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가인의 갈등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4:46

가인의 갈등

 

창세기 4:1-10

1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 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 은 농사하는 자이 엇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 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 하셨으나 5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 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쯤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 찜이요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 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 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가라사대 네가 무엇 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피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의 대 학생들 사이에 있는 유행하는 풍 자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교육감이 모 초등학교를 방문 했는데 교실을 둘러보다가 창가에 놓여있는 지구본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이 지구본의 축이 왜 이렇게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 학생 이 대답하는 말이

"그거 내가 한 거 아닙니다."

이렇게 책임을 회 피하더랍니다. 자기 잘못이 아 니라고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서 있는데 선생님이 지나갑니다. 선생님에게

"김 선생, 이 지구본이 왜 이렇게 기울어져 있지?"

하고 물었더니 선생님 대답하는 말이

"그거 본래부터 그랬어요."

그러더랍니다. 아주 타성적 무기력, 무관심입니다. 언제 한번 그걸 생각해 본일 없는 무책임한 대답입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교장선생님을 만나 가지고

"이 지구본이 왜 이렇게 삐딱하죠?"

하고 물었더니 교장선생님 말씀

"그거 모르십니까? 그거 국산이 에요."

그러더랍니다. 이건 기가 막힌 얘기입니다. 학생이던 선생이던 교장이던 뭐 하나 진지하게 생각할 줄 모르는데 대한 풍 자입니다. 이래 가지고 나라꼴 이 되겠습니까? 이게 교육입니까? 여기서 무슨 세계 경쟁얘기 가 나옵니까? 뭐 경쟁력 같은 것은 아주 먼 얘기입니다. 이렇게 멍청하고야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그래 구약성경 잠언에 보 면 '깨달음이 없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그랬어요. 깨달아야 됩니다. 우리는 좀 더 깊이 생각해야 될 그런 단계에 있습니다. 사건은 문제가 안 됩니다. 문제는 사건에 대한 자세입니다. 어떤 일을 당했느냐고 묻지 마십시다.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올시다. 지능이다 지식이다 기술이다 무슨 얘기를 해 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에 대 한 구체화 능력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자, 실수와 실패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실수란 하나의 과정이요, 실패는 바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실패라는 것은 끝났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실수란 수없이 반복 되면서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올시다. 우리는 과정으로써의 실패는 있지만 결론적인 실패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올시다. 실패가 되느냐 실수가 되느냐 하는 것은 그 사건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에 달 린 것이올시다. 가끔

"우리가 당한 경제적 한파가 언제 끝날까 요?"

라고 하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제가 계시를 받는 것도 아니고 점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때마다 저는 대답합니다.

"우 리가 할 나름이지요."

자연히 자동적으로 우연히 그렇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지요. 지금 이 시 간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 이 사건이 있게 된 원인을 깨끗이 깨닫고 그로부터 돌이키면 길이 있는 것이고요. 그대로 앉아 기다린다면 그것은 주저앉 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냐고 묻지 마십시다. 우리가 깨닫고 돌이키는 그날, 그때가 다시 일 어나는 시작일 것입니다.

