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벧산/벧스안 ②
주전 63년 이후 갈릴리·요단강 주변서 최대 로마도시로
솔로몬의 도시
블레셋 사람들은 길보아산에서 전투 중에 사망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았다. 이를 보고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그들의 시체를 가져와 불사르고 장사 지내주었다. 이 사건 이후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에게 치욕을 안겨준 벧산을 정복한 것으로 보인다. 주전 10세기 벧산은 대화재로 인한 파괴의 흔적이 목격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파괴의 근원이 다윗이라고 보고 있다. 다윗의 정복으로 솔로몬은 벧산을 자신의 행정구역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왕상 4:12). 이 시기에 벧산에는 행정건물들이 세워졌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르호보암 시대에 남과 북으로 분열되면서 벧산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었다. 이후에도 도시는 갈릴리 지역의 행정 중심도시의 역할을 했다. 주전 732년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III에 의해서 도시는 파괴되었으며 더 이상 중심도시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데가볼리의 중심 - 스키토볼리
벧산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주전 3세기 헬라시대부터였다. 이제 벧산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았다. 도시의 이름은 스키토볼리로 이란을 근원지로 하여 용병 생활을 했던 스키티아인들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헬라시대 이후 이 도시에는 주로 스키티아인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스키토볼리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세운 도시로 그의 유모 니사가 묻힌 곳이다. 한때 이 도시는 니사-스키토볼리라고도 불렸다.
스키토볼리는 이제 세계사에 등장하는 도시가 되었다. 주전 3∼2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들이었던 프톨레미와 셀루시드는 알렉산더의 정복지를 소유하고자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스키토볼리의 지리적·경제적 입지는 두 장군의 접전지로 기록되었고 결국 셀루시드 왕조의 차지가 되었다. 도시는 확장되어 북쪽의 이츠타바 언덕(Tel Iztaba)까지 뻗어나갔고 성벽과 집들이 세워졌다. 벽들은 프레스코로 뒤덮였고 때론 1m나 되는 긴 돌을 쌓아 기초를 다진 벽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헬라도시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고 주전 2세기 말 대화재로 파괴되고 말았다. 두텁게 쌓여 있는 재 속에서 로데스를 비롯한 그리스 본토에서 수입된 수없이 많은 그을린 그릇들이 발견되었다. 화재를 일으킨 주인공은 유대인들이었다. 헬라문명에 저항했던 마카비를 중심으로 한 반란 때 유대의 대제사장 요나단은 이곳에서 저항하다가 드미트리우스 II세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유대인들은 도시를 차지했고 셀루시드의 통치에서 독립할 수 있었다.
팍스 로마나
주전 63년 이후 도시는 더 이상 언덕(tel) 위에 머무르지 않았다. 로마의 폼페이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스키토볼리는 갈릴리와 요단강 주변 10개의 헬라화된 연합도시인 데가볼리 중 가장 큰 로마의 도시가 되었다. 도시는 언덕을 내려와 남서쪽 방향에 카르도라 불리는 로마식의 도로를 펼치고 평지에 자리를 잡았다. 주후 2세기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불리는데 로마의 평화 혹은 지중해 주변지역을 로마가 정복함으로 로마의 통치권 아래 평정을 이룬 시기이다. 덕분에 경제는 번영했고 보안은 잘됐으며 로마의 도시들은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가득할 수 있었다. 스키토볼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드리안 황제 이후 도시의 확장과 더불어 거대하고 정교하게 장식한 건물들이 세워졌다. 스키토볼리로 들어가는 정문은 벧산의 별명이 에덴동산 입구라는 것을 상기라도 시켜주듯 도시를 주변지역과 구별시켜주는 석문이 우뚝 서 있었다.
