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설교 1 - “왜 섬겨야 하나요?”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
(갈라디아서 5장 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선택이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가장 당황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수강 신청’입니다. 고등학교까지는 짜인 시간표대로 수업을 들으면 됐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가면 자신이 선택해야 합니다. 대학교 교육은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단계까지는 예배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교회에서 준비한 기본적인 성경 공부를 통해 신앙의 지식을 쌓아갑니다. 하지만, 어떤 단계에 이르면 신앙의 삶에서도 ‘전문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섬김과 봉사라고 말합니다.
왜 섬김과 봉사가 전문성 있는 분야라고 이야기 하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양의 은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 속에 어떤 은사가 존재하고 있었는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쓰임 받아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통해 점점 깨닫게 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뜻이 있구나!”
이사야 44장 2절과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낸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사야 43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자, 다시 대학과정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과목을 선택하고 시간표를 짜는 데 있어서 아주 유심히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선택과목’과 ‘필수과목’입니다. 선택과목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서 즐길 수 있습니다. 모든 공부가 자신이 원하는 선택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전문가가 되려면 선택보다 중요한 것이 ‘필수’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과목은 이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문성 있는 사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있지만 꼭 해야 하는 명령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아주 중요한 명령 중의 하나입니다.
“서로 종노릇 하라!”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종노릇이라는 것은 내가 섬겨야 할 사람에게 종이 되어서 그 사람을 높여주라는 것입니다. 올바를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체를 높여주고 섬겨주는 것입니다.
교회를 가만히 보세요.
누군가의 섬김을 통해 예배가 드려지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예배당에 오기 전에 잘 정돈된 모습은 누군가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들어오면서 받은 주보와 전단도 만든 사람과 나눠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주차를 안내하는 사람이 없다면 많은 혼잡을 겪거나 예배시간에 들어오지도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맡아 가르쳐주는 교사들이 있기 때문에 어른들 예배에 참여합니다. 찬양대원이 있기 때문에 예배가 은혜롭습니다. 헌금을 안내하고 자리를 안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예배가 매끄럽게 진행됩니다. 여러분이 이용하는 카페나 식당에도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성경공부도 각각 도우미들이 봉사하기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결국, 모든 일이 누군가의 헌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낮은 신앙의 단계에서는 이런 봉사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이제는 서로 종노릇 할 때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성숙한 전문가가 되는 것은 서로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 아마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성숙함”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장성한 데까지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장성함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먼저 배려하고 생각하고 알아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관계는 서로서로 종노릇 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종노릇”에도 기준이 있습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 그리고 “사랑으로” 이 두 가지가 섬김과 봉사의 핵심입니다.
자유로…
장경철 교수가 [축복을 유통하는 삶]이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학교에서 저녁에 학생들을 가르칠 때가 있는데, 그때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학생들에게 초코파이를 사 줍니다.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하는데 직장에 다니는 학생들이 식사를 못하고 올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학생들이 초코파이를 받아서 먹는데 앞에 앉은 한 학생이 “교수님도 하나 드세요?” 하고 저에게 초코파이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왜 그렇게 기쁘죠? 매우 기뻤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제가 기뻐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첫째, 저는 집에서 밥을 먹고 왔기 때문에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둘째, 그 초코파이는 모두 제 돈 내고 제가 산 것이거든요. 자기 것을 받는데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기쁘죠?
그때 제가 외람되나마 하나님의 기쁨을 조금 느껴 보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제가 하나님께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 모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주신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까? 그날 저는 초코파이를 받으면서 하나 깨달았습니다. 제 목소리며, 지성이며…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인데 딱 한 가지 제 편에서 드릴 수 있는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바로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그것 하나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안 드릴 수도 있지만 드릴 수 있는 ‘마음’, 그것 하나만이 진정으로 우리가 이바지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자발적인 마음과 자유로운 영혼을 찾고 계십니다.
참 의미심장한 이야기이지요.