여러분, 실패했다고 곧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 는 사건이요. 실패자라는 것은 인성 자체의 문제입니다. 실패라고 하는 사건은 있으나 실패자 는 될 수 없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하는 사람 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실패하는 인격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실패라고 하는 사건들을 통하여 더 건전하고 더 건강하고 더 바르게 더 생 동력 넘치는 그 런 인격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생명이 지닌 역설적 관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가인이라 고 하는 대표적 인간이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입니다. 저들이 각각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물리쳤습니다. 사건은 이러합니다. 이제 가인이 여기서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그가 어떤 태도로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그 운명이 좌우됩니다. 이 순간 그가 무엇을 생각했느냐 는 겁니다. 여기에 따라서 그의 운명은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면 은 '아 벨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라고 말합니다. 이 논리에 의하면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고 가인은 믿음 없이 드렸다.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흔히 말하는 가인 콤플렉스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는데로 심히 분해했다. 분노합니다. 이 사건 앞에서 이 분노 가 이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또 안색이 변했어요. 얼굴색이 달라졌다. 그 마음에 갈등, 고민을 말하는 것이에요. Complications 그 갈등을 여기서 말해주는 것이 에요. 몹시 괴로워 한 것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게 지금 괴로워 할 일입니까?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어야 하는 거죠. 내가 아무리 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아니라면 아닌 거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인데 내 속마음 내 진실을 아시 는 분은 그분이지요. 그가 아니 라면 아닌 거지 왜 안색이 변하 는 것입니까? 왜 분노해 하는 것입니까? 왜 통곡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판단에 대하여 공손하게 수락하지 못 했다는 말이 에요. 하나님의 심판 앞에 겸손 하지 못 했어요. 혹은 진실하지 못 했다는 말입니다. 원인을 생 각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십니까? 납니까? 어느 쪽이 옳은 겁니까? 또 이웃의 판단 뭐 그 게 중요합니까? 남들이야 뭐라 고 하든 말든 내 자신은 내가 압니다. 내가 아는 내가 또 그게 온전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나 를 아십니다. 그의 판단, 그의 말씀 그것이 옳은 겁니다. 그의 처사가 옳았던 겁니다. 하나님 의 공의에 대해서 우리는 그대로 받아 드려야 됩니다. 북한식으로 말하면 전폭적으로 접수해야 됩니다. 이 접수가 잘못된 것이 에요. 그대로 받아 들였으면 이제부터 좋은 생각이 났을 텐데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색이 변하고, 분하고, 속에서 들끓습니다. 갈등과 고민 번뇌가 일어납니다. 이 결과가 다른 방향으로 분출됩니다. 그래 오늘 성경말씀에 하 나님은 미리 경고했습니다.

"네 가 선을 행했으면 왜 낯을 들지 못하느냐? 네 선함을 점검하라."

경고합니다. 또

"죄의 소원 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지금이 위기다."

위기 요 왜? 고민하니까... 갈등과 고 민, 위기란 말이에요. 이 순간에 이것이 어느 쪽으로 분출되느냐 에 따라서 운명이 곤두박질하는 거니까 위기입니다. 자, 그가 고민하게 된 이유가 뭡니까? 저 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재물을 다 받 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 사람이 안색은 안 변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한 사람 것은 받고 자기는 받지 않으시니까 이 건 질투요. 시기와 질투,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것은 죄가 아니라 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은 원죄, 그 원죄 중에 가장 뿌리 깊은 죄가 시기 질투입니다. 그건 무서운 겁니다. 가만히 보세요. 전부가 이 시기 질투 때문에 잘못되는 것이에요. 내가 못 살아서가 아니요. 다른 사람 잘 사는 게 배가 아파서 그래요. 가만히 보면 모든 문제가 여기 걸려요. 그런데 시기 질투 때문에 마지막에 신앙까지 잊어 버려요. 이성도 병들어 버려요. 판단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시기와 질투란 참 무서운 겁니 다. 그 인성을 사람의 마음을 아주 썩게 만듭니다. 정신 못 차립니다. 여기서 위기에 돌입 하게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 에 다시 돌아오고 하나님과의 관 계를 생각하게 되는데 하나님과 의 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사람에 게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 서 책임전가를 합니다. 아벨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웃 지향 적, 타인 지향적 속성이 문제입니다. 내 문제는 내 문제예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그 누구 때문도 아닙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오로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지 그 누구와의 관계도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이요. 이것이 신앙입니다. 가인은 지금 바로 이 시 간에 뻔한얘기 아닙니까? 하나님이 안 받으셨으면 다시 하나님께 바로 나와야지. 왜? 아벨은 생각하는 거요. 아벨의 제사를 받았던 안 받았던 왜 기분 나빠하는 것입니까? 이 타인 지향적 판단, 아주 위험한 것이올시다.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하는 것 이 도대체 뭡니까? 그 50년 혹 은 70년 동안에 많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 혁명이라고 하 는 것의 기본 철학은 뭐냐 하면 내가 못사는 이유가 다른 사람에 게 있다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거예요. 내가 가난한 것이 저 부자 때문이요. 우리 프롤레타리아의 어려움이 저 부르 조아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사회문제라고 합니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다. 이렇게 돌려 놉니다. 결국은 내 책 임은 없다는 거예요. 공산주의 40년 50년 하는 동안에 그런 인간을 만들었어요. 지금 동서독 도 보니까 서독이 얼마나 고민하는지 모릅니다. 그저 경제문제 만 해결되면 정치문제만 해결되면 될 줄 알았는데 딱 통일해 놓고 보니까 아니요.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이 아주 달라졌어요. 공산주의 속에서 불평, 원망 불 평 모든 것을 사회로 돌리고 모 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그런 인간이 되어 버렸어요. 다 시 말하면, 무책임하고 불성실하고 게으르고 이런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얼마나 고민하는 지 모릅니다. 우리가 북한에서도 저분들을 위 해 다 함께 일을 해봅니다. 일 을 시켜보는데 안됩니다. 일 할 생각 안 합니다. 참으로 일 시 키기 어렵습니다. 안됩니다. 우 리가 하는 일의 1/10도 안됩니다. 그렇게 돼버렸어요. 그리고 속에는 원망과 불평이에요. 꽉 차 있습니다. 여러분 믿거나 말 거나 북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북한이 저렇게 못사는 이유는 남한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래 서 무서운 거예요. 이 마음을 깨뜨리기 전에는 바꾸기 전에는 아무 일도 소용없는 거예요. 자 기들이 못사는 이유는 철저하게 남한 때문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당한 이 어려움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남의 얘기 할 게 아닙니다. 내 가 어려워진 이유가 누구 때문이냐고요. 가끔 보면 은 쉽게 말합니다. 무슨 사건이 하나 터졌을 때 총체적 위기입니다. 사회적 인 문제입니다. 국가의 문제입니다. 그 말하는 동안에 그 뒤 에 있는 비밀한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너 자신의 책임은 아니 라고 내 책임은 아니라는 말로 들려지는 거예요. 여기는 해결 이 없어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모든 책임은 내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어느 가정에 아버지 어머니가 훌륭한데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해 요. 걸핏하면 집을 나가고 속 썩혀요. 만날 때마다 그저 뭐

