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자유(r-137)
인간은 누구에게나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리를 통해 깨닫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깨달은 진리는 우리의 인생관과 신앙관의 기초가 되며 우리의 삶과 태도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관과 삶의 태도는 결국 우리 자신의 무의식 세계인 잠재의식 속에 정착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의식적인 구조가 우리의 삶에서 크고 작은 많은 결정을 하지만 실제 아무도 우리를 의식하지 않는 우리의 삶속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무의식구조가 하루에도 수많은 결정을 한다. 우리 삶의 대부분의 결정은 우리의 의식적인 구조 보다는 무의식 구조에 의해 결정 되는 것이 많다. 평소 우리의 삶에서 무의식 구조가 내린 적은 결정들이 우리의 의식 구조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무, 의식 구조들이 우리의 인생관과 신앙관 그리고 우리의 삶의 태도를 만드는 근간이 된다.
이렇게 우리의 觀 과 태도와 우리의 無, 意識構造는 상호 호환한다. 인간의 긍정적인 변화에 대한 갈망과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 중에 하나일 것이다. 성경은 진리의 보고이다. 성경에는 복음진리뿐 아니라 일반 진리도 광범위 하게 소장되어있다. 그러나 진리는 반드시 성경에만 소장 되어있는 것이 아니며 진리는 사실 어느 책에도 소장 되어있다. 또 진리는 책에만 국한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자연계에도 있고 인간의 역사에도 있다. 사실상 진리는 어느 곳에도 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은 우리에게 진리의 멧세지를 보내고 있다. 진리발견을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의 겸손한 마음과 열린 마음이다.
진리의 정의;
칸트는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나의 머릿속에 있는 개념과 실제의 그 사물이나 사건이 일치할 때 그것이 진리 이다’ 라고 정의 하였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철학자의 정의와 신앙인들의 정의는 다르다.
신앙인들에게 진리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님의 생각이다. 신앙인들에게 진리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구현 하는 것이며 자신의 그릇된 사고나 착각된 사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신앙인들 에게 진리는 ‘자신의 신념이며 자신의 생명이며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신앙인들이 진리를 위해서 목숨 을 내놓지는 않지만 신앙인들은 진리를 믿으며 진리를 삶의 중심에 놓고 살려고 노력한다.
물론 진리는 신앙인들만 의 전유물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진리를 향한 본능적인 갈망을 갖는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셨고 인간의 영혼은 진리와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다수가 믿는다고 진리는 아니다. 객관적으로 진리는 오류로 반박되지 않아야한다. 그러나 실제 진리는 각자가 깨달은 것이며 확신하는 것이며 믿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개인의 의지가 작용한다. 진리는 각자가 믿는 것이기 때문에 각자는 자신이 믿는 것을 수호해야하는 생각을 갖도록 유혹한다.
즉 진리는 인간을 교만하게 하는 취약성이 있다.
신앙인들은 진리를 성경이라는 굴레 속에 넣고 DOGMA 라는 울타리를 치려고 한다.
진리의 싸이클; 지성/이성->깨달음->관->진리
*지적 단계;
진리가 머리로 들어와서 진리를 알고 깨닫는 단계이다. 진리는 우리의 5관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어오며 머리에 들어온 진리는 지성과 이성을 통하여 분석 저장 된다.
*정적인 단계;
머리로 들어온 진리가 가슴으로 내려와서 진리를 가슴으로 느끼며 깨닫는 단계이다. 모든 진리가 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서 느끼며 깨닫지는 못한다. 또 경우에 따라 진리는 머리에서 가슴에 도달 하는 진리로 끝나고 마는 진리도 많다.
*의적인 단계;
가슴으로 느낀 진리를 우리의 행동으로 실천하며 헌신 하는 단계이다. 우리가 깨달은 진리나 가슴으로 느낀 많은 진리는 우리의 인생관과 신앙관의 근저가 되는 것이다.
복음진리는 우리의 전통과 가치관과 본능과 상치한다.
믿음이란 복음진리 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며 변화된 우리의 의식구조이다. 그래서 믿음은 성경을 읽고 들음에서 나온다.
또 믿음은 우리의 변화된 생각이며 변화된 가치관이며 변화된 인생관이기 때문에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변화는 우리의 능력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긍정적인 변화는 모두 하나님의 인도함이기 때문이다.
복음진리는 인간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인도한다. 복음은 이렇게 인간에게 혁명의 메시지이며 변화의 메시지다. 대부분 진리가 우리의 가치관과 상층 하지만 특별히 복음진리는 우리의 전통의식과 가치관과 본능의식과 상층 한다. 복음진리는 인간의 전통을 깨트리며 인간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어주며 인간의 본능의식을 초월한다. 그래서 복음진리가 대중에게 보편성을 갖지 못한다. 성경의 복음진리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그래서 인간의 구원과 생명과 소망의 근원이 된 것이다.
