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부활주일 설교 요약 모음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2:44

부활주일 설교 요약 모음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올해에도 부활절이 다가옵니다. 목회자는 설교준비를 통해 그 은혜와 기쁨에 먼저 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설교 시간을 통해 쏟아놓게 됩니다. 성도들도 알게 모르게 그것을 기다립니다. 목회자에게 때론 그것이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는 은혜 말입니다. 금년에도 몇 편의 설교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설교준비 때부터 부활의 은혜와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① 제목: 제 3일의 신앙
본문: 누가복음 24:1~10

기독교는 독특한 신앙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신앙입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수도 없이 많이 있지만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요즘 불교가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와서 기독교를 여러 가지 면에서 모방해 가고 있습니다. 찬불가도 만들어 부르고, 심방도 하고, 불교 어린이학교도 개설하고, 수련회도 갖고, 요즘에는 주일마다 정기 예불도 드리고 있습니다.

불교가 아무리 기독교의 것을 모방한다고 하여도 한 가지만은 모방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불교에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탄생하게 된 것은 부활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여기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개중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죽은 예수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이 그랬습니다. 방부제를 들고 아침 일찍 무덤을 찾아간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날이 밝기만을 기다려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가 보았더니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제서야 제 3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많은 신앙인들이 이 모양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인간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무덤도 있고 석가의 무덤도 있는데 왜 예수의 무덤은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찾지 않고 성현들 가운데서와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포함해서 4대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를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파에서는 4대 성인의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성인을 섬기는 교파도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로 피택한 사람에게 시취(試取)를 하면서 “예수님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니까 거침없이 대답하기를 “4대 성인 가운데 한 분이지요”라고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같은 신앙이 오죽하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부자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곧 바로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는 줄로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부자가 되고 형통하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소유가 많아지고 건강해지고 잘 되면 다 축복이고 은혜라고 쉽게 믿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 알기를 부자 예수로, 해결사 예수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대학에 낙방하고, 머리가 나쁘고 한 것이 모두 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모두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현세적이고 현실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 결과주의고 모두 성급한 성공 위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둔한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둔한 사람들 중에는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우둔한 사람들은 더 선량한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몇 년 전에 전국 암송대회에서 일등을 한 사람이 영등포 교도소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은 시사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머리가 명석하고 좋다고 해서 다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병든 사람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은 조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는 모두 건강한 사람들이 짓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탈선을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오직 살아가는 데 열중할 뿐입니다. 그러면 누가 죄를 짓습니까? 모두가 가진 자, 배부른 자, 건강한 자들이 죄를 짓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형통, 형통하지만 그것이 모두 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찾지 않고 의사 예수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변화를 받고, 새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병을 고치려고 예수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병을 잘 고친다고 소문난 목사에게 몰려가고, 병을 잘 고친다고 소문난 기도원에 몰려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의사 예수를 만나려고 가는 것입니다. 병을 고치려는 목적이 우선하다보니 신앙은 본질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예수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찾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그에게 새 삶이 주어지고, 새 인생이 시작되고, 새 믿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 출발이 시작되고, 변화된 삶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같은 부활의 예수를 믿고, 만나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에게서 부인이 없어집니다.
오늘 사람들은 불안에 싸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안 중에서도 질병에 대한 불안이 가장 큽니다. 오늘은 무서운 질병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암도 종류가 대단히 많습니다. 암의 발병률도 대단히 높습니다. 언제 그 같은 암이 내게도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두 질병 때문에 불안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도 큽니다. 중병 환자들에게 가장 큰 고독은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자는 자신이 암이라는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지레 죽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불안이 크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 라사콜리나크프는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두렵고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나중에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애인에게 요한복음 11장을 읽어달라고 합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보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요한복음 11장을 읽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서 이 같은 불안과 두려움을 일거에 없애 주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의 신앙만 내 속에 확립되어 있으면 죽음조차도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 사후 얼마나 두려워하였고 불안해하였습니까? 다락방에 모여 앉아 문을 걸아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그것도 여의치 않아 제자들은 야음을 틈타 시골로 피신을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새 힘을 얻습니다. 용기와 격려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몸소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은 비로소 부활의 예수를 나가서 전하기 시작합니다. 수천 명이 모인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로 변화를 받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두려워하며 숨어 있었던 제자들이 오늘은 그렇게 달라진 모습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변화입니까? 부활의 예수는 이렇게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없애 주었습니다.