석문을 통과하면 기둥들이 늘어선 도로와 마주했다. 도로의 폭만 24m나 되었으며 양쪽으로 서 있는 기둥들은 로마의 기둥들과 마찬가지로 홈이 파져 있고 기둥머리는 고린도 양식과 이오닉 양식 즉 식물과 꽃, 기하학적인 무늬들로 조각되었다. 도로들은 각각 도로의 건설을 후원한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스키토볼리를 발굴한 발굴자들은 각 도로의 이름을 이 후원자들의 이름으로 불렀다. 특별히 도시의 남북을 가르는 실바누스 도로의 경우 56m의 도로로 입구에는 7m 높이의 기둥이 있다. 실바누스 도로와 연결된 하롯샘으로 향하는 밸리 도로의 경우는 150m의 길이가 드러났다. 도로의 양 측면에는 디오니소스와 니사를 위한 신전들과 바실리카 양식의 광장 그리고 마치 현대의 분수대 같은 샘터와 목욕탕들이 늘어서 있었다. 도로는 이 지역의 가장 흔한 돌인 검은 현무암으로 포장되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공공건물들은 흰색의 석회석으로 건축되었다. 어떤 건물은 대리석으로도 장식이 되어 있어 이 도시가 얼마나 부유하였는가를 상상케 한다. 도로 주변에 있는 인상적인 건축물 중 하나는 이오닉 기둥머리의 기둥들로 이루어진 바실리카 양식의 70×30m의 광장으로 도시의 경제적 활동을 책임졌던 시장으로 사용되었다. 공공건물들에서 발견되는 비문들은 이 건물들이 로마 정부와 귀족들의 후원으로 지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시대의 고대 언덕은 이제 도시를 지키는 수호신을 섬기는 신전이 서 있는 성스러운 구역이 되었다. 언덕 꼭대기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신전은 제우스를 위한 신전이었다. 스키토볼리의 번영은 수많은 인구를 먹일 수자원을 필요로 했다. 로마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였는데 7㎞ 떨어진 길보아산의 샘물을 아취형의 수로로 흐르게 했다. 이 수로에서 끌어들인 물은 실바누스 도로 곁의 샘터로 도착했다. 로마의 문화적 특징 중 하나인 목욕탕을 채운 것도 이 물일 것이다. 도시의 서쪽에서 발견된 가장 큰 목욕탕은 그 크기만 해도 100×90m에 달한다. 스키토볼리에서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제우스 신전을 향해 입구를 두고 서 있는 지름 110m의 극장으로 7000명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었다. 스키토볼리에서는 현재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원형극장 중 가장 잘 보존된 케이스가 발견되기도 했다. 타원형으로 생긴 극장은 102×72m의 크기로 5000∼7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전체 10∼12줄의 관람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앞의 3줄만이 보존되었으며 북쪽에 높은 지위의 인물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좌석 아래는 82×47m의 타원형의 공간이 3.2m 높이의 벽으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이 안에서 짐승들이나 글라디에이터들이 싸우는 경기가 이루어졌고 관람석의 사람들은 이 잔인한 경기에 환호하곤 했다.
스키토볼리의 로마 도시는 주후 363년 갈릴리 지역을 강타한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주후 409년 팔레스타나 세쿤다(Palestina Secunda)라 불렸던 갈릴리와 이즈르엘 골짜기의 수도가 되면서 인구는 더욱 증가했고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진에 무너진 건물들은 보수되었고 도시는 다시금 화려함을 입을 수 있었다. 이전의 도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로마가 기독교화되면서 스키토볼리의 로마신전들은 오히려 파괴되었다. 언덕에 있던 제우스 신전은 이제 교회로 대치되었다. 도시의 인구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고 도로를 따라 교회들이 들어섰다. 교회들의 틈바구니 속에 작게나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회당들도 함께 지어졌다. 도시의 인구는 4만명에 달했고 도시를 둘러 2.5m 두께의 성벽이 세워졌다.