복음은 자체에 능력이 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복음은 자체에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는 많은 경우 상층성이 있고 2중성이 있으며 복합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복음진리는 마음의 문만 열면 이해하기 쉽고 단순하며 간단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리는 진리를 어느 방향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그리고 누가 보며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이해되며 소화된다. 진리는 때로 왜곡되며 전혀 다른 내용이 되며 우리를 혼란하게 만든다.
쉬운 예를 들어본다. ‘음식은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 귀한 것임으로 귀한 것이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옳은 진리의 말이다. 식량이 귀한 아프리카 지역이나 식량이 부족한 이북에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식량이 풍부하여 먹는 것 보다 버리는 것이 많은 미국 사람들에게는 옳은 말은 아닌 것이다.
기독교 진리가 왜곡된 이유;
1.그런데 기독교의 진리가 많은 경우 왜곡되어 전달된다. 물론 고의성은 없지만 대부분 인간에게 불가능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전달자들의 인간적인 한계와 사회적인 타협으로 왜곡 되었다. 즉 전달자 자신이 확신이 없거나 실행 할 수 없는 많은 진리는 전달자의 수준으로 왜곡된다.
2.예수님의 대부분 진리는 왜곡 되었고 전달자들이 현실과 타협된 진리만 전파된다.
오늘날 예수님이 말씀 하신 진리의 말씀을 실행하지 못한다고 고민 하는 신앙인들은 많지 않다.
예수님의 진리는 목사님들에 의해서 실천을 강조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어주고 2 벌의 옷이 있으면 한 벌은 남을 주고 자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 목사님들도 거의 없다. 예수님의 진리는 우리가 거의 실행 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원래 요구하시는 헌신은 총체적인 헌신이다. 중간도 타협도 일부분도 아닌 모든 것을 다 거는 'all in' 이다.
오늘날 교회는 진리를 세속적으로 이해하며 타협 한 후 진리가 아닌 많은 것을 진리로 정착 하였다. 예를 들면 교인들은 교회에서 열심히 헌신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도덕적인 결함은 어느 정도 용서하여 주신다고 착각한다.
3.인간적인 부족함으로 진리는 왜곡되고 오해 된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이기심과 옹졸함을 진리로 그리고 우리의 편견을 진리로 그리고 우리의 동정하는 마음을 진리라고 확신하기 도 한다.
진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넓은 마음과 열정과 사랑을 요구 한다. 목회자가 개 교회부흥에만 초점을 두면 교회의 사명은 개 교회의 존재로 추락한다.
진리의 2중성;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부인과 자기포기는 신앙인이 갖추어야할 매우 중요한 자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자기부인과 자기포기를 해야 한다. 자기부인과 자기포기를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자아를 죽이고 깨뜰어야 하며 자신의 본능과 싸워 이겨야한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던 자신의 시간, 재물, 능력 등이 어느 순간에서 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깨닫고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포기사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인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위해서는 자아를 만족 시켜 주어야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건전한 자아를 형성하는 것은 헌신과 희생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자기부인/자기포기> 그리고 <자아만족>은 2개의 거대한 상반되는 진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자기희생도 자아 만족이라는 진리가 나오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기부인과 자기포기도 자아만족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희생과 헌신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희생과 헌신은 자신의 신념을 만족하는 기회로 그리고 성취와 기쁨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도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때로는 진리를 이해하는데 인간의 전통과 관습과 통념과 가치관이 방해를 한다. 복음진리뿐 아니라 모든 진리는 인간의 변화의 통로이다.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깨닫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보완 및 상층성;
진리는 크게 나누어서 일반적인 진리와 절대적인 진리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인 진리는 예를 들면 ‘인간은 변화 한다’ 이다. 또 ’인간은 변화하지 않는 다’ 이다. 2개의 상층적인 진리는 모두 진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여간해서는 변화하지 않는 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결국에는 서서히 조금씩 변화하기 때문이다.
‘게으르면 가난이 도적 같이 온 다’ 는 말이 있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진리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나님의 <심판>와 <사랑> 도 2개의 보완, 상층 되는 진리이다. 보완, 상층 되는 2개의 진리는 너무나 다르면서도 그 뿌리가 같기 때문에 한 고리에 있어 서로 떼어 낼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모두 사랑의 진노이며 사랑의 심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과 <행위>도 2개의 상층 되는 진리이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바울사도의 로마서는 행위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는 야고보서의 진리와 상층 된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4:7) 와 하나님을 시험하라(말3:10) 도 완전히 상층 되는 진리이다. 칼빈의 <예정론>과 <자유의지론>도 보완, 상층 되는 진리이다. 장로교의 교리는 예정론을 선호하며 침례교는 자유의지론을 선호한다.
