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게셀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08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게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게셀 기사의 사진
해안도로 지나던 교통요충… 솔로몬, 결혼 예물로 받아 요새화

교통의 요지-게셀

도시 설립과 발전의 주요 요소 중 하나는 교통 입지다. 이집트와 아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지중해변의 해안도로(Via Maris)가 지나가는 가나안의 도시들 역시 요새화돼 발전했다. 게셀은 해안도로에 있었던 도시로 주전 2000년쯤부터 도시가 발전했다. 성서시대에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게셀은 고고학 발굴을 통해 현재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 떨어져 있는 텔 엘-제제르(Tell el-Jezer)로 밝혀졌다.

1873년 언덕 주변을 둘러싸고 몇 백 미터 떨어져 도시의 경계를 나타내는 13개 비석들이 발견됐다. 주전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히브리어로 새겨진 기록들은 ‘게셀 경계’를 보여 주고 있어 도시의 이름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 영역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됐다.

게셀은 남쪽의 이집트에서 올라오는 해안도로 위에 있지만 동쪽으로도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지나 요단 동편 산지까지 연결돼 지정학적으로 중요했다. 따라서 이 도시는 항상 높은 성벽과 튼튼한 성문으로 보호될 수밖에 없었다. 주전 2000∼1500년쯤 게셀은 거대한 돌로 된 성벽을 자랑하는 요새화된 도시였다. 양쪽에 탑을 세워 망대로 사용했던 성문 자리도 발견되었으며 5m 높이의 성벽을 버티도록 누벽을 쌓아 보호한 흔적도 발견됐다. 이 도시는 이집트의 투트모세 Ⅲ세(주전 약 1479∼1425년)에 의해 주전 1477년쯤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 투트모세가 게셀을 파괴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고학적으로도 도시가 대화재로 무너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게셀은 이집트의 속국이 됐다. 주전 14세기 기록된 아마르나 문서는 게셀의 왕들이 이집트의 바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집트는 20년 동안 게셀의 왕들을 4번이나 갈아치웠다.

그 뒤 게셀이 이집트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 14세기 후반에 가서 언덕 꼭대기에 궁전이 다시 건축됐다. 4m 두께의 성벽도 다시 세워졌다. 이집트는 이것이 못마땅했나 보다. 이집트의 메르넵타(주전 약 1212∼1202년)가 가나안 원정을 시도했다고 당시 돌비석에 기록돼 있는데 그가 파괴한 도시들 중에 게셀의 이름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집트는 이후 지중해 연안의 세계에서 정치적 힘을 잃었다. 가나안에 대한 통치권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었고 더불어 성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게셀 왕 호람은 라기스를 도우러 가다가 오히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의해 파괴됐다(수 10:33). 주전 13세기 말 게셀의 인구는 줄어들었고 도시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솔로몬의 요새

이스라엘은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쫓아내지는 못했다. 게셀 족속은 에브라임 지파와 함께 그 속에서 거주했다(수 16:10, 삿 1:29).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주전 12∼11세기 게셀에 다시 행정건물들이 들어섰다. 가나안과 블레셋(사무엘하 5장 25절은 다윗이 몰아낸 블레셋이 게셀까지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다)의 여러 다른 토기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혼합적인 성격을 띤 장소였음이 분명했다.

게셀이 성서적 사건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솔로몬 시대였다. 솔로몬은 게셀의 지리적 입지를 높이 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해안도로와 북쪽으로 가는 주요 도로를 장악하기 위해 므깃도와 게셀 그리고 하솔에 요새를 건축하기를 원했다(왕상9:15). 이 중 게셀만이 이스라엘 땅이 아니었다. 이집트의 왕 바로는 게셀을 탈취하고 불사르고 그 성읍에 있는 가나안 사람을 죽이고 솔로몬에게 아내로 준 자신의 딸의 예물로 삼았다(왕상 9:16).

게셀에서는 므깃도와 하솔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성문이 발견되기도 했다. 양쪽에 방이 세 개씩 있어 육방 성문으로 불리는 성문이다. 누가 세운 것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모두 동시대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학자들은 이 독특한 성문을 세운 사람이 솔로몬이라고 보고 있어 ‘솔로몬 성문’이라 부른다.

적어도 게셀의 성문은 솔로몬이 건축했음이 확실시되고 있다. 성문이 세워진 바로 밑에서 주전 10세기 초(다윗의 시대) 유물들이 발견됐으며, 성문은 세워진 지 얼마 후 르호보암의 시대에 시삭에 의해 주전 925년 파괴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게셀은 주전 732년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Ⅲ세에 의해 파괴된 후 다시는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이 없다.

종교적 장소

위에서 언급한 역사와 성서에 관련된 고고학적 흔적 외에도 게셀에서는 이목을 끌만한 독특한 유물들이 많다. 게셀 유적지의 남서쪽 평지에서 발견된 10개 돌들은 발견 당시 땅 바닥에 누워 있었지만 고대에는 분명 세워져 있어 마치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입상, 혹은 주상(히브리어 마세봇)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돌의 높이는 3m다. 이 중 하나는 제단의 형태를 띠고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제물을 담을 수 있도록 큰 그릇의 형태를 하고 있다. 고대 근동에서는 조각한 돌만 신의 상징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연석을 세운 자체만으로도 신의 모습 혹은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예는 야곱이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집에 왜 돌을 세웠는가를 설명해 준다. 대부분 학자들은 이 돌들이 세워진 장소가 해안 도로를 지나가는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제의가 행해진 종교적 장소일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게셀 달력

또 다른 흥미로운 발견은 길이 10㎝밖에 안 되는 작은 석회석 조각이다. 주전 10세기 중반 이후로 연대가 추정되는 이 조각은 히브리어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게셀 달력’이라 불린다. 모두 7줄의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내용은 12개월을 계절별로 나눠 농경의 순서를 이야기하고 있다. 학자들은 문자의 생김이 너무나 유치하고 서툰 솜씨로 쓰였기에 공문서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알브라이트(W F Albright)의 경우 조각의 크기가 한 손 안에 들어올 만큼 작은 것으로 보아 서기관이 되려고 하는 학생들의 학습용 기록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게셀 달력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지만, 이 달력이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농경에 대해서 시사해 주는 바는 크다. 우선 주전 10세기 중반 이후 솔로몬 시대에 이집트 바로가 게셀을 솔로몬에게 주었고 이곳에 이스라엘의 요새와 함께 히브리어가 발견됐다는 것은 성서적 역사와 일맥상통한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농경 순서와 올리브 보리 포도 등 주요 작물을 언급한 것도 고대 농경문화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게셀에서는 1871년부터 1990년까지 지속적인 발굴이 이뤄졌다. 초창기 발굴된 고대 흔적을 잘못 해석해 고고학적 연구가 계속된 곳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솔로몬 성문’의 경우 초창기 고고학자 맥칼리스터(MaCalister)는 마카비 즉 주전 2세기쯤의 탑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2006년부터는 미국 남서침례신학대학원(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오르티즈(S Ortiz) 교수가 이스라엘 유물청과 함께 게셀의 발굴 결과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출판하는 일을 하고 있다. 1902∼1909년 사이 맥칼리스터가 발굴한 7m 깊이의 수갱과 24m의 수로는 백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폭풍과 바람, 수천 톤의 흙으로 뒤덮였지만 다시 찾아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