때문인데 아마 도시를 건설한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을 것이다.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신이 밭을 갈다”라는 뜻으로 골짜기의 풍요로움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 골짜기 안의 주요 도시에는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므깃도, 이스르엘, 벧산 등이 있다.
이스라엘의 전쟁터
이스라엘의 산지 형세는 도보와 우마차로 이동하는데 쉽지 않은 길을 제공했다. 특히 북쪽으로 원정을 나가는 이집트의 병거들에게 이스라엘의 산지는 최악의 통로였다. 그에 비해 이스르엘 골짜기는 골짜기라고 기록돼 있지만 지형은 평지다. 덕분에 이곳은 지중해에서 요단강까지 다시 남쪽에서 북쪽의 메소포타미아로 연결되는 내륙을 연결하는 쉬운 이동경로가 됐다. 산지들로 둘러싸인 넓은 평지는 붉은 테라로사 흙이 가득하여 녹색의 물결을 자랑하지만 무엇보다 지중해 연안과 고대 근동의 무역상들이 모여들었던 중심지였다. 도로 상황이 좋고 넓은 지역을 제공하는 골짜기의 조건은 또한 전쟁터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스르엘은 이미 주전 14세기에 기록된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도시가 형성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호수아 17장 16절에서 요셉 자손이 이 지역을 배분받자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고 할 정도로 막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사기 속의 전쟁들이 자주 이 골짜기에서 벌어졌는데 동쪽에 위치한 다볼산 아래에 드보라와 바락의 군대는 하솔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대항하기 위해 진을 쳤다. 여호와는 하로셋학고임에서 시스라와 그 군대를 전멸시켰다(삿 4장). 사사기에서 가장 많은 설교의 예화가 되는 기드온의 전쟁 역시 이 골짜기와 관련이 있다. 사사기 6장은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괴롭히자 이스르엘 골짜기 오므라 출신의 기드온이 사사로 선택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미디안은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을 함께 모아 요단강을 건너와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다(삿 6:33). 기드온이 이스르엘 골짜기의 유명한 하롯 샘에 이스라엘과 진을 쳤고 이 샘의 물을 어떻게 먹는가를 보고 300명의 용사를 선택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삿 7장).
지난 호에서 벧산과 관련하여 등장했던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블레셋과의 전쟁 중 전사한 곳도 이스르엘 골짜기의 남동쪽에 위치한 길보아 산이었다.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다윗은 길보아 산에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을 것이며 밭에 산물이 없을 것이라고 저주하는데(삼하 1:21) 이스르엘 골짜기의 풍요로움을 기억한다면 그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이스르엘 성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스르엘 골짜기는 이스르엘 도시의 이름을 따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스르엘이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장소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다윗의 아내 중 아히노암이 이스르엘 출신이라는 것이다(삼상 25:43). 이스르엘이 곡창지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를 차지하는 것은 꽤 중요했을 것이다. 다윗은 이스르엘 출신의 여인과 혼인함으로써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면서 곡물의 후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중요성은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았을 때 온 이스라엘을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이라고 말하게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면서 이스르엘은 북왕국 이스라엘 땅이 됐다. 이스르엘을 무엇보다 유명하게 한 것은 아합이 욕심이 나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왕상 21장). 결국 항상 악녀로 등장하는 이세벨은 나봇을 돌에 맞아 죽게 하고 포도원을 아합에게 안겨줬다. 하지만 선지자 엘리야는 이세벨에게 그녀의 시체를 이스르엘의 개들이 먹게 되리라는 저주를 선포했다.
성서는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 가까이 왕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왕상 21:1). 더불어 아합의 아들 요람은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이스르엘로 돌아왔던(왕하 8:29) 것으로 보아 왕궁은 상당히 견고한 요새였을 것이다. 예후가 요람을 멸하러 올 때 파수꾼 하나가 이스르엘 성의 망대에서 예후가 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왕하 9:21). 이세벨은 예언대로 이스르엘 성의 창에서 떨어져 죽어 개들이 먹고 말았다. 이때 이세벨이 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은 다시 요새화된 높은 성을 연상케 한다. 예후는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의 아들들과 귀족들에게 이스르엘 성으로 올 것을 명령했고 그들 모두를 죽였다.