모두에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유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것으로 그냥 갈무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누구의 명령에 의해서 억지로 살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율법과 죄가 우리를 구속하지 못합니다. 아주 큰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마치 장경철 교수가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학생들에게 초코파이를 사다 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학생 중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와 은혜를 마음대로 사용하여 자신의 욕구를 채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유로 주어진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자원하여 드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만 쓰지 말고 서로서로 종노릇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1월 둘째 주 설교를 하면서 우리 교회 사역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신앙은 내가 자유 함으로 마음껏 즐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쓸 수 있을 때 빛을 발합니다. 내가 받은 기쁨과 감사함 만큼이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섬기고 그 아름다운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것이 성숙함이기 때문입니다.
“왜 섬겨야 하나요?”
바로 우리 성숙함의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섬김이 억지로 한다면 우리를 무척 힘들고 괴롭게 할 것입니다. 이 섬김과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의 특권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할까요?
제가 군목 시절 허리를 수술하게 되었을 때 수술을 하고 마취의 고통에서 깨어나던 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허리를 다쳤다는 사실, 수술의 고통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앞으로 나의 사역에서 가장 의미 있게 섬길 기회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수술을 통해 고쳐주신 은혜와 자유로움을 나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고통을 당하는 환자들을 위해 의미 있게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우리 딸아이를 위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많은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딸아이를 위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깨닫는 순간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 함을 내가 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 함을 누리지 못한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고 부르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몸이 아파서 어려웠던 몇 년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제가 어떻게 부르심에 응답하여야 하는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가 치유된 감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가라고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성경공부를 마치면 자연스럽게 먼저 마친 사람들이 다음 기수를 섬기는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섬김입니다. 자유로 서로 종노릇 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서로 종노릇 하면서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섬김의 모습이요, 섬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중에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얼마나 많은 섬김을 받고 있습니까? 그런데 서로 섬김이 없이 받고만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성숙한 신앙인은 아닐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유명한 배우 오드리 헵번의 이야기를 아시나요?
그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1929년 5월 4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의 네덜란드에서 성장했습니다. 행복해야만 할 어린 시절 부모의 갈등으로 그녀는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했고 교육마저도 어려웠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와 굶주림에 허덕였고 먹을 것이 없어 물로 배를 채운 적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사 직전 이웃에게 발견되어 겨우 목숨을 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 한 구호단체가 그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해졌습니다. 그 단체는 국제연합아동구호기금으로 지구촌의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구호 빵을 먹으며 위기를 극복했고 자신의 불행한 운명과 싸워 이겨낸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성이 되었습니다.
1951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Gigi]에 출연하고,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1961년 <티파니에서 아침을 Breakfast at Tiffany's>, 1964년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결혼은 세 번째 결혼을 하는 12살 연상의 남자와 하게 되지만, 이혼하였고 두 번째 결혼은 자신의 열성팬이었던 남자였지만 역시도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두 남자로부터 한 명씩의 아들을 얻었고(Sean 과 Luca), 두 번의 결혼을 끝으로 그녀는 죽는 날까지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199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유니세프 친선 대사(UNICEF Goodwill Ambassador)"로 구호활동에 나서면서부터 휴머니스트이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녀의 헌신적인 공로를 인정한 아카데미는 1993년 3월29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인도주의 상"의 시상을 계획하였으나 오드리 헵번은 끝내 그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1999년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했고, "미국 필름 협회(American Film Institute)"는 '미국 영화 100년사에서 가장 뛰어난 여배우 100인'을 선정하면서 오드리 헵번을 3위에 올려놓았습니다. 1993년 1월 20일 복강암(충수암/appendiceal cancer)으로 스위스 제네바호의 톨로체나즈(Tolochenaz) 자택에서 63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난 그녀는 최종학력이 국졸이지만 유럽 사회 상류 계층 간의 교양을 두루 갖춘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분들을 위해 이제 내가 봉사할 차례다.”
