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롭게 여호수아와 조약맺어 정복전쟁의 칼날 피해
이스라엘을 속이다
성서에 나타나는 전쟁이야기를 보면 적의 약점을 잘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전술로 이해할 수 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에 상당한 두려움을 던져줬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여호수아의 전쟁방식을 잘 파악해 멸망과 죽음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낸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이 기브온 사람들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리고와 아이를 정복하자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지중해 해안에 거주했던 헷,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와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맞서 싸우려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기브온 사람들은 해어진 전대를 입고 낡은 신을 신고,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실은 무역상으로 꾸며 마치 먼 길을 온 것처럼 보이도록 해서 여호수아를 만났다. 그리고 멀리서부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소문을 듣고 왔다고 거짓말해 이스라엘과 조약 백성이 되기를 희망했다.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않은 채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과 조약을 맺었고 함께 배석한 족장들도 그들에게 맹세했다. 사흘 후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의 정체를 알게 됐다. 하지만 이미 여호와의 이름으로 조약을 맺은 백성이었기에 기브온과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물 긷는 자와 나무를 패는 자가 되리라고 저주를 받았다(수 9장).
청동기 시대의 기브온
실제로 기브온은 여리고까지 하루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기브온은 17세기부터 엘-집(el-jib)이라 불리는 아랍 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언덕이라고 이미 알려져 있다. 언덕의 이름이 아랍어로 ‘가바온’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성서적 이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스라엘 유적지들은 아랍어 이름에 성서적 이름의 어원이 담겨 있어 장소를 추측하는 데 도움이 돼왔다. 그중 몇몇 유적지들은 고대 장소를 확인해 줄 수 있을 만한 고고학적 근거가 없는 경우가 있어 논란이 됐다. 그러나 기브온의 경우 1956년 이미 기브온이라 기록돼 있는 항아리 손잡이가 발견돼 장소가 확실시됐다.
기브온에서의 발굴은 56∼62년 미국의 펜실베이니아대의 고고학자 프리차드(J Pritchard)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발굴에 의하면 기브온에는 주전 3000∼2000년 사이 이미 사람이 살았던 거주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방어벽과 언덕 꼭대기에 꽤 큰 유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유적지 전체가 후대 건물들에 의해 파괴됐고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많은 부분이 보존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철기시대(주전 8∼7세기)의 벽의 기초석 밑에서 14개의 저장용 항아리가 발견됐고 주변 언덕에서 이 시대 무덤들도 발견된 바 있어 마을이 있었던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브온의 시대 유적 중 가장 의아한 것은 중기 청동기시대(주전 2000∼1500년)다. 언덕에는 더 이상 마을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에서 26개의 무덤이 발견됐다. 무덤들은 수직으로 갱을 파고 사람을 묻었는데 간단한 토기가 함께 수장됐다. 당시 이곳에는 마을이 없었다는 점과 수장품들의 내용을 보아 이 무덤의 주인은 주변에서 양을 치던 유목민으로 보인다. 중기 청동기 말기에는 미흡한 증거이기는 하지만 도시가 형성됐다는 증거들이 있다. 특별히 이 시대에 발견된 토기의 경우 그 두께가 너무나 얇고 정교해 마치 타조알 껍질 같았다.
후기 청동기시대 즉 여호수아와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으려고 했던 시대의 사람들의 흔적은 기브온에서 많이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사용된 무덤 군에서 발견된 미케네와 키프루스에서 수입된 토기에 비춰볼 때 주변에 정착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의 흔적은 후대 철기시대의 건물들에 의해 파손된 것으로 보고 있다.
왕국시대의 기브온
여호수아와 조약을 맺은 것으로 인해 정복 전쟁의 희생을 피한 기브온은 베냐민 지파의 땅이 됐고(수 18:25), 레위지파의 도시가 됐다(수 21:17). 역대상 8장 29절과 9장 35절에 의하면 사울의 조상은 기브온 사람 여이엘이었다. 기브온 사람들은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위해 봉사했다. 그러나 사울은 기브온 사람이 이스라엘이 아니기에 자신이 얼마나 왕으로서 열심을 다하는가 보여주기 위해 기브온을 치는 사건을 벌였고(삼상 21:1∼2) 그의 피로 인해 다윗의 시대에 3년 동안 기근이 있었다(삼하 21:1).
왕국시대 기브온은 이제 이스라엘의 땅이 됐다. 솔로몬이 여호와께 천번제를 드리고 지혜를 선물 받게 된 중요한 장소가 기브온이다(왕상 3:4). 실제로 기브온은 주전 12세기 이후 언덕을 둘러싸고 있었던 거대한 성벽으로 도시를 이뤘다. 성벽 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둥근 수장고가 지하로 파졌다. 수장고의 크기는 지름 11.8m, 깊이 10.8m에 달한다. 수장고의 바닥까지는 벽면에 깎아 만든 79개의 계단을 내려가야만 한다. 계단의 끝은 다시 지하 터널로 연결돼 수장고의 근원인 샘에 도착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수장고는 후대에 다시 보수 공사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계단은 93개였다. 이 수장고는 우리에게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이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을 만났던 기브온 못가를 연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레미야 41장 12절에도 기브온 못가가 묘사되고 있다.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 지휘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행한 모든 악을 듣고 모든 사람을 데리고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싸우러 가다가 기브온 큰 물가에서 그를 만나매.”
주전 10세기쯤 도시는 상당히 확장됐고 발전했다. 주전 8∼7세기쯤 기브온은 유다 왕국의 포도주를 책임지는 도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 발견된 포도주 공장 지역에서는 63개의 포도주 저장용 장소들이 있었다. 9만5000ℓ의 포도주를 한 장소에 저장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항아리 손잡이의 모습으로 보아 정부에 일정한 양을 바치는 항아리를 보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저장용 항아리는 LMLK 손잡이 항아리라 불리는 것으로 높이는 1∼1.2m 정도이고 손잡이에는 왕의 상징인 날개 달린 원판이나 풍뎅이 등의 모습과 함께 LMLK, 즉 왕을 위한 혹은 왕에게 속한 물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인장이 찍혀 있다. 당시 앗수르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자 이스라엘의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와의 전쟁에 대비해 군량을 거둬들이면서 사용된 항아리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더불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항아리의 손잡이 중 하나에는 “기브온”이라는 히브리어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어 이 유적지가 기브온이었음을 확실하게 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브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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