1987년 아랍어로도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남겨져 있었던 지린이라 불리는 유적지 근처에서 건물을 짓기 위해 불도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불도저의 삽이 들어 올린 흙 속에는 고대 유물들과 건축에 사용된 벽돌들이 함께 있었다. 결국 구조 발굴이 시작되고 1990∼1996년 텔아비브 대학교의 우시쉬킨(D. Ussishkin) 교수와 영국 고고학자 우드헤드(J. Woodhead)의 지휘 아래 대대적 발굴이 시행됐다. 이 발굴을 통해 이스르엘에서는 주전 9세기 즉 아합의 시대 때 건설된 거대한 요새가 발견됐다. 289×157m의 직사각형 궁전은 모나게 잘 다듬은 돌을 쌓아 기초를 만들어 건축한 성벽을 가지고 있었다. 성벽의 각 모서리에는 망대가 있었고 성벽을 둘러 폭 8∼12m, 깊이 6.5m의 해자가 파져 있었다. 해자는 성벽을 둘러 웅덩이를 파 주로 물을 붓고 악어 같은 짐승을 풀어 놓아 적들이 성벽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방어용 구조를 말한다. 망대와 해자를 통해 이 성이 상당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세벨이 서서 예후가 오는 것을 내려다보았던 창은 아마도 사마리아에서 같은 시대 조각된 상아 여인상의 모습과 같을 것이다. 특히 여인의 얼굴 아래 보이는 창문 난간 장식은 당시 이 지역에 유행하던 난간 조각과 같다. 그러나 9세기 말 예후의 시대에 아람왕 하사엘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공격에서 이스르엘은 살아남지 못했다. 이스르엘은 산산이 부서졌고 더 이상 도시도 성도 건설되지 않은 채 버려진 언덕이 됐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이스라엘의 곡창지대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이스라엘의 곡창지대는 북쪽에 위치한 이스르엘 골짜기이다. 성서에서도 아합이 탐냈던 나봇의 포도원이 이스르엘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었다(왕상 21:1). 지형학에 따르면 이스르엘 골짜기는 약 200만년 전 지중해와 요단계곡 사이에 형성된 꽤 넓은 지역을 일컫는다. 북쪽으로는 갈릴리와 남쪽으로는 사마리아 산지를 경계로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요단 계곡과 접해 있으며 서쪽에는 갈멜산이 있다.
이스르엘 골짜기는 주전 4500∼3300년쯤의 유물도 발견될 정도로 오래전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던 장소다. 골짜기에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이스르엘로 불렸던 도시가 있었기 때문인데 아마 도시를 건설한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을 것이다.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신이 밭을 갈다”라는 뜻으로 골짜기의 풍요로움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 골짜기 안의 주요 도시에는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므깃도, 이스르엘, 벧산 등이 있다.
이스라엘의 전쟁터
이스라엘의 산지 형세는 도보와 우마차로 이동하는데 쉽지 않은 길을 제공했다. 특히 북쪽으로 원정을 나가는 이집트의 병거들에게 이스라엘의 산지는 최악의 통로였다. 그에 비해 이스르엘 골짜기는 골짜기라고 기록돼 있지만 지형은 평지다. 덕분에 이곳은 지중해에서 요단강까지 다시 남쪽에서 북쪽의 메소포타미아로 연결되는 내륙을 연결하는 쉬운 이동경로가 됐다. 산지들로 둘러싸인 넓은 평지는 붉은 테라로사 흙이 가득하여 녹색의 물결을 자랑하지만 무엇보다 지중해 연안과 고대 근동의 무역상들이 모여들었던 중심지였다. 도로 상황이 좋고 넓은 지역을 제공하는 골짜기의 조건은 또한 전쟁터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스르엘은 이미 주전 14세기에 기록된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도시가 형성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호수아 17장 16절에서 요셉 자손이 이 지역을 배분받자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고 할 정도로 막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사기 속의 전쟁들이 자주 이 골짜기에서 벌어졌는데 동쪽에 위치한 다볼산 아래에 드보라와 바락의 군대는 하솔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대항하기 위해 진을 쳤다. 여호와는 하로셋학고임에서 시스라와 그 군대를 전멸시켰다(삿 4장). 사사기에서 가장 많은 설교의 예화가 되는 기드온의 전쟁 역시 이 골짜기와 관련이 있다. 사사기 6장은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괴롭히자 이스르엘 골짜기 오므라 출신의 기드온이 사사로 선택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미디안은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을 함께 모아 요단강을 건너와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다(삿 6:33). 기드온이 이스르엘 골짜기의 유명한 하롯 샘에 이스라엘과 진을 쳤고 이 샘의 물을 어떻게 먹는가를 보고 300명의 용사를 선택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삿 7장).
