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구원의 도리 마 8:19-22 주님을 따르는자

열려라 에바다 2011. 10. 31. 15:54

구원의 도리 마 8:19-22 주님을 따르는자

오늘 이 주일 오후에도 지난 주일 오후에 계속해서 예수님을 좇아가려는 세 사람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상고하겠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공생애 재 3년, 3년도 그 해 끝에 하반에 대개 그것을 주후 요즘 말로 AD 29년이라고 하면 그 해에는 장막절에 초막절이라고 하는 그 쑤콧 이라는 절기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셨는데 예루살렘에 가시기 이전에 갈리리를 그것으로써 영별을 하셨어요. 영구히 갈릴리를 떠나서 사마리아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내려 가셨는데 이 사마리아를 지날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지 않은 사건이 있었고 그리고 길을 가시면서 이 3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겠다할때 이런 문답을 하시고 그 다음에는 사마리아에서 병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아마 연대 시간 순으로 되어있으니까 필연 이 3사람이 예수님을 좇겠습니다하는 일도 사마리아에서 길 가실때 “ 길 가실때에”라고 여기 누가복음에 이야기 해 왔지요? 그걸 노상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눅9:37-62에는 3사람이고 오늘 읽은 마8:19-22은 2사람, 처음 두 사람 것만이 기록이 되어있어요. 그런데 그때쯤은 10월초순쯤 된듯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얼마 안 있다가 초막절 이 수콧이라는 이 절기에는 벌써 예루살렘에 계셔서 예수살렘의 사람들과 말씀을 하신 것이있고 그것이 그해로 우리가 환산을 해 보면 이 그 수콧이라는 것이 성력으로는 제 일곱째 달, 보름날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제 일곱째달 이름을 티슈리라고 하는데 티슈리 제 15일에 시작해 가지고 이레동안 지키는데 첫날과 그 다음에 8일에도 성회를 모이게 되어 있어요. 첫날 성회로 모이고 쭉 지키고 그 한주일을 지키고 그리고 8일에는 성회를 모이게 되었는데 그러한 그러니까 첫날도 성회 그리고 끝나는 날도 성회, 그래서 요즘 요일로 따지면 주일로부터 주일까지 하는 식으로 지키게 되었는데 그 해로 그것을 따질것 같으면 29년은 그게 첫날 시작이 13일쯤 아마 되었을 것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연대를 그렇게 추정하고 로마의 력으로 모두 환산해서 그러면10월 13일, 12일 이나 13일에는 벌써 예루살렘에 대강 가 계신듯한데 혹은 그 중간에 가셨는지도 알수 없어요. 그렇다면 이 사건이라는 것 예루살렘을 향해 사마리아를 지나 유대땅으로 해서 예루살렘으로 이제 들어가는데 그때 무렵이 됐을 거니까 10월 초순이 되었으리라. 시일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기가 가 날자라든지 그전 것 보다는 그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이런 문답을 하실 그때가 적어도 공생애의 마지막 부분으로 들어가면서 달리게 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동안까지 벌써 3년이 가까운 시기동안에 예수님은 공인으로서 가르치시기도 하시고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고 여러가지 일을 하셔서 그것이 첫해는 무엇인지 누구인지 잘 몰라서 알아보려고 하던 사람들이 그의 일을 풍문을 솜누을 내감녀서 이렇다 저렇다 해 가면서 알아 보던 시기예요. AD 27년. 그러나 둘째 해에는 ‘야! 이야말로 우리가 기대하던 메시아인가보다’ 하고 굉장히 인기가 높던 시기지만 동시에 그것을 시기학 질투하는 악당의 무리들이 한 쪽에서는 예수님을 해하려고 차례로 해할 적개심 혹은 적대하는 감정이라는 것이 이번에는 자꾸 도당을 만들고 규합해 나가는 시대예요. 그러나 제 3년에 가서는 강렬한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반대하는 세력이 점점 강성해 져서 마침내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느데까지(AD29) 치닫고 나가는 그 시기인데 제 3년에도 하반으로 내려가서 이때쯤은 아주 그런것이 현저히 두드러진 그 시기의 성격으로 있고 동시에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그 일이 단순히 전 민족을 상대로 민중에게 알리고 인기 얻고 반대 받고 하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그것이 또 대단히 중요한 것이 아니구요. 예수님에게는 그 오신 목적을 이루어 나가시는데서 벌써 근 3년에 걸친 그 거룩하신 사역이 진전할때 농부가 밭에서 농사를 지을때 시기가 될것 같으면 곡식이 점점 익는 일이있지만 그 역사 현실에서 이러한 아주 심히 중대한 문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과 가르치시는 내용과 베프신 바 그 계시대 대한 반응이라는 이러한 중대한 문제라는 것은 단순히 농부가 콩을 심고 그 놈을 익으면 거두어 간다는 그런 식으로 된 것이 아니다 말이오. 