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⑧헤롯과 예루살렘 2

열려라 에바다 2014. 8. 23. 12:53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⑧헤롯과 예루살렘 2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2)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 ⑧헤롯과 예루살렘 2 기사의 사진헤롯, 건축에 관심과 안목… 유대인 환심사려 성전 복구

성전 복구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역사를 기록한 요세푸스는 헤롯이 헤로디온 마사다 가이사랴 사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을 얼마나 아름답게 건설하였는지 기록하였다. 헤롯은 건축에 깊은 관심과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헤롯 자신이 직접 도시의 건물을 설계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물론 로마 문화를 사랑했기 때문에 헤롯이 세운 건물들에는 대부분 로마식 건축 양식이 도입되었다. 로마의 분봉 왕이었지만 유대와 유대인의 왕이란 사실을 잊지 않았던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복구를 그의 건축 프로젝트 중 가장 우선 과제로 삼았다.

헤롯은 예루살렘에 분봉 왕으로 재위한 지 18년 되던 해(주전 19년)에 스룹바벨과 느헤미야가 주전 516년에 세웠던 제2성전을 복구했다. 헤롯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경건한 유대교인으로 비춰지길 바랐기에, 예루살렘 성전의 복구야말로 자신의 신앙심을 과시할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 관한 지난 연재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늘날 헤롯의 예루살렘 성전 역시 안타깝게도 그 흔적을 찾는 것이 어렵다. 헤롯의 성전은 현재 바위돔(Dome of Rock)이라고 불리는 무슬림의 성지에 있기 때문에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현재의 상황에서는 발굴도 불가능하다. 단지 우리는 요세푸스의 기록과 최근 성전산 벽 주변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통해 과거의 모습을 재현해 볼 뿐이다.

성전산

솔로몬의 성전(제1성전)은 아마도 예루살렘의 북쪽에 위치한, 유대교에서 말하는 모리아산 꼭대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2성전 역시 이 산 위에 세워졌다. 모리아산은 북쪽으로는 편평한데 반해 남쪽은 경사가 급했다. 하스모니아 왕조시대에는 북쪽의 평지를 중심으로 벽을 쌓고 성전을 세웠다. 우리는 이 성전과 성전이 세워져 있는 산을 성전산(Mountain of the Temple)이라고 부른다.

헤롯은 성전산의 남쪽을 확장하였다. 성전산의 동서 폭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넓어지지 않았지만 남북의 길이는 더 길어졌다. 남북의 길이는 약 487m, 동서로는 약 274m에 달한다. 확장된 성벽의 흔적은 지금도 성전산 벽의 동쪽에서 볼 수 있다.

하스모니아 왕조 때 세워진 성전산 벽과 나란히 후대에 덧붙여진 벽돌들을 볼 수 있는데, 벽돌의 모양으로 보아 헤롯 시대의 것이 분명하다. 성전산을 쌓기 위해 사용된 벽돌은 평균 길이가 70㎝이고 무게는 28t이다. 가장 큰 벽돌의 경우 길이만도 13m에 이르고, 무게는 무려 600t이나 되었다.

헤롯은 성전산을 확장하면서 기존 언덕의 경사면을 편평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는 돌을 쌓아 둥근 아치모양으로 만들어 그 위에 플랫폼을 깔았다. 현재 이 둥근 아치들은 성전산 남쪽 끝에 있는 알악사(al-Aqsa) 모스크 지하에 여전히 서 있으며 ‘솔로몬의 마구간’이라 불린다. 아치의 기둥들이 마구간에서 동물들을 묶어놓는 장치와 비슷해 보였고, 한때 솔로몬의 성전과 궁전이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아치들은 일반인들에게는 관람이 금지되어 있다.

알악사 모스크의 남쪽 끝은 헤롯시대에는 벽으로 둘려 있었다. 그 벽의 한 부분에서는 안식일과 절기를 알리기 위해 제사장이 나팔을 부는 장소가 있었을 것이다. 이 장소를 표시하는 기록이 남겨져 있는 돌 하나가 발견된 바 있다.

