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우리의 삶에서 부활해야 할 것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5:36

우리의 삶에서 부활해야 할 것(눅24장 36-43)

그래도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봄이 되어 집 뜰에 목련이 피고 노란 개나리 울타리가 그 색을 자랑하고 전국 각지의 벚꽃이 만발하기도 했고 지금은 라일락이나 연상홍, 철쭉꽃이 만발하여 자연은 생기가 더하고 있지만 우리네 살림살이는 생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이라크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의 상처가 이라크 국민들에게만이 아니라 그 아픔이 전이되어 지구촌의 인류가 모두 전쟁의 아픔을 느끼고 있으며 전 세계가 온통 전염병으로 긴장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으며 경제의 침체가 계속되면서 길거리에는 축 처진 어깨에 힘없이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누구를 붙잡고 당신에게 삶의 기쁨과 희망이 있느냐고 물어도 왠지 요즘은 부정적인 응답이 많을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삶의 어느 구석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정치-그것은 분명 국민에게 평안을 주고 희망을 주어야 하지만 오늘의 정치는 그렇지 못한 것 같고 우리 경제는 절망의 긴 터널 속에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요 근래 특히 교육의 붕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교육이 말이 아닙니다.교사들은 학생들을 보고 허탈해 하고 학생들은 학교 교육을 외면하고 있다고 하며 그래서 조금이라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초·중·고생 할 것 없이 조기 유학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생업을 위해 아버지는 이 땅에 남아 있고 아이와 엄마는 해외로 가는데, 자녀 교육을 위해서 나는 희생해도 자녀들에게는 희망을 걸어보자는 생각에서일 것입니다.가족은 흩어지고 그래서 불쌍한 아버지들이 많아지고 있다니 참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적 관점에서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희망을 이야기해야 합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가실 때 대제사장에게 잡히시고 억울한 누명과 빌라도의 불법적 재판과 온갖 조롱받으심과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되실 때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희망이 있었는가요? 없었습니다.그냥 암담했습니다.불의가 의를 이기고 죽음이 생명을 삼켰습니다.메시아 소망으로 예수를 따랐으나 그 소망이 완전히 사라져 절망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으며 다락방에 모여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불안과 염려 그리고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습니다.전혀 내일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어느 누구도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그러나 십자가를 목격한 제자들에게 희망이 찾아온 것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었습니다.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부활의 예수님이 절망 가운데 있는, 희망이 없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평안을 주고 새로운 소망을 주었습니다.

부활은 모든 인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입니다.부활은 절망을 소망으로, 불안을 평안으로 바꿔 놓습니다.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절망적인데 어느 누가 희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활 신앙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부활신앙을 통해 암담한 이 국가, 민족 그리고 개개인의 삶에 희망을 부어 넣는 역사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은 믿음의 시작이요 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무력하게 산다면 그것은 부활신앙이 없고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여자 청년들 사이에 유행되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자가 과거가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남자가 미래가 없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생각해 볼만한 말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면 "신앙인이 과거가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신앙인이 부활신앙도 없어 미래가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의 인생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동행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평안이었습니다.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만나실 때마다 "평안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평강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은 부활주일 하루만의 축제가 아니라 매일의 삶이어야 합니다. 부활주일을 지나고도 평안을 되찾지 못하고 기쁨을 도리어 상실하면 이것이 바로 불신앙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재미있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폭소를 자아내는 일입니다. 주님은 웃고 있는 우리를 들어서 더 큰 창조의 역사를 계속하십니다.

6세기에 살았던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는 인간의 영성을 깊게 이해하신 분인데 이분은 인간은 아름다운 "내적 성(interior castle)을 갖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깊은 인간 영성을 온 세계에 보여 준 분이십니다. 어느 분이 이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를 소개하기를 "그녀는 거룩한 유우머(wit)로서 사신 분이다" 라고 했는데 한 짧은 시가 그녀의 삶을 잘 묘사해 준다고 생각하기에 그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목은 "바보의 기도" 입니다.

바보들의 아버지 하나님
익살꾼과 웃기는 성자들의 주님
당신의 아들인 예수,
이 세상의 모든 유머를 마스터한 예수님이
매일 나를 초대하여 자기처럼 바보로 만드니 감사합니다
나에게 당신의 모든 유우머를 주시어 감사합니다.