왜냐하면 거기 이해하는 측에 그 깨닫고 알고 예수님 앞으로 더욱 가까이 오는 사람들측에 여러가지 문제가 있고 또 그 사람들이란 것이 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만났고 대중 가운데 가장 그럼직한 사람을 쏙 뽑아가지고 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 한정된 지역에서 한정된 어떤 시간동안에 그 한정된 사람들, 만난 사람들, 그 중에서 사도로 뽑으시고 제자로 뽑으시고 그 문도들을 확인도 하시고 그런것이오.그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히브리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강렬한 그 민족적인 역사적인 그 소망 혹은 요구 그런 것들인데 그것 다른 무엇보다도 이상적인 국가, 도덕적인 사회, 도덕적으로 아주 고도적이고 신령하고 정치적으론 아주 자유롭고 살 맛이 있는 그러한 세계가 앞으로 올것이라는 것을 그 민중이 전통적으로 기다리고 잇었던 거요. 그것이 물론 메시아 왕국이라는 것이라든지 혹은 복지국가라는 그런 사상인데 제일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가운데 항상 동결해 마지 않는 이 사상이올시다. 이 사상은 메시아 자신에 대한 기대보다도 더 강렬한 것이고 좀더 기본적인 것이며 이 사상에 의해서 그러한 위대한 국가가 건설되기 위해서 그 그릇으로써 쓰이는 그 초연한 인물은 곧 메시아다하는 것이 그 시대에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에요. 그러나 이것이 물론 절대로 모든 사람이 다 꼭 같이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고 또 이런 메시아에 대한 기대라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그 후의 역사를 볼지라도 그 기대의 내용이라는 것이 꼭 방법론이 동일하지를 않는 것이오. 아주 비근한 예를 들면 데오도르 헷셀이 시오니즘 운동을 했을 때는 그 시오니즘 운동 자체는 이것은 복지국가, 메시아 국가 건설에 가장 강하고 효과있는 매개로 그 때의 여건하에서 생각했던 거예요. 이스랑레 백성이 바르 코크바의 난리 후에는 다시 본토로 돌아가지 못하고 로마 사람들이 붙들어서 애굽에다 팔고 아주 학대를 해서 가혹해게 다른 까닭에 수 많은 사람이 세계 사방으로 퍼져 갔다는 것을 여러분들 다 아는 역사요. 그래서 이 세계 사방으로 퍼져 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혹은 유럽한 중원으로 해서 북쪽으로 슬라브계 있는 쪽으로 올라간 많은 수가 있었고 그래서 폴란드와 러시아로 간것이 한 큰 그룹이고 또 하나는 남 구라파 쪽으로 유럽의 남쪽으로 쭉 뻗어나간것이 또 하나의 큰 세력이고 또 하나는 동방, 근친관계에 있는 아랍쪽으로 퍼져 나간것이 또 한세력이오... 그래서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본토로 귀환할때 그 소종래에 따라서 그 사람들의 언어 쓰는 법이든지 그 사람들의 얼굴의 색깍이라든지그런 자연과의 관계의 여러가지 조건들 인류학적인 조건들을 부를때에도 그렇게 동유럽으로 들어가서 동쪽유럽에서 부쪽까지 올라갔다 박해받고 내려와서 사방을 유럽으로 퍼지되 주로 북 구라파에 주로 독일이나 폴란드에 많이 퍼져 있던 이런 사람들을 아스케나스라고 부르고 또 어떤 유명한 피아노 잘 하는 피아니스트의 이름은 안ㅂ니다. 원래가 유대 사람부르는 이름이오. 그 다음에는 서반아를 중시으로 해서 유고슬라비아로 남 유럽으로 발칸으로 쭉 퍼져 나간 이것인 세파딤이라 하고 그 다음에는 아라비아로 죽 퍼져 나간 유다 사람을 오리엔탈이라해요. 그 중에 우리의 가지고 있는 이 동북아시아 쪽에는 중국 저 남쪽 해방시에 유대사람이 들어와서 거기서 유대인으로 살다가 여러분 그런것을 생각할때 가령 중국 상해나 큰 도시에 와서 옛날 다수의 집거하고 살고 도시에서 활동하던 소위 쥬-가로 하던 유대 사람들 그런 사람 그런 거이 아니예요. 그런 사람을 다 대부분이 그 때 동양으로 와서 살던 혹은 한국에도 더러 있었는지는 몰라도 일본데도 여러 사람이 있었고 또 명가로 날리던 이런 사람들은 만나보면 꼭 유럽사람 같애요. 얼굴도 서양사람이고 말도 일본사람같이하고 다만 기질이 다만 조금 동양적이에요. 이런건 전부 아스케냐쉼들이에요. 결코 내가 지금 여러분한테 이야기하는바 오리엔탈 쥬가 아닌 것이오. 오리엔탈 쥬라는건 인도로도 들어오고 그 다음에느 아라비아 사우디 아라비아 그 일대로도 퍼져 갔고 그 일대로 죽 퍼지고 이프리카로 퍼져가고 그 다음으로 동양으로 우리에게 제일 접근한 데는 중국까지 왔어요.그래서 그 사람들은 거기서 중국사람으로 동화해서 중국사람같이 사는 거에요. 옷도 중국사람 같이 입고 말하자면 아스케나심 쥬가 와서 자기는 유럽 사람으로서 은거하는 두려워하고 살고 있는 외국인 같은 풍을 내지 않고 그 나라 사람같이 동화해 가지고 살기는 살지만그 종교가 늘 독특해요. 말하자면 유대교를 하고 있고 그 집의 족장되는 사람 가장이 되는 사람은 머리에다는 커버라는것을 쓰고 앉아서 절기가 되면 애들을 다모아 놓고 우리의 선조가 이렇게해서 애굽에서 담부지역으로 고생하다 홍해를 건넜다든지 우리 선조가 이런 걸 가르쳤다고..... 여러 절기가 있지 않아요? 유월절도 있고 오순절도 있고 또 지금 여기 말하는 초막절도 있고 수전절도 있도 그런 여거 절기들을 지켜 가는데 히브리 말로 꼭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이고 만일 히브리 말로 성경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그 집안에서 없어지면 그 사람 이제 유대인인것이 소멸되고 마는 거요. 