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라기스 ②
이스라엘 최대의 적 블레셋과 마주… 르호보암이 요새화
요새화된 라기스
주전 1150년경 풍요로운 쉐펠라(평지) 지역의 부유한 라기스가 파괴되었다. 여호수아 10장에 의하면 파괴자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그 이후 오랫동안 완전히 황폐한 도시로 버려졌으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라기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요새화했다. 히스기야 시대에는 더욱 강화된 요새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스라엘의 최대 적이었던 블레셋 땅과 마주하고 있었던 라기스는 이스라엘의 서쪽 경계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성벽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가나안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성벽의 모습으로 지어졌다. 우선 직사각형 형태로 잘 다듬은 벽돌을 쌓고 그 위에 진흙벽돌을 쌓아 세웠다.
라기스의 성벽에서 특이한 점은 이중으로 성벽을 쌓은 모습이다. 더욱 강화된 요새의 모습이다. 외벽의 두께는 3m였으며 내벽의 두께는 6m나 되었다. 이렇게 이중으로 성벽을 쌓은 모습은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현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저수지가 두 성벽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하고 있다(사 22:10). 성벽은 누벽을 쌓아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성벽의 남서쪽에 세워졌던 성문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당대의 성문 중 가장 크고 튼튼하게 세워진 것으로 외벽과 내벽 모두에 각각 성문이 있었다.
외벽 성문의 경우 석벽돌을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높은 탑이 양쪽에 있어 방어를 위해 사용되었다. 성문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 조각이 경첩이 그대로 달린 채 발견되었는데 아카시아 나무였다. 성 안에서 발굴이 가장 많이 이뤄진 부분이 도시의 영주 혹은 행정관의 저택이다. 도시의 가장 상부에 위치해 있는 이 저택은 주변 지역보다 높게 단상을 쌓아 그 위에 지어졌다. 히스기야 시대에 가장 크게 확장된 저택이 세워졌으며 이 때 전체 크기는 한쪽이 76m, 다른쪽이 36m에 이른다. 저택을 포함하여 안뜰과 마구간이 있어 이 지역만 따로 벽을 한 번 더 둘러싸 요새화한 것을 볼 수 있다.
산헤립의 침략
라기스를 이렇게 요새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지중해변 해안도로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던 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주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했다. 앗수르는 지중해변에 있는 블레셋의 도시들도 파괴하고 이집트의 북부지역까지 내려갔다.
남왕국 유다는 이 혼란의 틈 속에서 살아남았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 남왕국 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신앙적 개혁을 감행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들었다(왕하 18:3-7).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고 독립을 꾀했다.
역사적으로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사르곤의 암살은 히스기야에게는 희소식이었지만,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은 더욱 강력한 제국 확장 정책으로 남유다를 계속 압박했다. 산헤립은 이스라엘로 진격해 왔고 히스기야는 부랴부랴 성벽을 보수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산헤립의 일대기 기록에 의하면 그는 46개의 도시를 치고 예루살렘을 향했으며 히스기야로부터 상당한 조공을 얻어냈다.
열왕기하 18:14-17과 역대기하 32:9는 산헤립이 라기스를 정복하고 예루살렘까지 위협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건은 앗수르 니느웨의 산헤립 궁전 벽 부조에도 묘사되어 있다. 앗수르의 왕들은 자신들의 궁전 벽부조에 다른 나라를 점령한 승리의 장면들을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원정의 시작부터 전쟁 장면 그리고 점령 이후 포로들과 조공을 받는 장면까지 상세히 기록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렇게 궁전을 장식해 앗수르 왕의 부강한 힘을 과시하는 데 노력했다.
벽부조는 전쟁 지역의 주변 환경과 성벽의 모습 심지어 그 지역 주민들의 의복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우리에게 고대 중동과 가나안 지역에 대한 자연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라기스 벽부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쉐펠라 지역과 라기스 성, 그리고 유다인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라기스 주변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과일인 대추야자의 나무(성서에서는 종려나무로 번역되었다)와 포도나무로 둘러 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벽부조 발굴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라기스의 성벽은 이중 성벽으로 새겨져 있고, 성문의 탑과 성문으로 향하는 경사진 비탈길도 보인다. 비탈길에는 도망가는 피난민들이 커다란 주머니를 들고 가고 있다. 피난민들과 앗수르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라기스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당시 남왕국 유다의 의복도 엿볼 수 있다. 남왕국 유다인들은 앗수르의 군사들과는 다른 헬멧과 두건을 쓰고 있다.