"우리는 다 좋은데 아이들 때문 에 고민입니다. 고민입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래 언젠가 아이 들하고 같이 이렇게 부모님들하고 같이 얘기가 됐어요. 내가 딱 한 마디 했습니다.

"이걸 해 결해 줄 테니까 내 말을 따르겠소?"

"아, 그러면요."

"그래요. 간단합니다. 공부 못하는 책임 이 부모 당신들에게 있다고 생각 해 본 일이 있느냐?"고

"그게 말이나 되느냐? 밥을 안 줬어? 돈을 안 줬어?"

"아니요. 겸손 해 지세요. 이 사건의 책임이 내게 있다고……."

가만히 있더니

"사실은요. 저도 학교 다닐 때 어지간히 공부 안 했거든요. 속 썩이고요."

그 말을 한 마디 하니까 그 옆에 있던 아들이 당장 한 마디 하대요.

"아 그 비밀을 진작 말했더라면 내가 나빠지지 않을 건데."

그러더라고요.

여러분, 겸손하세요. 스스로 낮추시고 아이들 앞에도 그저

"미안하다."

그러세요.

"다 너희 들이 이렇게 잘못된 것도 다 내 탓이다."

그 한 마디만 하면 다 해결될걸.

"나는 할 일 다 했다. 너는 뭘 하는 거냐? 나는 고학 하면서 공부했다. 이놈아! 너는 이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그게 뭐냐?"