그 디에 중국에 있던 유대 사람은 결국 최후로 히브리 말을 읽고 토라를 읽어서 자식들에게 가르치던 사라이 죽은 다음에는 그 자식들이 정식으로 그것을 계승하지 않은 까닭에 그만 완전히 없어져 버렸어요. 그건 중국이라는 대중 속으로 그냥 물 흐르듯 흘러 들어가서 그 사람들이 되고 말았어요. 그렇지, 다시 그 살마들이 간 기록도 없고 소멸된 것이오. 자연히 소멸되요. 이렇게 해서 이 동북 아시아에 영국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극동이라는 것, 우리에게는 극이라는것이 의미가 없는 말이지만 자기네 측에서 멀고 가깝다해서 극동 근동 하는건데 우리에게서는 동북아시아로 와서는 그게 가장 근접했던 유대 사람으로써 그런것 뿐이고 그걸로 끝났어요. 그러나 아프리카나 인도나 혹은 아라비아 일대에 있던 오리엔탈들은 한 큰 그룹이 되어서 1948년 독립한 이후에는 많은 사람이 거기서 돌아 왔어요. 아프리카에 살던 유대인들은 거의 흑인과 같이 다른 것이 별로 없어요. 다만 그 용모, 골격에 이 feature라 하는데 anthropolpological feature, 그 인류학적인 용모, 안형 같은 것이 조금 순수 그 아프리카 사람들하고 다르고, 애굽에서 사는 유대인들도 순수 그 미즈라임들과 다르고..... 허나 그건 그렇다 해서 별 것이 아니예요. 왜냐하면 이 지중해 일대는 Mediterranean feature라는게 있어요. 인류학상 그 사람의 노형을 볼때에는 지중해 형이다는 것이 있어서 그의 그 지중해 연안에 있던 발칸 사람들, 헬라 사람들 남방 아덴이나 스파르타 옛날 그 고지에 살던 사람들도 또 좀 그런것이 있고 팔레스틴 사람도 그렇고 북아프리카로 애굽으로 리비아고 저쪽으로 트리폴리 저쪽으로 가면서도 그런 feature, 공통점이 있어요. 그러한 까닭에 여러분은 유대사람, 그 얼굴 모양 생김이 유대사람 같아 가령 머리는 뒤로 조금 나가고 코는 뾰족하니 아주 메부리 코로 나오고 대개 눈은 근시안이고 하는 것이 유대 사람의 전형인것 같이 마치 쉐익스피어 극에서 사이록 같은 사람의 역을 하는 사람들이 마치 그런 사람들이 수염은 이렇게 길게 나오고 하니까 그런걸 유대인이 feature 형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보통 보통 사람들 아마추어가 아는 것이지 전문적인 학자의 눈으로 볼때는 그게 뭐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다만 그 사람들이 유대인적인 그 특성, 문화내용, 그것을 가진 까닭에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면 오늘날은 더 유대인이 아닌거요. 이러한 사람들을 규합해 가지고서 다시 복지국가를 우리의 고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에다 건설해야 되겠다 하고 거기에 유명한 부자 예를 들면 영어로 말하면 로스 화일드이고 읷이 그 사람의 본명을 정확하게 부르면 Rothschild라는 사람이오. 그 사람 아주 유명한 사람인것 아시지요? 영국의 그 나폴레옹 전쟁때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내렸을 때도 롯휠드 형제가 부자가 다 영국으로 독일로 블란서로 쭉 은행을 가지고있으면서 내내적으로 다 거래를 하고 터 주었다는 거요. 그래서 나폴레옹 정책이 완전히 승리할수 없게 한 그런 사라들이어서 후에는 작위도 받고 아주 존중히 여김을 받고한 사람들이오. 그 사람들이 지금도 가 보면 팔레스틴에다 투자를해서 땅을 산 다음 식민을 시작했어요. 이렇게 해서 이런 방식으로 메시아 와아국을 회복하려고 하는거요. 이런 메시아 왕국을. 이것인 특별히 그 헷젤, 디어도어 헷젤이 생각해 낸 그 시오니즘 운동인데 운동의 내용 가운데는 문화적으로 첫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신을 불어 넣어서 같이 결속해서 궐기하도록 해야 되겠다. 그래서 이 문화적으로 그 챔피온이 되어서 그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고취하고 이끌고 나가고 하는데 훌륭한 문필가는 유명한 조셉-클라우스너(Joseph Clauscer)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인물들 다 훌륭하게 시오니즘 운동을 한 사람들이오. 이 죠셉 클라우스너는 지금은 죽었지만 그가 아직 살아 있을때 이 사람이 그 예루살렘에서 같이 만나서 그 댁으로 인도를 받아서 갔다 온 일이있었어요. 훌륭한 대 역사학자고 그런 인물인데 그러한 사람들이 시오니즘 운동을 해서 그 운동에 정신적인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예후디옷 베 아나시옷’ 이라고 그 클라우스너 집앞에다 딱 써붙인 것 같이 유대주의 곧 인도주의다 하는 식으로 썼어요. 이래서 내세의 어떤 것을 바라는 그런 강렬한 피안의 종교를 요구하는 것 보다, 현세에서 어떻게 선행을 하고 어떻게 인류에 복지를 끼치겠는가? 하는 이러한 인도주의적이 위대한 정신 그것을 가지고 오늘날 가장 강력한 주의를 삼고 있는 것이오. 이러한 까닭에 그것이 하나의 종교생채를 그 행하는 일에 종교적인 행사가 있는 까닭에 그리고 그 역사적이 연원에 종교적인 것이 있고 또 거기 관련이 있어서 그렇지 그 사상 내용에 앴어서는 내세에 무엇을 특별히 바란다든지 하는 것은 그게 강조가 없어요. 강조됨이 없고 많은 인종의 그 예수님 당시 사두개인들같이 현실화한 것이라 말이오. 많이.

