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벧세메스
돌아온 언약궤를 들여다봐 죽음에 이른 이야기로 유명
태양의 집/태양신의 신전
벧세메스는 여호수아서에 유다 지파의 서쪽 도시(15:10-11)로 레위 지파를 위한 거처를 배분할 때 유다 지파가 내 놓은 아홉 도시 중 하나(21:16)로 기록돼 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경계도시였으며(삼상 6:9-18), 솔로몬의 두 번째 행정구역의 주요도시로 등장하고 있다(왕상 6:9-18).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유다 땅을 탐낼 때 전쟁을 벌이기도 했던 장소였다(왕하 14:11-13). 히스기야 시대에 벧세메스는 블레셋 사람들과는 여전히 국가 경계도시로 전쟁이 계속해서 있던 곳이었다(대하 28:18). 벧세메스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할 때 파괴된 주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구약시대 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진 도시였다.
그러나 벧세메스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형학적으로 소렉 골짜기에 위치해 소라와 딤나와 가까웠으며 블레셋과 경계를 이루는 도시였다. 마침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져 있는 곳에 아랍어로 ‘아인 쉠스(Ain Shems)’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름에서 고대 벧세메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형학적인 조건에서도 너무나 잘 맞았다. 주변에 있는 3만㎡의 언덕에서 마침내 고대 도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벧세메스는 히브리어로 ‘태양의 집’이라는 뜻이다. 가나안에서는 쉐메쉬라 불리는 태양신이 섬겨지고 있었다. 이곳을 이스라엘이 점령하기 전에는 태양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벧세메스의 발굴은 1911∼12년, 1928∼33년 미국과 영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발굴이 시작되었다. 안타깝게도 발굴의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고 모든 것은 이스라엘 왕국 시대로 해석되어 재탐사가 필요했다. 1971년 이스라엘 고고학자 엡쉬타인(C. Epstein)의 발굴은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이스라엘이 벧세메스를 정복하기 전 이곳에는 요새화된 가나안 도시와 신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름의 유래도 밝힐 수 있었다.
언약궤가 돌아오다
벧세메스는 텔아비브 대학교의 부니모비취(Sh. Bunimovitz)와 레더만(Z. Lederman) 교수의 지속적인 관심아래 1990년부터 현재까지 발굴이 시행되고 있다. 텔아비브 대학교의 주요 관심은 이스라엘 정복시대부터 왕국 시대까지 이스라엘과 관련된 흔적들을 찾는 것이었다. 특별히 주전 12∼11세기 사사시대의 흔적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이 시대는 성경에 등장하는 도시 중 벧세메스를 기억나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시기이다.
블레셋과 에벤에셀에서 접전을 벌이던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들 사이에 있기를 원했다. 실로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전쟁터로 옮겨왔다. 하지만 언약궤는 빼앗겼고 전쟁에서는 지고 말았다(삼상 4장). 언약궤를 아스돗으로 옮겨온 블레셋에게는 오히려 재앙이 내렸다. 그들의 다곤 신상은 넘어져 버렸고 아스돗 사람들은 독한 종기에 걸려 신음했다. 언약궤는 가드를 거쳐 에그론으로 옮겨졌다. 가는 곳마다 독한 종기로 여호와는 블레셋을 벌하셨다(삼상 5장).
일곱 달 동안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 있던 여호와의 궤는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어서 빨리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 더 이상 해가 없도록 해야만 했다. 속건제를 지내기 위해 블레셋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를 만들었다. 세 수레를 만들어 여호와의 궤와 금으로 만든 물건들을 상자에 담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메게 한 후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경계로 가게 했다. 그곳이 벧세메스였다. 송아지를 막 떼어놓았는데도 어미소는 울지도 않고 좌우로 치우치지도 않고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갔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궤가 오는 것을 보고 수레를 태우고 암소를 번제물로 드렸다. 그러나 벧세메스 사람들 중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죽음을 면할 수가 없었다.
이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마을이 벧세메스에서 발견되었다. 유적지 전반에 걸쳐 발견된 사사시대의 마을에서는 2층으로 지어진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가옥이 발견되었다. 일상용품으로 사용된 토기들과 더불어 맷돌, 화로 등이 함께 발견돼 구약시대 삶의 모습도 재현해 볼 수 있었다. 금으로 만든 장식품들과 포장된 넓은 방이 있는 집도 발견됐다. 부유한 상류층의 집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변 유적지들과 언덕에서는 같은 시대에 돼지 뼈가 발견되는데, 벧세메스에서는 이 시대부터 돼지뼈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시대부터 돼지를 금기시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거주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 같다. 또한 지난해 발견된 지름 1.5㎝ 인장에는 한 사람이 동물을 마주하고 서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데 소렉 골짜기를 무대로 했던 삼손의 모습과 자주 비교되고 있다.