둘째는 슬픔을 없애 줍니다.
예수님 사후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슬퍼하면서 낙향하였습니다. 베드로 요한 형제도 시름에 젖어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낙심하였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죽으셨던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 순간 모든 이들에게서 슬픔과 탄식이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슬픈 마음, 어두운 마음, 낙심되었던 마음들이 순식간에 환희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이 세상 방방곡곡 어두운 곳에까지 기쁨과 소망을 준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보면 그보다 더 큰 슬픔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와 형제가 죽으면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은 부모나 형제가 부활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인 것입니다.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종교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주는 축복입니다.

셋째는 실망도 제거해 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세주로, 해방자로 믿었습니다. 억압하는 로마로부터 민족을 구원하여 줄 만한 해방자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희만을 걸고 있던 예수가 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실망은 대단히 컸을 것입니다. 3년 동안이나 병을 고치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풀던 결과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죽어가는 무력한 예수를 보면서 사람들은 “과연 불의의 힘이 선의 힘보다 더 크구나”하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보면 불의의 힘이 선의 힘보다 더 강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악한 사람이 더 잘 살고, 더 형통하고, 강도는 석방되고, 예수는 죽고, 그래서 어떤 때는 불의가 이기는 것같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끝내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불의의 힘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정의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본보기입니다. 아무리 긁어 덮고, 억압하고, 돌을 굴려 문을 틀어막아도,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부활로써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면 파우스트가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나중에는 허무에 빠져서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 교회에서 합창소리가 들려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그 합창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내면으로부터 이상한 힘이 솟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인생의 깊은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활의 예수가 없다고 하면 우리 인류의 문명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인류의 문명은 고사하고 오늘 우리의 처지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주님의 부활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다시 사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셔서 큰 믿음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_ 이정익, <교회력에 맞춘 절기설교>, 생명의말씀사, 1994, pp.151~157


②제목: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본문: 로마서 3:21~26

주후 6세기에 로마 황제 유스티니이누스 2세는 바티칸에 십자가를 기증했습니다. 그 십자가는 금으로 만들어졌으며, 귀한 석재로 겉을 두른 것이었습니다. 값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귀한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중심에는 부서진 나무 조각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석으로 장식된 십자가에 나무 조각이라니 일견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스티니이누스 황제는 그 나무 조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 그렇게 보면 이해할 만도 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그 황제가 아주 수완 좋은 장사꾼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만약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 조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다고 해서 성찬식이 더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 때문에 십자가에 대한 설교가 보다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예배가 더 영적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요, 우리의 교회가 더 거룩한 교회로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로마교회에 편지를 쓰던 바울은 로마교인들이 비록 자신들의 죄로 인해 불의하게 되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얻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어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화목케 하시는 분으로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제기해야만 할 질문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가, 혹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어떤 기구가 사용되었는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녀야 할 질문들은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무엇이 그분을 십자가에 달리도록 했는가? 그분은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단 말인가? 이 모든 것들 배후에는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 모두에 대해서 본문으로부터 완전한 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세 가지 답은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라는 우리의 질문에 대해 첫 번째 답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대도시에서 개최될 부흥집회를 준비하던 저명한 부흥사 일리선데이는 그 도시의 시장에게 편지를 써서, 시장이 아는 사람들 가운데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및 도움과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선데이는 깜짝 놀랄만한 답장을 받았습니다. 시장은 그 도시의 전화번호부를 보내왔던 것입니다.