그러면 그런 시대, 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는바 하나의 예인데 이런시대에 그 메시야 국가운동이란 것은 어떤 메시아라는 개인 인물을 기적적인 큰 능력을 가진 인물을 기대하는 운동이 아니고 적어도 사호적으로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고 그 세력을 잘 결속되어야 하고 공동의 목표를 가직 모두가 다 수긍할수 잇는 논리적인 목표 그것을 가지고 같이 그때 주어진 여건하에서 예를 들면 로휘드 같은 부자나 많은 사람이 돈을 각출해서 돈을 가지고 땅을 사서 거기다 식민을 한다든지 아직 외세사 지배하는 땅이니까 무슨 특권이 없을 지라도 경제적으로 자기가 거기 가서 주권을 주장할만한 그런 투자를 해 나가는 거요. 그러다가 1948년 독립을 한 다음에는 그것이 확대되어 지금도 투자한 식민들이 각각 독특한 방식 그것으로 그 나라를 개척해 간다 하는 개척정신 이런 것들은 직작부터 있던 일인데 비상한 문제 앞에 대결하기 이해서 잘 결속하고 규율하에서 일정한 지위하에서 움직이는 까닭에 그런 집단적인 농장 기부쓰라는거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만 있는게 아니고 기부쓰라는것이 아니고 기부싸라는게 있지요. 그러면 모샤브,모샤바, 모샤바빔 이렇게 적어도 다섯개의 유형의 집단적인 colonial운동, 식민운동이란 것이 있고 또 산업운동으로 지금은 化해나갔는데 이런것을 보아서 그리고 사실상 저 남방 네게브 평야에다 물이 없으니까 북쪽에 있는 야르콘강 즉 요단강 지류요, 요단강은 그때는 이쪽 수리아사람들하고 아랍사람들이 꽉쥐고서는 전쟁하려고 하나까 이 이스라엘 따으로 뻗어들어가는 이 야르콘강에서 물을 뺐어요. 빼어 우리나라 이 수(보)로 수백리를 연안쪽으로 관으로해서 보내어 거기서 인공으로 다 바람개비를 돌려서 물을 뿌려서 그 사포(모래땅), 황막하고 아무것도 없던 땅에다 지금 그 낙화생, 옥수수 그리고 또 하나는 오렌지 이런것을 아주 풍성하게 재배를 해서 푸른 정원, 큰 아주 그린 가든 이것을 만든것을 볼때 기적적인 일종의 기적적인 감이 드는거요. 그 사람들은 그러한 아이디어나 목표하에서 메시아 복지국가 건설운동을 하고 나갔던 것이오. 이것이 현대에 있는 유대 사람들의 그 역사적인 운동, 그것의 성격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잠간 이야기를 드렸는데 그러한 일이 이스라엘 역사 가우데 잇을 지라도 우리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던 당시는 대부분이 특별히 대부분 서민들이 어떤 기적적인 능력을 가진 메시아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자기네들이 원하고 바라던 그 복지국가를 건설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오. 그런데 그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다 조건이 있는것이지요? 어떤 나라가 부요하게되고 또 아주 잘 살게 되고 강력하게 되려면 첫째 외모(外侮)들, 외국의 수모를 받지 않을 만한 능력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해요.자위할 능력, 외모에서 부터 , 외침에서부터 자위하 ㄹ능력이 첫째 있어야 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것을 지탱할수 있는 국력이 늘 있어야 하는것이고 동시에 그것을 지탱할수 있는 능력이 늘 있어야 하고 거기에다 붙여서 국민이 항상 할수 있도록 생활향상을 위한 경제적 활동을 할 바탕이 있어야 하느데 그 바탕이란 것이 제일 좋은 것은 풍부한 자원이오.그리고 그것을 잘 요리하는 지혜들이오. 그것 없을 때는 일본과 같이 서서(瑞西)와 같이 자체에는 충부한 바탕이 없을 때는 가지고 있는 자기네의 기능을 잘 100% 로 활용해서 외국것을 받아다가 굉장하게 가공을 해서 즉 가공국가로서 일본이 그런 나라 아니에요? 가공국가로 가공을 해서 물건을 만들어서 외국에 팔아서 들어오는 이득을 가지고 자기네의 필요한 것을 외국에소 또 수입하는 것이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자체가 적고 자원이 그렇게 풍부하 것은 아니니까 이 많은 인구가 다 같이 상당한 level의 생활을 하려면 그만큼 가동력이 강해야 한다 그말이오. 이것이... 그건 이제 여기 나라 문제였고.... 여기 팔레스틴도 그런 복지국가가 되려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예요. 사람들의 정신도 도덕적으로 향상하여야 도덕적으로 자유롭고 더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지 교육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자기 욕심만 차리고 만사에 자기 앞에 큰 감 놓고 공공의 사업이라는 것 무시해 버리는 그런 풍조가있는 사회라면 말이오. 즉 공동의 소유라는 건 시시하고 돌 하나라도 반반한 것이 있으면 자기 집 마당에 갖다 놔야 뱃속이 시원하다는 이런 정신을 가지면 국가가 공동으로서 번영하기 우려운 거요. 이러한 도덕적인 늑별히 사회도덕의 관념이나 정신이 발휘되려면 그만한 훈련과 그렇나 교육이 필요한 것이오. 그런데다가 그러한 자원이 있어야 하겠고 또 그러한 여러가지 것들이 조건들이 다 구비되어야 할 것 아니오? 아까 내가 쭈 말한.... 그런데 팔페스틴에 있는 이나라, 외모를 받기가 참 쉬워요. 북쪽이 강하면 밀고 내려오고 남쪽 애굽측이 강하면 밀고 올라오고 그러니까 이런 그런데서 능히 그 양쪽 어디서든지어더라도 이 손으로 밀어내고 저 손으로 밀어낼 만한 튼튼하고 강력적ㅇ니 것이 있으려면 첫째 그 인구도 상상히 있어어지 인구가 적으면 안될 거란 말이오. 사람 수가 적으니까 원체 암만 결속해 봐도 별 힘이 안나요. 즉 인구의 힘, 이것이 일종의 큰 세력인데사람의 힘이라는 것, 그런데 그 인구의 힘이라는 것도 이렇게 박약하면 안되니까 그사람들은 자기네게 열광적으로결속을 해서 싸워 보아도 당시에 막강의 대군을 가진 그 군대하고 더불어 싸울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북지국가는 오기를 바라는거요. 가렴주구를 받을 수록 로마는 지독하니 잘 그 세금을 짜내 가는 그런 나라였으니까 가렴주구를 받으면 받을수록 어서 이걸 망해 버리고.....그러면 그런 것과 같이 이 때의 이 팔레스틴의 유대사람들도 그런 괴로움을 가지고 호소를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이 나타나시니까 그 사람들이 예수님이 나타나시지 않했던면 그때가 꼭 적시로서 메시야 국가 중흥을 위한 일대 민중 운동을 일으킬 때라고 생각했느냐 하면 그럴만한 요인이 별로 없어요. 