이 벽부조에서 특이한 것은 앗수르 군사들이 라기스 성벽을 향해 공성퇴를 매단 병거를 밀 때 병거와 군사들이 올라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긴 세 개의 막대기 같은 형태의 물체다. 산헤립은 그의 일대기에 인공으로 언덕을 쌓아 공성퇴를 사용해 공격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라기스를 발굴한 우쉬쉬킨(D.Ushshkin) 교수는 라기스 언덕의 남서쪽에서 성벽을 향해 인공으로 쌓은 언덕을 발견했다. 이 언덕은 1만5000t의 흙과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공성퇴 병거가 올라갈 수 있도록 언덕 위를 두껍게 회칠을 하였다. 라기스 성 내부에서는 이 언덕 반대편에 누벽을 쌓아 성벽을 올리고 성벽을 넘어오는 이들을 공격했던 흔적이 발견됐다.
전쟁의 극심함은 주변에서 발견되는 화재의 흔적과 함께 수백 개의 무기들 즉 물맷돌, 화살촉, 창끝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벽부조에서도 서로를 향해 던지고 쏘는 무기들과 유다인들이 던지는 횃불을 볼 수 있다. 라기스 언덕의 한 동굴에서는 1500명의 해골이 발견되었는데 벽부조에서 보여지는 앗수르의 군사들이 적군을 죽이고 머리를 잘라 내관에게 보여주고 전쟁에 참여한 수당을 받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라기스의 멸망
산헤립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진 라기스는 히스기야 시대만큼의 모습으로 재현될 수는 없었지만 요시야 시대(주전 639∼609년)에 다시 한 번 재건돼 요새로 쓰였다. 그러나 이 도시의 운명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략으로 라기스는 이 땅에서 사라졌다.
바벨론과의 전쟁 역시 마치 영화를 보듯 처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레미야는 “그때에 바벨론의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읍들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라”(렘 34:7)고 당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라기스의 발굴을 통해서 이 역사적 장면이 사실임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라기스의 장군으로 보이는 요아스에게 라기스와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 장관으로 보이는 호샤야후가 보낸 편지가 쓰여 있는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18개의 편지는 대부분 호샤야후가 요아스에게 부탁을 하거나 군 상태를 보고하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4번 편지로 호샤야후는 요아스에게 아세가를 우리는 볼 수 없고 다만 라기스의 봉화만을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 위에서 언급한 예레미야 34:7의 전쟁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바벨론의 무차별한 칼날을 피하지 못한 라기스는 오랜 세월동안 버려진 황폐한 언덕으로 남아있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요새화된 라기스
주전 1150년경 풍요로운 쉐펠라(평지) 지역의 부유한 라기스가 파괴되었다. 여호수아 10장에 의하면 파괴자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그 이후 오랫동안 완전히 황폐한 도시로 버려졌으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라기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요새화했다. 히스기야 시대에는 더욱 강화된 요새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스라엘의 최대 적이었던 블레셋 땅과 마주하고 있었던 라기스는 이스라엘의 서쪽 경계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성벽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가나안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성벽의 모습으로 지어졌다. 우선 직사각형 형태로 잘 다듬은 벽돌을 쌓고 그 위에 진흙벽돌을 쌓아 세웠다.
라기스의 성벽에서 특이한 점은 이중으로 성벽을 쌓은 모습이다. 더욱 강화된 요새의 모습이다. 외벽의 두께는 3m였으며 내벽의 두께는 6m나 되었다. 이렇게 이중으로 성벽을 쌓은 모습은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현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저수지가 두 성벽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하고 있다(사 22:10). 성벽은 누벽을 쌓아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성벽의 남서쪽에 세워졌던 성문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당대의 성문 중 가장 크고 튼튼하게 세워진 것으로 외벽과 내벽 모두에 각각 성문이 있었다.
외벽 성문의 경우 석벽돌을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높은 탑이 양쪽에 있어 방어를 위해 사용되었다. 성문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 조각이 경첩이 그대로 달린 채 발견되었는데 아카시아 나무였다. 성 안에서 발굴이 가장 많이 이뤄진 부분이 도시의 영주 혹은 행정관의 저택이다. 도시의 가장 상부에 위치해 있는 이 저택은 주변 지역보다 높게 단상을 쌓아 그 위에 지어졌다. 히스기야 시대에 가장 크게 확장된 저택이 세워졌으며 이 때 전체 크기는 한쪽이 76m, 다른쪽이 36m에 이른다. 저택을 포함하여 안뜰과 마구간이 있어 이 지역만 따로 벽을 한 번 더 둘러싸 요새화한 것을 볼 수 있다.
산헤립의 침략
라기스를 이렇게 요새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지중해변 해안도로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던 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주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했다. 앗수르는 지중해변에 있는 블레셋의 도시들도 파괴하고 이집트의 북부지역까지 내려갔다.
