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희 섬(:대마도)은 조선 지방이니, 마땅히 조선 일에 힘을 써야 한다."
― 에도 막부(江戶幕府) 장군의 측근이 대마도 고위관리에게 한 말. 서기 1617 년 통신사 이경직(李景稷 : 1577∼1640)이 자신들(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던 대마도의 고위관리에게 이 말을 듣고 적어 놓았다.
2. 대마도는 … 대대로 우리 조정의 은혜를 받아 조선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요, 땅으로 말하자면 조선에 부속된 작은 섬이다.
― 서기 1590 년,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 부사로서 일본을 다녀온 김성일(金誠一 : 1538∼1593)이 조선에 돌아온 뒤 낸 보고서에서
3. 우리 대마도에게 조선 영토 안의 주 군(州 郡)의 예에 따라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 : 도장)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 서기 1419 년 대마도 정벌 뒤에 대마도주가 보낸 서신에서.
4. (전략) … 이곳은 일본 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서 망령되게 자존하면서 포악하오나, 이들 모두 도서(圖書)를 받고 우리 조정에 귀순하기를 바라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데 이 섬의 두목들에게 예전처럼 오고 가게 하고, 이따금 양식이나 주고 도서를 주어 뜻밖의 우환에 대비하게 하소서.
― 서기 1444 년 대마도에 보내졌던 초무관 강권선(康勸善) 이 世宗에게 보고한 글.
5.『산가요약기(山家要略記)』(:12 세기 말 일본 천태종의 승려가 쓴 책)에 말하기를 "대마도는 고려국의 행정치소인 목(牧 )이다. 옛날에는 신라 사람들이 살았는데, 개화천황(開化天皇)대에 이 섬(대마도)으로부터 (일본본주로) 습래(襲來)해 왔다. 중애천황(仲哀天皇;신공황후가 섭정) 이 풍포궁(豊浦宮)에서 나와 대마도 악포(鰐浦)에서 新羅(당시 對馬島에 있던 佐護加羅 중심의 新羅임)를 정벌함으로써 마침내 이 섬을 얻었다."고 하였다.
6. 1723 년 對馬島人 등정방(藤定房)이 쓴 대마도의 역사서인『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에서 무릇 對馬島는 옛날에는 新羅國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
7. 13세기 말의 일본 책인『진대(塵袋)』 제 2권에서 『高麗史』에 의하면 고려는 선종 2년(1085) 이래 대마도주를 '대마도구당관(對馬島勾當官)'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흥미롭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제주도의 성주(星主)를 '탐라구당사'(耽羅勾當使)로, 일기도(壹岐島 : 대마도와 구슈 섬 사이에 있는 이키 섬) 도주(島主)를 일기도구당관(壹岐島勾當官)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당관은 高麗時代 변방 지역 내지 수상(水上)교통의 요충지를 관장하는 행정 책임자들에게 붙인 관직명이다. 이를 보면 탐라, 대마도, 일기도의 지배자에게 고려가 구당사 혹은 구당관이란 명칭을 붙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앞의 세 섬을 고려의 속령(屬領: 영토로 속한 땅)으로 인식하였거나 아니면 고려 정부가 대마도와 제주도를 고려 고유의 지배 질서 속에서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