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아랏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25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아랏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아랏 기사의 사진
유다광야와 네겝 경계지역… 이스라엘 남방 지킨 요새 발견

네겝 땅의 아랏

모세와 이스라엘이 바란 광야에 위치했던 가데스바네아를 출발하여 가나안 땅 진입을 시도했을 때 첫 전쟁 상대는 남방의 아랏(Arad)이었다(민 21:1). 아랏의 왕은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외쳤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넘기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니라.”(민 21:2∼3)

결국 아랏은 이스라엘의 땅이 되었고 가나안 정복 이후 아랏은 유다 지파의 땅이 되었다(삿 1:16).

아랏은 유다 광야와 네겝의 경계 지역에 있는 한 언덕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텔 아랏(Tel Arad)’이 그곳이다. ‘교회사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며 주후 3세기경 활동했던 유세비우스 역시 비잔틴 시대에 텔 아랏이 성서의 아랏이라고 밝힌 바 있다. 네겝 지역에서 유목을 하던 베두인들도 이 언덕을 아랏이라고 불러 왔다.

현재 이 고대 유적지와 10㎞ 떨어져 있는 현대 도시 아랏이 있어 성서의 아랏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랏은 아미란(R. Amiran)과 아하로니(Y. Aharoni)가 1962년부터 67년까지 발굴했다.

가나안 도시

아랏은 남쪽의 네겝과 유다 광야의 경계 지역에 위치해 있어 강우량이 매우 적은 지역이다. 5000년 전 네겝의 강우량은 현재의 두 배 이상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랏은 서쪽 에돔 땅으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입지에 있었다.

아랏에서 가장 오래된 층은 주전 4000년경 거주했던 동석병용기 시대이다. 아랏이 가장 발전했던 시대는 초기 청동기 즉 주전 3000∼2650년경으로 당시 도시 크기가 12만㎡에 이르며 2500명 정도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시 전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성벽의 길이가 1200m이고 두께는 2.4m였다. 두 개의 성문이 발견되었다. 성벽에는 반원형태의 탑과 사각형의 탑이 세워져 있었다. 도로는 계획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성문에서 뻗어나간 도로는 도시의 중심을 향해 있었다. 물 저장고도 있었다.

가옥들은 직사각형의 모양이다. 입구가 안뜰을 향한 긴 벽에 놓여 있었다. 가옥 바닥 자체는 안뜰보다 낮아 계단으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다. 방은 나무기둥 하나로 지붕을 지탱하는 독특한 구조였다.

궁전과 신전은 도시의 서쪽에서 발견되었다. 신전에서는 잘 다듬은 석상이 발굴되어 신의 임재를 표현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궁전에서 발견된 석회석 조각에는 곡식 단처럼 생긴 두 형상이 하나는 누워 있고 하나는 서 있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고대 근동에서는 흔하게 이야기되는 비가 오는 여름에는 죽었던 신(예를 들어 담무스)이 비가 오는 시기에는 살아난다는 신화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 아랏은 네겝의 남쪽 광산에서 채취한 구리와 사해 역청을 거래하는 무역로에 위치한 도시로 네겝 지역의 중심도시였다. 더불어 이곳에서 발견된 이집트 토기와 이집트 제1왕조의 왕 나르메르의 이름이 씌어있는 토기 조각은 당시 이집트와 무역이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에 띄우는 배와 미라를 만드는데 역청을 발라 마감을 했었기 때문에 아랏을 통과한 무역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부유했던 아랏은 주전 2650년경 갑자기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가 되어 버려졌다. 아랏이 왜 버려졌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아마도 네겝의 온도가 훨씬 더 올라가 덥고 건조한 기후가 되면서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도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 요새

안타까운 것은 아랏에서는 모세와 이스라엘이 파괴한 아랏 왕의 도시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오히려 텔 아랏에서 남서쪽으로 11㎞ 떨어진 텔 엘-밀흐(Tel el-Milh)가 아랏이었다가 텔 아랏에는 모세의 장인을 비롯한 겐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아랏이라고 불렸다고 추측하고 있다. 실제로 텔 아랏은 주전 11세기경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했던 시기에 다시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아랏이 유명한 것은 솔로몬 시대부터 남왕국 유다의 멸망시기까지 이스라엘의 남쪽 네겝을 지키는 요새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요새는 남쪽에서 동쪽으로 연결되는 무역로를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요새의 크기는 55m×50m로 규모는 작지만 5m 두께의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동쪽 성문 옆의 두 개의 탑과 성벽의 네 귀퉁이마다 세워진 탑에서는 요새에 다가오는 이들의 동태를 살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을 위해 암반을 파 물 저장고를 만들었는데 이 저장고의 물은 요새의 남쪽 아래 4.6m×21m 크기 우물을 파서 물을 끌어다가 채웠다.

이 요새에서 무엇보다 관심을 받은 건물은 신전구역이었다. 성서는 이스라엘 왕국시대에 오직 예루살렘에만 여호와의 집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호와의 집에는 현재 무슬림의 사원이 있고 이미 고대의 전쟁으로 인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아랏의 신전은 현재 남왕국 유다지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신전이다. 특히 아랏에서는 이스라엘 왕국 시대 제사장들의 이름 중 바스훌(렘 20:1)과 므레못(스 8:33)의 이름이 적힌 토기 조각이 발견되어 이 신전이 남왕국 유다에 속해 있었다는 데 의심이 없다. 또 다른 토기조각에서는 ‘여호와의 집’ 즉 성전을 언급하는 글이 기록되었다.

요새의 남서쪽 구석에 위치해 있던 신전구역은 예루살렘의 성전처럼 안뜰을 만나게 된다. 안뜰에는 돌을 쌓아 만든 2.5m×2.5m 크기의 제단이 있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던 브엘세바의 제단과는 달리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다. 지금은 찾아 볼 수 없지만 학자들은 고대 이 제단의 네 구석에는 뿔 모양으로 생긴 다듬지 않은 돌이 얹혀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다.

제단의 맞은편에는 성소구역이 있다. 세 개의 계단을 따라 안뜰보다 높게 만들어진 지성소로 들어가기 바로 전 우리는 두 개의 작은 돌로 만든 제대를 만난다. 제대의 꼭대기에는 고대에 유기물질을 태웠던 흔적이 발견된 바 있어 제사가 거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성소에는 1m 높이의 석상 2개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제대도, 석상도 모두 2개라는 점과 석상의 경우 돌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신상을 의미했던 고대 근동의 종교적 관습이 어떻게 유다 땅에서 발견되었는가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신전이 파괴된 시기를 통해 그 해답을 얻었다. 아랏의 요새 자체는 주전 586년 바벨론으로 인해 파괴를 당했지만 신전은 주전 700년경(히스기야 시대)과 주전 650년경(요시야 시대) 2차례 파괴당했고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아랏의 신전은 히스기야(왕하 18장)와 요시야(왕하 23장)의 종교개혁 당시 파괴된 지방의 산당 중 하나로 두 신을 동시에 섬겼던 장소라고 해석하고 있다.

아랏은 바벨론 시대를 거쳐 주전 5∼4세기 페르시아 시대까지 지속됐다. 요새도 헬라시대와 로마시대를 거쳐 주후 800년대 중반 이슬람 시대까지 사용되다가 버려진 언덕이 되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