그러한 까닭에 그 사람들이 그 시대에 메시아 왕국을 간절히 대망하는 것은 예수님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확연히 보편적으로 있던 일이라기 보다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에 대한 기대가 생긴 것이오. 시작했다 말이오. 그 막연히 혹은 어느때라고 지정할 것이 없이 마음 가운데 가지고 있던 그 간절한 소원 어느 때든지 나타나면 좋으니 그러면 그것이 어느때냐 하는 것이 그러던 사람들이 ‘ 아니 저기 예수라는 위대한 인물이 나왔다 그가 그 선지자인가보다.’ 오 그러냐? 왜 예수님에 대해서 때때로 ‘그 선지자’라는말을 썼는가 하면 이스라엘 사람의 그 메시아관에는 메시아는 엘리야나 그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의 하나라고 생각하는거요. 즉 메시아가 아무리 위대해도 결국 그런 분들의 하나이고 그분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하나다. 아마 이런 정도로 최고로 생각했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생각 않는 거요.그러니까 아, 거기 그런 위대한 선지자가 왔다.해서 기대를 하고 그리고 우- 몰려 다니면서 따라 다니면서 하다가 심지어 억지로 왕을 삼으려고 한 일도 있고 그렇지만 예수님이 그런 일을 위해서 즉 그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개념안에 그러한 사상과 관념하에서 활동하셔야 할 인물로 오신 것이 아닌것은 또 분명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메시아냐 할때 분명히 메시아요. 그러나 그 사람들이 자기네가 볁하고 자기네의 그 사정상 자유스럽게 상당히 자기네의 현실에 의하여 구성한 메시아 사상이란 것에 들어 맞는 인물은 아니다 그거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를 뒤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자기네 식 사상에서 메시아를 뒤따라 간거요. 자기네 식 사상에서 메시아를 뒤 따르게 되는 까닭에 자기네가 에수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나는 그의 제자다’할지라도 자기 딴에 예수님을 해석하고 그리고 제자라는건 저런 분의 자자라는 건 무엇이다고 자기 식을 해석하고 그 해석하에서 자기가 제자로 자처하고 또 제자들로서 예수님을 추종하고 있었어요.

여기 보면 이 제 둘째 사람의 케이스인데 이 사람은 보면 제자중의 한 사람이었어요. 이 누가복음에는 다른 사람이라고 했지만 마태복음에 볼 것 같으면 “ 제자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제자중에 한사람, 누가 복음에는 “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말을 했다고 그랬어요. 그런 것을 보면 제자중의 한 사람에게 예수님이 “ 너는 나를 좇으라” 하니까 ‘예 좇기는 하겠습니다만 가서 먼저 저의 아버지 장사를 다 치른 후에 오게 좀 저를 허락해 주십시요. ’ 고 말을 한거예요.이런 말을 여기서 하는것 보면 이 제자라고 하는 말 뜻이 예수님게서 베풀어 놓으시 제자의 조건에 다 부합한 인물이라는 뜻이 아니란 말이예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이 후에 지금은 10월 초라고 그랬지요? 그 다음에 뵈레아로 가셔서 아마 3월이 됐든지 혹은 2월에 뵈레아에서 한 달쯤 계셨으니까 그 한달 후에 나중에는 잡히시는데 그 때에는 예수님의 제자되는 조건 셋을 이야기를 했다고 우리가 누가복음 14장에서 몇일 전에 배웠어요. 첫째는 “ 네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그 누구 보다도 나를 더 사랑치 아니하면” 그 사랑이라는 점으로 볼때 나에게 대한 사랑은 아주 unique 해야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건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하는 말로 반어를 썼어요. 그 사랑 있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수 없다. 하시고 또한 “ 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좇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수 없다” 이것이 눅 9:23에 십자가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고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지니라.....그렇지 않으면 내게 합당치 않다.” 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것이 하나요. 마지막에는 33절에 “이와같이 네 모든 것을 다 버리지 않고는 내 제자 못된다” 해서 여기는 제자된 절대 조건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 말한 거요. 그러니까 다른 것 있다 하더라도 이것 없으면 어떻게 제자가 되겠느냐? 못된다 하는거요. 그렇게 강력한 말을 쓰셨어요. 나를 가장 사랑치 않고서 십자가 지고 따라 온다고 그것이 내 제자 되는것 아니다. 그러니까 이 조건은 절대적이다. 십자가지고 나르 매일 따라 온다는 것도 절대적이다. 제게 있는 것을 다 버리고서야 따라오는 것이다. 절대적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아지 그와 같은 것을 말씀하시기 전에 몇 달 우에 그 말씀을 하시게 되지만 여기서는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하여 또 말씀을 하시는 거요. 지난번에 우리가 본 것과 같이 이들 3사람, 그 다음에 또 한사람 있지만 다 각각 가령 그가 제자라고 자기를 생각했을 지라도 자기가 누군가에 대해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표준에서 볼때는 심히 부족했던 것이예요. 이 사람은 지금 제자요. 제자로서 우리가 제자라는 말은 아까 말씀들린 바와 같이 그때 그 정형하에서 예수님을 해석을 했겠지요. 그러면 물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석은 안했어요. 