예루살렘의 성전산 서쪽은 골짜기다. 서쪽에 사는 유대인들은 성전에 가기 위해 골짜기를 내려와 다시 산을 오르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이런 번거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서쪽 지역에서 성전산으로 들어가는 아치 형태의 다리들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성전산벽에서 이 잘려나간 다리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다리들 중 유명한 것은 ‘로빈슨의 아치’로, 1830년대 성전산 벽의 벽돌 틈 사이에 삐죽하게 밖으로 드러난 아치의 끄트머리를 로빈슨이 발견하여 명명한 것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성전산의 서쪽벽에는 4개의 문이 있었다고 한다. 남쪽에서 성전산을 올라가기 위한 계단은 이미 발굴되었으며, 계단 꼭대기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들도 벽 틈에 흔적이 남아 있다. 중앙에 있던 문은 ‘훌다 문’이라고 불렸는데 지금도 당시 입구 윗부분을 장식했던 조각의 일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다. 비록 입구는 후대에 막아버렸지만 문의 형태는 육안으로도 확연히 볼 수 있다.

알악사 모스크 1층 내부에는 이 훌다 문을 지나 성전산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있다. 이 복도의 천장에는 헤롯 시대의 장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남쪽 벽의 동편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입구는 후대에 막아버렸다. 이 문들은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성전산에 오르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기둥들의 행렬이었다. 백색의 대리석으로 만든 162개의 기둥들이 4열로 성전산 전체를 둘러 서 있었다. 기둥머리는 고린도 양식으로 조각되었으며 그 위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천정이 씌워졌다. 이 행렬의 동쪽 부분은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불렸다. 아마도 솔로몬과 관련된 고대 건물의 흔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은 수전절(히브리어로 하누카-더럽혀진 성전을 청결히 하고 수리한 것을 기념하는 명절)에 이 솔로몬의 행각에서 거닐다가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라는 제안을 들었다(요 10:22∼23). 신약시대 솔로몬의 행각에서는 학자들이 자주 모여 토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롯 성전

성전산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덕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성전 안까지 들어와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행각과 성전 사이 마당에 있던 이 장사치들을 향해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5∼16)고 말씀하셨다.

성전은 이 마당보다 15규빗(1규빗은 약 50㎝) 높은 단상 위에 세워졌다. 단상까지 가려면 14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단상에는 돌로 울타리를 세워 경계를 쌓았다. 울타리에는 9개의 입구가 있었고, 중간에는 돌비석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발견되었다. 비석에는 헬라어로 “이방인은 성소를 두르고 있는 이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누구든 이 법을 어길 시에는 죽음으로 그 죄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씌어 있었다.

울타리 안쪽은 다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동쪽은 ‘여인들의 안뜰’이었다. 여인들은 성전 그 자체에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제사가 드려지는 동안 이곳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성전 안뜰로는 오직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여인들의 안뜰에서 성전 안뜰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15개의 계단을 올라 금과 은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문을 통과해야 했다.

성전 안뜰의 벽을 따라서 제사 용기를 보관했던 곳을 비롯해 여러 제사와 관련된 용도로 사용되는 방들이 있었다. 안뜰의 서쪽에는 다시 12개의 계단이 있어 성전 자체가 세워져 있는 단상이 있었다. 단상 위의 성전 입구 앞에는 제물을 태우기 위한 제단이 있었다. 제단은 정사각형으로 4면의 길이가 50규빗이었으며, 높이는 15규빗이었다. 제단의 북쪽에는 24개의 링을 땅에 박아 제단에 바쳐질 동물을 묶어 놓았었다. 8개의 대리석 탁자가 있어 희생 제물들을 준비할 수 있었다. 남쪽에는 청동으로 만든 물두멍이 있어 제사장들이 정결례를 취할 수 있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터치바이블 대표·서울신학대학교 한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