지난 호에서 벧산과 관련하여 등장했던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블레셋과의 전쟁 중 전사한 곳도 이스르엘 골짜기의 남동쪽에 위치한 길보아 산이었다.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다윗은 길보아 산에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을 것이며 밭에 산물이 없을 것이라고 저주하는데(삼하 1:21) 이스르엘 골짜기의 풍요로움을 기억한다면 그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이스르엘 성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스르엘 골짜기는 이스르엘 도시의 이름을 따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스르엘이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장소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다윗의 아내 중 아히노암이 이스르엘 출신이라는 것이다(삼상 25:43). 이스르엘이 곡창지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를 차지하는 것은 꽤 중요했을 것이다. 다윗은 이스르엘 출신의 여인과 혼인함으로써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면서 곡물의 후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중요성은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았을 때 온 이스라엘을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이라고 말하게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면서 이스르엘은 북왕국 이스라엘 땅이 됐다. 이스르엘을 무엇보다 유명하게 한 것은 아합이 욕심이 나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왕상 21장). 결국 항상 악녀로 등장하는 이세벨은 나봇을 돌에 맞아 죽게 하고 포도원을 아합에게 안겨줬다. 하지만 선지자 엘리야는 이세벨에게 그녀의 시체를 이스르엘의 개들이 먹게 되리라는 저주를 선포했다.
성서는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 가까이 왕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왕상 21:1). 더불어 아합의 아들 요람은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이스르엘로 돌아왔던(왕하 8:29) 것으로 보아 왕궁은 상당히 견고한 요새였을 것이다. 예후가 요람을 멸하러 올 때 파수꾼 하나가 이스르엘 성의 망대에서 예후가 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왕하 9:21). 이세벨은 예언대로 이스르엘 성의 창에서 떨어져 죽어 개들이 먹고 말았다. 이때 이세벨이 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은 다시 요새화된 높은 성을 연상케 한다. 예후는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의 아들들과 귀족들에게 이스르엘 성으로 올 것을 명령했고 그들 모두를 죽였다.
1987년 아랍어로도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남겨져 있었던 지린이라 불리는 유적지 근처에서 건물을 짓기 위해 불도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불도저의 삽이 들어 올린 흙 속에는 고대 유물들과 건축에 사용된 벽돌들이 함께 있었다. 결국 구조 발굴이 시작되고 1990∼1996년 텔아비브 대학교의 우시쉬킨(D. Ussishkin) 교수와 영국 고고학자 우드헤드(J. Woodhead)의 지휘 아래 대대적 발굴이 시행됐다. 이 발굴을 통해 이스르엘에서는 주전 9세기 즉 아합의 시대 때 건설된 거대한 요새가 발견됐다. 289×157m의 직사각형 궁전은 모나게 잘 다듬은 돌을 쌓아 기초를 만들어 건축한 성벽을 가지고 있었다. 성벽의 각 모서리에는 망대가 있었고 성벽을 둘러 폭 8∼12m, 깊이 6.5m의 해자가 파져 있었다. 해자는 성벽을 둘러 웅덩이를 파 주로 물을 붓고 악어 같은 짐승을 풀어 놓아 적들이 성벽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방어용 구조를 말한다. 망대와 해자를 통해 이 성이 상당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세벨이 서서 예후가 오는 것을 내려다보았던 창은 아마도 사마리아에서 같은 시대 조각된 상아 여인상의 모습과 같을 것이다. 특히 여인의 얼굴 아래 보이는 창문 난간 장식은 당시 이 지역에 유행하던 난간 조각과 같다. 그러나 9세기 말 예후의 시대에 아람왕 하사엘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공격에서 이스르엘은 살아남지 못했다. 이스르엘은 산산이 부서졌고 더 이상 도시도 성도 건설되지 않은 채 버려진 언덕이 됐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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