예수님을 해석하기는 하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연히 해석했는지 의문이고 또 가령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적어도 그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이라는 것이 상당히 여기서는 몽롱한 것을 우리가 볼수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때는 다만 그의 신성한 능력과 그 인격에 대해서만 그의 아주 비류없는 그 신비한 인격에대해서만의 의미가 아닉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째서 이 세상에 오셨느냐 하는 문제애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하는건데 그런 대답이 없던 사람이오. 즉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에 오시 목적을 지금 알고 하시려고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잘 알았다고 하는 것이아니오. 이게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는 그때 까지라도 자 몰랐던 거요. 물론 예수님은 결국 그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오신 목적과 그 뜻을 이룰수가 없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어요. 그러한 까닭에 이 갑갑하고 답답하고알지 못하는 대중을 상대로 자꾸 무엇을 하시지 않고 그중에 뽑은 소수에게 집중적으로 자꾸 가르치신 것이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인격에 대해서 자기네가 종래 보던 평가에서 보다는 훨씬 달리 가이사랴 빌립보 같은데서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고백을 하는데까지 이르렀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왜 이 세상에 오셨느냐? 오셔서 뭘 이루시려고 하시느냐? 하나님께서 그 아드님을 보내신 그 큰 목적은 무엇이냐를 알았어야 하는데 그걸 아직 모르는때요.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을 따라가겠다 하는거요. 예수님을 어디까지 다라가겠다는 가도 자기가 가 의미를 모르는 거요.예수님이 가는 데를 자기가 알지 못하는 까닭에 그러나 자기로서는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말을 한다든지 예수님게서 “ 나를 좇으라” 하시는 말슴을 하실때 자기로서는 어떤 의미를 알고 있었을 거요. 그것이 무엇이다 하는 자기 딴의 해석이 있었을 거란 말이오. 이렇게 예수님을 좇는다는 말의 듯을 주관저긍로 자기의 짧은 생각으로 해석하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대답한다는 것은 보통 이 세상에서 다른 대화를 할지라도 많은 오핼ㄹ 내고 상호 완전한 교통을 소통을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되는 거에요.그러면우리가 보통 사람끼리 만나서 서서 이야기할때 그 사람이 말하는 내용고 이 사람이 생각하는 내용과 어떤 한개의 단어를 놓고 서로 완전히 다르다면 결국은 완전한 이해 가운데 양쪽다 돌달 못하는 것이오. 피차 상대를 이해 할수 없어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쓰고 있으니까..... 예를 들면 “ 교회”라는 말을 쓸때도 우리가 두 사람이 앉아서 교회는 이러이러해야 하고 이러해야 하고 교회에서 이렇다 하고 뭐 이러면 , 아 그렇다고 하고 그러면 그 교회라는 말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면 해석이 서로 다르면 둘이 암안 이야기를 했어도 아무것도 사실 서로 통한 것이 없는 것이오. 그 여타의 여러가지가 그래요. 그 사람 믿음 있다 없다 하는말, 믿음 이라는 말도 그 믿음이란 말에 대한 정당한 해석을 서로 공통으로 가지지 못하고 이 사람 이것 생각하고 저사람 저것 생각해서 서로 믿음이라 한다면 결국 두 사람의 말은 맞을 리도 없고 소통이 안되는 것이오.

이와같이 예수님을 좇는다 하는 말의 뜻에 대해서 이 사람은 어느 정도 만큼이나 알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 거기 나타나요. 거기 나타난 그것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어느 정도면 되느냐 하는것을 을수 있는거요. 이 사람은 자기 가정이 있던 사람이고 또 거기는 늙으신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한 까닭에 늙은 아버지 이야기를 했지요? 아마 이 노부는 얼마동안 살다가 수한이 다 해서 보통 다른 사람들이 일반 표준으로봐서 그렇게 오래 여러해를 사시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나겠지요? 그러니까 저로 하여금 돌아가서 노부의 신후사를 노부의 돌아가실때까지 爲人者之 도리를 하고 봉양을 하다가 돌아가시면 장사를 지내고 그리고 나서 그때 와서는 아무 구애없이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예수님은 “ 나를 좇으라” 그랬다 말씀이오. 그런데 그 사람은 “ 예 좇기는 좇겠습니다만 제겐 이런 일이 하나 있습니다. ” 그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하고” 하는 그 말씀으로 보아서 그 늙으신 아버지를 장사할 사람들이 거기 있다는 이야기요. 아무도 없는 사고무친한 사람이어서는 외아들로 가서돌아보지 아니하면 제 아버지는 어떻게 할수가 없다는 그것이 아니오. 거기에는 장사할 사람 ‘저희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 그래서 그 사람들이 죽은 자라 하는 말은 예수님의 거룩하신 안목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가지고 평가한 것뿐이고 요컨데 거기 사람들은 있다 하는 것을 또한 표시하는 거요. 그러니까 그것 돌아 볼 사람들은 있지 않느냐? 하는 말씀과 같이도 들려요. 그럼 너의 아버지 돌아가시면 장사까지 ‘지낼 사람 너희 아버님과 같이 살면서 지지하고 있을 사람 그 있지 않느냐?’ 다만 그럼 그 사람이 왜 그 말을 했느냐 하면 한 꾀를 부리려 한건 아니고 위인자지 도리라는 말을 아마 쓰면 잘 맞아요. 