아름다운 삶을 산 여인 오드리 헵번이 죽기 1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들에게 준 글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돼야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며
병으로부터 회복돼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섬김을 받은 사람이 서로 섬기며 종노릇 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 섬김이 확산하기 시작할 때 행복과 기쁨이 확산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모습, 소망이 되는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으로…
사도 바울의 또 하나의 중요한 권면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라고 권면 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두 종류의 섬김을 봅니다. 하나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섬기는 것과 다른 하나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종노릇 하듯이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섬김의 방식은 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섬기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받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또 자신이 상처를 받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섬김이란 늘 자신의 의가 드러나야 만족을 하며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쁨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섬김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이기는 하지만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해 우리가 고린도전서 강해를 배우면서 ‘사랑’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2절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패트릭 존스턴 선교사가 집필한 [세계 기도정보]라는 책에 ‘아이티’라는 나라를 위한 기도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아이티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습니다. 그때 나라 전체를 사탄에게 봉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땅을 빼앗고 지배하던 프랑스 사람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늘 이야기했고 자기네들은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다. 죽으면 무덤에 십자가을 세우고 어느 마을에 들어가도 교회부터 세웠습니다.
그런 프랑스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악독하게 짐승처럼 굴었는지 그들이 너무 미워서 그들이 믿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그 반대편에 서서 사탄에게 나라를 봉헌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기가 막힐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사랑이 없는 종교, 사랑이 없는 교회는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에서 유기성 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동안 목회하면서 가장 부끄러운 일 중 하나가 교회 임원을 세울 때 나의 기준이 성경적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께서 가장 강조하셨던 점을 쉽게 간과했습니다. 주일 성수, 십일조 헌금, 성경공부, 교회 봉사 등을 잘하면 임원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은 조금 부족해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심사숙고해서 직분을 맡겼건만 왜 그들이 교회를 일으키기는커녕 도리어 문제를 일으키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사랑 없이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처음부터 임원을 세우는 기준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요한을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단적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에서 섬기고 헌신한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눈물을 흘리게 했는지를 보아왔습니다. 교회에서 모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의로운 것인 양 착각하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 왔습니다. “섬김”이란 사랑이 없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합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사탄은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를 죽일 수 없습니다. 단지 상처를 줄 뿐입니다. 그러나 상처 입은 하나님의 자녀를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상처를 감싸주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가는 그리스도인을 우리는 교회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한 친구 목사의 상담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시카고의 한 창녀와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나이 어린 딸을 변태성욕자에게 팔아서 돈을 번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곤혹스러워서 잠시 할 말을 잊었다가, “왜 가까운 교회라도 가서 도움을 받아 보실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창녀는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말했습니다.
“교회요! 거긴 뭣 하러 가요? 그렇잖아도 비참해 죽겠는데, 가면 그 사람들 때문에 더 비참해질 거예요.”
우리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이런 창녀에게 우리는 “우리 교회 오세요.”라고 말할 수 있나요?
뭐,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을 가장 힘들게 하는 못된 사람을 향해 “당신에게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 합시다.”라고 말할 수 있나요?
사실은 이 부분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계속해서 가졌던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성실하며 가장 신실하게 성전과 율법의 의무를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섬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섬긴다는 것은 예수님이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르헨티나의 골프 선수 중 빈센 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은 우승을 하고 나오던 중 그는 클럽하우스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너무나 처절하고 간절하게 아이의 수술비를 요청하는 여인에게 상금을 다 주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사람을 통해 그 여인에게 사기를 당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빈센 조는 그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안심하며 이렇게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럼 위급하게 죽어가는 아이가 없다는 거죠?”
내가 얼마든지 분개하고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 감사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은 분명히 세상을 다르게 보는 마음 때문에 가능하겠지요.
우리는 늘 하루하루가 너무 복잡하고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종노릇 하기에는 나에게 주어진 짐이 너무 버겁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이렇게 복잡한 세상 가운데서 딱 한 가지만 하겠다고 결심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금방 이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한 가지 일만 하고 살 수 있나요? 김찬미 씨는 [삼켜지고 싶은 사람]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너무나 분주하고 복잡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셨지요.
