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세리장(稅吏長) 삭개오 ( 뜻: 순결 )
예수께서 여리고 지방을 지내실 때에 많은 무리가 주를 에워싸고 따르고 있었다. 그 때에 그 곳에 세리 장(稅吏 長이)요 부자인 삭개오라 하는 사람이 주를 뵙고자하였으나, 저는 키가 작은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이 많이 둘려서있어 어떻게 뵈올 수가 없어, 저는 뽕나무에 올라가서 주를 뵙게되었다. 그때에 주께서 삭개오의 영혼의 요구를 아시고, 곧 그에게다가 가시여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누가복음 19장 1-10절에 말씀을 읽고 삭개오에 대한 몇가지 교훈을 상고하고자 한다.
저의 심령의 고통
그 때에 삭개오의 심령상태를 상상컨대, 저는 남 모르게 죄의 고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저의 직업은 저의 심령에 큰 고통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 세리는 로마정부의 세관(稅關)관리(官吏)이다. 세리는 유대인들에게 극히 배척을 받으며 싫어하는 직업이다. 유대의 동요에 [산중에는 사자가 있고 성안에는 세리가 있다]하여 극히 미워하며 배척하는 직업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미워하며 배척하는 직장 장으로서, 저의 심령에는 언제나 사회의 압박을 느끼면서 의(義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것이다.
주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이처럼 죄의 번민(煩悶)을 가지고, 그 마음에 근본 위로를 요구하는 사람이다. 저에게 많은 재물도 참 위안이 되지 못하였고, 세리 장이라는 높은 직분도 참 위로를 주지는 못하였다. 저의 영혼의 깊은 요구는 저도 다 - 알지 못하였다. 그 영혼의 깊은 요구는, 오직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는 길 밖에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제사는 상한 심령이니(시 34:18), 세상에는 이처럼 남모르는 번민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다. 이러한 영혼마다 주를 만나야 한다. 기독교는 학 박사의 것이 나니라, 그 마음에 죄의 고통을 가진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주께서 저의 집에 유숙하셨다. 과연 주님은 죄인의 집에 유숙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들도 삭개오와 같이 죄에 대한 심각한 참회로 주님을 영접할 것이다.
주께 대한 갈망(渴望)
저가 주를 사모하여 뽕나무에 올라간 것은, 어떤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러나는 충동에서였다. 저는 평소 사회로부터의 압박과 자기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그의 심령에는 어떤 적적한 감이 있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니 사람의 배속 깊은 것을 살핀다](잠 20:27)는 말씀과 같이 우리의 진정한 요구는 우리의 영이라야 아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함을 삭개오의 영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는 당시 사람들이 들리는 소문에 끄려 주를 따랐음과는 달리, 저가 그처럼 주를 사모한 것은 예수를 이용하여 무슨 세상 허영을 낚아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저의 양심에 참 평안과 영의 참 만족을 요구하는 충동에서였다고 하겠다. 그것은 5절에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주께서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도를 말씀하심은, 주께서 그의 영적 상태를 드려다 보시고 말씀하심이었다. 그처럼 주께서 삭개오의 심령을 드려다 보시고, 그의 요구, 영적인 평안을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하신 말씀그대로 삭개오는 주를 갈망하였음으로 주의 큰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이는 [값진 진주하나를 구하는 사람](마 13:46)과 같으니, 주는 이처럼 사모하는 자의 마음에 임하시는 것이다. 구하는 자마다 얻을 것이며, 찾는 자마다 만날 갓이니, 우리들에게 주께 대한 갈망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저의 무 사기(無 邪氣)함
저가 많은 무리 가운데서, 자기를 가리우려 하지 아니하고 세리장의 그 모습 그대로 나무꼭대기에 올라갔음은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은 무 사기함을 보인다. 이처럼 주를 맛나 뵙기 위하여서는 겸허하고 무사기한 마음이라야 한다. 저가 체면 불고하고 나무에 기여 올라가는 그 형편을 상상해 보시라 얼마나 무 사기한가? 예수님의 말씀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하셨다. 삭개오는 참으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는 다 -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회개도, 간증도 무 사기하여야 한다. 누가 복음 18:9-14에,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해 보라. 바리새인은 자기를 꾸며 기도하였으나, 세리는 자기의 상태 그대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는 이처럼 자기 모습 그대로 나아와야 한다. 화 있을 것은 외식하는 자며, 자고 하는 자들아!
