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사철 풍요… ‘에덴동산 입구’라는 농담까지
사울이 세 아들과 함께 전사한 길보아산의 인근
에덴동산의 입구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순례객마다 이스라엘에 대한 감동이 다르다. 비가 전혀 오지 않는 건조한 여름에 방문한 사람과 비 내리는 싸늘한 예루살렘의 겨울을 경험한 사람은 이스라엘을 각각 다르게 묘사한다. 그러나 예외적인 유적지들도 있는데 특히 갈릴리 호수 남쪽으로 27㎞ 떨어져 있는 벧산에 대한 감동은 남다르다. 벧산은 이즈르엘 골짜기와 요단 골짜기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수자원이 풍부하며 나무가 우거진 숲과 풍요로운 농경지로 형성된 지역이다. 물론 여름과 겨울 모두 그 풍요로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약 이스라엘에 에덴동산의 입구가 있었다면 벧산이었을 것’이라는 농담까지 할 정도라면 이 도시가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운지 알 수 있다. 덕분에 벧산에는 주전 5000년께부터 끊임없이 사람이 살아오고 있다. 벧산은 또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길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해안에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데다 갈릴리 지방에 속했던 성서시대의 벧산은 주목받지 못한 도시였다.
벧산의 지리적 위치와 텔 엘-후슨(‘요새언덕’이라는 뜻)이라는 고대 유적지의 이름 덕에 이 도시에 대한 고고학적 관심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헬라시대 이후 이 도시는 스키토볼리스라고 불렸는데 지난번 거라사에 관한 글에서 다루었던 데가볼리의 중심도시였다. 1921∼1933년 피셔(C S Fisher)를 비롯한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 팀은 주로 언덕(Tel)을 중심으로 발굴해 주전 3000년께의 마을과 주전 2000년께 사용된 공동묘지를 발견했다. 피셔의 발굴을 통해 주전 5세기부터 주후 7세기까지 이 언덕에는 20개의 거주지 층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벧산에서의 발굴은 1980년대 히브리대학교의 발굴 이후 현재까지 계속돼 구약성서시대는 물론 로마-비잔틴 시대의 도시들까지 드러내고 있다.
이집트 행정 도시
벧산이 가나안 땅의 역사에 있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주전 15세기부터다.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에 의해 정복된 이후 벧산은 이즈르엘 골짜기의 므깃도와 함께 가나안 북부의 이집트 왕실 행정도시의 역할을 하였다. 벧산과 므깃도는 가나안 땅의 주요 도시로 이집트 18∼20왕조의 문서에 자주 등장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건물들도 대부분 이집트의 건축양식에 영향 받아 지어진 것으로 정부관료의 집과 곡식저장고, 신전 등이었다. 더불어 이집트 왕들의 조각상들도 함께 발견됐다.
신전들의 경우 숭배된 신은 가나안 신으로 신전 전체는 가나안의 구조물이지만 건축양식 곳곳에서 이집트의 요소들이 발견됐다. 주전 15세기 투트모세 3세 때 지어진 신전에서는 수많은 이집트의 제의용기들이 발견됐고 이집트 스타일의 의복을 입고 연회에 참석한 신을 조각한 상도 발견됐다. 이 조각상은 이집트의 서기관 파렘헵으로 그의 아버지 메엡을 위해 헌정한 것이지만 정작 조각에 나타난 신은 이집트 신이 아닌 가나안 신 메칼(혹은 몰렉)로 도시의 종교적 문화적 복합성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대에 진흙벽돌로 지어진 도시를 통치했던 관료의 저택은 23×22m의 거대한 건물이었다. 중앙에는 홀이 있었고 홀을 둘러싸고 4면에는 방들이 마련돼 있었다. 홀에는 지붕을 바치기 위해 두 나무 기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기둥의 돌 받침대가 발견됐다. 이 저택의 주변에서 다른 관료들의 거주지들도 발견됐는데 문설주를 비롯한 건축 요소들과 토기, 화려한 장신구들은 대부분 이집트의 것으로 벧산의 관료들이 이집트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이집트 왕 세티 1세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현무암 조각상의 경우 벧산을 비롯해 이집트에 대항한 가나안의 도시들이 어떻게 이집트에 의해 정복됐는지 기록하고 있다.
가나안/블레셋 도시
벧산에서 이집트의 통치는 주전 1150년께 대화재로 인한 파괴와 함께 끝이 났다. 블레셋을 포함한 에게 문명에서 온 해양민족들의 이집트 공격과 더불어 가나안에서의 정치적 판도의 변화는 이집트가 가나안에서 떠나가도록 만들었다. 이 시대 가나안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착과 더불어 정복전쟁이 있었다. 또한 블레셋 역시 지중해변을 중심으로 가나안 땅에 터전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벧산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여호수아 17장 1∼12절과 사사기 1장 27절은 “므낫세가 벧산/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여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도시들은 이즈르엘 골짜기에 위치한 유적지들로 주전 11∼10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물보다는 가나안이나 블레셋의 유물이 많이 나오는 장소들이다. 벧산 역시 이 시기에 가나안과 이집트의 남은 후예들 그리고 블레셋의 복합적인 문화양상이 드러났다. 일찍이 이집트의 신전이 있었던 곳에는 가나안의 신을 섬기는 신전이 들어섰고 이집트가 남겨놓은 조각상은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 재사용됐다.
성서에서 벧산이 다시 언급되는 곳은 사울이 길보아산에서 블레셋 민족과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는 사건이다(삼상 31:1∼1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즈르엘 골짜기에 있는 길보아산으로 도망하였다. 이때 사울과 그의 아들들 역시 전쟁에 참여하였고 사울은 활에 맞아 중상을 입은 후 칼로 자결하고 말았다.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사울의 세 아들(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역시 전사했다.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았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일 동안 금식하였다”(31:8∼13).
이 사건 이후 다윗은 벧산을 정복한 것으로 보인다. 벧산의 가나안 도시는 주전 10세기 초 화재와 함께 파괴됐으며 솔로몬의 행정구역을 나눌 때 이즈르엘의 주요 도시 중 벧산이 다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왕상 4;12).
◇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벧산/벧스안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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