생각해보건대, 시장의 행동은 성경적으로 말해 옳은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살아가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 그리고 모든 어린이 들은 영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또한 이 문제는 결국 개인적인 죄의 문제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전해진 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죄를 지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라는 바울의 말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가, 또는 죄의 결과가 무엇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리 큰 의견 차이는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최근에 어느 집회에서 자신이 한 번도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청중들에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각자의 종교적인 배경을 막론하고 단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현실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여러분과 제가 범한 죄가 제거될 수 있을까요? 또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종교 체계는 이 문제에 대해서 비슷한 해결책을 내 놓고 있습니다. 불교도이든 이슬람교도이든 힌두교도이든 혹은 정통파 유대교인이든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가 충분히 선한 일을 행할 수 있으며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 부탁해서 그분의 양보를 얻어내고 용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정복자 윌리엄은 해스팅스 전투에서 영국 왕 해롤드를 무찌른 후, 많은 사람들이 그 전투에서 죽은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곳에서 뿌려진 모든 피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성당을 세웠습니다. 윌리엄은 그 전투의 현장에 성당을 세우면서, 해롤드 왕이 죽은 바로 그 지점에 성당의 가장 높은 제단이 들어서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것, 즉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무죄했던 상태를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려 한다고 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많은 교회 건물을 짓는다고 해도, 또 아무리 많은 돈을 선한 일에 쓴다고 해도, 또는 아무리 많은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죄라는 현실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몇 구절 앞부분에서 바울은, 우리가 어떠한 율법 체계를 지킨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입지는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10절),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2절)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우리의 본문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선행으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달래드리려고 노력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디트리히 본 회퍼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독립적인 의를 추고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의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칭의의 유일한 기회를 스스로 빼앗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디트리히 본회퍼, 제자의 대가, p.308).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종교의 요구를 준수하고 경건한 행위를 한다 해도 스스로를 구원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개인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소망, 새로운 치료의 길이 열렸습니다. 바울은 “이제는”이라는 말로써 우리 모두가 들어야만 할 이 같은 말을 꺼내고 있습니다. 앞선 구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으며 율법 안에는 구원에 대한 말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는‘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날, 새로운 시대가 왔으며,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단으로 인류를 대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를 실제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부분적으로 이 의에 대해 증거 해 주기도 했지만,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이 의를 온전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에게 이 새로운 생명의 길, 하나님의 의 안에서 사는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그분은 죽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형태든 율법이나 선행, 규정 준수, 혹은 종교 체계에 의지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그러한 것들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여러분들의 처지를 변화시켜 줄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에게 이 새로운 길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의의 선물을 주기 위해
예수님은 왜 죽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의 선물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는 하나님의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 인간 편에서 행하는 어떤 경건한 행위가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질서에서의 인간은 자신의 의사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의 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의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의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24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선물은 살 수 없는 것으로서, 선물을 주는 자가 자신이 주기로 결정한 자에게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그분의 의의 선물을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RP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심으로써 우리가 이 의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팀 밀러의 가족이 휴가를 아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휴가 때가 되자 그의 아홉 살난 딸 제니퍼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팅의 가족은 씨월드에 놀러가는 대신에 제니퍼가 컴퓨터 촬영, 에스레이 촬영, 피검사 등을 받는 동안 온 밤을 병원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의사들은 제니퍼가 척추 검사도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의사들은 그 검사가 아주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의사는 제니퍼의 아버지 팀에게 검사실에 있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팀은 제니퍼 혼자서 그 괴로움을 감당하도록 남겨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의사들은 제니퍼의 구불구불한 머리를 작은 방울로 묶었습니다. 팀은 딸 아이의 얼굴에 얼굴을 맞대고 아이를 껴안아 주었습니다. 주사 바늘이 들어오자 제니퍼는 울었습니다. 그리고 타는 듯한 통증이 더 심해지자 제니퍼는 흐느껴 울며 계속해서 “아빠 너무 아파요 어떻게 좀 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팀의 눈물과 제니퍼의 눈물이 뒤섞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찢어졌으며, 그는 이 같은 상항에 치를 떨었습니다. 팀은 제니퍼를 사랑했기 때문에 팀 자신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제니퍼로 하여금 일생에 가장 괴로운 경험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제니퍼가 척추 검사를 받는 동안 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때 아들과 아버지는 얼마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까요.

24절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5절은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세워졌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이 선물은 선행이나 율법 준수와 같은 값을 치르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선물에 대해서 이해해야 할 네 번째 주제가 있습니다. 즉, 이 의의 선물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믿음을 드릴 때 받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22절)입니다. 25절은 또한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으며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이들을 용납해 주실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온다면 하나님의 의라는 선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의를 가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실 때 여러분이 범한 죄를 보지 않고 여러분의 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더 잘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를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공동체로서, 또한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안에서 또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곳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_ 베리 L. 데이비스, <그말씀>(1998, 4월호),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두란노, 1998, pp.72~78.


③ 제목: 부활절, 그리스도인들이 그날을 지키는 것은 잘못인가?

여러분은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저에게는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즉 선생님께서는 왜 부활절을 지키며 또 부활절이라는 말을 사용합니까? 그 이름과 날짜는 로마가톨릭이 정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여러분은 알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이교도의 신의 이름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할 때, 부활절은 다른 것들처럼 중요하지 않습니까?”