블레셋과의 경계도시
주전 10세기 솔로몬은 블레셋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벧세메스를 행정도시로 만들고(왕상 4:9) 요새화하였다. 벧세메스 언덕의 북동쪽에서는 거대한 벽과 이 벽을 지탱하는 누벽이 함께 발견되었다. 성벽 중에는 방들을 연결하여 만든 포곽벽도 있었다. 여기에는 위급한 상황에서 도시를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 문도 만들어져 있었다.
벧세메스는 경계에 위치해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당연히 잦은 전쟁이 있었을 것이다. 열왕기하 14장 11∼13절에 서술된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와 유다의 왕 아마샤 사이의 전쟁에서도 볼 수 있다. 역대하 28장 18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벧세메스와 주변지역을 빼앗아 이곳에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전쟁 때문에 벧세메스에는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했을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가 일곱 달 여름 내내 지속되는 이스라엘의 기후 조건 때문에 물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전쟁의 수단이었다. 벧세메스에는 암반을 파 지하에 4개의 큰 홀이 십자 모양을 형성하는 물 저장고가 있었다. 지하에 있었던 큰 공간이기 때문에 밖에서는 계단을 내려가는 시설만이 보인다. 저장고를 보호하는 데 용이했을 것이다.
한 번에 800㎥의 빗물을 모아 저장할 수 있었는데 전체 벽면은 회칠을 하여 방수처리를 했으며 다시 회칠한 수로들이 도시의 도로들로 뻗어나가 도시민들에게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벧세메스는 철 제련소도 갖추고 있었다. 다양한 제련용 도구와 제련을 하고 남은 찌꺼기들이 발견되어 이곳에 산업적 시설도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철 제련소는 이스라엘 유적지에서는 자주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벧세메스가 상업적으로 지형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주전 8세기 이후 벧세메스는 블레셋 도시 에그론과 함께 올리브 기름 생산을 주업으로 하는 산업도시가 되었다. 올리브 기름을 짜는 돌추과 그릇이 유적지 전역에 걸쳐 발견되었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의 46개의 도시를 파괴하였을 때 벧세메스도 앗수르의 손에 넘어갔다. 폐허가 된 상태로 버려졌다. 이후 잠시나마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이 발견되지만, 얼마 안 있어 바빌론이 다시 파괴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아무도 찾지 않는 도시가 되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태양의 집/태양신의 신전
벧세메스는 여호수아서에 유다 지파의 서쪽 도시(15:10-11)로 레위 지파를 위한 거처를 배분할 때 유다 지파가 내 놓은 아홉 도시 중 하나(21:16)로 기록돼 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경계도시였으며(삼상 6:9-18), 솔로몬의 두 번째 행정구역의 주요도시로 등장하고 있다(왕상 6:9-18).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유다 땅을 탐낼 때 전쟁을 벌이기도 했던 장소였다(왕하 14:11-13). 히스기야 시대에 벧세메스는 블레셋 사람들과는 여전히 국가 경계도시로 전쟁이 계속해서 있던 곳이었다(대하 28:18). 벧세메스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할 때 파괴된 주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구약시대 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진 도시였다.
그러나 벧세메스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형학적으로 소렉 골짜기에 위치해 소라와 딤나와 가까웠으며 블레셋과 경계를 이루는 도시였다. 마침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져 있는 곳에 아랍어로 ‘아인 쉠스(Ain Shems)’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름에서 고대 벧세메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형학적인 조건에서도 너무나 잘 맞았다. 주변에 있는 3만㎡의 언덕에서 마침내 고대 도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벧세메스는 히브리어로 ‘태양의 집’이라는 뜻이다. 가나안에서는 쉐메쉬라 불리는 태양신이 섬겨지고 있었다. 이곳을 이스라엘이 점령하기 전에는 태양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벧세메스의 발굴은 1911∼12년, 1928∼33년 미국과 영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발굴이 시작되었다. 안타깝게도 발굴의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고 모든 것은 이스라엘 왕국 시대로 해석되어 재탐사가 필요했다. 1971년 이스라엘 고고학자 엡쉬타인(C. Epstein)의 발굴은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이스라엘이 벧세메스를 정복하기 전 이곳에는 요새화된 가나안 도시와 신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름의 유래도 밝힐 수 있었다.
언약궤가 돌아오다
벧세메스는 텔아비브 대학교의 부니모비취(Sh. Bunimovitz)와 레더만(Z. Lederman) 교수의 지속적인 관심아래 1990년부터 현재까지 발굴이 시행되고 있다. 텔아비브 대학교의 주요 관심은 이스라엘 정복시대부터 왕국 시대까지 이스라엘과 관련된 흔적들을 찾는 것이었다. 특별히 주전 12∼11세기 사사시대의 흔적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이 시대는 성경에 등장하는 도시 중 벧세메스를 기억나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시기이다.
