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베이트 셰아림과 찌포리
랍비 유다 하나시가 두 도시 오가며 탈무드 ‘미쉬나’ 완성
구전된 율법이 문서화되다.
탈무드는 랍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대인 사회구조에서 구약의 모세오경 다음으로 중요한 유대교 문헌이다. 총 63개의 수필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었는데 유대교의 선생인 랍비들이 율법, 철학, 역사, 관습, 도덕 등에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탈무드는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주후 200년경 유대교의 구전된 율법을 처음으로 문서화한 미쉬나이며 또 다른 하나는 주후 500년경 기록된 모세오경과 미쉬나의 주석과 설명을 덧붙인 게마라가 있다.
그중 미쉬나는 이스라엘과 유대교 역사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헌이다. 미쉬나의 다른 이름은 샤스(shas-sisha sedarim 6개의 명령)로 구전으로 내려오는 집대성된 유대교 율법이다. 랍비들의 가르침이나 성서에 대한 해석들 그리고 유대교 율법들은 모두 구전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을 문서화함으로써 그들의 종교와 정신 민족을 보존해야만 했다. 주후 220년경 랍비 유다 하나시는 갈릴리 주변 베이트 셰아림과 찌포리, 디베랴를 중심으로 이 구전물들을 편집해 미쉬나를 완성했다. 물론 이 도시들은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도시로 기독교와는 더욱 관련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탈무드를 통해 성서에 기록되지 않았던 유대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으며 성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고 있기에 이 흥미로운 유적지들을 여기서 살펴보고자 한다.
베이트 셰아림 - 유대 공동묘지
1880년대 베이트 셰아림에 이미 고대 유대인들의 공동묘지가 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이트 셰아림에서 본격적으로 발굴이 실행된 것은 1930년대와 1950년대로 이스라엘 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는 벤자민 마잘과 나하만 아비가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두 개의 문들을 가진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이트 셰아림은 요세푸스에 의하면 헬라어로 베사라라 불렸다. 도시는 주전 1세기경 건설되었으며 주로 유대인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다가 주후 352년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화재로 타 버린 도시이다.
유적지의 가장 큰 특징은 유대인 공동묘지의 발견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유대의 최고 법원인 산헤드린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도시는 번성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주후 220년 산헤드린의 최고 수장이었던 랍비 유다 하나시는 이곳에 살면서 미쉬나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찌포리로 이동했지만 그는 죽어서는 꼭 베이트 셰아림에 묻히길 바랐다. 그의 장례식이 있었을 때 18개의 다른 회당들에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트 셰아림에 왔다가 집에 돌아갈 때까지 해가 저물지 않는 기적이 있었다고 탈무드에 기록돼 있다. 실제로 14번 무덤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어 이 유명한 랍비의 무덤이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 주변에 무덤을 갖게 되는 것은 최고의 자랑이요 희망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베이트 셰아림을 자신들의 공동묘지로 삼았는데 멀리 두로와 파말라에서 온 사람들의 무덤도 발견됐다. 이곳에서는 바위를 깎아 커다란 방을 지하에 만든 무덤들이 30여개 발견됐다.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비문들도 눈에 띄지만 화려한 장식이 조각된 석관들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베이트 셰아림의 공동묘지는 2002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됐다.
찌포리
나자렛에서 북서쪽으로 4km 떨어져 있는 찌포리는 헬라화된 로마 도시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부모의 고향이라는 전통도 있으며 목수였던 요셉이 주로 일감을 가져왔던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 역시 물건을 살 때는 찌포리에 방문하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주전 7세기 앗수르의 북왕국 이스라엘 점령 이후 처음 도시가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찌포리는 앗수르는 물론 헬라시대까지 갈릴리 북부 지역의 주요 행정도시의 역할을 하였다. 이곳은 한때 하스모니아 왕조의 도시였지만 주전 37년 헤롯 대왕은 눈보라를 뚫고 도시를 점령하여 로마에 바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헤롯이 죽고 나서 찌포리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항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부족했고 도시는 전멸했으며 거주민들은 대부분 노예로 팔려갔다. 로마군은 찌포리에서 사마리아까지 잇는 로마 도로를 건설하고 새로이 왕이 된 헤롯 안티파스는 도시를 ‘갈릴리의 보석(Autocratis)’이라고 부르면서 로마 도시로 번성해 나갔다.
