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브엘세바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23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브엘세바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브엘세바 기사의 사진
이스라엘 내 사람이 살 수 있는 최남단… ‘7개의 샘’ 어원 지녀

유네스코 지정 세계 유산 유적지

성서는 이스라엘의 경계를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고 말하고 있다(삿 20:1, 삼상 3:20, 삼하 3:10, 17:11, 24:2, 왕상 4:25). 단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있는 도시지만 브엘세바는 최남단에 있는 도시는 아니다. 브엘세바 남쪽은 네게브라 불리는 지역으로 성서는 이곳을 남방이라고 불렀다.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내려갈 때 네게브를 지나갔고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향해 올 때도 네게브를 지나갔다. 성서는 또한 이곳을 광야 혹은 사막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네게브는 비가 오지 않아 마치 사막과 같은 지역이기 때문에 브엘세바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이스라엘 최남단에 위치한 마지막 도시였기에 남쪽 경계도시로 불리곤 하였다. 현대에도 네게브 지역은 비잔틴시대나 십자군 시대에 은둔자들의 거처의 흔적이나 오아시스를 개발해 생겨난 작은 키부츠들 외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현재 브엘세바라고 불리는 도시 옆에 위치한 텔 세바(Tel Sheva)를 고대 브엘세바라고 추정하고 있다. 텔 세바에서는 1969년부터 텔아비브 대학교의 아하로니(Y. Aharoni) 교수의 지도 아래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2003년까지도 발굴이 진행되었다. 텔 세바를 성서의 브엘세바로 보는 학자들의 의견은 거의 논란 없이 일치하고 있으며 발굴의 성과가 성서 내용과 상당히 근접하다는 결과로 인해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 유적지로 지정된 바 있다.

맹세의 우물/일곱 개의 우물

브엘세바는 7개의 샘이라는 히브리 어원을 갖고 있다. 또한 맹세의 샘이라는 뜻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브엘세바의 어원을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의 언약 ‘창 21:31)에서 찾고 있고, 또한 이삭과 아비멜렉의 언약(창 26:33) 때문이라고도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그랄 지방 아비멜렉의 자손들과 우물에 대한 시비가 붙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물들을 빼앗는 아비멜렉의 자손들 때문에 발생한 싸움이 마무리되면서 이 장소는 우물을 판 증거에 대한 맹세로 혹은 더 이상 싸움이 없는 것에 대한 맹세로 브엘세바라고 불렀다. 이때 아브라함의 일곱 양이 언급되며 이삭은 일곱 개의 우물을 팠다. 어찌됐든 이 이름은 브엘세바가 물이 풍부한 장소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수자원이 풍부하다는 조건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는 결과를 이야기해 준다. 실제로 텔 세바에서는 주전 4000년 동석 병용기 시대부터의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며 수많은 우물들과 물 저장고들도 함께 발견되었다.

텔 세바에서 발견된 왕국시대의 유물과 건물들은 성서의 스토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맹세의 땅이었던 브엘세바는 야곱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주요 거주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야곱은 벧엘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은 후 브엘세바를 그의 주요 거주지로 삼았다(창 28:10∼15, 46:1∼7). 여호수아는 정복 전쟁 이후 브엘세바를 시므온과 유다의 땅으로 배분하였으며(수 15:28, 19:2)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사로 브엘세바에 살면서 그들의 아버지와는 달리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뇌물을 받고 재판을 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삼상 8:2). 고고학적으로도 주전 1200년경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적인 항아리라든가 가옥의 형태가 나타나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새화된 도시

처음 브엘세바를 요새화하고 성벽을 쌓은 이는 사울이었을 것이다. 사울은 이스라엘 영역 사방의 적들을 몰아내었는데 남방의 아말렉도 물리쳤다(삼상 14:47∼48, 15:2∼9). 사울이 건설한 도시는 후대에 가면서 좀 더 요새화된 도시적 성격을 드러냈다. 브엘세바 도시의 모습은 마치 현대의 잘 구획된 도시처럼 도로가 뻗어 있으며 도시 외곽 전체를 가옥들로 연결하여 마치 성벽을 이루는 것처럼 건설되었다. 도시 내부는 행정구역과 상업적 지역, 군사 지역 등 필요에 따라 잘 구분되어 있었다. 도로에는 마치 현대 도로 바닥에 깔려 있는 것 같은 하수도가 있었다. 성문 입구 왼쪽에는 우물이 있는데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물을 연상케 한다. 뿐만 아니라 최근 발굴에 의하면 브엘세바는 바닥을 파고 돌을 쌓아 건설한 거대한 물 저장고도 있었다. 성문은 돌로 기초를 쌓고 진흙 벽돌을 그 위에 쌓고 양쪽에 탑을 만들어 도시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도시의 중앙에는 다른 곳보다 높게 쌓아 플랫폼을 만들고 그 위에 세워진 행정건물이 있어 도시를 통치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다.

더불어 기둥들이 두 줄로 길게 세워져 있는 독특한 건물들이 발견되었다. 이 건물들은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시장이나 곡식 저장고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구간으로 해석하고 있다. 말이나 마차는 고대에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나 통치자들의 전쟁을 위해 사용된 것으로 브엘세바가 이스라엘 최남단의 도시로서 행정적, 군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다(왕상 4:25).

저주 받은 도시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브엘세바가 여호와의 책망을 받은 도시였다는 것이다. 요시야가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율법서를 찾아 이스라엘 민족이 전혀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 종교개혁을 단행했을 때 그는 게바에서 브엘세바까지 제사장들이 분향하던 산당을 없애버렸다(왕하 23:8). 아모스도 브엘세바의 종교적 타락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가 있어 종교적으로 타락했던 벧엘을 찾는 것처럼 브엘세바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암 5:5). 또한 사마리아의 우상을 두고 맹세하거나 단의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듯이 브엘세바를 두고 맹세하면 죽으리라고 예언하고 있다(암 8:14).

결국 남유다의 브엘세바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이방신을 섬겼던 것처럼 심각한 종교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브엘세바에서는 이러한 종교적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주전 8세기 후반∼7세기 초반에 건설된 곡식 저장고의 벽에서는 뿔 모양으로 생긴 돌 3개가 발견되었다. 이 돌들은 네모반듯하게 벽돌을 깎아 쌓았던 이스라엘의 건축양식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학자들은 이전시대에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던 돌들이 저장고의 벽돌로 재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뿔들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돌들을 저장고의 벽에서 뽑아내어 쌓아보았더니 1.5m 높이의 제단이 완성되었다. 이스라엘에서 뿔 달린 제단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성서는 이미 이스라엘의 성전과 성막에 뿔 달린 제단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단은 성서 율법에 위배되는 성격을 보이고 있다. 성서는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지 않은 돌로 쌓으라고 명령하고 있지만(신 27:6, 수 8:31) 브엘세바의 제단은 잘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더불어 제단에 사용된 돌 중 하나에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풍요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뱀 모양이 새겨져 있다. 학자들은 이 제단이 주전 8세기경 브엘세바에서 사용되다가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주전 720년경) 당시 파괴되어 곡식 저장고를 건축할 때 벽돌로 다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브엘세바는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면서 다시 작은 도시가 건설되었다. 로마시대에는 네게브와 요단강 동쪽편에 거주했던 나바티안의 공격에 맞서서 싸우기도 했다. 또한 주후 7세기 아랍의 이스라엘 정복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