저 오순절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보라 저들은 자기를 꾸며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다가 화를 자취하였다(행 5:1-10). 아론의 아들들은 여호와 앞에 거짓 불을 드리다가 화를 자취하였다. 그럼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는 겸비하며, 또는 무 사기하게 꿈임 없이 나아와야 한다. 은혜에 충만한 다윗은 여호와의 법궤(法櫃)를 모실 때에 너무 기뻐서 춤을 추었다(삼하 6:14). 일를 지켜보던 다윗의 처 미갈은 다윗을 업신여기며 비방하였다(삼하 6:16, 20). 오늘날에도 육에 속한 신자들은 은혜 받은 사람이 기뻐하며 춤을 추며 손 벽을 치는 것을 보고 경건치 안타고 비방하며 비웃는 일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님 앞에서 항상 무사기하며 겸비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저의 철저한 회개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하였다. 이것은 곧 저의 철저한 회개를 증명한다. 회개는 이와 같이 열매가 있어야 한다. 어떤 형제는 어느 상점에서 일하면서 그 주인의 눈을 속여 가면서 많은 급전을 소비하였다. 저가 회개하는 날에 그 주인에게 이일을 자백하고 그 돈을 갚았다. 이것이 곧 열매있는 참된 회개의 실례이다. 어떤 형제는 어느 도서관에 출입하며 공부하다가 그 도서관 책을 가만히 훔쳐다가 자기 소유를 삼았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는 날에 이 책을 그 도서관에 돌렸다. 또 어떤 형제는 기차로 왕래하면서 교묘히 역원을 속여 왕래하더니, 회개하는 날에 철도국에 그 차임(車賃)을 다 - 계산하여 갚았다. 또 어떤 형제는 모 여관에서 숙박을 하고, 식사를 하고 식사비를 내지 않고 갔다가 그가 회개하는 날에 여관에 찾아가 이 식사비를 갚았다. 또 어떤 자매는 평생을 몸치장을 하는 일에 돈을 많이 소비하더니 그가 회개하는 날에 아주 검소한 생활을 하며, 그 몸치장하던 화장품 값으로 교회에 헌금하게 되었다. 그러면 모든 신자의 회개가 이처럼 철저하여야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저의 구원의 확증
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삭개오의 구원을 선포하셨다. 오늘날에도 회개하고 주를 믿는 자의 심령에 이와 같은 성령의 음성이 임하는 것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하신 말씀은 곧 이러한 경험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이처럼 명백하여야 할 것이다. 사죄와 성결에 대하여 성령의 확증을 가져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혹 심령 상 경험을 물으면 내가 이제 죽어 보아야 죄 사함을 받았는지 천국에 들어갈지 알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러한 애매한 말은 심히 위험하다. 우리의 거듭남이나 성결은 현세에서 가지는 경험이요 결코 죽은 후에 받을 은혜가 안인 것이다. 현세에서 중생의 경험을 가진 자가 천국에 들어 갈 것이며, 현세에서 성결의 은혜를 받은 자라랴 장래의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엡 1:13, 고후 1:22). 그럼으로 우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에1 3:12) 아멘 ****************************************************************************************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기"--중 발췌
회개의 결과로서 두 번째 전형적인 모습(paradigm)이 19:1-10절에 나온다. 이것은 논쟁 이야기(a conflict story)(예수 행동/1-6절, 7절에는 비평, 이에 대한 예수 반응은 9-10절)인데, 이 이야기는 누가 복음 5장에 나오는 레위(Levi)를 부른 이야기(둘다 다음과 같은 것이 나온다. 예수는 어디론가 가고 있 는데, 그곳에 세리가 있었다; 예수가 부른다; 긍정적인 반응이 주어진다; 그러자 예수가 그 세리의 집으 로 들어간다; 반대가 생겼다; 예수는 그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반응한다. 그리고 "내가 왔다"는 말이 덧 붙혀진다)와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 8절은 처음 읽을 때에 문제가 있는 구절로 나타난다. 이것은 7절과 의 연결을 끊어놓는다. 7절에서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왜냐하면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기 때 문이다." 그리고 9절b에서 예수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 다"라고 반응한다(삭개오에 대해 백성이라고 한다.). 게다가 8절은 매우 누가적이다: "주여"와 "회개(참 고. 5:32절)." 저자는 전승되어 내려오는 한 이야기에 8절을 더한 것처럼 보인다. 본래 이 이야기는 예 수와 삭개오가 함께 한 식탁 교제에 대해 말하였다. 여기서 삭개오가 예수를 기쁘게 영접한 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참고. 7:35-50절). 8절을 첨가함으로써, 저자는 이 식탁 교제들 을 통해 은총에 대한 이 부유한 세리의 적절한 반응을 자세히 설명한다. 이것은 수평적인 은총이었다. 삭개오가 말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 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구약성서에서는 토색한 사람이 시인을 하고 자발적인 배상을 할 때 는 훔친 양에 1/5를 더하여 갚아야 한다(레6:5; 민5:7절). 고의적인 강도 행위에 대해 사람이 강제적으 로 행위 배상을 해야할 때, 동물이 살아 있다면 2배로 지불하지만, 죽었거나 팔았을 경우에는 4배나 5 배로 배상해야 한다(출22:1, 3절b-4; 삼하12:6절). 