사람의 자식으로 내가 할 도리가 그것인 까닭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다 맡길 것이 아니라, 마땅히 내가 돌아보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올시다. 남들도 다 그렇게 말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 사회 일반적 도덕 기준 하에서 내가 몹쓸 짓을 하지 않고 무심한 일 하는 사람이 아니 되고 나는 정당히 자식 된 도리를 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는 이 사회도덕적인이 관념 하에서 이러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자기가 스스로 정한 바에요. 그리고 그것은 제 멋대로 정한 것은 아니에요. 사회의 기풍에 의해서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적이 요구 하에서 자기는 그것이 자기의 당위라 생각한 거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안목으로 볼 때 그 사람이 자기의 당위에 대해서 정당한 이해를 하고 그 의무를 행하고자 돌아가려고 했다는 것은 정당했다고 일반적인 기풍 하에서는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오. 그러면 그것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라는 것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일반 도덕 율하에서 일반 도덕률이 요구하고 있는 정도 안에서 모두 일을 하고 나가야 할 그런 일이라면 그렇게 하는 거요. 그렇지만 그것이 그 사회의 일반 도덕률에서는 썩 벗어나는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한 것이라든지 새로운 생활을 건설하기 위해서 구습을 타파하고 과거를 철폐하고 그리고 새로운 것을 여기 일으켜야 하겠다는 그런 일 같으면 예수님의 일 아니고 이 세상에라도 새로운 중흥의 일 새로운 개혁의 운동 같은 데서는 일반 률을 그대로 적용하고서 하는 재주가 없는 것이오. 그런 까닭에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때 개혁하기 전에 먼저 그전 구태의연한 것을 고쳐보자고 처음에는 했지만 고칠 재주가 없으니까 이것을 포기하고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새로 터를 닦고 새로 집을 짓자 그것이었어요. 그러면 이와 같은 일을 볼 때 이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그 사상이 어떤 카테고리 안에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정의의 관념에 의한 도덕적인 규범 하에서 무슨 일을 하시고 무엇을 요구하시고 무엇을 또 명령하시는 것이다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한 것이오. 그렇지 “ 나는 따라 오려면 비상한 각오를 가지고 이 시대가 가지고 있던 그 고루한 생각에서 벗어나서 새롭고 또 거시적인 큰 시야에서 문제를 보는 그 눈을 가지고 네사상 자체의 같은 것, 즉 동굴의 우상 같은 그런 사상 말이오. 동굴 구멍으로만 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것이 세계니라 친지니라고 하는 이걸 버리고 그리고서 나온 거라. 혹은 그것이 idola tribus일수도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대로 너도 생각하는 그것 버리고 나오너라 ”그거요. 만일 예수님의 제자로서 참돈 기독교를 알고 따라가려면 과거에 가지고 있던 철학과 헛된 속임수와 공교한 마로 너희들을 설득했던 것들에서 너희는 벗어나와야겠다고 성경이 말씀한 바와 같이 그릇된 인간적인 사상이나 주장이나 철학이나 그런 영향 하에서 못 벗 고난 것ㅇ서 벗어나야 한다 그거요.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하신 바에 의해서 네 사상을 새롭게 하고 바르게 건설 해야겠다 그것이오. 이 고루한 구습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아주 조직적인 체계 있는 사상일지라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는 거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신성한 계시 하에서 구성했던 그 사상체계,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아직 사도가 되기 저에 부르심 받기 전에 가졌던 히브리주의적인 사상이 그런 것이었어요. 많은 히브리의 위대한 학자들이 가진 사상이 다 그런 거요. 그 사람들의 민족주의적인 또 독특한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위대한 사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으로써 기독교의 가지고 있는 신선하고 중요한 내용을 덮어서 그 기독교의 내용이란 이 안에서 하라! 사울은 그렇게 하려던 사람이오. 그래서 핍박을 한거요. 이것이 계시다. 계시에 의해서 구성된 사상체계다. 그런데 무엇이 여기서 벗어나서 딴 주장을 한단 말이냐? 그래서 교회를 핍박했지만 예수님을 알고 거기서 예수님을 알았다는 보았다는 만나 뵈었다는 거기는 돌아 볼 사람이 있지 않느냐? 지금 이런 시기에 너도 가서 그것 그런 정도의 일을 하고서 세월을 보내려고 하느냐? 너만큼 배우고 너만큼 나를 따라왔으면 이젠 이것 해야 할 것 아니냐? 지금 그리고 내가 있는 동안에는 너는 이것해라. 얼마 안 있으면 나와 작별한 다음에는, 그렇게 쉽게 할 수 없고 그때는 양상이 달라지고 역사의 전개도 달라 질것이다. 지금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것은 신약의 교회가 되기 전에 그 터가 될 만한 터전이 될 민초를 지금 만들어 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을 전해야 할 텐데 너 하나님 나라 전파하지 않고 가서 너의 아버지 봉양하는 그것으로서 나는 인간의 일을 다 했다고 하느냐?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사를 주어서 그 은사를 심분 사회도덕입네 무엇의 요구네 그 무엇이네 해서 일반적인 비속 된 아주 평범한 사상 하에서 들어가서 그것을 자기는 인간다운 것같이 하고 있으면 무식하고 몰이해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그것 잘한다. 