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실로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02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실로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실로 기사의 사진 여호와의 거처 회막과 언약궤가 있던 거룩한 장소

가나안 정복 이후 신앙적 중심지(회막)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 각 지파에게 땅을 나눠준 장소가 실로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회막을 세웠으며(수 18:1) 여호수아는 실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내 그들의 기업에 따라 땅을 그려오게 했다(수 18:8-9). 그들이 다시 모인 곳도 실로로 성서는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고 그 땅을 배분했다(수 18:10)고 말하고 있다. 이제 실로는 여호와의 거처인 회막이 있는 곳으로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가장 거룩한 장소가 되었다.

이 거룩한 장소는 오랜 세월 동안 잊혀졌다. 성지 순례객들은 실로와 가까운 벧엘은 방문했지만 실로의 위치는 기억하지 못했다. 주후 4세기 제롬은 예수의 흔적을 밟을 때 실로와 벧엘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주후 6세기 만들어진 요단강 건너 마다바교회의 바닥을 장식한 모자이크 지도는 실로를 세겜의 동쪽에 두고 있다. 대부분의 성지에 교회의 모습이 있는 것에 반해 실로에는 단지 이름만이 보일 뿐이다. 주후 6세기의 또 다른 기록에는 실로가 예루살렘과 엠마오 사이에 있다고 언급되기도 했다. 주후 1300∼1494년 사이 이탈리아의 플로렌스 영토를 중심으로 한 플로렌틴(Florentine) 지도의 경우에도 실로는 사무엘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네비 사무엘이라는 곳에 표시돼 있다.

실로의 위치를 밝혀낸 것은 1838년 미국의 로빈슨(E Robinson)이다. 앞서 자주 언급된 로빈슨은 1830년대 초반 성서를 들고 이스라엘을 직접 걸어다니면서 고대 폐허의 흔적에 ‘언덕’이란 뜻을 가진 텔(Tell)이나 키르벳(Kirbet)이라는 호칭이 붙은 지역마다 그 지형과 위치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성서 지역들을 밝혀냈다. 그는 사사기 21장 19절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에 실로가 위치해 있다는 구절을 통해 벧엘에서 북쪽으로 10㎞ 떨어져 있는 키르벳 세일룬을 실로라고 추정했다. 아랍어의 세일룬은 사실 실로라는 명칭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키르벳 세일룬 즉 실로에서의 발굴은 1926∼32년 사이 덴마크 학자들이 시작했다. 이후 1981∼84년 사이 텔아비브대학의 이스라엘 핑켈쉬타인이 실로에서 대대적인 발굴을 이뤄냈다. 핑켈쉬타인의 발굴에 의하면 주전 19∼18세기 실로에는 이미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비잔틴 시대까지 사람이 살았다. 그러나 성서를 제외하고 고대 문서 어디에도 실로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로는 가나안 땅에서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입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로에서의 고고학적 흔적

비록 이 지역의 중심도시는 아니었을지라도 실로라는 도시 자체는 상당히 요새화되어 있었다. 주전 18세기에 세워진 성벽의 높이는 7m 이상이었고 두께도 4m 가까이 되었다. 제방을 쌓아 지탱하여 성벽을 더욱 더 견고하게 했다.

실로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무엇보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사사시대 즉 주전 12∼11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2층 구조의 가옥이다. 1층은 양 측면에 기둥을 세워 2층의 바닥을 지탱한 형태의 가옥이다. 이 가옥은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유적지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공공건물이라는 점과 종교적 성격을 띤 유물들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종교적인 장소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가옥과 함께 독특한 저장용 항아리가 발견됐는데 항아리 입구가 마치 셔츠의 칼라를 접어놓은 것처럼 점토를 한번 더 덧대어 붙였다는 뜻으로 목깃항아리(collared rim jar)라 부른다. 이 항아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을 점령했던 시기부터 사용되었고 이스라엘 유적지에서는 대부분 발견되고 있어 전형적인 이스라엘 토기로 불리고 있다. 목깃항아리의 발견은 이 건물 주인이 이스라엘 사람이었음을 시사해주고 있어 사사시대 실로에 회막과 제사장들이 살고 있었음을 유추케 한다.

당시 희생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뼈들이 담벼락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실로의 경우 주전 13세기 가나안의 땅이었을 때는 돼지뼈가 발견되는데 반해 주전 12세기 사사시대 이후 돼지뼈가 거의 발견되지 않아 이스라엘 사람들의 식습관과 관련이 있는 모습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회막이 있었던 실로에는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었다(삿 21:19).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명절에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베냐민 지파 남자들이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갔다(삿 21:21). 학자들은 이 명절이 10월 중순경에 있는 초막절이었을 것이라는 데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성서적 전통에 의하면 초막절은 광야에서 초막을 치고 살았던 것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포도를 수확하는 시기와 맞물리는 명절이기도 하다. 이때는 포도원 주변에 초막을 치고 며칠 동안 포도를 수확하고 수확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춤을 추고 잔치를 베풀곤 했다. 사사기 21장에 묘사된 장소는 마치 포도원 주변의 모습과 같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기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삼상 1:3). 이 전통적인 관습으로 인해 한나 역시 실로에 올라가 술 취한 사람처럼 울며 기도했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기억되는 제사장 사무엘을 갖게 되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있었던 실로는(삼상 4:3)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요(수 18:10) 여호와가 말씀하시는 곳이다(삼상 3:21).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과 싸울 때 그들은 전세가 악화되자 실로에서 언약궤를 가져다가 그들 중에 있게 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에 대한 예언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전쟁에서 지게 만들었고 언약궤는 뺏기고 말았다(삼상 4장). 여호와는 더 이상 실로의 회막에 머물지 않았다. 실로를 발굴한 핑켈쉬타인은 유적지 꼭대기가 회막 장소라고 말하지만 성서의 회막이 세워지기에는 장소가 좁아 아직도 회막의 위치에 대한 논란은 끝나지 않고 있다.

곡식저장고에서 발견된 불에 탄 보리에 의하면 실로는 주전 11세기 말 화재로 사라졌다. 학자들은 이 화재를 일으킨 주인공이 회막에서 언약궤를 빼앗아 간 블레셋 사람들이라고 보고 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세운 뒤 실로는 더 이상 종교적 장소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실로는 한동안 버려졌다가 주전 8세기 앗수르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하기 전 잠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으나 다시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로마시대와 비잔틴시대에 와서 사람들이 다시 살기는 했지만 여전히 작은 마을일 뿐이었다.

2006년 실로 유적지 언저리에서 이전 발굴을 마무리하기 위한 작업이 있었다. 이 작업 중에 주후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이는 비잔틴시대의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 건물이 발견되었다. 교회의 크기는 가로·세로 각각 40m, 14m로 고린도 양식이 장식된 두 개의 기둥머리들과 함께 12개의 기둥받침이 있었다. 더불어 십자가를 비롯한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된 모자이크는 당시 교회의 아름다움을 상상케 한다. 제롬과 유세비우스가 언급한 실로에는 아마도 이 교회 건물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