스키토볼리는 결국 주후 7세기 무슬림들의 침략에 의해 베이산(Beisa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작은 도시로 전락했지만 기독교인들은 건재했다. 그러나 주후 749년의 강진으로 인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솔로몬의 도시
블레셋 사람들은 길보아산에서 전투 중에 사망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았다. 이를 보고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그들의 시체를 가져와 불사르고 장사 지내주었다. 이 사건 이후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에게 치욕을 안겨준 벧산을 정복한 것으로 보인다. 주전 10세기 벧산은 대화재로 인한 파괴의 흔적이 목격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파괴의 근원이 다윗이라고 보고 있다. 다윗의 정복으로 솔로몬은 벧산을 자신의 행정구역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왕상 4:12). 이 시기에 벧산에는 행정건물들이 세워졌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르호보암 시대에 남과 북으로 분열되면서 벧산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었다. 이후에도 도시는 갈릴리 지역의 행정 중심도시의 역할을 했다. 주전 732년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III에 의해서 도시는 파괴되었으며 더 이상 중심도시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데가볼리의 중심 - 스키토볼리
벧산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주전 3세기 헬라시대부터였다. 이제 벧산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았다. 도시의 이름은 스키토볼리로 이란을 근원지로 하여 용병 생활을 했던 스키티아인들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헬라시대 이후 이 도시에는 주로 스키티아인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스키토볼리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세운 도시로 그의 유모 니사가 묻힌 곳이다. 한때 이 도시는 니사-스키토볼리라고도 불렸다.
스키토볼리는 이제 세계사에 등장하는 도시가 되었다. 주전 3∼2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들이었던 프톨레미와 셀루시드는 알렉산더의 정복지를 소유하고자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스키토볼리의 지리적·경제적 입지는 두 장군의 접전지로 기록되었고 결국 셀루시드 왕조의 차지가 되었다. 도시는 확장되어 북쪽의 이츠타바 언덕(Tel Iztaba)까지 뻗어나갔고 성벽과 집들이 세워졌다. 벽들은 프레스코로 뒤덮였고 때론 1m나 되는 긴 돌을 쌓아 기초를 다진 벽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헬라도시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고 주전 2세기 말 대화재로 파괴되고 말았다. 두텁게 쌓여 있는 재 속에서 로데스를 비롯한 그리스 본토에서 수입된 수없이 많은 그을린 그릇들이 발견되었다. 화재를 일으킨 주인공은 유대인들이었다. 헬라문명에 저항했던 마카비를 중심으로 한 반란 때 유대의 대제사장 요나단은 이곳에서 저항하다가 드미트리우스 II세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유대인들은 도시를 차지했고 셀루시드의 통치에서 독립할 수 있었다.
팍스 로마나
주전 63년 이후 도시는 더 이상 언덕(tel) 위에 머무르지 않았다. 로마의 폼페이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스키토볼리는 갈릴리와 요단강 주변 10개의 헬라화된 연합도시인 데가볼리 중 가장 큰 로마의 도시가 되었다. 도시는 언덕을 내려와 남서쪽 방향에 카르도라 불리는 로마식의 도로를 펼치고 평지에 자리를 잡았다. 주후 2세기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불리는데 로마의 평화 혹은 지중해 주변지역을 로마가 정복함으로 로마의 통치권 아래 평정을 이룬 시기이다. 덕분에 경제는 번영했고 보안은 잘됐으며 로마의 도시들은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가득할 수 있었다. 스키토볼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드리안 황제 이후 도시의 확장과 더불어 거대하고 정교하게 장식한 건물들이 세워졌다. 스키토볼리로 들어가는 정문은 벧산의 별명이 에덴동산 입구라는 것을 상기라도 시켜주듯 도시를 주변지역과 구별시켜주는 석문이 우뚝 서 있었다.