삭개오는 자기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 후자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며, 기꺼이 배상했다. 이러한 행위는 부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보여주었다. 사람에게 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였다(18:27절). 8절에서 세리인 삭개오는 결단하고 실천하였으며 그 결과 9절에서 예수는 삭개오의 삶에 구원이 임했다고 선언한다(참고. 7:36-50절). 그의 이름이 말하 는 대로 그는 참으로 의롭거나 순수한 사람이다.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전승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교회의 경험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면, 편집된 이 논쟁 이야기를 회개의 전형적인 모형으로 새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a) 이 단원은 예수가 어떻게 사람을 끌어당기는가를 보여준다(1-4절). "주님은 때때로.....주님이 아직까 지 알려지지 않았고 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인 감정으로 그들을 주님에게 데리고 온 사람들 을 격려한다....주님은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그 때에도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낸다(Calvin's Commentaries: A Hamony of the Gospels, trans. T. H. L. Parker [Grand Rapids: Ederdmans, 1972], 2:281.)."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 사람 예수를 슬쩍 보기 위해서 무화과 나무 위를 오르는 삭개오를 끌 어 당기는 무언가가 주님에게 있다.
(b) 이 이야기는 또한 주님이 한 사람에게로 갔음을 말한다(5-7절). 계3:20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실제로 나타난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거한다'는 말은 바울(예. 갈2:20; 골 1:27절)과 요한복음(예. 14:23; 15:5절)이 널리 사용하는 용어이다. 예수가 죄인 삭개오(Zacchaeus)의 집 에 들어간다는 것은 용서를 의미한다.
(c) 이 구절은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는 삭개오가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 보였다고 인정해 주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이 사람(8-9절)을 보증한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이 보증을 입증해 준다: 변화된 삶(8절)과 예수의 증거(9절). 요한1서의 저자는 말한다.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도 다음의 두 가지 똑같은 근거를 말한다. 한 편 으로는 변화된 삶의 증거가 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 거니와(요일 3:14; 참고. 4:12절b)" 다른 한 편으로는, 내적인 증거가 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 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4:13; 참고. 3:24절b; 참고. 롬 8:15-17; 고후1:22절)". 누가복음의 저자는 지상의 예수 이야기에서 부활 이후의 실재를 미리 보여준다. 이것은 회심의 두 번째 모형(paradigm)이다. ********************************************************************************************
"삭개오와 뽕나무" 에서.... 나무와 예수 그리스도, 아무 상관없는 듯 하지만 그는 분명 목수였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은 나무를 당신이 선택한 사람을 돌보시고 힘을 주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한 민족을 이끌어야 했던 모세에게 당신은 친히 떨기나무를 통해 한 없는 신뢰와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셨고, 끝없는 좌절과 절망의 늪에 허덕이는 엘리아에게 로뎀나무를 통해 쉼과 용기를 주셨다. 그렇게도 당신이 선택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나무를 통해 다함없는 사랑을 베푸셨지만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거칠고 잔인한 나무, 십자가에 다셨다. 그러나 그 나무는 나에게 놀라운 선물이었다. 나를 당신의 전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나를 사신 것이다.
제 민족의 재산을 빼앗아 로마에게 바치고 그 빼앗은 것으로 치부하던 삭개오, 사람들에게 사람대접 한 번 못 받은 삭개오, 더군다나 키마저 정상적이지 못했던 삭개오를 먼저 부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온갖 열등감에 휩싸인 삭개오를 예수님과 만나게 해준 뽕나무(FigTree-사실은 돌무화과이지만)는 단순히 그 자리에 서있었을 뿐이다. 이 홈도 그 뽕나무처럼 웹상에 존재할 뿐이다. 이 홈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준 뽕나무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부상하는 뉴에이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시각을 정립해 보고자한다. 세기말과 새로운 천년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기대 속에 알게 모르게 찾아온 뉴에이지를 공부해가면서 나를 전부를 주고 사신 하나님의 사랑을 지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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