대영백과사전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절, 기독교계 전체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매년 지키는 축일. 다른 주일의 명칭과 마찬가지로 부활절이라는 명칭은 주일의 다른 날들처럼 옛 튜튼족의 신화에서 유래된 말이다. 베데(Bede)에 의하면 부활절은 앵글로 색슨 족의 봄의 여신인 이오스터(Eostre), 혹은 오스타라(Ostara)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절기는 오늘날 4월에 해당되며, 부활의 달이라 불렸으며 신께 바쳐졌다. 베데가 말하는 바, 이 달은 ‘옛 축제 일이 새로운 장엄함으로 지켜졌을 때’와 같았다. 부활절에 대한 다른 이름들이 많이 유래된 어근인 pasch는, ‘he passed over’(그가 넘었다)라는 말의 동사형에서 온 히브리어의 pesch(Passover, 유월절)에서 온 것이다.”

부활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부활절 어린 양의 형태에서 규정하고 있는 명백한 패턴을 따랐습니다. 고린도전서 5:7에 보면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어린 양은 분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문 위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묻혀 좋고 집안에 머무르며 애굽에서 처음 태어난 아이를 모두 죽인 죽음의 천사로부터 구원 받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자는 우리의 어린 양 그리스도의 값비싼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으며 안전합니다.

요한복음 19:31에서 우리는 예수가 바로 예비일, 즉 유월절 어린 양을 죽이고 요리하는 연례 행사일에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문자 그대로 그 형식을 완수하였으며, 유월절 어린 양이 천 오백년 동안 연례적으로 죽었던 그날에 돌아가셨습니다.

처음에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개종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유월절 만찬과 축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멋지게 성취되는 것을 보았을 때에 매년 이 때를 구제주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신성하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유대의 유월절 때와 바로 그 다음날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특별히 기억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유대인들이 개종하기 전에도 이 때를 경축했던 것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고대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그들이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어디를 가나 형식을 정하고 준수한 이 예언에 대한 멋진 완수를 그들이 여전히 되새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태력으로 7월 14일의 유월절은 매년 일정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아직 오지 않은 우리 자신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그리고 있는 바, 매 일요일 ~ 주의 첫째 날 ~을 그리스도 부활의 기념일로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이 그 주의 첫째 날이었으므로 일요일이 당연히 그리스도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이 그 주의 어떤 날로 정해진다 해도 매년 유태력 7월의 일정한 때에 유대 축제일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해야 할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따르는 것이며 유대의 의식법을 지키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매년 주 중의 어떤 날보다는 일요일 하나를 정해 연례적으로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더욱 좋지 않을까?

그리스도인들은 매년 특정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실, 대영백과사전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교회에서는 부활절을 그 주의 첫날에 지켰지만, 반면 동구의 교회들은 유대인들의 관례를 따르며 14일을 부활절로 지켰다.”

주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부활절을 일요일에 기념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후에 그레고리오력이 채택되었을 때 현재와 같은 체계로 부활절을 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특별한 문제는 아니지만 몇 년 전 전깃불이 없을 때에는 달빛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 해서 천체의 운동도 축제나 예배나 여행이나 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톨릭교회 관리들이 매년 부활절을 정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레고리력도 만들었습니다. January(1월)가 로마의 신 Janus의 이름을 딴 것이므로 우리는 그 이름을 거부해야 할까요? Saturday(토요일)은 이교도의 신 Saturn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므로 또한 그 이름을 거부해야 할까요? 또는 Sunday(일요일)는 sun이라는 신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므로 그 날에 예배하는 것을 죄로 간주해야만 할까요? 콜로라도의 매니토우 스프링즈는 인디언의 신 매니토우에서 이름을 딴 것이므로 그곳에 살거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죄가 될까요?

이 모든 이름들은 요점을 벗어나 있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이 유월절 절기를 준수하였던 것같이, 사실 중요한 것은 부활절이 앞으로 오실 구세주,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인 주님을 그리기 위하여 주신 축제의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 유대의 달력에 이 기간을 상정함으로써, 하나님께 예배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과 부활을 기억하는 데 그 달력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으로부터 지금 가톨릭과 다른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종려주일, 수난주간, 부활주일을 공식적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을 지키는 데에 어떤 의무적인 것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부활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하고 그의 부활을 기억하는 데에 좋은 시간입니까? 참으로 그렇습니다. 한 해의 이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생각하도록 배운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다른 때에는 교회를 가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부활절에 교회를 가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것은 법의 문제가 아니요, 교회의 규칙도 아니요,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행복하게 기억하고 그의 영광스런 부활을 기뻐하는 기회이며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입니다.