사실 아빌라의 테러사는 이처럼 웃으면서 평안한 삶을 사셨던 분은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많은 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여인으로서 16개의 수녀를 위한 수도원과 2개의 남자 신부들을 위한 수도원을 지었습니다. 18개의 수도원을 지으며 극심한 조롱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처럼 핍박을 받으면서도 한 여인으로서 그렇게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이 웃을 줄 알았던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고 부활하신 후 이 땅에서 40일 동안 계시면서 사람들에게 열 한 번 나타나셨고 네 마디 말씀을 남기셨는데 "의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나를 사랑하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부활하신 후에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의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주님을 사랑하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에게‘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복음 20:27∼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실은 도마뿐만 아니라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주님은 그들을 향하여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예수님의 부활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이것이 바로 믿어지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증거요 믿음의 선물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둘째,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은 주님을 영으로 생각했습니다.그리고 그를 의심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아무리 폭풍이 불어도 굴속에 있는 개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그러나 밖에 나와 있는 개미는 두렵습니다.잘못하면 날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으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나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갈릴리로 가셔서 실망하고 떠나버린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셨습니다.그때 베드로에게도 다가 가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5)라고 물으셨습니다.이때 요한은‘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이런 질문과 대답이 세 번이나 오고 갔습니다.부활하신 예수님께 남은 것은 승천하시는 것이었기에 제자의 사랑을 확인하고 올라가시고 싶어하셨습니다.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확인시키시며 당신을 사랑하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넷째,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가 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8∼20).

이 명령을 받들어서 사도 바울은‘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린도전서 9:16)고 말했습니다.우리는 땅 끝까지 부활의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우리의 최초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될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믿음이 없으면 마음의 평화가 없어집니다. 2) 믿음이 없으면 놀람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3) 믿음이 없으면 판단력이 흐려지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확실합니다. 2천년 전에 주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죽으면 우리도 분명히 부활할 것입니다. 과거의 부활도 있고, 미래의 부활도 있지만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의 삶에서 부활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부활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의 신앙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은 오래 했지만 점점 신앙이 죽어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부활을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으면 아무리 화려한 성공을 해도 불쌍한 인생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마음 문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주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만나주십니다.

둘째, 우리의 첫 사랑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마가복음 16장 7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십니다. 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정치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자신들이 누구를 왜 죽이는 줄도 모른 채 십자가형을 집행했던 그 사람들이나, 예수는 죽이고 바라바를 살리라고 말했던 무지한 많은 백성들 앞에 나타나셔서 멋있게 보여 주지 않으시고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처음 만났던 [갈릴리]는 새 출발의 상징이었습니다. 무덤이 끝이라면 갈릴리는 시작입니다. 무덤은 과거요 갈릴리는 미래입니다. 무덤은 정지요 갈릴리는 움직임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갈릴리에 가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하시고 사람들을 만나셨던 그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셨다는 말입니다.