될 것 같습니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제나 사건 앞에서 우리는 그 책임을 내가 질 줄 아는 주도적 성격을 가져야 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은요. 자, 이 사건의 원인은 오늘 제사 드린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겁니다. 도대체 가인이라는 이 사람은 믿음이 없었어요. 믿음 없는 행위 속에 오늘 와서 제사만 드린 거예요. 모름지기 그런고 로 그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은 거죠. 오늘 제사를 안 받으셨다고 하는 이 사건만이 중요 한 게 아니에요. 또 하나는 오늘은 이 사건으로 나타났지만 벌 써 원인이 있었고 그 원인에 대 한 결과가 여기에 있을 뿐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당한 지금 현 실, 자꾸 지금 오늘 된 것처럼 잘 나가다가 뭐 잘못된 것처럼 하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 요. 뭘 잘 나갔습니까?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거예요. 그것이 오늘의 이 결과를 낳은 것이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벌써부터 누적되었던 것이 오늘 와 서 분출된 것뿐이에요. 어느 하 나 새로운 게 없어요. 있던 사 건이 나타난 것뿐이지요. 잔치를 했다면 남의 돈 가지고 한 잔 치죠. 그 동안 잘살았다면 빚내가지고 흥청거린 거예요. 그런데 오늘 이것이 오늘에 와서 뭔가 잘못된 것처럼, 그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이건 벌써 고 질적이에요. 수십 년 전부터 쌓이고 쌓여서 있을 일이 있은 것 뿐이요.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누구 책임도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 앞 에서 Self examination 자기 자 신을 살펴야 됩니다. 그리고 자 기성찰 자기반성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 마음속에 벌써 오래 전부터 있었던 타성화 된 것 그 것에 대해서 깊이 관찰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는요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내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지만 다른 사람의 제사 받으셨으니까 거기서 좋은 모범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1954 년 미국에서 오하이오주에서 열렸던 골프 세계적인 대회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아놀드 파머라 고 하는 25세 청년이 나가서 1등 을 했습니다. 1등을 해 가지고 환호가 올라갈 때에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는데 거기에 14살 난 잭 니콜라우스라는 소년이 저 뒷전에 서서 그 환호를 보면서 마음에 다짐을 했습니다. '나도 빨 리 커서 저렇게 골프계의 왕자가 되리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정 말로 1960년에 가서 미국에 오픈 대회가 있을 때 파머가 1등을 하 고 니콜라우스가 2등을 했습니다. 그 후로 계속 둘이 경쟁을 한 나머지 결국은 니콜라우스가 파머를 이겼습니다. 어떤  는 또 파머가 이기고 어떤 때는 니콜라우스가 이기고 두 사람이 그 대로 경쟁을 10년 동안 합니다. 이제 한 세월이 다 갔습니다. 1992년 62세의 파머와 52세의 니콜라우스가 대결을 합니다. 모 든 사람들은 지켜보면서 걱정이었어요. '저 분들이 한 평생 저렇게 경쟁을 했으니까 저거 어디 서 터지면 어떻게 하나?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한 사람이 죽기 를 바라고 그러면 어떻게 하나?'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해서 걱정을 했는데 두 사람은 여전히 사이가 좋아요. 그리고 파머가 니콜라우스에게 귓속말로 하는 말이

"자, 우리도 나이는 이제 많이 먹었지? 참으로 고마우이. 아놀드."그랬습니다. 참으로 고맙다고....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들은 이렇게 둘이 경쟁을 한 평생 했는데 사이가 좋으냐?"고. 그들은 대답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없어야 할 적수라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Helper 조력자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가 있으므로 내가 열 심히 하고, 내가 있으므로 저가 열심히 하고 서로서로 우리는 도우면서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오늘에 이른 겁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여러분, 만일에 가인이 이렇게 생각을 해서 동생을 찾아가서

"나의 재산은 하나님이 안 받으셨는데 너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 이 받으셨냐? 그 좋은 길을 좀 가르쳐 주라."

둘이 화목하면서

"형님, 이렇게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협력해서 제사를 드렸더라면 하나님이 받았을 것이고, 두 사람 다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왜 가인은 아벨이 죽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까? 세상에 죽어야 되 고 죽여서 해결된다고 하는 것처럼 무서운 일이 없습니다. 아시는 대로 히틀러는 유대인 600만을 죽여서 해결하려고 하다가 끝났고요. 아시는 바와 같이 캄보디아 의 폴 포트는 지성인 300만 명을 죽였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지성인만 죽였습니다. 화이트칼라가 문제다. 이걸 놔두고는 정 치 할 수가 없다고 모조리 죽이 는데 안경 쓴 사람 다 죽었답니다. 조심하세요. 손이 깨끗한 사람은 모조리 죽였답니다. 손끝 에 붓을 잡은 흔적이 있는 사람 은 모조리 잡아다가 좌우간 300 만 명을 죽였습니다. 이러고 사회주의국가를 세우려고 했으나 역사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여러 분 죽여서 해결하고 제거해서 해 결하는 이 방법은 근본적으로 잘 못된 방법입니다. 가인 콤플렉스 는 혼자 해결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다 시 서야 됩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 다. 많은 모순과 부조리한 사건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그는 기도 하십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께 위탁합니다. 아버지께서 내 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아주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리고 조용 히 그 어려운 십자가를 집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이 상 누구도 원망하지 맙시다. 누구를 비판하고 저주하지도 맙시다. 누가 없어야 된다고 생각도 맙시다. 다 있어야 됩니다. 다 함 께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하십시다.

곽선희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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