석문을 통과하면 기둥들이 늘어선 도로와 마주했다. 도로의 폭만 24m나 되었으며 양쪽으로 서 있는 기둥들은 로마의 기둥들과 마찬가지로 홈이 파져 있고 기둥머리는 고린도 양식과 이오닉 양식 즉 식물과 꽃, 기하학적인 무늬들로 조각되었다. 도로들은 각각 도로의 건설을 후원한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스키토볼리를 발굴한 발굴자들은 각 도로의 이름을 이 후원자들의 이름으로 불렀다. 특별히 도시의 남북을 가르는 실바누스 도로의 경우 56m의 도로로 입구에는 7m 높이의 기둥이 있다. 실바누스 도로와 연결된 하롯샘으로 향하는 밸리 도로의 경우는 150m의 길이가 드러났다. 도로의 양 측면에는 디오니소스와 니사를 위한 신전들과 바실리카 양식의 광장 그리고 마치 현대의 분수대 같은 샘터와 목욕탕들이 늘어서 있었다. 도로는 이 지역의 가장 흔한 돌인 검은 현무암으로 포장되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공공건물들은 흰색의 석회석으로 건축되었다. 어떤 건물은 대리석으로도 장식이 되어 있어 이 도시가 얼마나 부유하였는가를 상상케 한다. 도로 주변에 있는 인상적인 건축물 중 하나는 이오닉 기둥머리의 기둥들로 이루어진 바실리카 양식의 70×30m의 광장으로 도시의 경제적 활동을 책임졌던 시장으로 사용되었다. 공공건물들에서 발견되는 비문들은 이 건물들이 로마 정부와 귀족들의 후원으로 지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시대의 고대 언덕은 이제 도시를 지키는 수호신을 섬기는 신전이 서 있는 성스러운 구역이 되었다. 언덕 꼭대기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신전은 제우스를 위한 신전이었다. 스키토볼리의 번영은 수많은 인구를 먹일 수자원을 필요로 했다. 로마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였는데 7㎞ 떨어진 길보아산의 샘물을 아취형의 수로로 흐르게 했다. 이 수로에서 끌어들인 물은 실바누스 도로 곁의 샘터로 도착했다. 로마의 문화적 특징 중 하나인 목욕탕을 채운 것도 이 물일 것이다. 도시의 서쪽에서 발견된 가장 큰 목욕탕은 그 크기만 해도 100×90m에 달한다. 스키토볼리에서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제우스 신전을 향해 입구를 두고 서 있는 지름 110m의 극장으로 7000명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었다. 스키토볼리에서는 현재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원형극장 중 가장 잘 보존된 케이스가 발견되기도 했다. 타원형으로 생긴 극장은 102×72m의 크기로 5000∼7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전체 10∼12줄의 관람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앞의 3줄만이 보존되었으며 북쪽에 높은 지위의 인물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좌석 아래는 82×47m의 타원형의 공간이 3.2m 높이의 벽으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이 안에서 짐승들이나 글라디에이터들이 싸우는 경기가 이루어졌고 관람석의 사람들은 이 잔인한 경기에 환호하곤 했다.
스키토볼리의 로마 도시는 주후 363년 갈릴리 지역을 강타한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주후 409년 팔레스타나 세쿤다(Palestina Secunda)라 불렸던 갈릴리와 이즈르엘 골짜기의 수도가 되면서 인구는 더욱 증가했고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진에 무너진 건물들은 보수되었고 도시는 다시금 화려함을 입을 수 있었다. 이전의 도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로마가 기독교화되면서 스키토볼리의 로마신전들은 오히려 파괴되었다. 언덕에 있던 제우스 신전은 이제 교회로 대치되었다. 도시의 인구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고 도로를 따라 교회들이 들어섰다. 교회들의 틈바구니 속에 작게나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회당들도 함께 지어졌다. 도시의 인구는 4만명에 달했고 도시를 둘러 2.5m 두께의 성벽이 세워졌다.
스키토볼리는 결국 주후 7세기 무슬림들의 침략에 의해 베이산(Beisa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작은 도시로 전락했지만 기독교인들은 건재했다. 그러나 주후 749년의 강진으로 인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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