잘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네게 이런 은사를 주었는데 이런 능력 주었는데 겨우 하는 것이 그거냐? 하고 물으 실거요. 여러분 우리가 다 각각 하나님 앞에 받은 은사가 있으면 그것을 십분 써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햇 다른 것을 축조하고 다른 것을 생산해 내도록 해야지 사람이 도덕적이라고 인도적이라고 하고 사회 풍습에 맞는다하고 위인지자의 도리라 해서 이것 하라 할 때 아 그렇습니다. 하면 그것이 무던한 일입니까? 할 만한일입니가? 그러한 까닭에 여러분은 유교를 보더라도 유교에 많은 그런 요구가 있어요. 효자라 해서 그런 요자 사상, 그만 나중에는 시묘 일까지 시키는 거요. 3년 동안 세수도 별로 않고 손톱도 별로 안까고 머리도 길고 머리에는 이가 득실득실하고 그러고 앉아서 여막에 앉아서 아침저녁으로 어이어이 하고 앉았고 하면 출천대효라고. 그렇게 해서 출천대효가 되는 형식주의적인 윤기 가운데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생산했어요? 그 사람이 재주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좀 더 그것을 마다고 좋은 세월에 년 부 역강한 시기에 생산했어야 할 거예요. 그러데 그러지 않고 효자 하나 되려고 사람이 요구하는 그 시대적인 그 부슨 도덕관념이라든지 요구 그런 것 하나 되려고.... 이것은 종교적일 수도 있는 거요.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전체의 참된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참된 정신을 향해서 돌라가는 것을 끌어 내리고 욕하고 비난하고 왜 말없이 조용한 사람 못되고 말썽을 일으키느냐 할거요. 그런 의미에서 루터나 칼빈은 굉장히 카톨릭 편으로 보면 굉장히 말썽을 일으킨 사람들이에요. 조용히 좀 살 았더면 좋을 텐데 나쁜 것만을 고치도록 하고 그 다음에는 그대로 승순하고 지내지 왜 자중에는 전체의 교회를 막 반항하고 일어나서 딴 교회 세우느냐고.... 그렇게 고루한 사람 속에서 개혁자는 안 나오는 것이오. 고루한 정신 가지고서 개혁하는 교회도 안 나오는 거요. 강력한 교회, 고루해서는 안되는 것이오. 항상 정신이 참신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사상을 자꾸 더 흡수해서 속이 풍성해져야 하는 것이오. 이 사람이 이 고루한 생각 가운데서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고 뒤를 따라 가려고 할 때 예수님은 그것을 말씀하신 거요. 이런 것을 우리는 주의해야 해요. 그 시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아무리 예수님의 출현 한 것 때문에 메시아로 생각하고 메시아 왕국이 거기 임하기를 바라고 아마 이 사람도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 나라 회복이라는 것을 간절히 요구 했을듯 해요. 부활하신 후까지라도 제자들이 물었으니까....“이때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때입니까?” 고 그 사상에서 못 벗어나고 있었어요. 그것은 타파를 해 주시는 것은 그 후의 일이오. 그러나지금 좌우간 기초적인 일을 해 나가려고 할때 나아가서 전파하라고 했으면 아무때 해도 좋은 일은 아니오. 하라 하신 그때 하는거요. 여러분 교회에도 다 시기가 있는거요. 하라 할때 해야 하고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할수 있을때 하는 것이지 할수 있을때를 그냥 지나면 그 다음에는 하려고 해도 탄식소리 밖에 안 나오는 거요. 그때야 비로소 깨달아서 했으면 하는데 힘은 모자라고 힘이라는 것이 언제든지 옆에 가까이 있는 것이아니오. 할수 있을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고 할때 그 빛에 자기가 자기를 비취어야 하고 깨달은 것은 깨닫고 해야 할것은 해야 하고 그런 거요. 그런 까닭에 유예할수 없다. 죽은 사람들 거기 다 돌아 볼 사람들 있지 않느냐? 돌아 보도록하고 너는 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야 겠다.이것이 날 좇는 일이다.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그 그릇된 메시아 왕국관 그릇된 복지국가관속에 참된 나라는 무엇인가를 장차 깨달을 수 있도록 기초를 담아 주시는거요. 그것을 지금 전파하는 거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걸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라고. 이 이스라엘 백성의 순진한 사람들 그리고 가르치는 이가 없어서 잘못 먹고 가는 사람들을 먼저 먹여 주시는거요. 그것 하라고 내 보냈더니 가서 저의 아버지 장사지내겠다고 그래요? 이렇게 못하는 것이다. 네게 누구를 따라가려고 하느냐? 그가 뭘 하는 사람이고 뭘 요구하는 줄 아느냐? 그것 지금 물으시는거요.

(기도)

거룩하신 주님이여! 저희가 주를 따라 나가는 것이 용이한 일, 아무렇게나 해도 좋을 일이 아니고, 거기는 각각 비상한 각오를 늘 요구하는 것이고 그건 일신을 도해서 주를 따라가야 할것 이지 한 손으로는 주를 잡고 한 손으로는 자기의 이상을 잡든지 세상을 잡고 그렇게도 못하는것을 저희가 아나이다. 또 저희 사상이 고루해서 저희들이 주를 따라갈만한 속에 든 것이 없고 생각의 신선성이 없고 상상 완고하고 그렇지 않으면 상상 뜨뜻미지근 하고 시기가 무엇이지를 볼줄 모르다가 하나님이 그 시기의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 그때사 탄식하고 아 우리가 힘이 있을 때 이걸 못했다고 생각하기가 쉽사옵니다. 이런것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이 있는 일이옵는데 저희들이 혹여라도 그런데 빠져들어가는 일이 없게하여주시고 저희에게 주신 그 거룩한 은혜를 저희에게 주신 은사들을 십분 다 활용해서 주께서 오늘이라 하는 동안 요구하실때 드릴만한 열매가 항상 있게 하시고 저희들의 길의 선택에 방황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서 저희를 거룩한 은혜로서 불러내시는 그길에 확연히 서서 전진해 가게 합소서.

우리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