부활신앙은 2천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회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절은 그 기념식도 아닙니다. 부활신앙은 현재의 확실한 삶의 현장에서 "나는 예수 믿음으로 죽어도 다시 산다"는 소망을 갖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신 것은, 사람들의 삶의 현장으로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일터에, 마음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갈릴리는 주님이 제자들과 첫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비전을 받았던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한번 사랑을 부활시키고 나가자는 주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이 부활절에 우리의 첫 사랑을 부활시키고, 우리의 비전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고, 우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고, 다시 한번 공동체 정신을 가다듬고 새롭게 출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때 품었던 첫 사랑을 부활시키고, 그때 품었던 소중한 비전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삶 속에 함께 계신 예수님
우리는 갈릴리에서 목수였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 기적을 행하셨던 그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런 것에 얽매여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던 그 갈릴리에서 일하셨던 그분을 추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과 죽음을 우리들의 삶 속에 그대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음으로 고난 당하고, 손해보고, 빛 되고 소금 된 삶을 살기 위해 때로 눈물도 흘리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포기하고, 예수 믿음으로 이 세상이 터전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아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우리의 인간성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때로 사람이 실수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모습을 노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양심의 가책이 있다면 주님 앞에 그 인간성을 내어놓고 돌아서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가룟 유다는 그것을 못했습니다. 그에게도 양심의 가책은 있었지만 그의 인간성은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양심의 가책을 통해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의 인간성을 부활시켰습니다. 우리의 인간성에도 이런 부활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넷째, 증인의 삶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주님 뜻대로 살다가 죽어 영원히 주님 품에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성공했느냐? 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내일의 주인공이 되고, 천국의 주인공이 되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바로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 되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지만 우리가 이 땅에 남아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소식을 누구보다도 빨리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사는 길이 있고, 치유의 길이 있고, 회복의 길이 있고, 구원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삶과 환경에 대해 입에서 불평만 나오게 하지 말고,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는 평생 기뻐하며 살아야 할 충분한 조건을 다 가진 줄 알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 힘차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은 지금 우리의 현재적인 사건이요, 우리들 가슴속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채 들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권력과 부와 명예의 상징인 성(城)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아름답게 치장한 당시의 성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삶의 현장, 사람들을 만났던 곳, 사람들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땀흘리고 애쓰는 삶의 현장인 갈릴리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가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현장 갈릴리에 계십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운 때에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이 우글거리는 우리의 생활 중에 부활의 주님, 승리의 주님이 계십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율법이요 또 무서운 것이 죽음입니다. 율법과 사망권세를 다 이기고 초연하게 자유인으로 누구도 그를 심판할 수 없고 누구도 그를 비판할 수 없고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그러한 당당한 모습으로 구원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위의 삶 속에서 부활해야 할 분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속에 크게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되어 있고 부활사건 속에 우리는 의롭다하시는 증거가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부활의 약속을 믿고 십자가의 사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며 오늘 내가 지는 십자가 속에도 더 많은 신비로운 의미가 있음을 순간 순간 해석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 그분은 부활을 바라보았기에 십자가를 쉽게 편하게 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조금 있으면 나를 못 보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고 가는 그 길에 십자가라고 하는 사건은 아무 별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끝... 하나님의 시작
인간은 끝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끝이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끝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인간이 끝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가이드 포스트]지에 킬링거 부인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이혼한 지 만 1년이 되던 날, 그녀는 친구, 가족, 경제생활 등 모든 것이 먹구름에 싸여 정말 자살 일보 전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딸의 책장에서 딸의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숙제물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여덟 쪽인데 매 쪽에 한 살부터 여덟 살 때까지의 사진 한 장씩을 붙이고 자기의 삶을 기록한(설명한) 숙제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쪽에 End(끝)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의 글씨 옆에 담임선생님의 'Your beginning'(너의 시작이다)이라는 글씨가 'End'라는 글씨를 내리 누르듯이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킬링거 부인이 새 출발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여덟 살 난 아이가 사진 이야기의 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마흔이 된 자기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 믿고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여덟 살의 어린아이가 자신의 숙제에 "끝"이라고 썼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던 것처럼 마흔 살이지만 내 삶은 이제 시작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금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끝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이지, 하나님에게는 시작점입니다.

부활을 증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15장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세상의 삶 속에 빛 되고 소금 된 삶을 살려고 애쓰는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 헛된 생활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부활의 힘찬 복음의 행진을 시작하신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부활해야 할 것들을 마음속에 확실하게 되새기며 삶의 환희와 사랑의 행진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드립니다.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흘만의 부활로 죽음 저편의 삶을 보여 주신 하나님! 여전히 질병과 고통과 거짓과 범죄 등이 판치는 어둠의 세상에 살던 우리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간직하며 새롭게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을 실패와 좌절에서 일어나게 하시고 우울함과 쓸쓸함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막힘과 갇힘에서 놓임 받게 하시고 영생의 소망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암교회에 오늘이 있게 하시고 미래에 시대에 새로운 복음의 행진을 위해 일하게 하신 하나님, 현재 모습에 만족하고 머무는 교회가 아니라 더 크게 쓰임 받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 성도들의 삶을 축복하시고 감사의 조건이 더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해야 할 것들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시고 확신하게 하옵소서. 죽음이 끝이 아닌 것으로 보여 주시려고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확신의 길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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