블레셋과 에벤에셀에서 접전을 벌이던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들 사이에 있기를 원했다. 실로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전쟁터로 옮겨왔다. 하지만 언약궤는 빼앗겼고 전쟁에서는 지고 말았다(삼상 4장). 언약궤를 아스돗으로 옮겨온 블레셋에게는 오히려 재앙이 내렸다. 그들의 다곤 신상은 넘어져 버렸고 아스돗 사람들은 독한 종기에 걸려 신음했다. 언약궤는 가드를 거쳐 에그론으로 옮겨졌다. 가는 곳마다 독한 종기로 여호와는 블레셋을 벌하셨다(삼상 5장).
일곱 달 동안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 있던 여호와의 궤는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어서 빨리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 더 이상 해가 없도록 해야만 했다. 속건제를 지내기 위해 블레셋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를 만들었다. 세 수레를 만들어 여호와의 궤와 금으로 만든 물건들을 상자에 담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메게 한 후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경계로 가게 했다. 그곳이 벧세메스였다. 송아지를 막 떼어놓았는데도 어미소는 울지도 않고 좌우로 치우치지도 않고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갔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궤가 오는 것을 보고 수레를 태우고 암소를 번제물로 드렸다. 그러나 벧세메스 사람들 중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죽음을 면할 수가 없었다.
이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마을이 벧세메스에서 발견되었다. 유적지 전반에 걸쳐 발견된 사사시대의 마을에서는 2층으로 지어진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가옥이 발견되었다. 일상용품으로 사용된 토기들과 더불어 맷돌, 화로 등이 함께 발견돼 구약시대 삶의 모습도 재현해 볼 수 있었다. 금으로 만든 장식품들과 포장된 넓은 방이 있는 집도 발견됐다. 부유한 상류층의 집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변 유적지들과 언덕에서는 같은 시대에 돼지 뼈가 발견되는데, 벧세메스에서는 이 시대부터 돼지뼈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시대부터 돼지를 금기시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거주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 같다. 또한 지난해 발견된 지름 1.5㎝ 인장에는 한 사람이 동물을 마주하고 서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데 소렉 골짜기를 무대로 했던 삼손의 모습과 자주 비교되고 있다.
블레셋과의 경계도시
주전 10세기 솔로몬은 블레셋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벧세메스를 행정도시로 만들고(왕상 4:9) 요새화하였다. 벧세메스 언덕의 북동쪽에서는 거대한 벽과 이 벽을 지탱하는 누벽이 함께 발견되었다. 성벽 중에는 방들을 연결하여 만든 포곽벽도 있었다. 여기에는 위급한 상황에서 도시를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 문도 만들어져 있었다.
벧세메스는 경계에 위치해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당연히 잦은 전쟁이 있었을 것이다. 열왕기하 14장 11∼13절에 서술된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와 유다의 왕 아마샤 사이의 전쟁에서도 볼 수 있다. 역대하 28장 18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벧세메스와 주변지역을 빼앗아 이곳에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전쟁 때문에 벧세메스에는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했을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가 일곱 달 여름 내내 지속되는 이스라엘의 기후 조건 때문에 물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전쟁의 수단이었다. 벧세메스에는 암반을 파 지하에 4개의 큰 홀이 십자 모양을 형성하는 물 저장고가 있었다. 지하에 있었던 큰 공간이기 때문에 밖에서는 계단을 내려가는 시설만이 보인다. 저장고를 보호하는 데 용이했을 것이다.
한 번에 800㎥의 빗물을 모아 저장할 수 있었는데 전체 벽면은 회칠을 하여 방수처리를 했으며 다시 회칠한 수로들이 도시의 도로들로 뻗어나가 도시민들에게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벧세메스는 철 제련소도 갖추고 있었다. 다양한 제련용 도구와 제련을 하고 남은 찌꺼기들이 발견되어 이곳에 산업적 시설도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철 제련소는 이스라엘 유적지에서는 자주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벧세메스가 상업적으로 지형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주전 8세기 이후 벧세메스는 블레셋 도시 에그론과 함께 올리브 기름 생산을 주업으로 하는 산업도시가 되었다. 올리브 기름을 짜는 돌추과 그릇이 유적지 전역에 걸쳐 발견되었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의 46개의 도시를 파괴하였을 때 벧세메스도 앗수르의 손에 넘어갔다. 폐허가 된 상태로 버려졌다. 이후 잠시나마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이 발견되지만, 얼마 안 있어 바빌론이 다시 파괴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아무도 찾지 않는 도시가 되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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