이 도시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켰던 주후 66∼70년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렇다고 해서 찌포리가 완전히 로마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주조된 동전은 로마 도시들의 동전에 등장하는 사람의 얼굴이나 신, 동물들의 모습의 아닌 넝쿨이나 종려나무, 보리 같은 식물을 담고 있어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유대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더불어 주후 132∼135년 일어난 바르 코크바 혁명이 실패한 후 유대인들이 대거 이곳에 몰려오면서 찌포리는 갈릴리 지역 유대인들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미쉬나를 편집한 랍비 유다 하나시 역시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이곳에는 유대인의 탈무드 학교인 예쉬바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주후 363년 갈릴리 지역의 지진으로 인해 잠시 파괴되기는 했지만 찌포리는 갈릴리의 중심지로서 유대인과 로마인 심지어 기독교인까지 평화롭게 함께 어울려 사는 도시가 되었다.
찌포리의 부유함은 ‘갈릴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모자이크가 발견된 로마 빌라에서 목격된다. 주후 200년경 세워진 이 빌라는 바닥에 화려한 모자이크가 깔려 있고 U자 형태로 사람들이 둘러앉아 포도주를 마시면서 모자이크를 감상하고 연회를 즐길 수 있는 홀이 마련되어 있는 건물이었다. 주후 363년 지진에 의해 무너진 건물은 이후 더 이상 사용이 안 되면서 상당 부분의 모자이크가 보존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복구된 모자이크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바친 것으로 디오니소스와 목동의 신 판, 영웅 헬라클레스 등이 어울려 연회를 즐기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갈릴리의 모나리자는 이 모자이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젊고 혈색이 좋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미의 여신 비너스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찌포리에서는 유대인들의 흔적 또한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자갈돌로 포장된 도로위에는 아이들이 남겨 놓은 것 같은 낙서들이 발견되었다. 낙서 중에는 고대 게임을 위한 밑그림이 있기도 했지만 성전 안에 있었던 여섯 가지 촛대를 그린 것도 있었다. 제사를 드리기 전에 혹은 안식일 전에 몸을 씻는 관습을 행했던 ‘미크베’라 불리는 유대인들의 독특한 정결례탕도 발견되었다. 더불어 주후 5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회당의 바닥에도 로마 건물들처럼 모자이크 장식이 있었는데 성전에서의 제사 모습이라든가 제사용 도구들, 성서 이야기들도 보이지만 중앙을 장식하고 있는 태양수레를 타고 가는 헬리오스와 황동 십이궁도(조디악)는 유대교가 점차 로마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찌포리에서 기독교의 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유대교의 위상은 점점 작아졌고 회당 역시 도시 언저리에 위치해 있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구전된 율법이 문서화되다.
탈무드는 랍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대인 사회구조에서 구약의 모세오경 다음으로 중요한 유대교 문헌이다. 총 63개의 수필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었는데 유대교의 선생인 랍비들이 율법, 철학, 역사, 관습, 도덕 등에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탈무드는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주후 200년경 유대교의 구전된 율법을 처음으로 문서화한 미쉬나이며 또 다른 하나는 주후 500년경 기록된 모세오경과 미쉬나의 주석과 설명을 덧붙인 게마라가 있다.
그중 미쉬나는 이스라엘과 유대교 역사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헌이다. 미쉬나의 다른 이름은 샤스(shas-sisha sedarim 6개의 명령)로 구전으로 내려오는 집대성된 유대교 율법이다. 랍비들의 가르침이나 성서에 대한 해석들 그리고 유대교 율법들은 모두 구전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을 문서화함으로써 그들의 종교와 정신 민족을 보존해야만 했다. 주후 220년경 랍비 유다 하나시는 갈릴리 주변 베이트 셰아림과 찌포리, 디베랴를 중심으로 이 구전물들을 편집해 미쉬나를 완성했다. 물론 이 도시들은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도시로 기독교와는 더욱 관련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탈무드를 통해 성서에 기록되지 않았던 유대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으며 성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고 있기에 이 흥미로운 유적지들을 여기서 살펴보고자 한다.
베이트 셰아림 - 유대 공동묘지
1880년대 베이트 셰아림에 이미 고대 유대인들의 공동묘지가 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이트 셰아림에서 본격적으로 발굴이 실행된 것은 1930년대와 1950년대로 이스라엘 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는 벤자민 마잘과 나하만 아비가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두 개의 문들을 가진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이트 셰아림은 요세푸스에 의하면 헬라어로 베사라라 불렸다. 도시는 주전 1세기경 건설되었으며 주로 유대인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다가 주후 352년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화재로 타 버린 도시이다.