이스터(Easter)라는 이름이 앵글로 색슨 계통의 봄의 여신인 이오스터(Eostre)에서 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 말의 어원과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이스터일 뿐이며 그 이름이 어디에서 왔던 문제를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태양계의 위성들의 정식 이름이 이교도의 신들과 여신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이 타이어를 열과 화학약품으로 처리하는 것(to vulcanize a tire)이나 벌커나이징 프로세스(the precess vulcanizing)라 부르는 것이 불과 대장일의 신 불카누스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에 잘못입니까?

이름이라는 것은 그저 그 의미를 가리킬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다른 언어에서 유래된 모든 단어에 있는 의미를 어둡고 죄스럽게 상상하는 것은 미신일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을 준수하는 것에 관해서 문제를 삼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문제를 삼고 있지 않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문제를 삼는 것은 잘못입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를 준수하라고 누군가가 강제하려고 한다면, 내가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고, 다른 사람이 특정한 날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탄생을 기념한다고 해서 누가 그것을 방해하려고 하고, 이러한 거룩한 문제들에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끈다면, 나는 그것에도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문제를 삼고 있지 않은 부수적인 일을 가지고 싸우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려는 모든 선한 사람들과 우리 모두 친하게 지냅시다. 그리고 복음의 경청자들을 모으고 사람들을 성경의 진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모든 기회를 이용합시다.

_ 커티스 허트슨 편저, <부활에 관한 명 설교>, 생명의말씀사, 1994, 385~390.


④ 제목: 부활의 신앙과 생명
본문: 시편 103:8~18, 고린도전서 15:12~19

당신은 우유빛과 진홍빛으로 불타는 활짝 핀 뺨을 자랑합니까? 장미를 죽고 시들어 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처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고 한 시인의 탄식은 지나친 표현 같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죽음으로 향해 가는 기나긴 죽음의 행렬에 뛰어듭니다. 부르너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지만 모든 인생의 길은 무덤으로 통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인생의 지리학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죽음은 아주 깊은 심연이요, 미지의 것이요, 끝없는 공포요,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들고 우리가 맺고 있는 일체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킵니다. 모든 인간의 불가피한 미래인 무덤은 무의미성의 총괄개념입니다. 우리 주님도 사실상의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부활절 예배는 환각적인 값싼 이로의 행사 이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성찬 예식은 사랑하는 선생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슬퍼하는 제사의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하나님을 모른다면 우리는 진노의 하나님, 무기력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느냐고 부활을 못 미더워 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이 죽음의 세력보다 더 강함을 가르칩니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은 이 세계와 죽음을 넘어서 자기 운명의 최종적인 실현을 희망하는 미래를 향하여 열려진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죽음은 분명히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부푼 희망과 가슴 설레이는 꿈들과 잘 짜여진 미래의 계획들은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서 모든 의미와 가치를 빼앗아 가고 삶을 실현하기 위한 모든 창조적인 가능성을 무로 만들어 보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이 신자들의 마지막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죽음이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단절시키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안에 이는 사람은 죽지만 홀로, 고독하게, 희망 없이, 허무하게, 저주스럽게 죽지 않습니다. 캄캄한 죽음의 세력이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보다 더 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보다 죽음의 분리시키는 힘이 더 강할 수는 없습니다.

2. 부할 신앙은 하나님의 창조 가능성을 부인하는 폐쇄적인 세계상을 깨뜨립니다.
바울 선생님은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에 지나가 버린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가르칩니다. 주님의 부활은 유일회적으로 마감된 사건이 아니라 미래를 향하여 열려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부활은 우리가 참여하게 될 새로운 생명, 부활의 몸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는 한계일 수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한계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계 한 가운데 영원한 삶의 세계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잘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아시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의 아침과 함께 새로운 가능성, 생명의 길이 열려 있음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를 살리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기업으로 허락하셨습니다. 모든 빛이 꺼지고,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무덤에서도 하나님은 현존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보여줍니다.

3. 부활의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여금 부활의 소망을 가지 사람답게 살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의 사랑과 부활의 소망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해명하고 전달할 책임이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를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내세지향적인 소극적인 자세로 살지 못하도록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가능성을 부인하는 폐쇄적인 세계상에서 맞서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선포하고 희망을 지닌 사람으로 이 세상 속에서 주님의 부활을 신빙성 있게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부활의 증인으로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우리 몸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육체의 욕심 때문에 자신의 몸을 불의의 무기로 사용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용되는 데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옛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시며 복의 근원이 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아들인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행하여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들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개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나가서 모든 사람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도록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 순종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로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셋째,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합시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옛날 주님의 제자들처럼 잘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칭찬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적대적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거부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기억할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흙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유한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흙으로부터 우리를 부르사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생명, 영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지닌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보내셨습니다.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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