그러나 2개의 상층적인 진리는 깊이 생각할수록 그 상층성이 없어진다. 예정론의 열쇠는 우리는 예정된 자가 누구인지 모르며 믿는 자는 모두 예정된 자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정된 자는 바로 자신이 자신의 예정을 인지하는 자유의지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의 열쇠는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존중하시지만 인간의 의지도 대부분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논리이다.
많은 진리는 보완, 상층적 이며 역설적이다. 우리의 기쁨과 고통이 함께하며 자 유함과 책임이 함께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그리고 심판과 구원이 함께한다. 우리의 좁은 관점과 지혜로 볼 때 진리의 상층 성으로 인하여 진리가 모순으로 보이는 경우기 있다. 그러나 상층적인 진리들도 깊이 연구하면 서로 보완성임을 발견 한다.
진리는 오류와 시행착오로 근접 된다;
진리는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는 같은 내용의 진리 일지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 혹은 환경에 따라 그리고 개인의 신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회와 하나님에게 헌신 하며 헌금 하는 것은 진리이다. 그리고 교회를 떠난 자선기관에 헌신 하며 헌금 하는 것도 진리이다.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과 일반 사회의 일을 엄격 하게 구분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게 하는 헌신만 옳은 진리로 생각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을 제외한 모든 대상을 하나님의 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즉 교회에서 하는 헌신만 하나님의 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부족하기 때문에 진리는 우리의 오류와 시행착오로 발견된다. 또 진리는 우리가 발견 한다기보다 진리에 근접한다고 해야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재발견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중용;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의 중용과 고리 문제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자아만족> 도 2개의 거대한 상반되는 진리이면서 한 고리에 묶여있다. 물론 신앙인들에게 모든 헌신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나 이세상의 어떤 헌신과 희생도 자아만족을 완전히 배재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만족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진리인 것이다. 자아만족은 헌신과 희생의 기본인 자부심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아만족은 한편 인간의 교만과 자기중심사상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우리 신앙인들의 고뇌가 있으며 자가당착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꾸 한쪽으로 치우치는 속성이 있다.
상층 되는 진리에서 하나를 위해서 다른 것을 희생할 수 없으며 하나를 강조하면 다른 하나가 곡해된다. 따라서 때로는 진리는 중용을 요구하며 비상 층을 요구한다.
진리로 인한 자유;
진리는 신념에 대한 확신이며 실존적인 믿음의 대상이다. 또한 진리는 자기초월의 도구이다. 진리의 통로의 순서는 보통 지, 정, 의 이다. 지 는 머리 이며 정 은 가슴 그리고 의 는 우리의 팔과 다리이다. 진리가 처음에는 머리로 발견, 이해되고 가슴으로 내려 온 후 마침내 우리의 발과 팔을 통하여 실천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진리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여행은 길고 멀고 험난한 길이다.
진리가 머리로만 이해될 때 우리는 진리를 공감하며 기뻐하지만 진리가 주는 자 유함을 못 느낀다. 진리가 머리에만 있을 때 우리는 기쁨 보다는 오히려 부담과 아픔과 갈등만 느낄 뿐이다. 진리가 때로는 우리의 멍에가 되고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깨닫고 생각하는 만큼 진리를 삶에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는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 되어야한다. 진리가 우리의 가슴속에 사무칠 때 비로소 자기초월이 가능하며 진리가 주는 자 유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진리가 산 체험되어 자신의 신념이 되고 자기초월의 도구로 사용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리로 인한 자유 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우리의 변화의 도구가 되어 실천 되어야한다. 진리를 통한 자 유함은 우리의 완전한 사랑, 헌신 그리고 완전한 자기부인이 요구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100% 의 사랑과 헌신을 요구 하셨기 때문이다.
진리는 발견되고 발표 되고 체험되어야한다.
복음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며 갈망하는 사람들은 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며 영원한 생명을 갖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복음진리는 만인에게 쓰이고 말해지고 공표 되어져야한다.
복음진리는 결국 인간을 하나님의 가치관에 근접하게 한다. 주님의 마음에 근접한 심정으로 세상을 보는 가슴을 갖게 한다.
모든 진리는 발견되어지고 새롭게 발견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발견된 모든 진리는 발표 되어져야하며 깨달아지고 체험되어야한다. 인간은 자신의 착각된 사고에서 계속 깨어나야 하며 인간은 진리를 통해 긍정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신앙인들에게 진정한 진리는 예수님뿐이다.
‘진리란, 온갖 다양성들의 대비(contrast)를 통한 통합의 차원에서 얻어지는 결정체다.
그렇기에 그것은 결코 온갖 다양성으로의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거기에는 분명한 자기 확신의 줄기가 스며들어 있다.‘
-Whitehead Alfred North-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롬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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