유적지의 가장 큰 특징은 유대인 공동묘지의 발견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유대의 최고 법원인 산헤드린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도시는 번성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주후 220년 산헤드린의 최고 수장이었던 랍비 유다 하나시는 이곳에 살면서 미쉬나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찌포리로 이동했지만 그는 죽어서는 꼭 베이트 셰아림에 묻히길 바랐다. 그의 장례식이 있었을 때 18개의 다른 회당들에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트 셰아림에 왔다가 집에 돌아갈 때까지 해가 저물지 않는 기적이 있었다고 탈무드에 기록돼 있다. 실제로 14번 무덤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어 이 유명한 랍비의 무덤이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 주변에 무덤을 갖게 되는 것은 최고의 자랑이요 희망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베이트 셰아림을 자신들의 공동묘지로 삼았는데 멀리 두로와 파말라에서 온 사람들의 무덤도 발견됐다. 이곳에서는 바위를 깎아 커다란 방을 지하에 만든 무덤들이 30여개 발견됐다.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비문들도 눈에 띄지만 화려한 장식이 조각된 석관들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베이트 셰아림의 공동묘지는 2002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됐다.
찌포리
나자렛에서 북서쪽으로 4km 떨어져 있는 찌포리는 헬라화된 로마 도시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부모의 고향이라는 전통도 있으며 목수였던 요셉이 주로 일감을 가져왔던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 역시 물건을 살 때는 찌포리에 방문하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주전 7세기 앗수르의 북왕국 이스라엘 점령 이후 처음 도시가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찌포리는 앗수르는 물론 헬라시대까지 갈릴리 북부 지역의 주요 행정도시의 역할을 하였다. 이곳은 한때 하스모니아 왕조의 도시였지만 주전 37년 헤롯 대왕은 눈보라를 뚫고 도시를 점령하여 로마에 바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헤롯이 죽고 나서 찌포리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항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부족했고 도시는 전멸했으며 거주민들은 대부분 노예로 팔려갔다. 로마군은 찌포리에서 사마리아까지 잇는 로마 도로를 건설하고 새로이 왕이 된 헤롯 안티파스는 도시를 ‘갈릴리의 보석(Autocratis)’이라고 부르면서 로마 도시로 번성해 나갔다.
이 도시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켰던 주후 66∼70년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렇다고 해서 찌포리가 완전히 로마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주조된 동전은 로마 도시들의 동전에 등장하는 사람의 얼굴이나 신, 동물들의 모습의 아닌 넝쿨이나 종려나무, 보리 같은 식물을 담고 있어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유대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더불어 주후 132∼135년 일어난 바르 코크바 혁명이 실패한 후 유대인들이 대거 이곳에 몰려오면서 찌포리는 갈릴리 지역 유대인들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미쉬나를 편집한 랍비 유다 하나시 역시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이곳에는 유대인의 탈무드 학교인 예쉬바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주후 363년 갈릴리 지역의 지진으로 인해 잠시 파괴되기는 했지만 찌포리는 갈릴리의 중심지로서 유대인과 로마인 심지어 기독교인까지 평화롭게 함께 어울려 사는 도시가 되었다.
찌포리의 부유함은 ‘갈릴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모자이크가 발견된 로마 빌라에서 목격된다. 주후 200년경 세워진 이 빌라는 바닥에 화려한 모자이크가 깔려 있고 U자 형태로 사람들이 둘러앉아 포도주를 마시면서 모자이크를 감상하고 연회를 즐길 수 있는 홀이 마련되어 있는 건물이었다. 주후 363년 지진에 의해 무너진 건물은 이후 더 이상 사용이 안 되면서 상당 부분의 모자이크가 보존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복구된 모자이크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바친 것으로 디오니소스와 목동의 신 판, 영웅 헬라클레스 등이 어울려 연회를 즐기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갈릴리의 모나리자는 이 모자이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젊고 혈색이 좋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미의 여신 비너스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찌포리에서는 유대인들의 흔적 또한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자갈돌로 포장된 도로위에는 아이들이 남겨 놓은 것 같은 낙서들이 발견되었다. 낙서 중에는 고대 게임을 위한 밑그림이 있기도 했지만 성전 안에 있었던 여섯 가지 촛대를 그린 것도 있었다. 제사를 드리기 전에 혹은 안식일 전에 몸을 씻는 관습을 행했던 ‘미크베’라 불리는 유대인들의 독특한 정결례탕도 발견되었다. 더불어 주후 5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회당의 바닥에도 로마 건물들처럼 모자이크 장식이 있었는데 성전에서의 제사 모습이라든가 제사용 도구들, 성서 이야기들도 보이지만 중앙을 장식하고 있는 태양수레를 타고 가는 헬리오스와 황동 십이궁도(조디악)는 유대교가 점차 로마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찌포리에서 기독교의 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유대교의 위상은 점점 작아졌고 회당 역시 도시 언저리에 위치해 있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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