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미스바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06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미스바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미스바 기사의 사진‘망대’ 의미… 숱한 전쟁의 아픔 간직한 베냐민 지파의 땅

회합의 장소

‘망대’ 혹은 ‘지켜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미스바는 베냐민 지파의 땅으로 성서 사건의 핵심 지역 가운데 하나다. 사사기 19장에 의하면 한 레위 사람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기브아 사람들이 밤에 그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그를 죽이려 하고 첩을 욕보여 죽게 하였다. 그는 첩의 시체를 거두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 기브아 사람들의 죄악을 모두에게 알렸다.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다.”(삿 20:1) 거기서 그들은 베냐민 사람에게는 그들의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하였다(삿 21:1).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온 후 기리얏여아림에 있었을 때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모이게 하고 그들을 위하여 금식하며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치려하자 사무엘은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고 부르짖었다. 여호와는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죽였다. 사무엘은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에벤에셀’ 즉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불렀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였다(삼상 7:1∼16).

사무엘 이후 미스바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사람은 유다의 왕 아사였다. 아사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 사이에는 일생 동안 전쟁이 있었다.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에 요새를 건축하여 유다 왕 아사와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하자 아사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북왕국 이스라엘을 공격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자신의 영토를 지켜야 했던 바사가 떠나자 아사는 온 유다에 명령을 내려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에 요새를 건축하였다(왕상 15장).

미스바는 전쟁 뒤의 슬픈 사연들을 담고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사사들 중 전쟁에서 한 약속 때문에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입다가 미스바 출신이었다(사사기 11장). 바빌론은 유다를 멸망시킨 후 미스바 출신 그다랴를 유다의 통치자로 삼았다. 유다 사람들은 뿔뿔이 쫓겨난 각처에서 돌아와 미스바에 사는 그다랴의 지휘 아래로 들어왔다. 그다랴는 아마도 자신의 권력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갈대아 사람 즉 바빌론을 섬기겠노라 큰소리 쳤고 결국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요 느다냐의 아들로서 왕의 장관인 이스마엘의 손에 죽었다(렘 40∼41장).

미스바의 위치

느헤미야가 돌아와 예루살렘을 다시 건축할 때 미스바 사람들은 기브온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 프로젝트에 기꺼이 참여하였다(느 3장). 신약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신구약 중간 시대를 다루고 있는 마카비서에서 마카비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던 헬라의 셀루시드 왕조와 결전을 위해 이스라엘의 기도 장소인 미스바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고 말하고 있다. 미스바는 분명 유다의 경계선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땅으로 예루살렘과는 그리 멀지 않은 장소임에 틀림이 없다.

고고학자들이 미스바로 추정하는 유적지는 두 곳이다. 그중 하나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6㎞ 떨어진 곳에 위치한 네비 사무엘(Nebi Samuel)이라 불리는 장소이다. 주후 6세기 한 기독교인은 이곳을 방문한 뒤 사무엘의 무덤이 있다고 말했다. 주후 1173년 유대인 투델라의 랍비 베냐민은 십자군들이 해안가의 람라(Ramla)에서 사무엘의 뼈를 발견해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사무엘을 기념하는 교회가 언덕의 꼭대기에 세워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의 고향 라마에 묻힌 것으로도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 네비 사무엘에서 1992∼2003년 사이 이자크 마겐(Yitzhak Magen)이 발굴을 진행, 주전 8∼7세기 1만6000㎡의 도시 흔적과 비잔틴 시대 수도원을 찾아냈다. 하지만 이곳에선 사무엘 시대인 주전 11세기 말∼10세기 초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미스바일 확률도 사무엘의 무덤일 확률도 적어졌다.

텔 엔-나스베(Tell en-Nasbeh)

네비 사무엘보다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12㎞ 떨어져 있는 텔 엔-나스베를 미스바로 지목하는 학자들이 더 많다. 유적지는 예루살렘에서 세겜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으며 기브온, 라마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어 성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지리적 입지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텔 엔-나스베는 평지에 가까운 기브온 유적지보다 182m 정도 높으며 약 3만2000㎡의 넓은 언덕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 회중이 모였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텔 엔-나스베는 1926∼1935년 미국의 퍼시픽 종교학교의 윌리엄 바데가 발굴을 진행했다. 바데의 발굴은 ASOR(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근동연구를 위한 미국 연구소)의 후원을 받아 이스라엘에서는 최초로 과학적 발굴 수단이 동원되었다. 안타깝게도 1936년 바데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발굴 결과는 동료들이 편집을 서둘러 출판했다.

다행히도 최근 미국 코넬 대학의 제프리 존 교수와 텔 엔-나스베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바데 박물관의 노력으로 5만8000개에 이르는 방대한 유물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발굴 결과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연구를 거듭하면서 존 교수는 텔 엔-나스베가 미스바라고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다.

텔 엔-나스베는 이미 주전 3000년쯤 이전부터 적은 인구지만 사람이 살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적지는 오랜 세월 동안 버려져 있었고 넓은 언덕만이 남아 있었다. 이 넓은 언덕에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주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을 것이다. 주전 11세기 말∼10세기 초, 사무엘 시대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블레셋을 물리친 후 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주전 9∼8세기 아사가 북왕국 이스라엘과의 경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세운 요새화된 성벽과 거대한 도시 성문이 발견되었다. 발굴된 유물 중에는 자아자니야라 불리는 사람의 인장도 있다. 인장의 주인은 본인을 왕의 신하라고 부르고 있으며 아마도 자신의 가족 문양인 것으로 보이는 수컷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텔 엔-나스베는 바빌론 파괴의 피해를 많이 입지 않았다. 이는 성서에서 미스바의 그다랴가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배경과 일치한다. 텔 엔-나스베는 주전 2세기쯤까지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는데, 미스바에 군대를 소집해 예루살렘의 셀류시드 왕조와 맞섰던 마카비의 것으로 추정된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