남왕국 유다는 이 혼란의 틈 속에서 살아남았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 남왕국 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신앙적 개혁을 감행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들었다(왕하 18:3-7).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고 독립을 꾀했다.
역사적으로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사르곤의 암살은 히스기야에게는 희소식이었지만,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은 더욱 강력한 제국 확장 정책으로 남유다를 계속 압박했다. 산헤립은 이스라엘로 진격해 왔고 히스기야는 부랴부랴 성벽을 보수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산헤립의 일대기 기록에 의하면 그는 46개의 도시를 치고 예루살렘을 향했으며 히스기야로부터 상당한 조공을 얻어냈다.
열왕기하 18:14-17과 역대기하 32:9는 산헤립이 라기스를 정복하고 예루살렘까지 위협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건은 앗수르 니느웨의 산헤립 궁전 벽 부조에도 묘사되어 있다. 앗수르의 왕들은 자신들의 궁전 벽부조에 다른 나라를 점령한 승리의 장면들을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원정의 시작부터 전쟁 장면 그리고 점령 이후 포로들과 조공을 받는 장면까지 상세히 기록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렇게 궁전을 장식해 앗수르 왕의 부강한 힘을 과시하는 데 노력했다.
벽부조는 전쟁 지역의 주변 환경과 성벽의 모습 심지어 그 지역 주민들의 의복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우리에게 고대 중동과 가나안 지역에 대한 자연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라기스 벽부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쉐펠라 지역과 라기스 성, 그리고 유다인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라기스 주변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과일인 대추야자의 나무(성서에서는 종려나무로 번역되었다)와 포도나무로 둘러 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벽부조 발굴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라기스의 성벽은 이중 성벽으로 새겨져 있고, 성문의 탑과 성문으로 향하는 경사진 비탈길도 보인다. 비탈길에는 도망가는 피난민들이 커다란 주머니를 들고 가고 있다. 피난민들과 앗수르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라기스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당시 남왕국 유다의 의복도 엿볼 수 있다. 남왕국 유다인들은 앗수르의 군사들과는 다른 헬멧과 두건을 쓰고 있다.
이 벽부조에서 특이한 것은 앗수르 군사들이 라기스 성벽을 향해 공성퇴를 매단 병거를 밀 때 병거와 군사들이 올라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긴 세 개의 막대기 같은 형태의 물체다. 산헤립은 그의 일대기에 인공으로 언덕을 쌓아 공성퇴를 사용해 공격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라기스를 발굴한 우쉬쉬킨(D.Ushshkin) 교수는 라기스 언덕의 남서쪽에서 성벽을 향해 인공으로 쌓은 언덕을 발견했다. 이 언덕은 1만5000t의 흙과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공성퇴 병거가 올라갈 수 있도록 언덕 위를 두껍게 회칠을 하였다. 라기스 성 내부에서는 이 언덕 반대편에 누벽을 쌓아 성벽을 올리고 성벽을 넘어오는 이들을 공격했던 흔적이 발견됐다.
전쟁의 극심함은 주변에서 발견되는 화재의 흔적과 함께 수백 개의 무기들 즉 물맷돌, 화살촉, 창끝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벽부조에서도 서로를 향해 던지고 쏘는 무기들과 유다인들이 던지는 횃불을 볼 수 있다. 라기스 언덕의 한 동굴에서는 1500명의 해골이 발견되었는데 벽부조에서 보여지는 앗수르의 군사들이 적군을 죽이고 머리를 잘라 내관에게 보여주고 전쟁에 참여한 수당을 받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라기스의 멸망
산헤립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진 라기스는 히스기야 시대만큼의 모습으로 재현될 수는 없었지만 요시야 시대(주전 639∼609년)에 다시 한 번 재건돼 요새로 쓰였다. 그러나 이 도시의 운명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략으로 라기스는 이 땅에서 사라졌다.
바벨론과의 전쟁 역시 마치 영화를 보듯 처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레미야는 “그때에 바벨론의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읍들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라”(렘 34:7)고 당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라기스의 발굴을 통해서 이 역사적 장면이 사실임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라기스의 장군으로 보이는 요아스에게 라기스와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 장관으로 보이는 호샤야후가 보낸 편지가 쓰여 있는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18개의 편지는 대부분 호샤야후가 요아스에게 부탁을 하거나 군 상태를 보고하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4번 편지로 호샤야후는 요아스에게 아세가를 우리는 볼 수 없고 다만 라기스의 봉화만을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 위에서 언급한 예레미야 34:7의 전쟁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바벨론의 무차별한 칼날을 피하지 못한 라기스는 오랜 세월동안 버려진 황폐한 언덕으로 남아있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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