“나를 따라다니는 일 한 가지만 잘해라! 내가 어떤 이를 사랑하면 너도 나를 따라 사랑하고, 내가 무슨 일에 대해 오래 참으면 너도 오래 참고, 내가 말하면 너도 말하고, 내가 침묵하면 너도 침묵하라. 내가 울면 너도 울고, 내가 기뻐하면 너도 기뻐하라. 내가 일하면 너도 일하고, 내가 쉬면 너도 쉬는 이 일 한 가지만 잘 하려고 해라.“
그러니 남은 평생을 주님 따라다니는 일 한 가지만 잘하려고 해보세요. 주님께서 직장에 가셔야겠다고 하시니 함께 직장에 가고,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하시니 함께 만나러 가고, 주님께서 어떤 물건이 있어야겠다고 하시니 그 물건을 사고, 주님께서 청소해야겠다고 하시니 나도 청소하고, 주님께서 어떤 이를 사랑하시니 나도 사랑으로 섬기고, 주님께서 무엇을 하셔야겠다고 하시니 나도 다만 그 일을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 보세요.
정말 멋진 말 아닌가요?
섬김이 무척 어렵게 생각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라 살면 됩니다. 순간순간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됩니다. 바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섬김이란 이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서로 종노릇 하며 사랑으로 섬기라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섬김이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통해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은사라는 것은 늘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되어야 하고, 둘째는,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은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도 모호해 합니다.
제가 지난 12월 호주 코스타에서 강의를 마치고 난 후에 한 청년에 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리고 아주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지금 하는 일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데 걱정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는 일이 정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니? 그 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이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킨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이 이 두 가지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재능과 즐거움을 될지 모르지만, 은사와 섬김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제가 가끔 이런 예를 들 때가 있습니다.
주부인 여러분에게도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특히 음식을 잘하는 사람과 청소를 잘하는 사람, 양육을 잘하는 사람 등등. 재능이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잘하는 것만 좋아서 한다면 가정이 유지되겠습니까? 때로는 하기 싫고 내가 못하는 일도 그것이 유익이 되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섬김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종노릇 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섬김을 통해서입니다.
왜 우리가 섬겨야 할까요?
바로 당신이 섬김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며 여러분이 속한 하나님의 공동체가 든든하게 세워지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건강한 가정에는 헌신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습니다. 부모의 헌신이 없이 어떻게 가정이 든든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아버지들을 일컫는 신조어가 만들어졌습니다. “Friendly”라는 말입니다. 친구인 ‘friend'와 아버지의 ’daddy'의 합성어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헌신하며 친구가 되어주기를 작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사랑과 자유로 섬기는 봉사자들을 통해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교회의 가장 큰 힘은 얼마의 사람이 모이느냐가 아니라 몇 명의 사람이 헌신하는 봉사자가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 교인 중의 한 분이 집에 일을 도와주러 오는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이런 말을 들었답니다.
“사모님! 참 이해할 수가 없네요. 집에서는 일을 안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교회에서 봉사하세요.”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돈도 시간도 있고, 수고롭게 살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에 집에서도 하지 않는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느 교회 여선교회에서는 봉사한다고 하면 대신 사람을 돈 주고 사서 보낸다고 합니다.
“섬김”이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단순히 일할 사람이 없어서 교회가 여러분의 헌신과 섬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이 일 년에 한 번 성전 바닥을 닦으며 먼지를 털어내며 아버지의 집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하나님이 귀하게 생각하시고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무릎을 꿇고 섬기는 일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려고 누군가 헌신하고 봉사하는 자리에 나도 서로 종노릇 하려고 그 자리에 서는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시나요?
오늘 이 헌신의 부름에, 아니 하나님의 명령에 한 번 순종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헌신의 기쁨과 여러분의 섬김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심을 경험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섬김으로 우리의 지체가 세워짐을 경험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그 섬김이 하늘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하늘에서 해 같이 빛나리.
'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경동 목사] 부부는 천생연분입니다 2부 (0) | 2011.10.31 |
---|---|
환난이 왔을 때 (0) | 2011.10.31 |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는 원동력 (0) | 2011.10.31 |
설교모음 - 장경동, 김진홍, 조용기, 김양재, 유기성 목사 (0) | 2011.10.31 |
김진홍, 오정현, 장경동, 박동찬, 김삼환 목사 (0) | 2011.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