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귀신 몰아낸 도시 거라사는 제라쉬? 쿠르시?
유대인이 살지 않는 도시
신약 시대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덕분에 이스라엘 땅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로마인들도 함께 거주했다. 문화적 관습이 전혀 달랐던 유대인과 로마인들은 각기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갖고 살았다. 당시 로마인들은 오늘날처럼 일요일 같은 휴일이 없었기 때문에 종교적 기념일 외에 매일 일을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매주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오후까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더불어 돼지고기라든가 비늘 없는 생선 등을 먹지 않는 독특한 음식 정결법은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하였다.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던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 즉 남동쪽에 위치한 지방으로 건너가신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는데 그에게는 군대처럼 많은 귀신이 있어 쇠고랑을 끊을 만큼 힘도 셌고 무덤과 산들을 다니며 소리를 질렀고 자기의 몸도 해쳤다. 그는 예수를 보자 달려와 절하며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부탁했다. 예수께서 귀신에게 그의 몸에서 나오라 명령하시자 그는 마침 산 곁에서 먹고 있는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도록 간구했다. 돼지에게로 들어간 귀신은 오히려 돼지 떼를 비탈로 달리게 하여 바다에 몰사시키고 말았다. 귀신 들렸던 사람은 이제 그가 어떻게 치료 받았는가를 데가볼리에서 전하는 이가 되었다.
데가볼리는 한 지역이 아니다. 갈릴리 호수 동편에 있던 10개 주요도시가 연합한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다메섹을 비롯한 스키토볼리스, 빌라델비아, 라바나, 히푸스, 디온, 펠라, 가나다, 거라사, 가다라 등이 있다. 데가볼리 지방은 주전 5세기 이후 형성된 헬라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돼지고기를 금기시했던 유대인들과는 달리 이 지역에서는 돼지를 기르고 먹었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불어 이 도시들 역시 이미 로마화되어 있었다.
이 사건의 장소가 어디였는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성서는 같은 사건을 다른 두 가지 장소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가다라(마 8:28), 또 다른 하나는 거라사(막 5:1; 눅 8:26)라고 부르고 있다. 가다라는 현재 갈릴리 호수 남동쪽 야르묵 골짜기에 위치한 하맛 가다라였다고 보며 거라사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북쪽으로 48㎞ 떨어져 있는 제라쉬라고 보고 있다. 특히 제라쉬 유적지는 오랫동안 성서 도시 거라사로 믿어지고 있다. 성서는 같은 사건을 왜 다른 장소로 제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은 없다. 다만 두 도시가 모두 데가볼리에 속해 있는 도시이기에 호수 건너편 돼지를 키우던 로마식 도시에서 이 사건이 일어났음은 분명하다.
거라사=제라쉬?
특히 거라사로 알려져 있는 요르단의 제라쉬는 거대한 로마 도시가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1806년 독일의 제첸(Seetzen)에 의해 발굴되기 시작한 이곳은 이미 주전 3200∼1200년 주거지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주전 63년 로마에 의해 정복된 이후 제라쉬는 헬라 문화권인 데가볼리 연합도시들과 함께 주후 90년 로마의 아라비아 구역에 포함되었다. 중동지역에서 발견된 로마 도시 중 가장 잘 보존된 제라쉬는 중동지역의 폼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주후 1세기 제라쉬는 상당히 부유했던 도시로 로마의 트라얀 황제에 의해 로마식 도로(cardo)가 놓이면서 이 지역의 경제적 중심도시가 되었다. 주후 129∼130년 사이 제라쉬를 방문한 하드리안 황제는 이곳에 방문기념 개선문을 세웠다. 세 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문의 중앙은 오직 지위가 높은 사람만이 지나갈 수 있었다. 12m 높이에 20∼40t의 무게가 나가는 거대한 기둥들로 이루어진 아르테미스 신전도 이 시대에 지어졌다. 만 명 이상 관람객이 앉을 수 있는 말경기장을 비롯하여 33줄의 돌 벤치에 3000명의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식 극장도 발견되었다. 특별히 이 극장의 의자에는 헬라어로 이름이 새겨져 있어 각 좌석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주후 2세기에 도시의 인구는 2만∼2만5000명에 이르렀고 80만㎡의 거대하고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이곳에는 주후 614년 페르시아의 침략 이전에 이미 많은 기독교인들이 거주했으며 더불어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으로 뒤덮인 13개의 교회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제라쉬는 페르시아의 침략이후 작은 도시로 전락되었고 주후 749년 지진으로 인해 주변 지역과 함께 사라졌다.
거라사=쿠르시?
데가볼리 도시인 요르단의 제라쉬에서 돼지 떼를 사육했다는 사실은 거라사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있다. 더불어 주후 4∼6세기 교회들의 발달과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흔적은 이곳이 거라사일 확률이 높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귀신들린 자가 들어간 돼지 떼는 비탈을 달려 내려가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 제라쉬는 지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갈릴리 호수 해변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학자들 중에는 거라사의 위치에도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 거라사가 아무리 부유했다 할지라도 2000마리의 돼지 떼가 한 곳에 몰려 있을 경제적 상업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 사건의 진위에 대해 의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 남동쪽 해안가에서 도로를 건설하던 건축가들은 쿠르시라 불리는 유적지에서 고대 건물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1971∼1974년 이스라엘 유물청의 바시리오스 자페리는 이 건물이 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수도원이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갈릴리의 고대 건축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수도원 건물 역시 현무암으로 지어졌다. 건물의 크기는 120x140m로 갈릴리 호수로 향하고 있는 입구에는 망대가 있었고 포장된 도로가 호수를 향하여 있었다. 아마도 이 도로의 끝에는 항구가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건물의 안에는 45x25m 크기의 교회가 있었는데 비잔틴 시대의 교회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바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는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상징하고 있다. 안뜰의 기둥들에는 동물이나 새, 꽃 등이 그려져 있다. 2001∼2002년에 시행된 발굴에 의해 수도원 주변에 있던 지하 통로와 방들도 발견되었다. 쿠르시의 수도원은 제라쉬를 강타했던 주후 749년의 지진 이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쿠르시 유적지의 위치를 볼 때 학자들은 이곳이 군대 귀신들린 사람과 돼지 떼의 사건에 더 적합하다고 본다. 쿠르시는 가버나움에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 남동쪽으로 가야 도착할 수 있어 데가볼리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비잔틴 시대의 일부 성지 순례객들 중에는 예수의 저주를 받은 가버나움보다 귀신을 몰아 낸 기적이 일어나고 이방 도시로, 복음이 전파된 거라사를 방문하는 데 더 의미를 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수도원이 세워졌을 것이다.
◇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거라사
속보유저
입력 2013-05-2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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